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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43화 (43/201)

< 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 >

15. 카리엘의 비장의 수

글렌과 대공가의 기사단 일부가 합류하면서 카리엘과 친위대, 황궁 기사단, 대공가의 기사단으로 이루어진 정예부대가 만들어졌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중앙군의 정예 병력 일부도 카리엘에게 넘겨주었다.

많은 숫자는 아니지만 전원 말을 탄 기마병으로 배치해 주었다. 정예 병력 중에서도 최상위 병력을 추려서 카리엘에게 넘겨준 것이다.

“괜찮겠소?”

카리엘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이렇게 정예 병력을 많이 넘겨주면 벨푸르스와의 전투에서 문제가 될 수도 있었다.

자신이야 믿는 바가 있기에 상관없었지만 이들은 아니었다.

특히 두 황자는 제국의 미래였다.

“이 전력으로도 벨푸르스 정도는 쓸어버리고도 남을 것입니다.”

데이비어 공작의 말에 카리엘이 대공과 두 황자를 바라보았다.

“걱정 마십쇼.”

“저희도 비장의 한 수쯤은 준비해 두었습니다.”

두 황자의 말에 카리엘이 한숨을 쉬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둘이 숨겨 놓은 한 수는 둘째치더라도, 확실히 벨푸르스 하나를 처리하기에는 과할 정도로 많은 전력이기는 했다.

이미 중앙군과 서부군이 포위망을 펼치고 있으니 그 전력까지 합하면 벨푸르스는 무조건 멸문이라 봐야 했다.

“믿겠소.”

데이비어에게 그렇게 말을 남긴 카리엘은 두 황자와도 작별을 고했다.

***

서부에 들어선 이후 갈라지는 토벌군.

서북부로 향하는 황태자군과 벨푸르스로 향하는 토벌군이 서서히 갈라지면서 각자의 목표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긴 행렬이 두 개로 쪼개지면서 각자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자 멀리서 그 장면을 지켜보던 검은 로브를 쓴 남자가 수정구를 들고 말했다.

“예상대로 갈라졌습니다.”

로브를 쓴 남자의 보고에도 검은 수정구에서는 답변이 들려오지는 않았다.

남자도 애초에 답변은 기대하지 않았는지 품속에 수정구를 넣고 빠르게 이동했다.

그런데 그렇게 검은 로브의 남자가 사라지자 멀리서 은신을 풀고 또 하나의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 역시 검은 로브를 입고 있었지만 다른 점이 있다면 로브 안이 온갖 무기들로 가득하다는 점이었다.

“기척이 사라졌습니다.”

“마법이군.”

“그런 것 같습니다.”

검은 로브를 쓴 마법사가 있던 자리를 세심하게 살핀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부하에게 말했다.

“전하께 보고드려라.”

“예.”

남자의 명령에 한 마리의 까마귀를 꺼낸 부하는 급히 뭔가를 적더니 하늘로 날려 보냈다.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던 남자는 부하와 함께 조용히 기척을 죽이며 사라졌다.

***

푸드득!

하늘 높이 날아올랐던 까마귀가 마차에 다가오자 검을 뽑으려던 황궁 기사들을 타리온이 제지했다.

그러자 까마귀가 마차 창문을 콕콕 찍었다.

“걸렸군.”

마차 문을 열고 까마귀에게 먹이를 주며 서신을 확인한 카리엘은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북부에서 파견된 까마귀들이 적의 목덜미를 잡았다.

이제 남은 것은 미끼를 물도록 먹음직스럽게 행동하는 것만 남았다.

“슬슬 몸을 풀어 두시라고 전해라.”

카리엘이 창문을 열고 타리온에게 명하자 그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황궁에 있으면서 서부 원정을 꾸준히 준비해 온 카리엘이지만, 만약의 상황을 대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국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욜로 라이프가 더 중요하기에 안전을 최대한 챙겼다.

당연하게도 준비한 것들은 흑마법사들에게 비수로 다가올 것이다.

우선 황궁 기사단 일부와 카리엘을 보필하는 그림자 출신 시종들, 그리고 친위대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글렌과 대공가의 기사단이 합류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드러난 전력에 불과했고, 흑마법사들이라면 이 정도 전력을 상대할 준비는 해 두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기에 적들에게 한 방 먹이기 위해서는 숨겨진 칼이 필요했다.

“까마귀는 반쯤은 드러난 검이니 의미 없고, 남은 수는 두 개.”

카리엘은 수르트와 황궁 기사로 위장한 남자를 떠올렸다.

자신의 목숨을 지켜 줄 비장의 수.

