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 >
15. 카리엘의 비장의 수 (3)
일인 군단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자들.
그들이 바로 마스터라 불리는 자들이었다.
그리고 오늘, 황태자 병력은 그 말이 맞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괴물이군.”
마스터라는 괴물이 보이는 힘을 다시 한번 목격한 카리엘은 피식 웃었다.
전생에 그랜드 마스터의 위용을 직접 보았던 카리엘이지만 오랜만에 느껴 보는 압도적인 힘에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홀로 무쌍을 찍는 마스터를 보며 새삼 전생에 아켈리오를 잃은 것이 제국에 얼마나 큰 손해였는지 알 수 있었다.
전생엔 데이비어와 아켈리오가 양패구상을 했기에 적들에게만 좋은 꼴을 만들어 주었다.
그 때문에 홀로 제국을 지탱하던 북부의 마스터마저 적들 손에 잃었다.
글렌이 각성해서 홀로 무쌍을 찍으며 적들을 쓸어버렸기에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진즉 제국은 멸망했을 것이다.
‘이번 생에서마저 그럴 수는 없지.’
모든 마스터들이 온전한 상황에서 암중에 숨어 있는 흑마법사들을 들춰냈다.
전생엔 서로 적대하며 검을 겨눴던 데이비어와 아켈리오가 같은 편이 되어 서부에 숨어 있는 적들을 박살 내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이 적들을 섬멸할 적기였다.
“이대로 뚫는다!”
아켈리오가 고함치면서 단신으로 치고 나가자 카리엘을 태운 마차가 기사들과 함께 빠르게 뒤따랐다.
그것을 본 흑마법사 장로가 인상을 찡그렸다.
“상황이 역전되었군.”
타리온이 장로를 보면서 비웃듯 말했다.
어느새 베어 낸 팔 한쪽을 멀리 던져 버린 타리온은 검을 빙글 돌리면서 말했다.
“항복해라.”
잡아 오라는 카리엘의 명을 지키기 위해 항복을 권유하자 장로의 표정이 굳어졌다.
마스터가 나온 시점에서 이 작전은 실패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바로 그때, 상공에서 만들어진 소환진이 붉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것을 알아챈 장로가 입가에 호선을 그리며 말했다.
“끝난 것 같나?”
그러자 타리온이 여유로운 표정으로 가만히 장로를 바라보았다.
그런 타리온을 향해 장로가 마력을 끌어 올렸다.
“쓸데없는 짓을…….”
타리온이 빠르게 검을 휘둘렀다.
심상치 않은 마력의 흐름에 잡아 오라는 카리엘의 명을 어길 각오로 베어 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로의 마력 흐름은 멈추지 않았다.
그러자 다급하게 장로의 심장에 검을 박아 넣는 타리온.
“……늦……었다.”
피를 토하면서도 웃음을 터뜨린 장로가 ‘대계를 위하여!’라고 외치자 남은 흑마법사와 다크 나이트의 흑마력도 폭주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주변을 포위하던 언데드들이 잿빛 가루를 휘날리며 소멸되어 갔다.
카리엘을 습격했던 모든 자들이 희생한 힘들이 허공으로 치솟자 허공에 그려진 소환진에서 검은 회오리가 생성되기 시작했다.
“소환 마법!”
타리온이 다급하게 외치며 황급히 카리엘이 있는 곳으로 복귀했다.
그러자 검은 회오리 속에서 튀어나오는 엄청난 숫자의 악마들.
그들이 인간들이 몰려 있는 곳을 향해 사나운 이빨을 들이밀며 달려들었다.
“악마들이다!”
“막아라!”
악마들의 공격에 병력이 황급히 대형을 유지하며 무기를 휘둘렀다.
모두가 지쳐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력을 다해 무기를 휘두르자 카리엘이 굳은 표정으로 아켈리오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마스터라도 몬스터와 악마 둘 다 막을 수는 없어.’
일인 군단이라 불리는 마스터지만 무적은 아니었다.
몰려오는 몬스터를 홀로 막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무리하고 있는 것이기에 악마는 자신들이 처리해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소환진에 만들어진 검은 모래시계의 크기가 그리 크지 않다는 점이다.
‘쏟아지는 양과 크기를 생각하면 30분 정도인가?’
짧다고 볼 수 있는 시간이지만,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카리엘의 군대에는 긴 시간이었다.
‘버티기 힘들겠군.’
카리엘이 그렇게 생각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차를 지키기 위해서 사력을 다했던 황궁 기사들은 대부분 내상을 입은 상태였고, 중앙군과 병력 역시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다.
거기다 가장 큰 문제는 모두 지쳐 있다는 점이었다.
