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 >
18. 동생들에게 주는 선물 (2)
제국의 종신 노예들이 작당모의를 하는 동안 카리엘은 마음 편하게 마차에 타서 남동부로 이동했다.
그러는 동안 남부 연합군 역시 카리엘의 예상대로 움직였다.
가장 먼저 남부 연합군이 화산에 숨어든 흑마법사들을 상대로 전투를 시작했다.
그들에게는 남은 선택지가 없었기에 어떻게든 제국의 심기를 조금이라도 풀어 보고자 흑마법사들을 잡을 생각을 한 것이다.
문제는 그것이 카리엘의 성에 차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것들이 잡는 척만 하네?”
카리엘은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는 남동부로 향하는 중간 거점에서 잠시 쉬다가 막 보고를 받은 참이었다.
“이 새끼들이 아직 정신을 못 차렸지?”
바닥을 발로 ‘탕탕!’ 치면서 분노하는 카리엘.
일이 다 끝났다고 좋아하던 게 며칠 전이었는데, 그림자가 가져온 쪽지를 화내는 모습을 보며 타리온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생각했다.
‘은퇴하실 거라면서요. 신경을 끄세요!’
타리온이 속마음을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하고 한숨을 푹푹 쉬는 사이 카리엘은 곧바로 통신 마법사를 불렀다.
“외무부와 연결해.”
“예!”
카리엘이 싸늘한 표정으로 말하자 통신 마법사가 황급히 마력을 끌어 올려 수정구에 불어 넣었다.
방금 전까지 휴양지 같은 풍경이 멋지다고 웃고 있던 카리엘이 길길이 날뛰더니 싸늘한 표정을 짓는 걸 본 그는 속으로 ‘조울증인가?’ 하고 생각하며 통신을 연결했다.
“나 황태자야. 외무대신 불러와.”
카리엘의 말에 우렁차게 대답한 외무부 관료가 대신을 불러왔다.
-전하!
“또 예전 버릇 나온 거야?”
-예? 전하, 무슨 말씀이신지…….
외무대신이 카리엘의 싸늘한 음성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숙였다.
“요즘 놀고 있는 것 같은데?”
-아…… 아니옵니다!
외무대신이 놀란 표정으로 황급히 대답하며 자신이 그동안 무슨 일을 했는지 설명하려고 했다.
그러자 카리엘이 그의 말을 끊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남부 연합군을 저대로 내버려 둘 거야?”
-무슨 말씀이시온지…….
“흑마법사를 잡는 척만 하고 있잖아. 내가 판 다 깔아 뒀는데 그동안 압박도 안 하고 뭐 한 거지?”
자신이 판을 깔아 줬음에도 외무부가 ‘이 정도면 되었다!’라고 판단했는지 별다른 압박을 하지 않았다.
그 때문인지 남부 연합은 군사적 움직임만 거창하게 보여 줄 뿐, 실질적으로 흑마법사들을 잡진 않고 있었다.
-그…… 미래를 위해서라도 적당히…….
“내가 말했지, 그놈의 외교적인 발언이나 수단 같은 것 좀 갖다 버리라고!”
-하오나 전하, 흑마법사 사태가 끝난 이후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외무대신의 말에 카리엘이 한숨을 쉬었다.
“주변에 누구 있나?”
-어…… 없습니다.
외무대신의 대답에 카리엘이 작게 한숨을 쉬고는 타리온에게 주변에서 사람을 물리라고 명했다.
그러자 천장이나 문밖에 대기 중이던 기사와 그림자가 일제히 물러났다.
“외무대신의 말처럼 미래를 생각하면 적당히 한 수 물러 주는 것도 필요할 수 있지.”
카리엘이 외무대신의 말이 맞다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지만 그건 남부 왕국들과 지속적으로 좋은 사이를 이어 나갈 때의 이야기였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그들과 좋은 사이를 이어 나갈 수 있을까?”
-그건…….
“그동안 남부 왕국들이 우리한테 해 처먹은 걸 토해 내게 하려면 제국은 외교적으로 강하게 나가야 한다. 대륙 회의는 그 시작이 될 거고.”
-제국이 강하게 나가는 지금의 기조가 장기간 유지되면 타국이 반발할 것입니다. 자칫하면 전쟁으로 이어질 수도…….
외무대신이 그렇게 말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침묵하는 카리엘을 보고 대륙 회의 이후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전하.
“마스터들과는 얘기가 끝난 일이야. 동생들도 알고 있고.”
외무대신의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카리엘이 단호하게 답했다.
“제국이 호구처럼 뺏겨 온 것을 절반이라도 챙겨 오려면돌려받으려면 지금처럼 유하게 움직여선 안 된다고 설득했고, 동생들은 그에 공감했다. 차기 황제가 누가 될지 알 수는 없지만 누가 되더라도 지금의 기조가 바뀌진 않는다는 얘기야.”
