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30화 (30/201)

< 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 >

9. 황궁의 비밀 (3)

카리엘이 재상을 만나기 위해 마차에 오르자, 타리온이 뒤따랐다.

-자꾸 일이 터지는군.

“그러게. 미치겠네.”

카리엘이 그렇게 말하면서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미래를 아는 너도 모르는 건가?

“전생의 난 이 시기에 아파서 골골댄 게 전부야.”

몇 년만 뒤였어도 어느 정도 흐름 정도는 파악할 수 있을 텐데, 하필 지금 시기여서 아는 게 없었다.

-큰일이군.

수르트가 빨리 다른 녀석들을 찾으러 가거나 수련에 집중해야 하는데 쓸데없는 것에 시간을 뺏어 먹는다고 툴툴거렸다.

그런 수르트를 보면서 카리엘이 말했다.

“그래도 의심되는 점은 있어.”

카리엘의 말에 수르트가 뽀르르 날아왔다.

한껏 궁금하다는 표정을 짓는 수르트에게 카리엘이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전생에 있었던 대공가 내의 반란 사건. 어쩌면 그것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네.”

카리엘이 그렇게 말하면서 전생에 자신의 목숨을 몇 번이나 살려 주었던 자를 생각했다.

전생에 박살 난 제국이 형체나마 유지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가 바로 그자였었기에 이번 생에선 나름대로 도움을 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엮이게 될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기에 당혹스러운 마음이 컸다.

-흠, 궁금하긴 하네.

수르트가 카리엘에게 몇 번이나 들었던 자에 대해 호기심을 가득 담은 표정으로 공중을 빙빙 돌았다.

-서부에는 언제 가냐?

“당장은 못 가지.”

무슨 위험이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는데 서부에 갈 수는 없다.

당장에 중앙 지역에만 나가도 습격받는 상황인데 서부에 갔다간 목숨을 장담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쉽네.

한껏 아쉬워하는 수르트에게 카리엘이 말했다.

“꼭 서부로 가야만 볼 수 있는 건 아니지.”

-응?

“중앙으로 부르면 돼.”

카리엘이 그렇게 말하고는 입을 다물자, 수르트가 더 말해 달라고 앙증맞은 팔로 톡톡 치면서 말해 보았지만 굳게 다물린 입은 더는 열리지 않았다.

재상과의 수 싸움에 대비해 생각을 정리하느라 바빴던 것이다.

그리고 얼마 뒤.

“삐졌냐?”

카리엘은 수르트를 돌아보았다.

입을 꾹 다물고 생각을 정리해서 그런지 수르트는 한껏 삐진 표정으로 빵빵한 더욱 볼을 부풀리고 있었다.

“재상이랑 대화가 끝나면 말해 줄게.”

카리엘의 말에 수르트는 이번 사안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있는지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

“전하를 뵙습니다.”

“재상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라.”

“예!”

카리엘의 명령에 고개를 숙이는 황궁 기사.

황금빛 갑주를 입은 기사의 뒤를 따라 감옥으로 들어가자 감옥치고는 나름 괜찮은 방들이 몇 개 지나갔다.

그렇게 가장 안쪽에 위치한 감옥에 도착하자 바닥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는 재상이 보였다.

“전하를 뵙습니다.”

카리엘을 본 재상이 곧장 일어나서 허리를 굽혔다.

“물러나라.”

“위험합니다.”

타리온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자신은 남겠다 했지만 단호하게 거절했다.

수르트가 있는 이상 한 번은 살 수 있었고, 그것이면 충분했다.

카리엘의 단호한 명령에 모두가 멀리 떨어졌다.

“늦어서 미안하군. 알아볼 게 있어서 말이야.”

자신이 올 줄 알았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재상을 보며 카리엘은 미소를 지었다.

기세에 지지 않겠다는 듯 한껏 여유로움을 담아 웃었지만, 재상은 상관없다는 듯 무표정하게 고개만 숙였다.

“쯧! 물어볼 게 있어 왔다.”

“저에 관해 조사하셨다면 소신이 어째서 입을 열지 못하는지도 잘 아실 텐데요.”

“폐하와 관련된 일이라서 입을 다물겠다? 자네가 언제부터 폐하께 그렇게 충성했다고?”

카리엘이 비아냥거리듯 말하고는 창살을 움켜쥐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서부와 관련 있나?”

카리엘의 물음에 재상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그런 재상을 보면서 카리엘이 혀를 차며 말했다.

“쯧! 맞군. 대공가 아니면 벨푸르스 가문일 텐데. 내가 보기엔 벨푸르스가 의심스럽단 말이야.”

카리엘이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리면서 자신이 이때까지 생각한 것들을 재상 앞에서 풀어놓았다.

“최근 대공가에 심상치 않은 조짐이 일어나고 있지. 그 뒷배에 벨푸르스가 있는 건가?”