하나도 쓰지 않으면 좋겠다 싶지만, 상황이 흘러가는 것을 보면 적어도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쓸 것 같았다.

“얼마나 큰 놈이 물려나.”

무는 놈이 클수록 비장의 수는 더 큰 힘을 발휘할 것이다.

긴장감과 기대감이 공존하는 묘한 기분을 느끼면서 마차는 빠르게 서북부로 향했다.

‘어떤 놈이 나를 공격하려는지 궁금하네.’

속으로 그렇게 생각한 카리엘은 전생을 회상했다.

자신이 황제가 되고 일어났던 흐름들.

반란-인접 국가 침공-몬스터 웨이브-인마 전쟁-동대륙 침공.

이 모든 흐름이 어쩌면 이어져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재앙이라고 여겨졌던 몬스터 웨이브가 흑마법사들에 의해 일어난 것이고, 인접 국가와 지방의 반란까지 벨푸르스와 연관되어 있다면 커다란 암중 세력이 제국을 노리고 있다는 뜻이 되었다.

‘전생에선 워낙 박살 난 상황이라 자세히 알 수 없었던 게 커.’

암중 세력을 들춰낼 여력은커녕 제국을 공격해 오는 침입자들을 막는 데 급급했다. 서부에 생긴 해적들과 암상인 연합이 벨푸르스와 연관되어 있다면, 대륙에 있는 암중 세력은 전부 흑마법사와 연관되었을 가능성도 검토해 봐야 했다.

그래도 흑마법사들에 대해 전혀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인마 전쟁을 하면서 알게 된 몇 가지 비밀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현시점에서 그 비밀들은 카리엘에게 큰 무기가 되어 줄 것이다.

“서북부 상황은?”

“몬스터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전투까지 초읽기입니다.”

서북부로 움직이는 동안에도 실시간으로 보고하러 오는 타리온.

그는 고개를 끄덕이는 카리엘에게 물었다.

“서신에 전하께서 따로 명령하실 것이 있는지 묻고 있사옵니다.”

“알아서 지휘하라고 해. 전쟁에 관해선 나한테 보고할 필요도 없다고 전하고.”

“그래도 되겠습니까?”

“전쟁도 모르는 자들이 괜히 끼어들면 지휘 체계만 늘어지고 신속 대응이 힘들어. 각자 알아서 하라고 해.”

전생에서도 숱하게 했던 말들.

바로 그 분야의 전문가들을 존중해 주어야 한다는 말이었다.

위정자는 그 자리에 맡는 자를 앉히고 감시할 뿐, 쓸데없이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게 카리엘의 지론이었다.

“흑마법사에 관한 것만 보고해. 이것도 각자 판단해서 조치하고.”

카리엘이 그렇게 말하면서 전생의 흑마법사들을 생각했다.

영악한 놈들은 꼭 사전 작업을 하고 움직였다.

가장 먼저 혼란을 조장하고 정신을 못 차릴 때, 혼란을 가중시킬 수 있는 인물을 암살시키려 했다.

지금 상황에서 자신이 죽는다면 어떻게 될까?

카리엘의 자질은 둘째로 놓더라도 황태자의 죽음만으로도 제국은 혼란에 빠질 것이다.

그것만으로 흑마법사들의 일차적인 목표는 완수한 셈이다.

‘날 죽이고 동생들까지 죽인다면 ‘그 녀석’이 모습을 드러낼지도 모르겠네.’

카리엘이 그렇게 생각하면서 얌전히 화기를 컨트롤하는 데 집중했다.

통제할 수 있는 화기의 양이 늘어나면 수르트도 성장할 수 있기에 서북부로 움직이는 동안 화기의 통제력을 늘려 갔다.

그러는 동안 서북부와 점점 가까워졌고, 마침내 방어군과 몬스터들이 첫 번째 격돌을 시작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그때부터 황태자의 행렬 역시 상황이 급박해지기 시작했다.

“전하, 이제부터 신속하게 이동해야 할 것 같사옵니다.”

“흑마법사들이 움직였나?”

“언데드 군단은 그대로 있는 듯 보입니다. 다만 검은 안개가 생기면서 일부 흑마법사들이 외부로 빠져나간 듯한 흔적을 발견했다는 까마귀들의 보고가 있었사옵니다.”

사전에 서부로 가서 정찰 중인 까마귀들의 보고가 사실이라면 흑마법사들이 카리엘을 노리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고 봐야 했다.

“역시 언데드군은 미끼였나?”

마치 서북부 방어선의 뒤를 칠 것처럼 해 놓고 진짜는 카리엘을 노리는 것이다.

