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 >
11. 다시 만난 최강의 기사
수도의 정문에 대공가를 환영하는 현수막이 펼쳐지고 꽃가루가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황궁의 음악단이 잔잔한 음악을 깔아 주며 대공이 탄 마차와 대공가의 기사단을 환영해 주었다.
다소 과하다 싶을 정도 의전이었지만 핵심은 황태자였다.
제국의 황태자가 성문에 서서 기다리고 있는 모습은 대공가의 수도 입성을 환영하는 최고의 의전이었다.
펑! 펑!
폭죽이 터지고 대공가 일행을 위한 작은 환영식이 끝나자 대공과 소가주가 마차에서 내려 카리엘을 향해 걸어왔다.
“제국의 작은 태양,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듀칼 공의 수도 입성을 환영하오.”
카리엘이 환한 웃음을 지으면서 말하자 듀칼이 적응이 안 되는지 헛기침했다.
그건 다른 대공가의 기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도 귀가 있기에 대공가의 복권에 카리엘이 노력했다는 것쯤은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자신들을 이 정도로 환영해 줄 줄은 몰랐다.
“이리 환대해 주셔서 감읍하옵니다.”
“아니요. 그동안 황가가 대공가를 실망시킨 것에 비하면 이 정도로는 한참 부족하오.”
카리엘의 말에 대공의 눈이 크게 떠졌다.
“전하, 누가 들을까 저어되옵니다.”
“괜찮소. 황실이 그대들을 실망시킨 건 사실이니까.”
“크흠!”
대공이 헛기침하면서 눈치를 봤지만 당사자인 카리엘은 당당했다.
황태자 자리를 보전할 것도 아니기에 거리낄 게 없었다.
“전하를 뵙습니다. 글렌 브리타뉴 디 베네룩스라 하옵니다.”
“반갑소. 카리엘이오.”
카리엘의 말에 글렌의 눈이 살짝 커지면서 허리를 숙였다.
“말씀 편히 하시옵소서.”
“차기 대공에게 그리할 수는 없는 법.”
카리엘이 그렇게 말하면서 차기 대공이 될 소가주를 바라보았다.
전생에 다 무너져 가던 제국을 홀로 지탱했던 위대한 검을 다시 본 카리엘은 감회가 새로웠다.
“잠시 마차에 좀 타도 되겠소?”
“아! 물론이옵니다.”
대공이 황급히 마차로 가서 문을 열어 주자 자연스럽게 올라탄 카리엘은 맞은편에 앉은 대공과 소공자를 바라보았다.
이미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어떤 말을 하려는 건지는 알지 못했던 부자는 긴장한 표정으로 카리엘이 말하기를 기다렸다.
“어느 정도 예상은 하셨겠지만 대공가의 복권을 대가로 원하는 것이 있소.”
카리엘의 말에 대공가아 침음성을 흘렸다.
“전하를 지지하길 원하시옵니까?”
대공의 물음에 카리엘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아니요.”
“전하를 지지하길 원하시는 게 아니옵니까?”
대공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황제파를 박살 낸 시점에서 그 빈자리를 메꾸기 위해 대공가를 원하는 것인 줄 알았다.
사실 대공가 입장에선 그렇게 생각할 법도 한 게, 황제파를 박살 내면서 귀족파와 중립파 역시 조져 버려 카리엘의 편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대공가를 복권시키면서 세력을 만들려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벨푸르스를 밀어내고 대공가와 서부 변경백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여서 서부를 황태자의 지지 세력으로 만든다.
제법 그럴듯한 생각이었다.
“잘못 생각하셨소.”
대공의 말에 카리엘이 정색하며 고개를 저었다.
“……정말 아니옵니까?”
“아니요.”
다시 한번 묻는 대공에게, 카리엘은 단호하게 답했다.
‘누굴 × 되게 하려고?’
황태자의 표정이 구겨지자 대공과 글렌은 긴장했다.
그러자 카리엘이 황급히 표정을 가다듬었다.
‘아차! 좋은 인상을 심어 줘야지.’
정신을 차린 카리엘은 숨을 길게 내뱉으며 분노를 가라앉혔다.
“후, 대공께서 크게 오해하신 것 같소. 곧 황태자 직위를 내려놓을 나한테 세력이 필요할 리 없지 않겠소?”
“으음, 정말 은퇴하시려는 것이옵니까?”
대공의 물음에 카리엘이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그렇소. 이왕이면 최대한 빨리 은퇴하고자 하오.”
