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40화 (40/201)

< 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 >

13. 즐거운 시간? (2)

제국의 역사 속에서 늘 함께해 왔던 대전 안은 지금 기묘한 침묵 속에 빠져 있었다.

카리엘이 사전에 황제파의 숙청 작업을 마무리 짓겠다고 공지해 왔기 때문이다.

황태자궁에서 출발한 카리엘이 대전에 도착하는 즉시 황제파에 관한 논의가 시작될 것이다.

“결국 미뤄 두던 것들을 매듭을 짓는군.”

데이비어 공작의 말에 월크셔 공작이 비웃듯 말했다.

“가만히 있었으면 중간이라도 갔을 것을……. 황태자를 자극해서 사달을 냈군.”

월크셔 공작이 미래가 그려지는 듯 귀족들을 보면서 비웃었다.

황태자의 은퇴를 억지로 미룬 이상, 그 분노는 귀족들에게 향하게 되어 있었다.

“당분간은 사려야겠어.”

“……본격적으로 피바람이 불겠군.”

너스레를 떠는 월크셔 공작의 말에 데이비어 공작 역시 무거운 표정으로 말했다.

두 공작의 말에 대전 회의에 참석한 대공이 빙그레 웃었다.

“재밌군.”

은퇴하려는 황태자를 두려워하는 귀족들.

이럴 거라면 ‘왜 은퇴를 막았는가?’라는 의문을 가질 수 있겠지만 그들 입장에서도 어쩔 수 없었다.

지금 상황에서 귀족파가 둘로 갈라지는 순간 황실의 먹잇감이 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중립파 역시 정치적 내전을 환영하지 않았기에 카리엘의 은퇴를 미루는 것에 만장일치로 찬성해 버렸다.

사실 중립파는 변경백들이 비밀리에 황태자의 은퇴를 막으라는 의중을 전했다는 말도 돌았다.

어찌 되었건 카리엘의 은퇴는 막혔고, 그 결과 피의 숙청이 시작되었다.

“카리엘 프레드리히 폰 블레이저 전하 납십니다.”

시종이 풀네임으로 입장을 알리자 귀족들이 의관을 가다듬었다.

얼마 후 거대한 문이 열리고 카리엘이 귀족들 사이를 당당하게 걸어 나갔다.

모두가 황좌에 앉을 카리엘을 예상했으나 그들의 생각과 달리 카리엘은 황좌 바로 앞 계단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전하, 황좌에 오르시지요.”

데이비어 공작의 말에 카리엘이 고개를 저었다.

“황좌는 폐하의 것. 난 여기로 충분하오.”

카리엘의 말에 귀족들이 헛기침했다.

황좌에 앉지 않는 것으로 다음번엔 반드시 은퇴하겠다는 뜻을 은유적으로 드러낸 것이기 때문이다.

“첫 번째 의제는…….”

“되었다. 내 직접 말하지.”

카리엘이 내관의 말을 막고선 직접 말했다.

“첫 번째 의제는 모두 알고 있다시피 미뤄 두었던 황제파의 재판 결과의 집행을 속행하는 것이오.”

그의 말에 대전 안에 침묵이 감돌았다.

“그리고 두 번째 의제는 앞선 의제와 연결된 것인데, 지방 귀족들 중 황제파 귀족들과 함께 범죄를 저질렀음에도 유야무야 넘어간 자들이 있을 것이오. 난 그들 역시 모조리 잡아 법의 심판을 받게 할 생각이오.”

카리엘의 말에 귀족들이 헛기침했다.

예정되었던 숙청이 직접 카리엘의 입을 통해 나오자 무거운 공기가 그들을 짓눌렀다.

“마지막으로 서부의 귀족들과 군부에서 불민한 자들이 속출하고 있다고 들었소, 그에 관한 처결 역시 논하면 좋겠소. 남은 안건들은 추후로 미뤄 두고 이 세 가지 의제에 집중하면 좋겠소만.”

“뜻대로 하십시오.”

데이비어 공작의 말에 귀족들이 고개를 숙이며 일제히 뜻대로 하라고 말했다.

“먼저 황제파의 집행을 속행하는 것인데…… 난 일주일 안으로 모두 끝마쳤으면 좋겠소.”

