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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52화 (52/201)

< 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 >

18. 동생들에게 주는 선물

제국의 황태자가 직접 마스터 셋을 이끌고 남부로 오고 있다.

이 사실만으로도 다리가 떨릴 정도인데, 심지어 황태자군은 중앙군 정예 기사단, 대공가 기사단, 친위대, 그림자, 까마귀 등이 포함된 병력이었다.

남부 연합군도 7개 군단이 있었으나, 남부 변경백이 직접 4개 군단을 이끌고 압박해 오고 있었고, 동부군에서 2개 군단이 추가적으로 카푸르 화산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그러니 남부 연합군 입장에선 부담될 수밖에 없었다.

잘못하면 대규모 전쟁이 발발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싸우면 승산은 있겠소?”

“……어렵습니다.”

남부 연합군을 직접 이끌고 온 클레타 공작의 말에 옆에 있던 부관이 고개를 저었다.

마스터 숫자에도 차이가 났지만 제국에는 서대륙 최강으로 불리는 시카리오 후작이 있다.

거기다가 황태자가 이끌고 오는 병력은 남부 연합군의 정예 기사보다 실력이 뛰어났다.

“물러나야 한다는 뜻인가?”

마스터인 클레타 공작이 자존심 상한다는 듯 입술을 깨물며 물었지만, 옆에 있던 부관은 그것도 어렵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우리가 남부 변경백을 뚫기 전에 황태자군이 당도할 것입니다.”

“그럼 어쩌라는 것인가? 여기에서 가만히 죽치고 앉아 있다가 저들이 오면 고개라도 숙이라는 건가?”

분노가 담긴 클레타의 말에 부관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사실 그도 할 말이 많았다.

지금 자신들을 남부로 돌아가지 못하게 하는 자는 그 유명한 제국의 남부 변경백이었다.

부족한 병력으로 남부 연합 전체를 견제하고 마스터가 포함된 전력도 방어해 낸 명장.

거기다 제국의 동부군이 2개 군단을 이끌고 자신들의 뒤를 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남부로 돌아간다고 설치면 필히 패할 수밖에 없었다.

“후…… 미치겠군. 상황이 어쩌다 이리된 것이지?”

탈로스의 제1검인 클레타 공작이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욕설을 내뱉었다.

분명 탈로스의 정보부가 파악하기로는 서북부의 일이 해결될 때까지 상당히 많은 시간이 남아 있다고 했다.

설령 해결된다고 하더라도 남동부까지 관여하는 데에 시간이 걸릴 거라고 했다.

그런데 자신들이 독 안에 든 쥐새끼 꼴이 된 것이다.

막막한 건 로테온도 마찬가지였다.

로테온의 유일한 마스터인 피레스 공작이 한숨을 쉬었다.

“망했군.”

-제국에 뜯길 일만 남았습니다.

통신구 속에서 로테온의 거상이자 재상인 윌싱엄 후작이 허탈한 듯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서대륙의 무역왕이라 불리는 윌싱엄이지만 지금 상황을 보면 앞으로 할 제국과의 외교가 막막하기만 했다.

“줄 건 주면서 최소한으로 막아 보게.”

-그렇게 하면 우리 왕국의 보물 창고를 털어 줘야 할 겁니다.

“……그 정도인가?”

-로테온에서 제국의 귀족들을 안 털어먹은 놈들을 찾는 게 더 빠를 겁니다.

“망했군.”

피레스는 윌싱엄이 어째서 이런 극단적인 방법까지 동원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냥 제국으로 불려갔다간 망할 것 같으니 뭐라도 쥐고 협상하려 한 것이다.

하지만 결국은 실패했고, 이제 로테온은 곳간에 숨어든 쥐새끼까지 찾아서 바쳐야 할 판이었다.

* * *

한편 남부 연합군에게 이러한 사태를 만든 원흉은 오랜만에 마차를 타고 천천히 남동부를 향해 오고 있었다.

“안 움직이고 있다고?”

-예.

“쫄았나 보네?”

-그런 것 같아요.

마차 안에서 통신구에 들리는 음성을 듣고 웃음을 흘리는 카리엘.

그런 카리엘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세리엘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과 루피엘을 수도로 보내서 대륙 회의를 준비하게끔 한 카리엘은 선물이라면서 제국의 남동부에 침공한 남부 연합군을 압박했다.

처음에 세 명의 마스터를 대동하고 남동부로 간다고 했을 때만 하더라도 형님이 또 미친 짓을 벌이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자신도 경험을 쌓으면 저런 식으로 머리를 굴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다음 날, 직접 연락이 왔을 땐 기함을 토할 수밖에 없었다.