은퇴를 하겠다는 말이 나옴과 동시에 강렬한 의지가 느껴지자 대공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모습을 옆에서 보는 글렌이 재밌다는 슬쩍 미소를 지었다.
마차에서 내릴 때부터 심드렁한 표정을 짓고 있던 글렌이 황태자가 보이는 의외의 모습에 흥미를 느낀 것이다.
“그럼 전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옵니까?”
“두 가지가 있소. 하나는 공적인 것, 다른 하나는 내 개인적인 부탁이오.”
카리엘이 그렇게 말하면서 대공에게로 몸을 기울였다.
그러자 대공 역시 몸을 기울여 주며 작게 말해도 들릴 만큼 거리를 좁혔다.
“대공도 알다시피 대공가를 수도로 불러들이는 이유는 벨푸르스를 견제하는 것이 가장 클 것이오.”
“……예.”
“하지만 단순히 견제하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오.”
카리엘이 그렇게 말하면서 벨푸르스와 흑마법사와의 관계, 타국과 밀약했을 가능성을 설명하며 단호하게 말했다.
“만약의 사태가 오면 벨푸르스를 서부에 묶어 놔야 하오.”
“죄송하오나 현재의 대공가로는 불가능하옵니다.”
대공의 말에 카리엘이 피식 웃었다.
“대공가에게 변경백 수준의 지원을 한다는 말은 허언이 아니오.”
그동안 황가와 중앙의 귀족들에게 당해 온 대공가 입장에서 변경백 수준의 지원을 한다는 말을 쉬이 믿을 리 없었다.
황태자가 활약하며 중앙이 많이 깨끗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암군인 황제가 건재한 이상 실제로 대공가에 지원되는 양은 극히 적을 것으로 본 것이다.
“중앙은 변했소. 적어도 이 위기가 지나갈 때까진 대공가에 지원되는 돈을 중간에서 착복할 수는 없을 것이오.”
카리엘의 말에 대공은 여전히 믿기 힘든 표정이었지만, 더 이상은 설득하지 않았다.
직접 수도에 생활하며 변화된 분위기를 겪지 않으면 오랜 세월 쌓인 불신을 걷어 내기는 어렵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음은 무엇이옵니까?”
대공이 불신을 지우지 못한 채 카리엘의 진짜 목적인 두 번째 부탁을 들으려 했다.
‘황제를 암살해 달라는 것일까?’
‘대공가를 중심으로 비밀 세력을 만드시려는 걸까?’
듀칼은 물론이고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글렌마저 궁금하다는 듯 카리엘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곧 그들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말이 들려왔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중립을 지키는 것.”
카리엘의 말에 대공가의 두 눈동자가 떨렸다.
“분명 이건 힘들고 어려운 일이 될 것이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탁드리겠소.”
고개를 숙이며 말하는 카리엘을 보면서 대공가의 두 부자는 침묵했다.
황가에 의해 중앙에서 밀려났음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지켜 온 신념.
그것은 바로 초대 황제의 부탁인 중립을 지켜 달라는 부탁이었다.
몇 번의 위기가 있음에도 지켜 온 초대 황제의 명은 대공가의 신념이자 자부심이었다.
“……그것이면 되옵니까?”
“어려울 것이오. 그럼에도 부탁하겠소. 제국의 기둥이 되어 무너지지 않게끔 해 주시오.”
“그건…….”
“사실상 새로운 변경백이 탄생한 것이나 다름없는 대공가는 앞으로 승승장구할 것이오. 그럼 중앙에 있는 쓰레기들이 오물을 묻히려 들 테지.”
“으음…….”
카리엘이 걱정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게 된 두 부자가 침음성을 삼켰다.
“신념을 지키는 것은 고된 일일 것이오. 그럼에도 부탁하겠소. 그동안 지켜 왔던 그대들의 신념이 흔들리지 않았으면 좋겠소.”
카리엘의 부탁에 두 부자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했다.
그동안 대공가가 신념을 지켜 온 것을, 어떤 자는 비웃었고, 어떤 자는 미련하다 욕했다.
그런데 황태자가 알아 준 것이다.
고되고 힘든 길을 걸어온 자신들을 위해 고개를 숙이며 앞으로도 신념을 지켜 주길 부탁했다.
그것을 보면서 두 부자의 마음에 뭔가가 빠르게 차올랐다.
아직은 이것이 무엇인지 모르겠으나 한 가지 확실한 건 눈앞에 있는 황태자는 자신들과 같은 신념을 품고 있는 자라는 점이었다.
