< 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 >
8. 황태자의 친위대? (7)
아주 잠깐 희망을 보았던 재상과 황제파를 다시금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뜨린 카리엘을 향해 황제가 표정을 찡그리며 말했다.
“후, 태자, 습격받은 당사자가 아닌 다른 이가 이 일을 맡는 것이 옳다고 보느냐?”
“물론 소자의 일을 아우들이 맡는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사옵니다.”
황제의 말에 카리엘이 솔직하게 인정했다.
무려 황태자가 습격받은 일이다. 당사자가 직접 움직이거나 황제가 이 일을 진두지휘해야만 했다.
“하오나 맡을 사람이 없사옵니다.”
“뭐?”
황제의 되물음에 카리엘이 담담히 말했다.
“폐하는 황좌를 굳건히 지키시어 혼란을 잠재워야 하옵고, 타국과 성국을 견제하셔야 하옵니다.”
“으음…….”
“소자 역시 지금 맡고 있는 일이 있으니 또 다른 일을 맡기는 어렵사옵니다.”
“이 일을 먼저 하면 될 일이다.”
황제가 분노를 억누른 음성으로 말하자 카리엘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폐하께옵서 처음으로 맡기신 일이옵니다. 부족하오나 처음으로 맡기신 일을 온 힘을 다해 이루고 황태자 자리에서 물러나고 싶사옵니다. 부디 불민한 소자의 청을 받아들여 주시옵소서.”
카리엘의 간청에 황제의 말문이 막혔다.
‘어딜 물타기 하려고?’
카리엘이 그렇게 생각하며 속으로 웃었다.
은근슬쩍 황제파를 존속시키고자 하는 황제의 시도를 막았다.
자신이 습격자들에게 집중하는 사이 은근슬쩍 황제파의 고위 귀족들에 관한 수사를 뒤로 미뤄 버리고, 증거들을 빼돌릴지도 모를 일이다.
그것을 사전에 막아 버린 카리엘은 단호한 표정으로 다짐했다.
‘내가 확실히 끝낸다.’
속으로 다시 한번 다짐한 카리엘은 황제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자 불편한 침묵 속에서 망설이던 황제가 입을 열었다.
“……아직 황자들은 어리다.”
황제의 말에 카리엘이 피식 웃었다. 한참을 고민해서 내놓은 이유가 고작 황자들이 어리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소자도 어리옵니다. 하오나 감찰부는 훌륭히 맡은 바 임무를 다하고 있고, 제국의 썩은 부분을 많이 도려냈다고 생각되옵니다.”
카리엘의 말에 황제가 미간을 찌푸렸다.
자화자찬을 하는 자신을 보는 황제의 표정이 안 좋아지자 카리엘이 곧바로 입을 열었다.
“솔직히 소자가 한 일은 제 권한을 빌려주어 일이 원만하게 처리될 수 있도록 한 것과, 권력을 이용해 감찰부의 일을 어렵게 하는 자들을 직접 데려온 것이 전부이옵니다.”
지금 하는 말은 아부성 말이 아니었다.
실제로 카리엘이 한 일이 그게 전부였다.
전문적인 일은 전부 밑에 있는 부하들이 다 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정보를 가져오는 것도, 범죄자들을 처리하는 것도, 혼란스러운 과정 속에서 치안을 안정시키는 것도 다 관료들이 한 것이다.
카리엘이 한 일은 그들이 일을 잘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한 것뿐.
“폐하께서 아직 어린 저에게 중책을 맡기신 이유는 권한을 적재적소에 쥐여 주고 잘 쓰이는지 감시하는 단순한 일이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되옵니다.”
카리엘이 그렇게 말하며 황제를 존경한다는 듯 올려다보았다.
“폐하께오선 균형을 지키느라 직접 움직이기 힘드니 소자에게 권한을 부여하여 뜻한 바를 이루신 것 아니옵니까?”
“크흠!”
“동생들은 소자보다 영민하니 더 잘할 것이옵니다. 믿어 주십시오.”
황제의 얼굴에 금칠해 주자 호통치며 어떻게든 황자들에게 일을 맡기려는 것을 막으려던 것이 애매해져 버렸다.
