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 >
17. 화산에서의 혈전
화산이 본격적으로 폭발하려는 조짐을 보이자 서북부의 모든 병력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스터를 중심으로 방어선 대부분의 병력이 중앙으로 모였다.
그리고 그 뒤에는 카리엘이 있었다.
“전하, 꼭 가셔야 하겠습니까?”
타리온의 말에 다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카리엘을 바라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빈약한 카리엘이 숲속에서 버틸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겉으로 보기에는 충분히 그럴 만했다.
강체술을 훈련해도 신기하게도 근육이 잘 붙지 않았다.
그래서 겉으로는 마른 체형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은근히 꽉 찬 근육이 자리하고 있었다.
적어도 카리엘이 생각하기에는 그러했다.
그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그는 마차도 아닌 말에 직접 올라탔다.
숲속으로 가는데 마차를 끌고 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전하, 다 끝나고 오시지요.”
황궁 기사단장 아켈리오조차 그리 말하자 카리엘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수르트.”
카리엘의 부름에 모두의 눈에 보일 만한 불덩이 하나가 나타났다.
그러자 그것을 본 아켈리오가 흥미로운 표정으로 물었다.
“그때의 그것이옵니까?”
“그렇소.”
“혹시 이번 화산 폭발에도…….”
“그럴 거라 짐작하고 있소. 내가 직접 가서 확인하는 게 좋을 것 같소.”
카리엘의 말에 잠시 입을 다문 채 고민에 빠진 아켈리오.
옆에서 타리온이 화산까지 직접 오르는 건 절대 안 된다고 칭얼거렸지만 카리엘의 눈은 아켈리오에게만 향해 있었다.
“후, 전하의 뜻이 이리 강경하시니 소신이 어찌 막겠습니까. 화산까지 모시겠습니다.”
“고맙소.”
아켈리오가 고개를 숙이며 말하자 타리온은 눈을 질끈 감았다.
“전하…….”
“나도 가기 싫어.”
카리엘의 말에 타리온은 ‘그럼 안 가면 되는 거 아닙니까?’라고 묻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타리온을 바라보는 두 눈동자가 어느 때보다 진지했기 때문이다.
처음엔 황궁 기사와 자신을 이용하기 위해 직접 움직이는 것이라 생각했지만 타리온이 모르는 비밀이 있는 게 분명했다.
‘갑자기 몸이 회복되시기 시작한 것과 연관이 있는 걸까?’
타리온은 그렇게 고민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은퇴하겠다는 것도, 몸이 회복되는 것도 누군가와의 계약 때문인 건 아닐지. 어쩌면 악마와 계약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타리온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가 더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자신이 아는 어떤 이보다도 똑똑한 카리엘이 위험을 감수하고 움직였다면 이유가 있을 터.
그의 시종장으로서 뒤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전하!”
성문 앞에 집결한 병력 앞에서 말에 올라탄 카리엘에게 까마귀가 황급히 한 장의 서신을 가져왔다.
“황궁에서 왔나?”
“아닙니다. 북부에서 왔습니다.”
“북부?”
까마귀의 말에 카리엘이 놀란 눈으로 검은 서신을 황급히 꺼냈다.
「전하의 원정에 북부군도 합류하겠습니다.
-베르시오 델 시키라오 변경백-」
짧게 적힌 서신은 무례해 보일 수 있었으나 다급하게 느껴질 정도로 빠르게 적은 것이 느껴졌기에 탓할 수 없었다.
“……북부군이 온다고?”
카리엘의 중얼거림을 들은 아켈리오가 황급히 다가와 물었다.
“변경백이 오는 것입니까?”
“그렇소.”
아켈리오의 말에 카리엘이 이해하기 어렵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잠시 출정을 미뤄도 되겠소?”
“전하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아켈리오의 말에 옆에 있던 군단장과 다른 지휘관들 역시 고개를 숙이며 그러라고 답했다.
그러자 카리엘이 황급히 통신장교에게 중앙으로 연락하라고 했다.
북부 변경백이 이곳으로 합류한다?
그것이 단순히 흑마법사를 처단하기 위함은 아닐 것이라는 걸 잘 알았다.
홀로 영악한 교황이 이끄는 성국군을 막아 냈던 북부 변경백이다.
그런 그가 이곳으로 지원군을 이끌고 올 정도라면 분명 북부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다.
“나 황태자다.”
-헉! 저, 전하!
카리엘의 말에 통신구에서 잡음이 들리더니 누군가가 황급히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바로 외무대신이었다.