‘쓰레기들에게 현혹되지 말고 앞으로도 꿋꿋하게 그 자리를 지켜라. 지원은 빵빵하게 해 줄게.’
대공가의 두 부자를 보면서 속으로 부탁한 카리엘이 다시 입을 열었다.
“물론 그냥 해 달라는 것은 아니오. 부탁했다면 대가가 있어야겠지.”
“신념을 지키는 것에 대가는 필요 없습니다.”
대공의 단호한 말에 카리엘이 고개를 저었다.
“개인적인 부탁인데 대가를 주는 것은 당연하오.”
“전하.”
카리엘의 말에 대공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자신들이 오랫동안 지켜 온 신념이 자칫 장사치의 거래와 같은 것으로 전락할까 걱정하는 그들에게 카리엘이 말했다.
“그대들이 받아야 할 것을 돌려주는 것. 그것이 내 보답이 될 것이오.”
“……예?”
멍청하게 되묻는 대공에게 카리엘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초대 대공의 무서.”
카리엘의 말에 글렌의 두 눈동자가 사정없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대들이 갖고 있던 원본은 수십 년 전 망가졌다 들었소. 어느 정도 복원했겠지만 완벽하진 않겠지.”
대공가가 몰락한 기점이라고 볼 수 있는 사건.
바로 대공가의 저택을 습격한 자들이 초대 대공의 무서를 망가뜨린 것이다.
그동안 전해진 것이 있었기에 몰락하진 않았지만 하필 마스터조차 배출하지 못했던 시기에 일어난 일이라 대공가의 몰락이 더욱 가속화되었었다.
“비록 사본이지만 황궁에는 초대 대공의 무서가 남아 있소.”
“……정말이옵니까?”
“물론 완벽하진 않소. 핵심이 되는 것 몇 개는 빠져 있거든. 하지만 그 핵심은 그대들이 가지고 있을 터.”
카리엘의 말에 대공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공가가 유지되고 있는 것은 초대 대공이 남긴 것의 핵심만큼은 지켜 냈기에 가능했다.
거기에 사본이 더해진다면 초대 대공의 무서가 완벽하게 부활하는 것이 가능했다.
‘전생에 글렌이 완벽하게 복원시키며 그랜드 마스터에 올랐지.’
전생을 기억하는 카리엘은 빙그레 웃으면서 글렌을 바라보았다.
“그대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대공가를 부활시킬 존재에 초대 대공의 무서가 더해진다면 제국의 기둥이 다시 세워질 수 있을 터. 이 정도라면 보답이 되겠소?”
카리엘의 말에 듀칼이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전하의 은혜에 감읍, 또 감읍하옵니다. 이 은혜는 변하지 않는 충정으로 갚겠습니다.”
“돌려줘야 할 것을 돌려주는 것뿐.”
카리엘이 그렇게 말하며 글렌에게 말했다.
“일정이 끝나거든 황태자궁으로 찾아오시오.”
“……그리하겠습니다.”
글렌이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한껏 설레는 마음으로 고개를 숙였다.
“전하, 황궁에 도착했사옵니다.”
“이만 헤어져야겠군. 부디 수도에서 많은 것을 얻어 가시길 바라겠소.”
그렇게 말을 남긴 카리엘은 대공의 마차에서 내려 자신의 마차로 갈아탔다.
그리고 근엄한 표정으로 마차에 올라타 황태자궁으로 돌아가고 있으려니, 돌연 같이 올라탄 타리온이 카리엘을 이상하게 바라보았다.
“전하.”
“응?”
“크흠! 그…… 웃는 것이 좀…….”
황태자궁으로 돌아가는 내내 히죽거리고 있는 카리엘을 보면서 타리온의 표정이 굳어졌다.
“어차피 아무도 없잖아.”
“그렇긴 합니다만…….”
“후! 이제 진짜 얼마 안 남았다. 대공가가 정식으로 복권되면 은퇴해야겠어.”
“그렇게나 빨리하시려는 겁니까?”
카리엘의 말에 타리온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럼. 동생들을 위해서라도 빨리 물러나 주는 것이 옳지. 약속했던 내 할 일도 끝났는데 미적거리면 의심할 수도 있고.”
“그렇긴 합니다만…….”
타리온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제국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고, 최근엔 귀족들 중에도 카리엘을 좋게 보는 자들이 늘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아쉬운 마음을 입 밖으로 내뱉을 순 없었다.
“흐흐~ 은퇴다.”
은퇴할 것을 기대하며 입꼬리가 귀에 걸린 카리엘을 보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