“…….”

“벨푸르스가 흑마법사와 손잡은 건가?”

“…….”

끝내 대답하지 않는 재상을 보면서 카리엘이 마음속 한구석에 품고 있는 것을 꺼내 놓았다.

“폐하께 들어가는 마약. 그거, 일반적인 마약이 아니지?”

카리엘의 말에 재상의 표정이 잠깐이지만 떨렸다.

그것을 캐치한 카리엘이 곧바로 입을 열었다.

“조사해 보니 자네가 만난 마약쟁이들 중 일부가 흑마법사와 관련된 자들이더군. 다른 마약쟁이들은 눈속임일 테고…… 진짜는 그들인가?”

카리엘의 말에 이번에는 실수하지 않겠다는 듯 표정을 완벽하게 컨트롤했다.

하지만 눈빛만은 어쩌지 못했는지 살짝 떨리는 게 보였다.

그것을 본 카리엘이 한숨을 쉬었다.

“흑마법사가 조제한 마약이라……. 근데 공교롭게도 그들이 서부와 남부 접경 지역 출신이란 말이지?”

카리엘은 싸늘한 음성으로 말했다.

“지금 말하면 가족들 목숨만큼은 살려 주지.”

카리엘의 말에 재상이 작게 고개를 저었다.

“말하지 않으면 네 가문은 멸문이다. 왜 못 할 것 같나?”

살기 어린 목소리로 말하는 카리엘을 보며 재상이 담담히 말했다.

“전하께서 제 가문을 살릴 수 있다 보십니까?”

“못할 것 같나?”

“전하께선 아직 황좌에 오르지 못하셨습니다.”

재상의 말에 카리엘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마치 황제가 되었다 해도 자신의 가문을 살리는 것은 힘들 거라고 얘기하는 듯했다.

“벨푸르스가 맞군. 작은아버지가 관련되어 있어. 맞지?”

벨푸르스 가문의 장녀와 결혼해 그 가문을 이어받은 황족.

카리엘의 작은아버지를 생각하며 말하자 재상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재상의 대답에 카리엘이 눈을 가늘게 떴다.

“……아니라고?”

“더 위입니다.”

재상의 말에 잠깐 멈칫한 카리엘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고모할머니가 관련되어 있다고?”

카리엘의 말에 재상은 침묵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이 긍정을 뜻하고 있음을 알아챈 카리엘은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얌전히 지내다 죽을 날만 기다리고 계신 걸로 알고 있는데?”

“서부의 절반을 장악하셨을 겁니다.”

“절반? 그럴 리가……. 그러면 모를 리가…….”

헛웃음을 터뜨리던 카리엘은 재상이 말한 것이 진짜 ‘절반’을 뜻하는 게 아님을 깨달았다.

“암상인과 범죄 집단의 모임. 그곳의 주인이 고모할머니였다고?”

어린 시절 황족치고 유약했던 그녀는 일찍부터 백작가로 시집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쥐 죽은 듯 살며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곳의 주인이 그분인 줄은 아무도 모를 겁니다.”

재상이 그렇게 말하면서 자신의 가문의 멸문은 확정되었으니 더 묻지 말라는 듯 표정을 굳혔다.

그러자 카리엘이 잠시 입을 다물고 생각을 정리했다.

재상에게 자신이 가진 정보를 털어놓고 추가로 정보를 받는 게 좋을지 고민했다.

여기서 재상에게 정보를 일부 주는 순간 어떤 자가 찾아와서 재상에게서 그 정보를 받아 갈지 알 수 없었기에 리스크가 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리엘은 입을 열었다.

“멸문은 막을 거다.”

“불가능합니다.”

“대공가를 불러들일 거다.”

카리엘의 말에 재상이 피식 웃었다.

“불가능합니다.”

한때 황족과 가장 친했던 가문이지만 암군의 시절을 겪으며 밀려나 버린 비운의 가문.

제국의 가장 큰 기둥이었던 대공가는 지금 몰락하고 있었다.

마스터를 배출하지 못한 지 100년 가까이 지나면서 대공가의 가치는 변경백보다 못한 처지가 되었다.

“한 가지 말해 주지.”

카리엘이 그렇게 말하면서 재상에게 가까이 다가오라 손짓했다.

그러자 그가 멈칫했다가 천천히 카리엘에게 귀를 가져다 댔다.

“벨푸르스가 대공가를 치면 그들은 멸문당한다.”

“불가능…….”

“지난 수십 년간 대공가가 가문이 쇠락해 가는 것을 지켜보기만 했을까?”

카리엘의 말에 재상의 눈이 커졌다.

전생에 듣기만 했던 대공가 내의 반란.

그 반란으로 가주가 죽고 식솔들 대부분이 죽음을 맞이했다.

그러나, 대공가를 지탱하는 기사단마저 전멸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대공가는 살아남았다.