1. 아직 어린 나조차 할 수 있을 정도로 적재적소에 힘을 빌려주고 감시하는 것쯤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2. 넌 같잖은 균형을 지키느라 바쁘니 황자들에게 맡겨라. 난 슬슬 황태자 자리를 물려줄 준비를 해야겠다.
3. 어차피 일은 공작들이 할 거니까 영민한 황자들에게 감투만 씌워 줘.
이런 속뜻을 품은 말에 황제가 미간을 찌푸렸다.
“후, 황자들에게 맡기는 건 그렇다 치고……. 태자는 습격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무리하게 움직이는 것 아닌가?”
“다행스럽게도 큰 부상을 입지는 않았사옵니다.”
“그래도 심적으로 충격이 컸을 터. 조금 쉬는 게 어떻겠느냐?”
황제의 물음에 카리엘이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 바로 답했다.
“사안이 시급하기에 바로 움직여야 할 것 같사옵니다. 습격자들에 관한 것도 다급하니 지금 당장 동생들을 불러들여 일을 맡기시지요.”
“너무 다급히 움직이는 것 아니냐? 급할수록 마음을 냉정히 해야 하느니라. 자칫 일을 그르칠 수도 있느니라.”
걱정된다는 듯한 어투로 말하는 황제의 음성에 카리엘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쥐새끼들이 도망칠까 염려되옵니다. 다소 문제가 생기더라도 더 큰 문제를 예방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 생각되옵니다.”
카리엘이 단호하게 말하자 황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명분을 쥐고 있는 카리엘이 이리 단호하게 나오자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었다.
“황태자를 습격했사옵니다. 다음은 누가 될지 알 수가 없는 일. 누구라도 죽일 수 있다는 쥐새끼들의 오만함을 짓밟고 황족의 명예와 제국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빠르게 움직여야 될 줄 아뢰옵니다.”
“폐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카리엘의 말에 눈치 빠른 공작들과 감찰총장이 후창했고, 다른 귀족들이 재창하면서 황제를 압박했다.
습격을 받은 당사자가 저렇게 주장하고, 그 주장을 귀족파와 중립파가 도와주고 있으니 황제의 입장에선 더 버틸 재간이 없었다.
그래도 미련이 남는지 마지막으로 카리엘에게 물었다.
“두 개를 동시에 진행할 수 있겠느냐? 일단 너의 습격에 관여한 자들부터 찾는 것이…….”
“그건 동생들이 할 것이옵니다.”
“제국의 힘이 두 개로 나뉘는 것이기에 문제라는 것이다! 하나에 집중해도 모자랄 일이다! 일을 그르치고자 하는 것이냐!”
“감찰부와 치안대만 넘겨주십시오. 그들만으로 남은 쥐새끼들을 잡아들이겠습니다.”
카리엘의 말에 황제가 눈을 가늘게 뜨며 재상을 힐끔 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그 모습에 카리엘은 뭔가 심상찮은 것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재상과 폐하 사이에 뭔가 있군.’
같이해 온 세월이 있으니 재상이 황제의 비밀을 상당수 알고 있을 것이다.
그것에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한 가지 확실한 건 재상을 절대 살려 둬선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번에 빠져나가면 황제의 비밀을 쥐고 있는 재상을 절대 잡을 수 없을 것이라는 예감이 왔다.
“폐하, 성국과 전쟁을 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쥐새끼들을 남겨 둘 수는 없사옵니다.”
“후, 길어지면 혼란은 겉잡을 수없이 커질 것이다.”
“혼란이 오기 전에 끝내겠습니다.”
한마디도 지지 않는 카리엘이 눈을 살벌하게 뜨며 황제를 바라보았다.
“쥐새끼들이 다른 곳으로 빠져나가기 전에 전부 불태워 죽이겠습니다. 지금껏 그래 왔듯 소자를 믿어 주십시오.”
카리엘이 살기 어린 눈빛으로 말하자 황제가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명분을 쥔 황태자.
게다가 귀족파와 중립파가 밀어주고 있었다.
틈이 보여 마지막으로 재상만큼은 구해 보려 했던 황제가 결국 포기했다.
“마음대로 하거라. 단! 신관들은 죽여선 아니 된다. 성국을 건드리는 건 모든 일이 명명백백히 밝혀진 이후에나 가능할 것이다.”
