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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54화 (54/201)

< 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 >

18. 동생들에게 주는 선물 (3)

제국의 패황.

타국에서 은연중에 퍼지고 있는 카리엘의 별명.

정적들과 범죄자들을 자비 없이 처리하고 흑마법사들까지 박살 내는 모습을 보고 그에게 붙은 별명이었다.

비록 스스로 가진 무력은 보잘것없지만 그것이 상관없을 정도로 비상한 머리와 판단력, 그리고 그것을 실행하는 흔들림 없는 결단력은 타국에서 재앙이라 불릴 정도로 두려움을 안겨 주고 있었다.

“……패황은 얼마나 남았다고 하나?”

“몇 시간 뒤면 올 것입니다.”

로테온의 마스터 피레스가 한숨을 푹 쉬었다.

무역왕 윌싱엄 후작의 보고에 따르면 제국이 남부 연합을 상대로 공식적으로 압박해 오고 있다고 했다.

거기다 성국와 아이론에서도 미적거리는 자신들을 압박하는 상황에서 카리엘이 직접 왔으니 남부 연합군은 흑마법사와의 싸움에서 선두에 서서 토벌할 수밖에 없었다.

카리엘이 소문대로 잔혹한 성정에 한번 결정한 것을 물리지 않는 단호함을 가졌다면, 남부 연합군은 제국의 땅을 밟은 대가를 자신들의 피를 뿌리며 흑마법사들을 ‘완벽히’ 토벌하는 것으로 갚아야만 했다.

그에게 외교적 혹은 관례 같은 것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서대륙에서 유명했다.

“확실한 성과라…….”

피레스 공작이 골치 아픈 표정을 지었다.

“후…… 이미 늦었지만 그래도 최대한 좋은 인상을 심어 주어야겠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크게 환영식을 준비하겠습니다.”

피레스 공작의 말에 부관이 고개를 숙이며 밖으로 나갔다.

굴욕이었다.

그동안 덩치만 큰 허수아비라고 생각했던 제국이다.

그런 제국에 남부 연합 전체가 엎드려서 빌어야 할 처지가 된 것이다.

삼대에 걸쳐서 말아먹은 제국이 다시금 부상하고 있었다.

“……위기군.”

피레스 공작이 보기에 남부 연합의 미래는 어둡기만 했다.

과연 그저 어둡기만 할 것인지, 아니면 파멸에 이를 것인지는 황태자를 직접 보아야만 알 수 있을 듯싶었다.

‘부디 소문이 과장된 것이기를…….’

피레스 공작이 그렇게 생각하며 카리엘이 소문만큼 잔혹한 성정이 아니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리고 그것은 클레타 공작 역시 마찬가지였다.

* * *

그렇게 남부 연합이 패황으로 불리는 카리엘을 떨리는 심정으로 기다리고 있을 때, 카리엘은 남부 변경백을 만나고 있었다.

“전하를 뵙습니다!”

제국 최고의 명장이라 칭송받는 로칸 바르사유가 카리엘에게 인사했다.

전생에는 결국 잃고 말았던 최고의 명장의 모습을 보자 카리엘이 그에게 성큼 다가가 반갑게 인사했다.

“반갑소. 카리엘 프레드리히 폰 블레이저요. 이렇게 제국 최고의 명장을 직접 보게 돼서 기쁘오.”

“명장이라니……. 과분한 칭호일 뿐입니다.”

“그럴 리가. 남부를 홀로 틀어막고 있는 분이 명장이 아니라니……. 겸양이 지나치시오.”

어떤 이는 마스터가 아닌 이가 남부 변경백이라는 위치에 있는 걸 불만으로 여기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의 불만을 실력으로 눌러 버린 게 바로 현 남부 변경백 로칸 바르사유였다.

남부의 마스터들이 포함된 전력을, 오로지 전략만으로 완벽에 가깝게 막아 낸 인물.