까마귀와 그림자 들조차 지친 것이 표정에서 드러날 정도이니 말을 다 한 셈이다.
그나마 쌩쌩한 대공가의 기사단과 친위대가 앞으로 나섰지만 이들만으로는 악마들을 막기에 역부족이었다.
‘그나마 사망자는 많지 않다는 점인데…….’
다행스럽게도 사망자는 많지 않았지만 너무 지쳐 있었다.
최소한의 숨을 돌릴 시간이 필요했다.
-이제 내가 나설 차례인가?
수르트의 말에 카리엘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큰 거 한 방이란 게 정확히 뭔지는 알 수 없지만 병력이 잠깐이라도 숨을 돌릴 시간을 벌 수 있다면 그걸로 족했다.
“전하!”
“위험하옵니다!”
마차 문을 열고 내리는 카리엘을, 같이 타고 있던 감찰관들이 황급히 만류하려 했다.
하지만 카리엘은 그런 그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마차에서 내려 앞으로 걸어 나갔다.
“전하, 위험하옵니다!”
근방에서 악마들을 죽여 나가던 타리온이 카리엘을 보며 외쳤다.
그런 그에게 카리엘이 물었다.
“1분이라도 쉴 수 있다면 의미가 있을까?”
일부러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말하며 주변을 둘러보자 황궁 기사들과 타리온이 하늘에서 날아드는 악마와 싸우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숨 좀 돌릴 시간이 있다면 회복 포션을 마시면서 컨디션을 회복할 수 있다.
일반 병력은 몰라도 기사급 이상이라면 충분히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모두의 확인을 받은 카리엘이 옆에 떠 있는 수르트에게 말했다.
“보여 줘.”
-그래.
카리엘의 말에 수르트가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위험하니까 앞에 있는 놈들 물러나라고 해.
수르트의 말에 카리엘이 앞에서 막고 있는 기사단에게 뒤로 물러나라고 명령했다.
그러자 의문에 찬 표정을 지으면서도 이번에도 카리엘이 숨겨 둔 한 수가 있으리라 판단하며 뒤로 물러났다.
바로 그 순간 수르트가 말했다.
-버텨라.
수르트의 경고와 함께 카리엘의 몸에서 화기가 솟구치기 시작했다.
그 순간 화염으로 이루어진 팔이 앞으로 뻗어 나가면서 몰려오는 악마들을 태워 버렸다.
허공에서 만들어진 화염 덩어리에서 뻗어 나온 불로 이루어진 팔이 빗자루 쓸듯 쓸어버리자 불에 닿은 모든 악마들이 재가 되어 흩어졌다.
그러자 작은 악마들론 안 되겠는지 검은 회오리를 뚫고 처음에 모습을 보였던 거대한 악마들이 튀어나왔다.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 또 하나의 팔이 튀어나오면서 양손으로 거대한 악마들을 막아 냈다.
거대한 두 개의 팔에 가로막혀 전진하지 못하는 거대한 악마들.
그 악마들 역시 신체 일부가 녹아내리기 시작하면서 완벽하게 소멸되어 버렸다.
고작 1분.
하지만 마치 마스터처럼 압도적인 위용을 보인 거대한 두 개의 팔은 몰려드는 악마들을 모조리 불태웠다.
마치 이 뒤로 가는 것은 조금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단단하게 막고 있는 거대한 두 팔.
그것을 보며 기사들은 황급히 회복을 위해 마력을 운용하고 포션을 마셨다.
카리엘이 벌어 준 소중한 시간을 헛되이 보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아주 잠깐이지만 숨을 가다듬고 내상을 치유할 시간을 번 기사들은 다시금 전열을 가다듬었다.
“큽!”
귀중한 휴식 시간을 준 카리엘은 몸 안을 활개 치는 화기를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그러자 악마들을 불태웠던 두 개의 팔과 화염 덩어리도 동시에 사라져 버렸다.
-수고했다.
카리엘의 귓가에 수르트의 음성이 흘러가듯 들려왔고, 그와 동시에 온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전하!”
“호……들갑 떨……지…… 마.”
타리온의 품에 안긴 카리엘이 숨을 헐떡이면서 말했다.
“가서 막……아.”
카리엘의 말에 타리온은 고개를 한번 숙이고는 황급히 마차로 데려갔다.
“전하를 부탁하오.”
타리온의 말에 마차 안에 있던 자들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황급히 포션을 꺼내 카리엘의 입안에 부어 주었다.
그것을 확인한 타리온은 검을 쥐고선 몰려드는 악마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미친 듯이 몰려들던 악마들을 한순간에 태워 버렸기 때문일까?