-전하, 안 그래도 서신을 작성하고……!
“마법 통신부터 했어야지!”
-사안이 엄중해 서신으로……!
감청당할 수 있어서 서신으로 작성하는 중이라고 외무대신은 나름대로 변명해 봤지만 카리엘의 화만 돋울 뿐이었다.
“그보다 왜 외무대신이 받지? 군부나 정보부는 뭐 하고?”
-그것이…… 성국과 관련된 일이옵니다.
“성국이?”
-그렇습니다. 서북부의 일은 대륙 모두의 일이라며 제국의 지원 요청을 받아들이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숫자가 심상치 않사옵니다.
외무대신의 말에 카리엘의 표정이 굳어졌다.
“성국의 마스터가 포함된 전력인가?”
-……그렇습니다.
카리엘의 물음에 외무대신이 무거운 음성으로 답했다.
“제국을 치려고 한다라……. 그럼 더 이상하군. 군부대신이 받아야 하는 거 아닌가?”
-그것이 애매하옵니다.
“애매하다?”
카리엘의 물음에 외무대신이 목을 가다듬고 차분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맨 처음 북부 변경백을 통해 중앙으로 연락된 성국은 서북부에 지원해 달라는 요청을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물론 그것을 듣자마자 북부 변경백은 수상하다며 곧바로 전 병력을 전투 대비 태세로 전환했다.
그런데 그다음이 더 수상했다.
성국의 1차 지원 병력이 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대규모 2차 병력이 움직인 것이다.
-2차 병력이 움직일 때도 공식적으로 통신했습니다.
“2차 병력이라…….”
외무대신의 자세한 설명을 들으며 카리엘의 고심은 깊어졌다.
“여우가 제국의 빈틈을 노리려는 수작질이거나, 성국에 변고가 생겼다는 것인데…….”
전생에 숱하게 당해 온 경험을 바탕으로 볼 때, 성국의 늙은 여우가 수를 썼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으나 흘러가는 정황을 보면 성국에 변고가 생겼을 확률이 높았다.
1차로 보낸 지원 병력 숫자도 심상치 않았지만, 진짜는 2차 지원 병력이다.
마치 1차로 보낸 병력을 따라잡으려는 듯 맹렬한 속도로 추격하고 있었고, 무엇보다 성국의 핵심 전력 대부분이 2차 지원 병력에 포함되어 있었다.
“2차 지원 병력에 이단 심문관이 포함되어 있었나?”
-……그것까진 알 수 없었사옵니다. 북부 변경백도 그걸 의심하며 알아보려 했으나,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어 북부군을 움직이는 듯합니다.
“정보부는?”
-현재 성국에 잠입한 첩자들을 통해 알아보는 중이라 하옵니다. 하오나 시간이 좀 걸릴 듯싶습니다.
외무대신의 말에 카리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급변한 사태에도 나름 일 처리가 깔끔했다.
‘역시 한번 청소하길 잘했군.’
카리엘은 그렇게 생각하며 북부 변경백에 대해 물었다.
“북부 변경백의 지원군 규모는 알고 있나?”
-군부대신 말로는 최소한의 방어 병력을 제외한 전 병력을 직접 끌고 올 것이라 하옵니다.
“직접? 그보다 군부대신?”
-방금 전까지 대전 회의 중이었사옵니다, 전하.
급변한 사태 때문에 황제가 직접 주관하는 대전 회의가 열린 듯싶었다.
‘북부 변경백은 여전히 망설임 없이 칼같이 결정하는군.’
카리엘이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북부 변경백의 강점은 바로 이러한 것이었다.
망설일 만한 상황에서도 결정을 칼같이 내리고 움직였다.
그로 인해 피해를 입은 적도 있건만, 상관없다는 듯 빠르게 결정을 내리고 최대한 좋은 성과를 내기 위해 노력하는 변경백.
그것이 바로 북부 변경백이었다.
“후, 시간 없으니 짧게 말한다.”
-예, 전하.
“대신들도 눈치챘겠지만 성국의 상황이 좀 이상해.”
카리엘이 그렇게 말하면서 짧게 생각을 정리했다.
“일단 성국까지는 북부군과 함께하면 어떻게든 처리될 거야. 그런데 아이론은 아니야.”
-……아이론 말씀입니까?
카리엘의 말에 외무대신의 음성이 무거워졌다.
지금 카리엘이 무슨 말을 하는지 단번에 알아들은 듯싶었다.