“그리 급하게 처결하실 이유가 있사옵니까?”

월크셔 공작이 얼굴에 의문을 가득 담은 채 카리엘을 바라보았다.

딱히 반대는 하지 않겠지만 이리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이유가 있느냐는 의문이 들었다.

재판을 빠르게 진행하는 만큼 집행만큼은 정석대로 하는 게 훗날을 위해 좋았기 때문이다.

그런 공작의 의문을 카리엘은 빠르게 풀어 주었다.

“내가 직접 서부로 갈 생각이오.”

“직접 말이옵니까?”

“그렇소.”

카리엘의 말에 월크셔 공작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옆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데이비어 공작은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작게 고개만 끄덕였다.

“여기서 못 박겠소. 서부의 일이 전부 끝나면 정식으로 황태자 자리에서 퇴위할 것이오. 이미 폐하께서도 윤허하신바, 빠르게 정국을 안정시키고 차기 황태자를 위한 경합에 돌입하는 편이 좋다는 게 내 생각이오.”

카리엘의 충격적인 발언에 귀족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귀족들과 대신들이 걱정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잘 알고 있소. 불안한 정국 속에서 둘로 갈라지는 최악의 상황을 바라지 않을 것을 잘 아오. 그렇기에 내가 은퇴하기 전에 지금 일어나는 문제는 끝내고 가겠소.”

그때 타리온이 뒤늦게 자료를 들고 왔다.

그동안 황태자궁에서 잠적하듯 박혀 있었던 것은 단순하게 자료들을 살피기 위함만은 아니었다.

“내가 은퇴한 후를 걱정하는 귀족들을 위해 준비했소.”

카리엘이 그렇게 말한 후, 대전 안에 설치된 영상구를 통해 준비한 자료들을 보여 주었다.

1. 차기 황태자 후보에서 미리엘 황녀는 제외한다.

2. 각 후보들은 흑마법사들의 격멸과 제국 내에서 벌어진 범죄자들과 협력한 타국으로부터 배상받는 것. 두 개 중에 선택해 차기 황태자의 경합을 시작한다.

3. 흑마법사를 대륙에서 뿌리 뽑기 위해 대륙 회의를 개최한다.

거대한 영상구에 나오는 것을 빤히 바라보던 몇몇 귀족들이 감탄했다.

첫 번째로 괜히 어린 미리엘을 들이밀어 이득을 취하는 이들이 없도록 두 황자로 확실히 못 박았다는 것.

그것으로 쓸데없이 더 분열되는 것을 막았다.

두 번째로 차기 황태자 경합의 시험을 외부의 적들을 처단하는 것으로 치르게 해 제국 내의 단합을 유도했다.

내전을 방지하고 혹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더라도, 타국을 반쯤 박살 낸 이후에 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대륙 회의를 통해 타국들을 불러 모았다.

이 역시 황태자의 자질을 시험하는 것으로, 타국의 사람들과의 협상을 통해 그들에게서 얼마나 많은 배상금을 받아 내고 흑마법사를 잡는 데 얼마나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 시험하는 것이다.

“난 은퇴하기 전까지 제국 내에서 일어난 문제를 최대한 처리할 것이오. 그럼 남은 건 타국과의 문제뿐. 차기 황태자는 더 이상 제국 내의 문제에 얽매이는 것이 아닌 대륙을 호령했던 제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할 것이오.”

카리엘의 말에 몇몇 중립파 귀족들의 눈에 희열이 돌기 시작했다.

대부분 군부 출신의 귀족들이었다.

귀족파 중에서도 늙은 귀족들은 오래전 대륙을 호령했던 제국을 생각하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위기 속에 기회가 있다 했소. 현재의 제국에는 많은 위험이 있지만 이것만 극복하면 과거의 영광을 되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오. 그렇기에 과거의 잔재이자 무능한 황태자인 나를 마지막으로 분열을 끝내고 차기 황태자를 중심으로 단합하여 부상했으면 좋겠소.”

카리엘이 담담한 말투로 연설을 끝내고는 귀족들을 바라보았다.

“……전하의 뜻, 잘 알겠사옵니다.”