“그리하겠사옵니다.”
황제의 말에 순순히 고개를 숙인 카리엘이 곧바로 대전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던 귀족파와 중립파의 귀족들은 고개를 숙였고, 황제파는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황제가 자신들의 편을 들어 주었을 때는 혹시나 싶었다.
하지만 카리엘이 자신들이 살아날 수 있는 동아줄을 내려오는 족족 잘라 내 버렸다.
결국 그들은 이변이 없는 한 황제파의 미래에는 죽음뿐이라는 사실만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
한편, 카리엘이 곧바로 동생들이 있을 만한 곳으로 향했다.
“가자.”
“예!”
마차에 타자마자 빠르게 이동하라고 명령한 카리엘은 미소를 지었다.
‘정말 머지않았다.’
카리엘이 그렇게 생각하며 이번 일을 완벽하게 끝내고자 다짐했다.
‘동생들을 보낸 후에 빠르게 움직여야겠군.’
이번 일은 시간이 생명이었다.
그렇기에 카리엘은 어느 때보다 빠르게 마차를 움직여 미리엘의 궁으로 향했다.
“여기에 있을 줄 알았지.”
이윽고 미리엘의 궁에 도착한 카리엘은 궁 앞에 있는 두 대의 호화스러운 마차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는 그럴 줄 알았다는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황급히 미리엘과 두 동생이 있을 만한 곳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순식간에 동생들을 찾아낸 뒤 사악하게 웃었다.
그런 그를 보며 두 황자는 괴상한 느낌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일할 시간이다.”
카리엘의 갑작스러운 말에 두 황자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예?”
“갑자기 무슨…….”
갑작스럽게 와선 일하라는 말에 황당한 표정을 짓는 두 황자.
그런 그 둘에게 타리온이 헛기침하고선 대전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해 주었다.
“얼마 전에 약속했잖아.”
카리엘의 말에 두 황자의 머릿속에 황태자궁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2황자는 마법으로, 3황자는 군권을 쥐여 주며 대결시키겠다던 말이 떠올랐다.
“누가 황태자에 걸맞은지 증명해라.”
카리엘의 말에 루피엘이 황당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말입니까?”
“원래 모든 일이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법이야. 하다 보면 익숙해질 거다.”
“하지만 형님, 이건 아닙니다! 최소한의 준비 시간도 없이 무슨 일을 합니까!”
이번엔 3황자 세리엘이 반항해 보았지만 카리엘에겐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어차피 너희 외가에서 도와줄 거고, 실제 일은 밑의 애들이 다 할 거 아냐.”
“그, 그건…….”
“물론 그렇긴 하지만…….”
“날 습격한 놈들이 너희들도 노릴 수 있어. 이번에 놓치면 답이 없다. 무조건 잡아야 해.”
카리엘이 진중한 표정으로 말하자 두 황자도 사태의 심각함을 아는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폐하께서 찾으시니 얼른 대전에 가 봐라.”
카리엘의 말에 두 황자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미리엘을 바라보다 어쩔 수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 두 황자를 향해 사악하게 웃은 카리엘은 미리엘을 향해 다가갔다.
“오라비 왔다.”
“으으…….”
“전하, 미리엘 황녀님과는 소신이 놀아 드리겠습니다.”
카리엘이 다가가자마자 울상을 짓는 미리엘을 보며 타리온이 말했다.
“아니, 나도 놀아 주고 싶은데…….”
“우우…….”
그러나 좀 더 다가가자 한층 더 울먹거리는 미리엘의 모습에, 카리엘은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자주 보면서 익숙해지긴 했지만 그럴 때마다 두 황자이 옆에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두 황자가 떠나고 카리엘만 남은 상황이니 미리엘이 무서워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흠흠! 천천히 친해지시지요.”
타리온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카리엘을 위로했으나, 그의 표정은 전혀 풀리지 않았다.
그럴수록 더욱더 타리온의 품으로 파고드는 미리엘.
“일단 일을 다 끝내고 차분하게 친해져야겠네. 쯧! 이게 다 쥐새끼들 때문이야.”
카리엘이 분노한 표정으로 말했다.
만약 두 황자처럼 시간이 많았다면 미리엘과 진즉에 친해졌을 것이다.