성국의 지금 상황이 흑마법사에 의해 일어난 일이라면 아이론이라고 그러지 말라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서부 변경백 혼자 아이론을 막기는 어려울 거야.”
-벨푸르스 토벌군에게 연락하겠습니다.
단번에 알아들은 외무대신이 황급히 뭔가를 적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고 나서 할 일은?”
-아이론 연맹에 공식적으로 서북부에 지원해 달라고 서한을 보내겠습니다.
“그걸로 부족해.”
-예? 그럼…….
“협박해야지.”
카리엘의 말에 외무대신이 기함을 토했다.
외무부의 특성상 같은 말을 해도 돌려서 말하거나 외교적 수사로 부드럽게 말하고는 했다.
하지만 이번 사안은 좀 과격하게 나갈 필요가 있었다.
“이제 선택할 때가 되었다고 해.”
-과격한 언어로 말이옵니까?
“그래, 자네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과격한 언어로 협박해.”
-……그리하겠습니다.
외무대신의 힘없는 말에 카리엘이 한숨을 푹 쉬었으나 어쩔 수 없었다.
“협박할 근거는 충분하지?”
-예. 성국에서 의심되는 정황을 통해 아이론 역시 흑마법사와 엮어 보겠습니다.
“좋아. 다음 계획도 있나?”
-예. 남부와 동부 공국에도 서신을 전해 두겠습니다.
외무대신의 말에 카리엘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성국을 흑마법사에 휘둘리는 쓰레기로 만드는 것이지만 상관없었다.
공식적인 루트로 말한 것도 아니기에 그들이 항의할 명분이 없었고, 무엇보다 성국에게 제국의 정보력이 이 정도는 된다고 경고하는 의미도 있었다.
“후…….”
“일은 끝나신 것이옵니까?”
아켈리오의 물음에 카리엘이 한숨을 쉬면서 설명했다.
“그렇소. 북부군이 서북부에 오기로 한 것은 사실인 듯하오. 문제는…… 일이 좀 복잡해졌소.”
“복잡하다 하오시면……?”
“성국이 오고 있소.”
카리엘의 말에 아켈리오와 주변에 있는 지휘관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흑마법사들을 잡기 위해 나선 것처럼 보이지만 카리엘의 표정을 보면 그게 아닌 듯싶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들을 향해 카리엘은 자신의 생각을 들려주었다.
근거가 될 정보가 턱없이 부족해서 전부 카리엘의 추론에 불과했지만 그럴듯했다.
전생의 경험을 바탕으로 현재의 정보들을 잘 섞어 설명해 주자 모두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북부군이 올 때까지 기다리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니요.”
카리엘이 보기에 성국의 지원군이 오는 것은 눈속임일 가능성이 높았다.
아직 이들은 흑마법사들을 많이 겪어 보지 않아 모르지만, 카리엘은 잘 알았다.
여우 같은 놈들이 ‘진짜’를 숨기기 위해 황당한 방법으로 현혹시키는 것을 몇 번이나 겪었던 카리엘이기에 반쯤 확신하고 있었다.
‘이놈들은 지금 시간을 벌기 위해 수를 쓰고 있는 거다.’
그렇게 생각을 마친 카리엘이 아켈리오에게 말했다.
“숲 앞쪽까지 움직여 봅시다. 그때도 반응이 없으면 그곳에 전선을 만들고 기다려도 늦지 않을 것 같소.”
카리엘의 말에 잠시 고민하던 아켈리오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군단장, 숲 앞쪽에 전선을 구축해도 몬스터들을 막을 수 있겠나?”
“예, 이 전력이라면 불가능도 가능하게 할 수 있습니다.”
“좋다. 믿어 보지.”
카리엘이 그렇게 말하면서 서북부 군단장에게 말했다.
“지금부터 모든 군 지휘권을 그대에게 주지. 몬스터들을 뚫고 숲까지 우리를 안내하도록.”
“명을 받듭니다!”
카리엘의 명령에 군단장이 한쪽 무릎을 꿇고 명을 받았다.
그런 그에게 카리엘이 다시 입을 열었다.
“시간이 생명이야.”
“예!”
카리엘의 명을 받은 군단장이 황급히 말에 올라탔고, 모든 이들이 출정을 위한 전열을 가다듬었다.
그러자 성문이 열리면서 저 멀리 몬스터들이 득시글거리는 숲이 보였다.
뿌우우우!
“몬스터들입니다!”
“소신이 뚫겠습니다.”
성벽 위에서 외치는 병사의 말에 아켈리오가 단기로 먼저 성문 밖으로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