월크셔 공작이 고개를 숙이며 말하자 데이비어 공작 역시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그들을 시작으로 모든 귀족들이 허리를 굽히며 카리엘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일제히 두 손을 위로 들어 올렸다.

그것은 오직 황제에게만 올리는 예로, 황제조차 쉬이 받을 수 없는 최고의 예우였다.

“……전하.”

타리온이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카리엘을 바라보았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목숨을 걱정하던 처지에서 이제는 귀족들에게 진심으로 존경받는 위치에 서게 된 것이다.

카리엘 역시 감회가 새로웠다.

귀족들에게 이런 예우를 받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크흠! 이제 본격적으로 안건을 논의해 봅시다.”

쑥스러운지 괜히 헛기침하면서 입을 연 카리엘은 본격적으로 미뤄 두었던 황제파의 처결과 서부를 어떻게 정리할지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일단 황제파 출신의 고위 관료들의 경우 그동안 지은 죄가 워낙 무거웠기에 전원 사형이 결정되었다.

몇몇 이들은 노예로 강등시키거나 작위를 박탈하는 선에서 판결이 난 이들도 있었지만 카리엘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감찰부가 갖고 있던 추가 자료들까지 가져와 귀족들을 설득했다.

황제파만큼은 완전히 끝장내겠다는 카리엘의 의지에 모든 귀족들이 결국 수긍했다.

남은 건 서부였다.

이 역시 확실하게 끝내고자 현재 가용한 모든 전력을 사용하기로 했다.

마스터인 데이비어 공작.

대공가.

월크셔 공작의 마법 병단.

이 셋만으로도 웬만한 소국 몇 개는 끝내 버릴 전력이건만 중앙군까지 움직였다.

거기다 더해서…….

“전하, 서부 변경백과 북부 변경백의 서신이옵니다.”

중립파의 대표 격인 포돌스키가 변경백들의 서신을 전해 주자 카리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서부 변경백이야 이해할 수 있지만 북부 변경백은 의외였다.

자신의 어미인 황후가 죽은 후, 황실과 의절한 곳이 바로 현 북부 변경백의 가문이었다.

“까마귀들을 보내 주겠다?”

“서부에 숨어 있을지 모르는 흑마법사를 잡는 데 사용하라 하옵니다.”

포돌스키의 말에 귀족들이 놀랐다.

황실의 그림자와 더불어 제국에 몇 없는 최강의 특수 전력이 북부 변경백의 까마귀들이었다.

“……고맙다고 전해 주게.”

“예, 전하. 그리고 또 하나 전해 드릴 것이 있사옵니다.”

포돌스키의 말에 카리엘이 말해 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의 은퇴식에 모든 변경백들이 참여하고자 하옵니다.”

“그건…… 추후 논하도록 합시다.”

카리엘이 그렇게 말하면서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서부에 관한 의제로 말을 돌렸다. 그 덕분에 빠르게 서부에 관한 안건을 끝낼 수 있었다.

***

그렇게 카리엘의 주관하에 이루어진 대전 회의가 끝나자 이에 관한 내용들은 곧바로 수도 전역에 퍼져 나갔다.

많은 이들이 흥분하며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해 격렬한 토론을 이어 나갈 때, 그 이슈를 만든 당사자는 야밤을 틈타 감옥을 찾았다.

“……오셨습니까.”

초췌한 몰골로 일어나 고개를 숙이는 남자.

한때 제국의 재상직에 있었던 무솔리니가 자신을 찾아온 카리엘을 바라보았다.

“저의 처우가 결정되었군요.”

“그래. 일주일 뒤, 그대는 처형당할 것이다.”

“저의 가족들은…….”

“작위는 박탈당할 것이나 지방에 있는 작은 상단 정도는 남겨 주지.”

카리엘의 말에 무솔리니가 눈물을 흘리면서 무릎을 꿇었다.

“그대에게 약속한 대로 서부를 쓸어버릴 것이다. 그대의 가족들에게 뭔가를 할 여유조차 없을 테지. 또한 대륙에서 흑마법사들을 몰아낼 수 있는 기반 정도는 만들 것이다.”

“약속을 지켜 주셔서 감사하옵니다.”