그런 인물을 이렇게 직접 볼 수 있다는 사실에, 카리엘은 그저 기쁠 수밖에 없었다.

‘이번 생은 멋지게 은퇴했으면 좋겠군.’

죽지 않고 정년을 다 채워 은퇴하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남부 변경백과 담소를 나누었다.

남부 연합군으로 가는 내내 입가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는 카리엘을 보며 근처에서 뒤따르던 마스터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나와 만났을 때는 저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과하게 환영하시는군.’

‘음…….’

세 명의 마스터는 속으로 작게 불만을 토로하며 남부 변경백과 카리엘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다소 질투가 섞인 마스터들의 눈빛을 눈치챈 기사들이 자신도 모르게 헛기침했다.

제국의 세 기둥이 질투하는 보기 드문 모습에 모두가 놀라는 동안 전열을 가다듬은 제국군은 이윽고 남부 연합군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제국의 작은 태양을 뵙소.”

“제국의 작은 태양을 뵙소.”

남부 연합군의 두 마스터가 카리엘을 마중 나왔다.

나름대로 신경을 쓴 듯한 환영식을 보면서 카리엘이 조용히 말에서 내렸다.

방금 전까지 웃으면서 남부 변경백과 얘기를 나눈 것과 다르게 싸늘한 표정을 지은 카리엘.

“전쟁을 하러 온 것인지, 놀러 온 것인지…….”

카리엘이 혀를 차면서 그렇게 말하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남부 연합군의 두 수장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모욕적인 언사였지만 카리엘에게 항의할 수는 없었다.

‘정말로 제국의 세 기둥이 전부 모였군.’

‘거기다 남부 변경백까지…….’

함부로 경거망동했다간 카리엘의 뒤에 서 있는 자들에게 영혼까지 털릴 것이다.

지금은 굴욕적인 상황에서도 인내하는 것 말고는 도리가 없었다.

“듣기로 흑마법사의 토벌에 진척이 없다는데…… 사실이오?”

“아니요. 현재 화산 중턱까지는 점령했으니 토벌하는 것만 남은 상태요.”

“자세한 얘기는 들어가서…….”

클레타 공작의 말에 피레스 공작이 애써 웃으면서 막사 안으로 안내하려 했다.

하지만 카리엘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흑마법사들을 토벌하기 위해선 시간이 생명이오.”

마치 그것도 모르냐는 듯 묻는 카리엘의 말에 두 마스터는 재차 인상을 찡그렸다.

그런 그들을 향해 카리엘은 일부러 훈계하듯 말했다.

“이렇게 미적거릴 시간이 없소. 지금 당장 화산 전체를 포위하고 완벽하게 섬멸해야 하오.”

지금까지 남부 연합군이 미적거렸던 것을 대놓고 탓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피레스 공작이 카리엘의 유약한 몸뚱어리를 지적하듯 말했다.

“긴 여정에 지치셨을 텐데 괜찮으시겠습니까?”

“흑마법사를 토벌하는 일이오. 개인의 사정 따위에 휘둘릴 수는 없는 법.”

피레스 공작의 걱정 섞인 말에 카리엘이 단호하게 고개를 젓고는 타리온에게 손짓했다.

“이곳 사정은 그동안 토벌해 온 남부 연합군이 잘 알 터이니 주공을 맡기겠소. 우리는 포위망을 형성하고 특별군을 편성해 화산 정상으로 향하겠소.”

“음…….”

카리엘의 말에 예상한 대로 일이 펼쳐지자 두 공작은 침음성을 흘렸다.

그런 그들에게 쐐기를 박듯 카리엘은 타리온에게 시켜 지도를 펼치게 하고 설명에 들어갔다.

괜히 다른 말로 돌리면서 시간 끄는 걸 사전에 막은 것이다.

작전 설명은 간단했다.