‘홀로 칼을 든 자’.

전생의 황궁 기사단장이었던 그의 이명.

“대공가는 무너지지 않아. 내가 그리 만들 거다.”

홀로 검을 들고 무쌍을 찍는 그에게 더 큰 무기를 쥐여 줄 생각이다.

그렇기에 대공가는 무너지지 않는다.

오히려 제국을 더욱 굳건하게 지탱해 줄 것이다.

“……정말입니까?”

“맹세하지. 방금 내가 한 말에 절대 거짓은 없어.”

떨리는 눈동자로 카리엘의 눈을 마주한 재상이 한참을 시선을 떼지 못하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자신과 함께 죽을 줄로만 알았던 가족들이 살 수도 있다는 말에 흔들리기 시작했다.

“말해.”

마지막으로 묻는 카리엘을 보면서 잠시 고민하던 재상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야기는 그가 처음 중앙 관료 사회에 발을 내디딘 순간부터 시작되었다.

남다른 재능을 가진 그였지만 인맥 중심의 관료 체계는 절망을 안겨다 주었다.

그런 그에게 어떤 세력이 접근했다.

그때부터 그의 세상이 달라졌다.

“청렴했던 이유가 그건가?”

뒤에서 돈을 대주니 굳이 나서서 비리를 저지를 필요가 없었다.

뒷배가 배가 터지도록 돈을 지원해 주니 정쟁에 집중할 수 있었고, 빠르게 황제파를 양대 세력에 밀어 넣을 수 있었다.

“폐하한테 마약을 준 것도 너인가?”

“아닙니다. 제가 폐하께 접근했을 때는 이미…….”

재상의 말에 카리엘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 이전부터 손쓰고 있었다고? 그런데 어째서 아무도 암중 세력을 견제하지 않지?”

“관료 중에 암중 세력과 연관 있는 건 소신뿐이니까요. 그 이전에도 마찬가집니다.”

재상의 말에 카리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철저하군.”

재상 혹은 그에 준하는 대신급 존재 딱 한 명에게만 연을 만들어 놓는다.

“사실 그분의 존재를 안 지도 얼마 안 되었습니다. 전하께서 황제파를 털기 시작했을 때, 딱 그때 한 번뿐이었습니다. 황궁으로 직접 찾아오시더군요.”

카리엘이 적아를 가리지 않고 마구잡이로 잡아들이면서 한순간에 수도의 범죄 조직들이 붕괴되었고, 암상인들이 붕 떠 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삽시간에 중앙 지역을 넘어서 남부로 확장되자 서부까지 그 불길이 번질까 봐 재상에게 접근한 것이다.

“내가 조금만 미적거렸어도 잡아먹히는 건 나였겠어.”

카리엘의 말에 재상은 말없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황궁으로 직접 찾아왔다라…….”

“이젠 불가능할 겁니다.”

몇 번에 걸쳐서 청소한 덕분에 황궁은 외부의 첩자가 들어오기 까다로워졌다.

한동안은 황궁에 쥐새끼를 집어넣는 건 어렵다는 뜻이었다.

카리엘의 궁에서 첩자를 잡고 한번 털어 낸 다음 미리엘 사건이 지나고 대대적인 청소까지 감행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후, 개판이군. 이리될 때까지 대체…….”

카리엘이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리자 재상이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폐하께선 암군이라는 세간의 평가와 달리 영민하십니다.”

“…….”

이리될 때까지 손 놓고 있는 양반을 칭찬하는 재상의 말에 말없이 침묵했다.

그런 카리엘의 반응에 재상이 말했다.

“폐하께선 배신을 많이 당하셨습니다. 전대 황제께서 승하하신 후, 아무런 파벌도 없이 지금까지 오신 겁니다.”

황제 위에 올라 수많은 배신을 당하며 지금에 이르렀다.

그 결과 균형에 집착하며 많은 이들을 수없이 의심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은 없어. 결론은 의심병 말기에 균형에 집착하는 양반일 뿐.”

카리엘이 냉정하게 현 황제에 대해 평가를 내린 후 몸을 돌렸다.

들을 것은 다 들었다는 듯 나가려는 카리엘에게 재상이 입을 열었다.

“부디 약속을 지켜 주시길…….”

재상의 말에 몸을 돌리지 않은 카리엘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감옥을 나섰다.

그런 카리엘에게 재상이 작게 말했다.

“은퇴를 바라시는 듯하나 쉽지 않을 것 같군요.”

재상이 그렇게 말하면서 늙어 버린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주름이 늘어 버린 자신의 손.

자신이 조금만 더 젊었더라면.

아니, 자신이 좀만 더 늦게 관료 체제에 들어섰더라면…….

카리엘의 진가를 더 일찍 알았다면 결과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후회했지만 이미 늦었다.

지금 자신에게 남은 바람은 그저 멸문을 막는 것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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