무솔리니의 말에 카리엘이 담담하게 말했다.

“약속한 것을 지키는 것일 뿐.”

볼일은 다 봤다는 듯, 몸을 돌리는 카리엘에게 무솔리니가 다급하게 말했다.

“전하, 드릴 것이 있사옵니다.”

“줄 것이 있다?”

이미 탈탈 털린 무솔리니가 줄 것이 있다는 말에 카리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전 회의 결과를 들었습니다. 도움이 될 것이옵니다.”

무솔리니의 말에 카리엘이 다시 몸을 돌렸다.

“전하께서 아직 잡지 못한 첩자들. 그들의 이름이 정리된 명단이 있사옵니다.”

“명단?”

“남부 연합 출신의 귀족들, 성국이 몰래 꽂아 넣은 북부 귀족, 마지막으로 로만의 끄나풀로 보이는 동부 귀족이옵니다.”

“작은 놈들은 아닐 테지?”

“전부 백작급이옵니다.”

무솔리니의 말에 카리엘이 눈을 찌푸리며 물었다.

“살고자 하는가?”

“아니옵니다.”

카리엘의 말에 단호하게 고개를 젓는 무솔리니.

“소신을 죽여야만 썩은 부위를 도려낼 수 있음을 잘 아옵니다.”

“그럼…… 뭘 바라지? 그대 가문의 복권?”

“그 역시 불가함을 잘 아옵니다.”

무솔리니가 그렇게 말하면서 카리엘을 바라보았다.

“그저 약속을 지키신 것에 대한 보답이라 생각해 주십시오.”

“으음…….”

무솔리니의 말에 카리엘이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거래는 카리엘 입장에선 상당히 찜찜했기 때문이다.

“정 불편하시다면 제국의 영광을 위해서라고 해 두지요.”

빙그레 웃는 무솔리니의 말에 카리엘이 한숨을 쉬었다.

“진즉 그리하지 그랬나.”

카리엘의 말에 무솔리니가 고개를 저었다.

자신의 인생에 후회는 없었다.

그 당시 환경에서는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러도 이런 상황을 만들어 내는 게 불가능했을 것이다.

“지옥에서나마 제국의 영광을 지켜보겠습니다.”

“……당장은 어렵겠지만 시간이 흐른 후에 그대의 명예만큼은 지켜 주지.”

카리엘의 말에 무솔리니는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찜찜한 표정으로 나가는 카리엘을 보던 무솔리니는 타리온에게 자신이 숨겨 둔 비밀 금고의 위치를 알려 주었다.

그리고 얼마 후 카리엘에게 무솔리니가 숨겨 두었던 증거들이 손에 들어왔다.

“……마음에 안 드는군.”

카리엘이 그렇게 말하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에 가려져 부옇게 빛이 퍼지는 달빛은 심란한 카리엘의 마음을 보여 주고 있었다.

***

그렇게 카리엘이 심란해하는 사이 시간은 흘렀고, 마침내 황제파의 처형 날짜가 다가왔다.

제국민들의 분노의 외침 속에서 도리어 웃으면서 ‘제국의 영광이 다시 피어나기를!’이라고 마지막 말을 내뱉은 무솔리니.

웃으며 목이 베인 그를 시작으로 다른 황제파의 귀족들이 하나둘 죽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무솔리니와는 다르게 오줌까지 지리면서 추하게 죽는 이들.

그런 그들의 죽음을 직접 끝까지 지켜본 카리엘은 몸을 돌렸다.

“웃으면서 갔군요.”

환하게 웃으면서 목이 베여 죽은 무솔리니를 생각하며 타리온이 말했다.

추한 귀족들과는 다르게 끝까지 죽음 앞에서 의연했던 무솔리니는 한 파벌의 수장이라 할 만했다.

그러자 공감한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인 카리엘이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약속을 지키러 가야겠지. 준비해라.”

“예.”

카리엘의 말에 타리온은 고개를 숙이면서 답했다.

이제 남은 건 서부를 쓸어버리는 것뿐.

미래의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웃으면서 죽은 무솔리니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최종적으로는 벨푸르스와 잔당을 쓸어버리기 위해서 카리엘은 서부로 움직일 준비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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