전형적인 흑마법사들의 수법이었다.

“뒤따라온 감찰부원들 전부 마차 안으로 태워.”

“전하.”

“천천히 이동하면서 얌전히 적들의 의도대로 놀아날 생각이야?”

카리엘의 말에 타리온이 망설이는 표정으로 말했다.

“짐마차에 태우면 되옵니다.”

“저기에 다 태울 수 있을 거라 생각해?”

“그건…….”

“비전투원들은 밖에 있어 봤자 혼란만 생긴다. 가능한 한 내 마차에 태우고 남은 녀석들은 짐마차에 태워서 이동한다.”카리엘의 결정에 타리온은 잠시 마차를 멈추고 감찰부와 같이 따라온 비전투원들을 넓은 카리엘의 마차와 짐마차에 모조리 태웠다.

“소, 송구하옵니다.”

“괜찮다.”

카리엘이 미안해하는 감찰부원들보고 편히 있으라고 한 후 창가 쪽에 앉아서 명령을 내렸다.

“지금부터 최고 속도로 이동해.”

“예.”

카리엘이 출발하라고 명하자 병력은 전보다 훨씬 빠르게 움직이면서 순식간에 서북부의 접경 지역에 돌입했다.

말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을 짐마차와 카리엘의 마차에 태운 덕에 속도가 훨씬 빨라져, 예상보다 더 빠르게 서북부에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이다.

흑마법사들의 예상보다 더 빠르게 움직이는 것으로 큰 혼란을 줄 순 없었지만, 적들이 편하게 노릴 수 없도록 했다.

“흑마력이다!”

황태자군의 이동 경로에 펼쳐져 있는 검은 안개를 본 기사들은 일제히 검을 뽑아 들었다.

정예 병력 역시 특수 처리된 창들을 세웠다.

전원 제한적이지만 마력 각성까지 이룬 병력으로 이루어졌기에 선두에 선 기사단과 바로 뒤쪽의 마차를 보호하는 형태로 대형을 짠 황궁 기사들, 그리고 병력까지 쐐기 형태로 돌파 대형을 이루고 일제히 검은 안개로 돌진했다.

선두에 선 중앙군의 기사단이 마력을 응집시키면서 돌파하자, 뒤이어 대공가의 기사들이 그들을 받쳐 주었다.

마지막으로 황궁 기사들이 마차를 보호하는 형태로 흑마력이 마차에 들어올 수 없도록 완벽하게 차단했다.

두두두두!

말발굽 소리와 함께 검은 안개 지역을 빠르게 돌파할 때였다.

“마법이다!”

선두에 선 기사의 고함과 함께 검은 빛줄기가 황궁 기사들이 만든 마력 결계를 두드렸다.

“멈추지 마라!”

“뚫고 가!”

기사들의 고함과 함께 잠시 멈칫했던 병력이 다시금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번엔 사방에서 마법들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검은 화염부터 하늘에서 떨어지는 뇌전까지.

어떻게든 잠시라도 멈추게 하겠다는 의지가 느껴질 정도로 다양한 마법들이 기사들의 돌진을 막으려 했다.

중앙 지역에서 있었던 습격 사건은 장난이었다는 듯, 엄청난 양의 마법들이 마력 결계를 두드리자 견고한 황궁 기사들의 결계에도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멈추지 않고 돌파하려는 황태자군의 앞에 한 검은 로브의 인영이 나타났다.

동시에 알 수 없는 음성이 들려오더니 기사들의 앞에 거대한 뼈들이 솟아나 벽을 이루었다.

쿠우웅!

거대한 크기를 자랑하는 것치고는 기사단이 자랑하는 돌진 한 번에 박살 나기는 했지만 잠시나마 돌진을 멈춘 것만으로도 효용을 다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황태자군이 잠시 멈칫하는 순간, 기다리고 있었다는 저 멀리서 엄청난 양의 마력이 뭉치더니 빛줄기가 되어 황태자가 탄 마차로 날아들었다.

“마력포다!”

기사의 외침과 함께 황궁 기사가 만든 결계를 직격으로 때리는 마력포의 빛줄기.

흑마법사들이 카리엘을 잡기 위해 만든 한 수에 황궁 기사들의 마력 결계가 깨져 나갔다.

“전하를 보호해라!”

황궁 기사의 외침을 시작으로 사방에서 검은 로브를 쓴 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방금 전까진 장난이었다는 듯, 엄청난 숫자의 흑마법사들이 카리엘을 죽이기 위해 마법을 발현했다.

그리고 바로 그때, 카리엘을 지키기 위해 북부에서 온 까마귀들이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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