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 >
10. 대공가의 수도 복귀! (2)
황제와 담판을 짓고 나온 후, 카리엘은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곧바로 움직였다.
가장 먼저 향한 것은 내무부였다.
“저, 전하, 이것은…….”
“방금 폐하께 허락받고 오는 길이다. 귀족 회의에 알리고, 대공가에게 나의 서신을 정식으로 전해라.”
카리엘의 말에 내무부의 관료들이 침을 꿀꺽 삼키며 카리엘이 내민 것을 내려다보았다.
대공가를 수도로 초청한다는 황태자의 초청장.
물론 내무부에서 서신을 작성한다고 곧바로 대공가로 향하는 것은 아니었다.
귀족회에 알리고 황제에게 정식으로 상신하여 윤허받고, 옥새를 찍어야 하는 과정이 남아 있다.
그 과정에서 귀족회가 반발하여 대전 회의에 안건으로 올린다면 서신은 내무부에 보관되어 결과가 나올 때까지 움직이지 못한다.
“최대한 빨리 폐하께 상신하도록.”
“귀족회에서 검토하기까지 시일이 걸릴 것이옵니다.”
“상관없으니 명령한 거나 잘 처리해.”
카리엘은 그렇게 말한 후, 그 자리에서 두 장의 서신을 작성했다.
“서부 변경백과 중앙군에게 전해.”
카리엘이 내관에게 두 개의 서신을 추가로 전하며 명령을 내리고, 곧바로 외무부로 향했다.
“전하를 뵙습니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그대로 아이론 연맹에 전해.”
카리엘의 말에 외무부 관료가 침을 삼키면서 황급히 수첩을 꺼내 들었다.
“아군의 부대가 대규모로 움직이는 것은 제국 내에 불미스러운 일을 처리하기 위함이니 양해를 바란다.”
“이, 이대로 보내면 되겠습니까?”
“추가로 나 카리엘 프레드리히 폰 블레이저가 직접 양해를 바란다는 말을 적고, 이는 폐하의 뜻임을 명확히 알려 주도록.”
카리엘이 그렇게 말하자 외무부의 고위 관료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 말했다.
“양해를 구한다 하여도 후에 분쟁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시간을 벌기 위함이니 나중에 분쟁이 일어나든 말든 상관없다. 그대들이 할 일은 이 일이 다 끝날 때까지 시간을 끄는 것.”
카리엘의 말에 외무부 관료들이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깊게 생각하지 마라, 그대들은 할 일만 하면 되는 것이니…….”
“어느 정도까지 시간을 끌어야 하는 것이옵니까?”
관료의 물음에 카리엘이 곧바로 대답했다.
“넉넉잡아 두 달. 가능하겠나?”
“그 정도라면 가능할 것 같사옵니다.”
“좋아. 믿어 보지.”
그렇게 말한 카리엘은 고위 관료의 어깨를 두드리고는 외무부를 나섰다.
그러자 외무부가 부산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명령은 간단했으나, 처리 과정은 간단치 않았기에 바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대규모 군사 이동은 국경에 불필요한 긴장감을 가져오기에 항의해도 할 말이 없으나, 카리엘이 직접 황태자의 이름으로 양해를 바란다고 부탁했으니 화내기에도 애매했다.
황제의 뜻임을 알렸다는 건 사실상 황제의 대리인으로서 황태자가 직접 양해를 구한 것이니 잘못 항의했다간 상황이 악화될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아이론 연맹 입장에선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설령 내부에 과격파가 있다 한들 서로 엇갈린 의견을 가지고 회의하느라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결국 최악의 상황이 와도 카리엘이 의도한 바는 이뤄지는 셈.
“이걸…… 스스로 생각하신 걸까?”
한 외무부 관료의 말에 젊은 관료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황태자의 이름을 사용해서 상대로 하여금 항의하기 애매하게 만들었다.
물론 후에 대규모 군사 이동에 대해서 해명해야 하겠지만, 그것은 나중 일이다.
일이 다 끝난 후에 해명하면 그만이니, 적어도 지금 당장은 아이론 입장에서 격렬하게 항의하기가 애매해져 버린 것이다.
그야말로 황태자가 자신의 명예를 희생해서 외교적으로 시간을 번 상황.
귀족 입장에서야 눈살을 찌푸릴 수도 있겠지만 외교관 입장에선 현명한 대처였다.
“옆에서 도운 이가 있겠지.”
“그런데 그런 것치고는 최근 태자 전하의 행보가…….”
“확실히 태자 전하를 행보를 보면 스스로 생각한 것일 수도…….”
관료들이 카리엘이 나간 곳을 빤히 바라보았다.
마법에 재능 있는 2황자, 검에 재능 있는 3황자와 달리 유약하다고만 알려진 황태자.
그런데 최근 행보와 방금의 일 처리를 보면 어쩌면 황태자 역시 두 황자 못지않은 천재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족의 황금 세대인가?”