-…….
“거기다 지금은 성국과 아이론도 제국의 발을 맞춰 줄 테지. 남부 연합을 털어먹을 절호의 기회다.”
카리엘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전부 이해한 외무대신이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최대한 압박해 보겠습니다.
“그래. 믿어 보지. 내가 동생들에게 준 선물이 반쪽짜리가 되지 않도록 노력 좀 해 주게.”
-……예, 전하.
그 말을 끝으로 통신이 끊기자 카리엘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스트레스를 받는 것 같은 카리엘을 타리온이 걱정스레 바라보았다.
십 대의 나이에 흰머리가 나는 것을 보면 그동안 카리엘이 얼마나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는지를 알려 주고 있었다.
“다 끝났어. 후…… 외무대신이 끝까지 그놈의 외교적 포지션을 포기하지 못해서 그래. 알아듣게 설명했으니 알아서 하겠지.”
카리엘이 그렇게 말하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멋진 풍경을 보니 마음이 좀 편안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사실 외무대신이 능력이 없는 건 아니었다.
카리엘이 보기에 그래도 써먹을 만한 놈이었고, 그래서 자꾸 잔소리하게 되는 것이다.
능력 없는 놈이었으면 진즉 날려 버렸을 것이다.
오랜 세월 황제로 있으면서 깨달은 것은, 이런 놈들을 잘 부려 먹으려면 명확한 목표를 설정해 두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위정자가 해야 할 일이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방금 전의 일도 카리엘이 직접 명령을 내려서 외무대신이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있도록 해 준 것이다.
‘그놈의 암군들의 책임 회피는 진절머리가 나지.’
현 황제야 최근에 좀 나아졌다지만 과거를 보면 치가 떨릴 정도였다.
자신의 실책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하기 위해 신하들한테 책임을 떠넘겼다.
카리엘의 입장에선 이해가 안 가는 행동이었다.
이미 ‘암군’이란 평가를 받고 있는데 더 떨어질 데가 어디 있다고 책임을 미루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황제가 책임 회피를 하니 대신들도 잘리지 않기 위해 아랫사람에게 일을 미루게 되고, 그것이 반복되니 국정이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는 것이다.
카리엘은 그럴 바에야 폭군이란 평가를 받더라도 능력 없는 놈들을 밀어내고, 빠르게 국정을 정리하는 편이 훨씬 낫다는 생각이었다.
‘그 때문에 온갖 욕은 다 먹었지.’
전생을 생각하면서 이를 바득 갈던 카리엘이 심호흡하면서 마음을 가라앉혔다.
“뭐, 이제는 나와 상관없는 일이지.”
그렇게 중얼거리며 카리엘은 오랜만에 진짜 휴식을 취했다.
갑갑한 황궁을 벗어나서 멋진 풍경을 감상하면서 쉬는 이 순간은 어느 때보다 달콤했다.
* * *
그렇게 꿀맛 같은 휴식을 끝낸 카리엘은 남동부로 향했다.
출발하기 전 그림자로부터 받은 보고서를 보며 카리엘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제야 굼벵이들이 제대로 움직이기 시작하네.”
외무대신이 제대로 움직이자 남부 연합군이 제대로 압박을 받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제국에서 항의하는 것은 물론이고 성국과 아이론 연맹까지 끌어들여 항의했기 때문이다.
카리엘이 깔아 놓은 판을 통해 군사적 압박은 물론이고 외교적 압박까지 강도 높게 들어가자 미적거리던 남부 연합군이 흑마법사를 잡기 위해 화산 중심부로 군사를 이동시켰다.
제국을 ‘침공’한 것이 아닌 ‘지원’하러 왔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확실한 액션을 취한 것이다.
하지만 외무대신이 한 일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제법이네.”
감찰부에서 자료를 받아 온 외무대신은 그 자료들을 바탕으로 남부의 국가들을 공식적으로 압박했다.
마약 밀수부터 허가받지 않은 밀무역, 자금을 빼돌린 정황 등을 해당 국가에 보내 항의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성국과 아이론 연맹의 도움을 받기 위해 물밑에서 외교적 협상을 한 것도 컸다.
“한 놈만 쥐어 팬다라……. 나쁘지 않아.”
성국에게 살길을 터 준 것이 아쉽긴 했지만 한꺼번에 모든 것을 얻을 수는 없었다.
하나를 포기한 대신 하나를 완전히 박살 낼 수만 있다면야 지금의 방법도 나쁘지 않았다.
“성국에게 살길을 터 준 게 좀 아쉽긴 합니다.”