분노 어린 음성으로 귀족들을 향해 욕하던 카리엘은 미리엘에게 웃으며 인사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쥐새끼들! 다 죽여 버리겠어!”
밖에서 들려오는 분노의 음성을 들으며 타리온은 한숨을 쉬었다.
“친해지실 수 있을까?”
맑은 눈동자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미리엘을 본 타리온은 정반대로 온갖 것에 찌든 듯한 눈을 하고 있는 카리엘과는 맞지 않음을 깨달았다.
카리엘이 알면 환장할 만한 사실.
하지만 그것을 애써 외면한 타리온은 얼마간 미리엘과 더 놀아 주다가 잠든 것을 확인한 후, 조용히 빠져나왔다.
방금 전까지 상냥한 아빠 같은 모습이었다면, 지금은 냉철한 사신과도 같은 기세를 뿜어냈다.
“전하께오선?”
“감찰부에 계십니다.”
타리온의 물음에 시종 중 하나가 조용히 다가와 말했다.
“얼른 가자.”
“예!”
***
감찰부로 황급히 움직인 타리온은 곧장 카리엘을 찾아갔다.
그곳에선 카리엘이 피투성이가 된 상태로 끌려온 귀족들을 싸늘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 곁에는 피가 묻어 있는 괴짜들이 나란히 서 있었다.
“뭘…… 하신 것이옵니까?”
“잡아 온 놈들을 고문 좀 했어.”
“직접 하신 것이옵니까?”
타리온이 기함을 토하며 묻자 카리엘이 고개를 저었다.
“설마. 내 손에 저 잡것들의 피를 묻히겠어?”
“후…….”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는 타리온에게 카리엘이 말했다.
“그래도 직접 참관은 했지. 미끼 좀 주었더니 줄줄 뱉더라고.”
그렇게 말하며 카리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자백도 받았으니 본격적으로 움직여야지?”
그리고 지금껏 보인 어떤 미소보다 무서워 보이는 미소를 입가에 가득 머금고는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백받을 것을 토대로 황제파의 비밀 기지들을 하나둘 털기 시작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어떻게든 비리가 될 증거들을 갖고 튀려는 놈들이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괴짜들과 타리온이 직접 나서서 처리했다.
그 때문에 매번 피가 묻어 흉악한 모습으로 변하자 카리엘이 직접 새빨간 제복을 선물해 주었다.
그 덕분인지 피가 튀어도 크게 티가 나지 않아 흉악한 모습은 다소 지워졌지만, 애초에 피 묻은 티가 덜 난다고 사라질 악명이 아니었다.
빠르게 쌓여 가는 악명에 괴짜들이 반항해 보았지만.
“예산 늘려 줄게.”
단 한마디로 괴짜들의 반항을 정리한 카리엘은 거칠 것 없다는 듯 빠르게 황제파를 털어 갔고, 그럴수록 카리엘과 괴짜들의 명성은 커져 갔다.
절차에 따라 움직이는 치안대와 감찰부와는 다르게 카리엘은 황명을 들먹이며 황제파를 족쳤기 때문에 엄청난 속도로 황제파의 숨겨진 세력을 털어 버렸다.
그 덕분인지 한동안 수도의 범죄율이 바닥을 길 정도로 줄어들 정도였다.
그런데 그 과정이 워낙 빠르고 잔인해 수도의 사람들이 황태자와 괴짜들에게 별명을 하나 붙여 주었다.
“혈태자와 붉은 친위대?”
카리엘은 신문에 난 자신의 별명이 재미있다는 듯, 괴짜들과 타리온을 바라보았다.
오늘도 앞에서 열심히 황제파의 비밀 기지 하나를 털고 있는 그들.
모두가 붉은 제복을 입고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모습에 만족스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울리긴 하네.”
붉은 친위대란 별명이 어울린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린 카리엘.
처음엔 괴짜들에게만 선물했던 붉은 제복을 매번 부럽다는 듯 바라보는 타리온의 모습에, 그에게도 선물해 주었다.
그리고 그건 어느새 카리엘의 친위대를 상징하는 제복이 되어 버렸다.
카리엘과 항상 붙어 다니는 타리온과 네 명의 괴짜들.
그들은 어느새 제국에서 가장 유명한 존재들이 되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