한 젊은 관료의 중얼거림에 다른 이들이 자신들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암군의 시대에 태어난 황족의 황금 세대.
어쩌면 이 혼란한 시대를 진정시키며 제국을 다시금 위대하게 만들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관료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비록 수대에 걸쳐 썩어 버린 황궁에서 자신들 역시 오염되었지만 가슴속 한구석에는 ‘위대한 제국’이라는 자부심이 남아 있었다.
그런 자부심이 황태자의 시원한 행보를 보면서 조금씩 깨어나고 있었다.
“어쩌면 제국은 변화할지도 모르겠어.”
“그랬으면 좋겠네.”
관료들은 그렇게 중얼거리다 황급히 정신을 차리고는 황태자가 명한 일을 처리하기 위해 바삐 움직였다.
***
그렇게 외무부와 내무부가 황태자의 명을 이행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일 때, 카리엘은 또 한 곳을 방문했다.
황궁을 빠르게 가로질러 감찰부로 향한 카리엘은 곧장 감찰총장이 있는 곳까지 올라갔다.
“서부 암상인 연합과 벨푸르스를 쳐야 한다.”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명을 내리는 카리엘을 보며 포돌스키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예? 지금 말입니까?”
“방금 폐하와 담판을 짓고 왔다. 시간이 생명이야. 서부 암중 조직들이 움직이기 전에 우리가 먼저 쳐야 한다.”
카리엘의 말에 포돌스키가 다급하게 말했다.
“이렇게 갑자기 말입니까?”
포돌스키가 당황스럽다는 표정으로 말하자 카리엘이 재상에게서 알아낸 정보들을 토대로 앞으로 계획한 것들을 간략하게 알려 주었다.
모든 설명을 듣자 이해했다는 듯, 포돌스키가 곧바로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준비하겠습니다.”
“총장이 할 일은 서부의 암상인 연합이 마약 사건과 관련 있다고 발표하는 것. 덤으로 흑마법사와 연관된 신전의 자금이 서부으로 흘러들어 가고 있다고 발표해.”
“아직 증거가 부족합니다.”
곤란한 표정을 짓는 포돌스키에게 카리엘이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조작은 저들만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후에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하는 척만 해. 그것만으로도 압박은 충분하니까.”
카리엘의 말에 포돌스키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라면 크게 문제 될 건 없었다.
감찰부 입장에서는 문제가 될 정황이 발견되었으니 조사하는 게 당연했다.
후에 문제가 생기더라도 감찰부 입장에선 조사할 수밖에 없다는 식으로 넘길 수 있었다.
“상대가 증거를 없애고 조작한다? 그럼 우리도 그에 맞게 대응하면 그만이야. 공권력을 쥔 자들이 힘을 사용하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 줘.”
“예.”
카리엘의 명령에 포돌스키는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이 작전의 핵심은 대공가를 부활시키는 것. 대공가가 수도에서 정식으로 모든 제재를 해제하고 과거의 영광을 찾을 기반을 닦을 때까지 시간을 끄는 거야. 굳이 적들을 잡을 필요 없으니까 압박만 해.”
“예.”
“하온데 정말 폐하께서 허락하신 것입니까?”
포돌스키가 아직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래, 어렵게 허락받았으니 실수하지 마. 대공가가 수도로 올 때까지 서부에 어떤 움직임도 용납하지 마라.”
“반드시 그리하겠습니다.”
포돌스키의 대답에 만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카리엘은 타리온과 포돌스키를 쳐다보며 말했다.
“대공가를 제대로 복권시키고 암중 세력을 먹은 벨푸르스를 무너뜨린다. 그것이 내가 황태자로서 할 마지막 일이야. 그러니 완벽하게 처리하자.”
그의 말에 포돌스키와 타리온이 살짝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카리엘이 본격적으로 움직이면서 제국은 그동안 움츠려 있던 것을 멈추고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썩은 부분을 잘라 내고 치유하며 다시금 일어서려 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황태자의 자리에서 자꾸만 물러나고 싶어 했다.
“착각하지 마. 지금 나를 따르는 귀족파는 내 편이 아니야.”
아쉬워하는 둘을 보면서 카리엘이 현실을 일깨워졌다.
현재 귀족파가 카리엘의 명에 움직이는 것은 순전히 두 황자를 위한 것이었다.
미래를 위한 투자에 불과한 것이다.
여기서 카리엘이 황제가 되겠다고 욕심을 부리면 다시금 귀족파는 한데 뭉치려 할 것이다.
“내가 할 일은 여기까지.”
확언하듯 말하자 타리온과 포돌스키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명예롭게 은퇴하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포돌스키의 말에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카리엘은 타리온에게 말했다.
“타리온, 넌 벨푸르스 가문을 엮어 봐.”
“어느 선까지 말입니까?”
“살짝만. 작은아버지가 과거 황좌에 대한 야망이 있었다는 것과 때마침 서부의 벨푸르스 근방의 암상인들이 감찰부의 타깃이 되었다는 것만 흘려.”