처음보다는 많지 않은 숫자의 악마들이 검은 회오리를 통해 나타났고, 아주 잠깐의 휴식을 취한 기사들은 굳건히 악마들의 공세를 막아 낼 수 있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악마들을 막아서는 데 선두에 선 것은 분노에 찬 타리온도, 친위대도 아니었다.
“천재군.”
타리온이 선두에서 악마들을 찢어발기는 글렌을 바라보았다.
가장 어린 대공가의 소가주.
그가 검을 휘두르며 악마들을 찢어발기고 있었다.
목숨을 건 실전 때문일까?
아니면 처음 겪는 대규모 전투여서 그런 것일까?
무엇이 되었든, 글렌은 전투 중에도 성장하면서 초대 대공의 무서를 통해 적립한 검술의 정수를 보여 주고 있었다.
“모두 전하의 희생을 헛되이 하지 마라!”
타리온의 외침에 기사들을 비롯한 병력이 무기를 꽉 쥐고 몰려오는 악마들을 맞이했다.
사력을 다해 막은 덕분일까?
검은 회오리가 점차 약해지면서 소환진에서 나오는 악마들의 숫자가 줄어들었다.
악마들의 숫자가 줄어들수록 수월하게 막아 냈고, 마침내 검은 모래시계가 사라지며 소환진 역시 소멸되어 버렸다.
“전하!”
“전……투는?”
카리엘이 숨을 헐떡이면서 묻자 타리온이 다급히 말했다.
“전투는 끝났습니다. 그보다 몸은…….”
“버틸 만해.”
카리엘은 그렇게 말했지만 타리온은 믿지 않고 친위대를 불렀다.
브리온이 황급히 마차 안으로 들어가 카리엘의 몸을 살폈다.
“화기만 가라앉히면 될 것 같습니다.”
브리온의 말에 아르슈나가 안으로 들어가 화기를 가라앉힐 수 있도록 도왔다.
그렇게 친위대가 카리엘의 몸을 살피는 동안 홀로 몬스터를 막아 냈던 아켈리오가 겁에 질려 물러나는 몬스터들을 쫓지 않고 카리엘이 있는 마차로 달려왔다.
“전하께선 괜찮으시오?”
아켈리오의 물음에 타리온은 고개를 저었다.
“심각하오?”
“잘 모르겠습니다.”
타리온의 대답에 아켈리오가 한숨을 쉬며 마차를 바라보았다.
모두가 걱정 어린 표정으로 마차를 초조하게 바라볼 때, 브리온이 밖으로 나와서 아켈리오와 타리온을 불렀다.
“전하, 몸은 괜찮으시옵니까?”
“……버틸 만해. 그보다 지금 당장 서북부 방어선으로 움직여.”
“그 몸으론 위험하시옵니다.”
타리온의 말에 카리엘이 그의 눈을 응시하며 바라보았다.
“서북부에 반역자들이 있다.”
카리엘의 말에 타리온의 입이 다물렸다.
“그것이 아니고선 몬스터들이 여기에 나타난 게 설명이 안 돼.”
“…….”
카리엘의 말에 입을 다물고 침묵하는 타리온.
“출발해.”
“전하께서 가시지 않아도…….”
“내가 가야 수월하게 풀린다. 폐하께 전권을 받은 내가 직접 반역자들을 처리해야 잡음이 없어.”
카리엘이 그렇게 말하며 아켈리오를 바라보았다.
“방어선의 방어를 부탁드리오.”
“맡겨 주십시오.”
아켈리오의 대답에 카리엘이 그제야 마음이 놓인다는 듯 웃으면서 타리온을 바라보았다.
“……믿는다.”
그 말을 끝으로 결국 정신을 잃은 카리엘.
타리온이 황급히 브리온을 바라보자 그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 말했다.
“기절하셨을 뿐입니다.”
“후…….”
다행이라는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타리온.
그런 그를 향해 아켈리오가 말했다.
“전하의 뜻에 따라야 하지 않겠소?”
아켈리오의 말에 잠시 카리엘을 바라보던 타리온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전하의 명을 어찌 거역하겠습니까?”
타리온이 자조 섞인 미소로 말하자 아켈리오가 타리온의 어깨를 두드려 주고는 서북부의 방어선을 향해 움직일 준비를 하라고 명했다.
모두가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으며, 가장 중요한 카리엘이 큰 부상을 입고 말았다.
황태자군 모두가 카리엘의 희생을 바로 뒤에서 지켜보았다.
그렇기에 사태를 여기까지 오게 만든 배신자들에 대한 분노가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배신자들을 처단하러 가자.”
아켈리오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숙이며 서북부 방어선을 향해 행군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