-야, 남부 변경백에게 카푸르 화산으로 압박하라고 해.

처음 이 말을 들은 세리엘은 남부 국경선이 위험하다고 안 된다고 하려고 했다.

자칫 잘못하면 제국군이 남부에서 올라오는 추가적인 병력에 앞뒤로 둘러싸여 발목이 잡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카리엘은 간단하게 해결책을 내놨다.

서부군을 남쪽으로 이동시키고, 동부군 일부를 빼서 카푸르 화산으로 움직이게끔 했다.

물론 여기까지도 ‘나도 생각할 수 있지.’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전략이 나온 배경을 생각하면 그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흑마법사에게 손해를 본 아이론 연맹과 성국의 입장을 이용해 조직된, 세 명의 마스터를 포함한 황태자군.

마찬가지로 아이론 연맹의 입장을 이용해 남부군을 압박해 추가 병력이 못 올라오게끔 견제하는 서부군.

마지막으로 남부 연합군이 카푸르 화산을 먹으면서 자신들을 압박하는 그림을 싫어하는 동부군의 입장을 이용해 움직이는 동부군.

이 모든 것은 카리엘이 미리 짜 놓은 판에 따라 제국의 외무부가 사전에 세 나라에 얘기해 두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세리엘이 흑마법사들이 나타난 것을 명분 삼아 대륙 회의를 개최하게끔 하는 것도 수월해졌다.

당연히 회의를 주관하게 될 내무부 역시 한결 편해질 수밖에 없었다.

“형님의 은퇴 선물이다.”

-……감사합니다.

세리엘의 감사 인사에 카리엘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륙 회의를 주관할 두 동생들에게 큰 선물을 안겨다 준 카리엘은 이제야 마음 편히 움직일 수 있었다.

사실상 그가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일이 끝났다.

남은 것은 화산 폭발을 저지하는 것인데, 그것은 그리 급하지 않았다.

“이제 좀 여유롭게 움직일 수 있겠네.”

카리엘이 중얼거리며 창턱에 턱을 괴고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남부 연합군이 허튼짓을 하지 못하도록 포위망을 만들어 놨으니, 후에 있을 대륙 회의에서 타국이 제국에 한마디라도 하고 싶다면 화산 폭발을 일으키려는 흑마법사들이라도 잡아다 바쳐야 했다.

그렇기에 황태자군은 서북부에 갈 때처럼 다급하게 갈 필요 없이 느긋하게 움직이면 되었다.

남부 연합군이 열심히 싸워서 밥상을 다 차려 주면 가서 떠먹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이렇게까지 상황을 만들어 놨으니 여행하듯 여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고생하셨습니다.”

타리온의 고생했다는 말에 카리엘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처럼 정말 개고생하기는 했다.

그럼에도 웃을 수 있는 것은 은퇴가 머지않았기 때문이다.

그토록 원하던 은퇴가 코앞으로 다가왔는데 지금의 고생쯤이야 웃으면서 넘길 수 있는 것이다.

“후! 이제 다 끝이다!”

카리엘이 후련하다는 듯 두 손을 번쩍 들면서 외쳤다.

그 소리를 마차 밖에서 들은 글렌이 옆에서 말을 타고 가던 아켈리오에게 말했다.

“황태자 전하는 정말 대단하시군요.”

“대단하신 분이지.”

아켈리오가 마차를 바라보며 말했다.

현 황제를 모시고 있고, 젊을 때는 전대 황제도 잠깐이나마 모셔 봤지만 비교가 안 되었다.

그 당시 재능 있다는 황자들을 다 끌어모아도 카리엘이 이룬 업적을 이루려면 엄청난 시간이 소요될 것이다.

“저런 분이 황좌에 오르신다면 좋겠지만…….”

아켈리오가 말끝을 흐리면서 데이비어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데이비어도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3황자를 지지하는 그였지만, 황태자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공감하고 있었다.

시카리오 후작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실 카리엘이 원하기만 한다면 황궁 기사단장인 아켈리오와 함께 지지해 줄 생각도 하고 있었다.

문제는 당사자가 그걸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서북부의 화산 폭발을 막고 내려올 때 넌지시 제안했었다.

“전하, 원하신다면 소신이 태자 전하를 지지하겠습니다.”

“소신 역시 중립을 깨고 전하를 지지할 용의가 있습니다.”

두 마스터의 제안.

그런데 카리엘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은퇴할 것이니 초치지 마시오.”

카리엘의 두 눈에 담긴 단호함.