“약만 치는 것이군요.”
타리온은 단번에 알아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번 꾸며 보겠습니다.”
“좋아.”
그럴듯하게 증거를 조작해 정말로 벨푸르스와 엮인 것인 양 여론을 만들겠다는 타리온.
그동안 카리엘 밑에서 일한 시간이 헛된 것은 아니었는지 이제는 개똥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그런 그를 만족스럽게 바라보던 카리엘은 손뼉을 쳤다.
“자! 시간 싸움이야. 움직여.”
“예!”
“예!”
***
카리엘의 명령에 바삐 움직이기 시작한 타리온과 포돌스키.
가장 먼저 움직인 건 포돌스키였다.
「황제파 쪽 귀족들의 비리 자금이 서부로 흘러들어 갔다는 정황이 나왔다.」
처음 발표했을 때만 하더라도 귀족들은 큰 반응을 하지 않았다.
그것보단 대공가에 대한 일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감찰부는 마치 귀족들의 관심을 구걸하는 것처럼 계속해서 발표했다.
「흑마법사와 관련된 신전의 비리 자금의 일부가 서부로 흘러갔다는 정황이…….」
「이번 황태자 습격 사건을 도운 상단 일부가 서부 출신이라는 정황이…….」
연이어서 감찰부의 조사 과정이 공개되었지만 확실한 증거는 하나도 없었다.
발표하는 내용을 보면 죄다 정황뿐이었다.
하지만 귀족들과 제국민이 보기엔 아직 확실한 증거를 찾지 못했을 뿐, 서부의 암상인과 범죄 집단은 관련이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타리온이 움직였다.
「과거 황좌에 대한 야심을 드러냈던 벨푸르스 백작」
「공교롭게도 감찰부가 발표한 정황들이 전부 벨푸르스 영지 근방에서 발생하다?」
조작된 정황증거를 마치 사실인 것인 양 만들어 여론전을 펼치는 타리온과, 그렇게 형성된 여론의 힘을 바탕으로 귀족들을 압박하는 감찰부.
그렇게 카리엘이 원하는 그림이 나오자 귀족들도 더 이상 대공가의 복권을 물고 늘어지진 못했다.
결국 황제의 재가를 받았고, 그 순간부터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가장 먼저 중앙군이 움직이고, 서부 변경백의 병력 일부가 대공가를 호위했다.
“일차적인 안전장치는 만들어졌군.”
그렇게 중얼거리며 카리엘은 한숨을 쉬었다.
대공가의 반란 같은 장난질을 할 수 없도록 안전장치를 만들었으니 가장 큰 건 지나간 셈이었다.
이제 남은 건 대공가가 수도에 오는 것을 기다리는 일과 적들의 반응을 보는 것뿐이었다.
“전하, 대공가에서 답이 왔습니다.”
내무부에서 전해 온 서신을 읽은 카리엘이 미소를 지었다.
“온다고 합니까?”
“그래, 온다는군.”
그동안 핍박받았던 대공가였기에 거절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했다.
만약 그럴 경우 강제로라도 제재를 풀어 주고 지원금을 대공가에 쑤셔 넣어 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끝났군.”
대공가의 확답까지 받았으니 사실상 카리엘이 할 수 있는 일은 전부 끝난 셈이다.
“고생하셨습니다.”
“후, 타리온도 고생했어. 이제 좀 쉬어.”
카리엘이 물러가라고 손짓하자 고개를 숙인 타리온이 조심스레 물러났다.
혼자가 된 카리엘은 한참을 천장을 멍하니 보다가 테이블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엔 흑마법사, 성국, 귀족파, 중립파 등이 적혀 있는 모형 깃발들이 어지러이 놓여 있었다.
“개판이네.”
중앙의 황궁을 중심으로 어지러이 놓인 세력판을 보던 카리엘은 손을 들어 귀족파와 중립파를 황궁에 두고 그 위로 새로운 모형 깃발을 올려 두었다.
대공가라고 적힌 작은 깃발이 황궁에 놓였고, 반대로 벨푸르스는 깃발은 서부에 옮겨졌다.
북쪽에는 성국.
서쪽에는 벨푸르스와 아이론.
동쪽에는 로만.
남쪽에는 남부 연합.
사방으로 포위된 형태에 제국의 내부에는 흑마법사의 깃발까지 꽂혀 있었다.
온통 적밖에 없는 상황에서 하나로 힘이 결집된 제국.
“이제 좀 해볼 만하겠네.”
강대했던 제국답게 사방에 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해볼 만하겠다고 생각했다.
한없이 추락했음에도 아직은 여력이 남아 있었다.
대공가 하나가 추가되었을 뿐인데도 예전과는 다른 안정감이 생겼다.
전생에 최강의 검으로 군림했던 자가 이끄는 대공가라면 어떤 상황에서도 제국을 지탱할 것이다.
“그 녀석만 잘 꼬드기면 은퇴 각이 잡히겠어.”
카리엘이 그렇게 말하며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