중턱에 배치 중인 남부 연합군의 병력이 흑마법사들을 서서히 압박하고, 제국군은 그 뒤에 산 전체를 휘감은 포위망을 형성한다.

그리고 지근거리까지 도착한 동부군까지 합세해서 쥐새끼 하나 빠져나갈 수 없는 포위망을 형성한 후, 남부 연합군이 흑마법사들과 전투를 벌이는 동안 카리엘이 편성한 제국의 특별군이 화산의 정상에서 기습 작전을 펼치는 것이었다.

“내가 직접 제국의 마스터들을 대동하고 정상에 있을 흑마법사의 간부들을 처리하면 남부 연합군의 피해가 그리 크진 않을 것이오.”

“직접…… 올라가시겠단 말입니까?”

피레스 공작의 말에 카리엘이 빙그레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황태자가 직접 정상으로 향한다.

그건 제국만 안전한 지역에 있으면서 남부 연합군에 희생을 강요한다고 항의할 수 없게 된다는 걸 뜻한다.

제국의 황태자가 위험을 감수하면서 직접 나선다는 명분도 챙겼고, 세 명의 마스터가 포함된 특별군을 이끄니 실질적인 피해도 별로 없을 것이 분명했다.

결국 카리엘의 작전은 남부 연합군만 피해가 누적된 상태에서 항의할 명분조차 없애 버리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흑마법사들의 간부들을 상대하는 건 서북부에서 상대한 경험이 있는 우리들이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이리 정했소만. 어떻소?”

카리엘의 말에 두 공작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모든 명분을 쥐고 압박하니 수긍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렇게 순식간에 작전 회의를 끝낸 카리엘은 그 자리에서 바로 특별군과 함께 화산 정상으로 출발했다.

그사이 남부 변경백은 동부군과 함께 포위망을 형성했다.

“후…… 직접 나서야겠군.”

“조금이라도 피해를 줄이는 게 우리에게 남은 마지막 소임 같소.”

클레타 공작의 말에 피레스 공작이 쓴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조금의 여지조차 주지 않고 움직이는 카리엘을 보면서 두 마스터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이번 전쟁이 끝나고 시작될 대륙 회의의 분위기가 벌써부터 머릿속에 그려지는 듯했기 때문이다.

“움직입시다. 최대한 저들을 도와 빠르게 끝내는 것이 최선인 듯싶으니…….”

“……그럽시다.”

두 마스터가 작게 한숨을 쉬면서 움직였다.

작전이 실패한 이상 최대한 전력을 보존하면서 물러나는 것이 최선이었지만 현재 제국을 이끄는 황태자는 그럴 생각이 조금도 없어 보였다.

결국 최소한의 피해로 물러나겠다는 그들의 계획은 시작부터 어긋나 버렸다.

지은 죄가 있으니 명분에서부터 밀리고 시작했고, 마스터 숫자도 부족하니 카리엘의 말에 반항만 한번 하지도 못하고 수긍할 수밖에 없는 굴욕적인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남부에서 명성 높은 두 마스터가 한숨을 푹푹 쉬면서 움직이자 남부 연합군 역시 사기가 뚝뚝 떨어진 채 흑마법사의 대규모 전쟁에 임했다.

반면에 제국군은 사기가 하늘 끝까지 치솟았다.

멀리서 보긴 했지만, 카리엘이 남부의 두 마스터를 상대로 압박하는 것을 직접 보았고, 무엇보다 제국의 황태자가 선두에서 움직인다는 점이 제국군에 색다르게 다가온 것이다.

황태자가 카푸르 화산에 온 지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대대적인 움직임이 일어났다.

가장 먼저 제국군이 넓게 포위망을 펼치기 시작했다.

동시에 남부 연합군이 본격적으로 움직이며 흑마법사들을 압박해 나갔다.

“남부의 두 마스터들이 선두에 섰다고 합니다.”

“피해를 최소화하려는 건가? 잘됐네. 우리도 움직이자.”