마차 근처에서 말을 타고 가는 시카리오 후작이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 걱정 마시오. 성국을 압박한 수단은 많으니까.”
“……압박할 수단이 있습니까?”
“남부를 압박하기 위해 양보한 것이라고는 끽해야 배상금 정도일 터. 그렇다면 대륙 회의가 진행될 때 흑마법사들을 물고 늘어지면 되지 않겠소?”
그렇게 말한 카리엘이 빙그레 웃었다.
“늙은 여우는 쉬운 상대가 아닙니다.”
“알고 있소.”
시카리오 후작의 말에 카리엘은 잘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전생에 지독하게 겪었던 자가 현 교황인 북부의 늙은 여우였다.
“교황의 비상한 잔머리는 잘 알고 있소. 하지만 그런 그조차 흑마법사가 엮인 이번 사건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오.”
“상대의 약점을 물어뜯는 것이군요.”
“여우 같은 놈들은 도망치는 데 능한 놈들이니 한번 물면 놓지 않아야 하오.”
“대륙 회의에서 끝내실 생각이 없군요.”
시카리오 후작의 말에 카리엘이 빙그레 웃었다.
어떻게 잡은 여우인데 놓아준단 말인가?
미친놈처럼 끝까지 물고 늘어서 가진 걸 탈탈 털게 만들어 줄 생각이었다.
카리엘이 동생들에게 준비한 선물은 한 가지가 아니었다.
“앞으로 고생할 동생들한테 하나만 선물해서야 되겠소? 큼지막한 선물 여러 개 정도는 주고 가야 나도 마음이 편하지.”
카리엘이 그렇게 말하면서 웃자, 근처에 있던 마스터들의 눈빛이 묘하게 빛났다.
그것을 보던 토토와 타리온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한숨을 쉬었다.
근처에 있던 모든 이들이 은퇴를 앞두고 환하게 웃는 카리엘을 짠하게 바라보았다.
마스터들이 하는 말을 들어 보면 쉽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의 생각보다 카리엘의 머리는 똑똑했다.
‘대륙 회의가 시작하거나 마무리될 때쯤 수도에 도착해야겠어.’
카리엘은 그렇게 생각하며 빙그레 웃었다.
아무리 대륙 회의에서 밀리지 않게끔 조치를 취했다 하더라도 미숙한 동생들이 제대로 남부나 성국을 벗겨 먹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대부분의 일은 실무자들이 처리하겠지만, 정상들끼리 해야 할 일이 있는 법.
바로 그 부분에서 황자들이 부족한 경험 때문에 밀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때, 카리엘이 나타나서 도와줄만한 구석이 있었다.
넘어간 분위기가 다시 제국으로 돌아오게끔 하는 방법.
‘공식적인 황태자 은퇴식.’
두 황자들에게 힘을 실어 주는 것과 동시에 자신이 공식적으로 은퇴할 수 있는 방법.
거기다가 그동안 제국을 털어먹던 타국들의 재산을 더 털어먹을 수 있는 방법이기도 했다.
황태자가 은퇴하는데 빈손으로 올 수는 없는 법.
뭐라도 가져와 할 테고, 죄지은 입장이니 규모는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이 정도만 판을 깔아 줘도 내무부와 외무부가 알아서 은퇴식을 협박 카드로 사용하며 타국들을 털어먹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남부 연합국을 완전히 밟아 줄 필요가 있어.’
남부가 힘을 모아도 제국에는 안 된다는 것을 확실히 알려 줘야 더는 기어오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카리엘은 이번 대륙 회의에서 제국이 타국들을 완전히 밟아 놓고 시작하게끔 상황을 조성할 생각이었다.
그 시작은 남부 연합이 될 것이고, 성국과 아이론은 수도로 돌아가 은퇴식을 진행할 때쯤 처리할 것이다.
‘내가 이 정도까지 해 줬는데 설마 망하진 않겠지.’
카리엘이 그렇게 생각하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진짜 다 해 주고 간다.’
자신의 높은 서비스 정신에 스스로 대견해하며 카리엘이 남부 연합군을 조지기 위해 마차에서 자료를 살피기 시작했다.
중간 거점에서의 휴식이 끝난 후 다시 일에 몰두하는 카리엘.
다 끝내고 쉰다는 마음가짐으로 개같이 일하는 사이, 황태자군은 카푸르 화산 근방까지 도착했다.
“……결국 왔군.”
“남부 변경백이 직접 황태자를 맞이한다고 합니다.”
클레타 공작의 말에 옆에 있는 부관이 고개를 숙이며 보고했다.
“우리도 맞이하러 가야겠지. 제국의 패황이 소문대로인지 확인해 보자고.”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