은퇴를 향한 그의 집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은 활활 타오를 것 같은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은퇴하기 전까지 괜한 짓 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시오. 알겠소?”

몇 번이나 두 마스터에 당부하는 카리엘.

그런 그를 보면서 지지 선언을 하려 했던 두 마스터는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카리엘이 하는 행동을 보면 자꾸만 욕심이 났다.

사카리오 후작이 보기에 카리엘의 머리라면 성국을 이끄는 늙은 여우에게 한 방 먹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켈리오 후작은 바닥까지 떨어졌던 황권을 다시 세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당사자가 거절한다.

물론 카리엘의 두 동생들도 딱히 떨어지는 재능은 아니었다.

황실 역사를 따져 봐도 상위권에 드는 재능이었지만 카리엘의 재능이 너무 사기적이었다.

“……아쉽군.”

“저리 좋아하시는데…… 어쩔 수 없지 않겠소?”

아쉬워하는 시카리오 후작을 보면서 아켈리오가 말했다.

그러자 근방에 있던 이들이 다들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제국민들이라면 카리엘이 은퇴에 진심이라는 것쯤은 다들 알고 있었다.

지방에 있던 귀족들이야 의심하는 자들이 있었고, 시카리오 후작 역시 그런 이들 중 하나였지만 이곳에 오고 나니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은퇴에 진심이시군. 재능 역시…… 소문대로야. 아니, 과소평가된 건가?’

은퇴하고자 하는 마음, 그리고 카리엘의 재능은 소문보다 더 대단했다.

현재 카리엘에 대한 소문은 나이치고 뛰어난 정도였다.

하지만 수도의 사람들은, 카리엘이 제국 역사에 몇 없는 엄청난 재능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나이치고 비상한 머리라는 소문부터가 잘못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십 대의 나이에 이미 완숙한 정치적 수완을 가지고 있었고, 수십 년을 정치판에서 살아야만 얻을 수 있는 노련함을 겸비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흐름을 파악하며 대처하는 능력과 부하들을 부릴 줄 아는 능력이 굉장히 뛰어났다.

위정자가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재능을 갖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화산에서 목격한 카리엘의 능력까지 본 시카리오의 평가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갔다. 그는 카리엘의 재능이 제국 역대 황제들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저런 재능을 가진 이가 벌써 은퇴할 생각이라…….’

배가 아팠다.

누구는 수십 년간 성국을 견제하면서 골머리를 싸매고 있는데, 누구는 십 대의 나이에 은퇴 각을 잡고 있다.

마스터는 죽을 때까지 은퇴와 연을 끊고 살아야 한다.

그런데 카리엘은 황족으로 태어났으면서 십 대에 은퇴 각을 잡고 있으니 배가 아플 수밖에 없는 것이다.

종신 노예와 십 대에 은퇴하는 황자.

여기까지 생각한 순간 시카리오의 표정이 구겨졌다.

항상 냉정한 얼굴로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던 후작조차 표정이 구겨질 수밖에 없을 정도로 배가 아팠다.

그 순간 아켈리오와 눈이 마주쳤다.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두 마스터 간에 눈빛이 교환되었다.

바로 그때, 데이비어 공작이 두 마스터들을 묘하게 바라보았다.

‘당신도?’

‘이대로 보내기엔 아쉽소.’

‘확실히…… 십 대에 은퇴라니…… 선 넘는 것 같소. 젊을 땐 사서 고생도 한다는데…….’

세 명의 마스터가 묘한 눈빛으로 카리엘이 탄 마차를 바라보았다.

이미 사전에 자신의 은퇴까지 활용할 방안을 생각해 둔 카리엘이기에 은퇴 자체를 막을 수는 없었다.

두 마스터야 카리엘을 지지할 생각을 갖고 있다지만 데이비어는 의외였다.

하지만 그 역시 카리엘이라는 유능한 인재를 이대로 보내 버리기엔 너무 아까웠다.

그가 보기에 두 황자가 제 몫을 다할 수 있게 되는 최소 나이가 스무 살이었다.

사실 그것도 너무 빨랐다.

그렇기에 카리엘을 좀 더 제국에 붙잡아 두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은연중에 확인한 월크셔 공작의 마음 역시 그러했다.

제국 유일의 마도사가 될 가능성이 높은 월크셔 공작.

세 명의 마스터.

거기다가 차기 대공가의 가주이자 마스터가 될 가능성이 높은 글렌까지 카리엘을 지지하는 상황.

심상치 않은 표정으로 눈빛 교환을 하는 마스터들을 보던 토토가 마차를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외쳤다.

‘전하! 지금 기뻐하실 때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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