타리온의 보고에 카리엘이 그의 등에 업혔다.

그러자 서북부에서처럼 피의 길을 만들 생각으로, 세 명의 마스터들이 먼저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스터들이 오러를 내뿜으며 길을 열자 카리엘의 특별군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총공세를 펼치는 남부 연합군을 막기 위해 화산에 있는 흑마법사들이 죄다 몰려가는 동안 만약을 대비해 배치해 둔 흑마법사들과 소환수들을 박살 내며 화산의 정상 부근에 도달했다.

“불이 괴로워하네.”

“……예?”

카리엘의 말에 타리온이 무슨 말이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그러자 카리엘도 자신이 왜 이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불이 괴로워한다는 느낌만큼은 확실했다.

그리고 그러한 이유는 화산의 정상에 가까워지면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쓰레기들이군.”

카리엘의 눈에만 선명하게 보이는 불의 움직임.

과거에는 한데 뭉쳐 있던 것들이 조각조각 나서 화산을 중심으로 흩어져 마법진을 형성하고 있었다.

서북부에서는 강제로 폭주하는 정령을 만들려 했다면, 이번엔 파편을 이용해 타 차원의 존재를 소환하려고 한 흔적이 보였다.

-불쌍하네.

어느새 나타난 수르트가 조각조각 나 찢긴 정령왕의 파편을 바라보았다.

울부짖는 것 같은 파편 조각들을 보며 카리엘이 인상을 찡그렸다.

“지금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저 고통을 끝내 주는 것뿐이겠지?”

-……그래.

흑마법사에 의해 찢겨 나간 순간 소멸은 예정된 것.

흑마력에 의해 소멸조차 유예되면서 강제로 소환을 위한 제물이 되어 버린 불쌍한 존재를 위해 카리엘은 마스터들에게 명령했다.

“저것과 비슷한 건물들을 모조리 파괴해 주시오.”

카리엘의 명에 마스터들이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재빨리 움직였다.

그들 역시 간접적으로나마 불의 마나가 요동치는 것을 느끼고 있었는데, 카리엘의 말을 듣고 그것이 고통에 찬 정령의 울음소리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게 마스터들이 흩어진 순간, 어딘가에서 흑마법사 무리가 나타나 카리엘을 덮쳤다. 근처에서 기회를 엿보고 있던 흑마법사의 장로와 정예 흑마법사들이었다.

하지만 흑마법사라면 지독하게 겪어 본 카리엘이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리 없었다.

친위대와 타리온, 그리고 황궁 기사들을 통해 그들을 막아섰고, 대공가의 기사단이 뒤를 치게끔 했다.

일부러 미끼를 자처한 카리엘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덫

그것에 꼼짝없이 걸려든 흑마법사들 전원은 끔찍하게 죽어 나갔다.

“대…… 대계는 끝나지 않……았…….”

“그런 건 동대륙에서나 해.”

몸의 절반이 사라진 채 피를 토하면서 말하는 장로에게 카리엘이 다가가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냥…… 물러……나진 않을…….”

그 말을 끝으로 숨을 거둔 장로를 보면서 카리엘은 혀를 찼다.

저주와도 같은 말을 들었음에도 카리엘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흑마법사가 서대륙을 떠나기 전에 수작을 부릴 것 같았지만 그건 카리엘과 상관없는 일.

남은 일은 동생들과 대신들이 할 일이었다.

“후…….”

황태자로서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을 처리하기 위해 카리엘은 화산의 정상 부분을 올려다보았다.

흑마법사들에 의해 찢긴 파편들이 붉은 빛으로 변하며 중심부로 모여들기 시작하는 것이 보였다.

그러자 그 순간 카리엘의 몸에 잠들어 있던 기운이 그것과 공명하기 시작했다.

마치 자신을 부르는 듯한 공명음.

그 공명음이 이끄는 대로 카리엘은 천천히 화산의 중심부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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