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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57화 (57/201)

< 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 >

19. 대륙 회의 (3)

황태자의 은퇴식.

황태자가 스스로 물러나는 일은 매우 드물었기에 은퇴식이라는 사실만으로도 관심을 받기에 딱 좋았다.

그런데 심지어 은퇴식의 주인공이 현재 제국민들에게 가장 많은 지지를 받고 있는 카리엘이었다.

그렇다 보니 제국민들의 관심이 은퇴식에만 쏠리는 것이다.

제국뿐만 아니라 타국들까지도 황태자의 은퇴식에 관심을 가지며 향후 정국이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 예측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그러다 보니 성국에서 일찍 출발하려던 교황의 일정 역시 꼬여 버렸다.

“……성하, 나중에 출발하시지요.”

추기경의 말에 교황은 고개를 저었다.

“가세.”

“성하.”

“지금은 진정성을 보여 주어야 하네. 그래야 수도에 가서도 명분을 들이밀 수 있을 걸세.”

황태자의 은퇴라는 강력한 패를 꺼내 들었기에 교황의 전략이 박살 나 버렸다.

하지만, 그래도 해야만 했다.

이 싸움은 애초에 성국에 불리한 싸움이었고, 그렇다면 최대한 길게 보아야 했기 때문이다.

“최후의 승자는 우리 성국이 될 것이네.”

교황이 그렇게 말하고는 하얀 마차에 올라탔다.

그러자 모든 추기경들이 교황에게 허리를 굽혔다.

“성하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모든 이슈가 황태자에게 집중된 상황에서 기어코 교황의 행렬이 출발했다.

교황이 이그니트를 향해 출발했다는 기사가 짤막하게 실렸으나 이내 잊히고 말았다.

그렇게 서대륙의 모든 시선이 이그니트에 집중되고 성국의 기를 꺾었으니 모든 게 카리엘의 의도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맞았다.

하지만 예상하지 못한 사소한 문제들이 발생하긴 했다.

「황태자의 은퇴식을 막아라!」

광장에 모인 제국민들이 황궁을 향해 소리치고 있었다.

부패한 귀족들을 쳐 내고 흑마법사들을 잡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제국의 위상까지 올린 황태자다.

그런 황태자가 은퇴한다?

제국민들 입장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전하께서 스스로 퇴위를 밝히신 바…….”

한 관료가 대표로 이유를 설명해 보았으나 제국민들이 들어먹을 리 없었다.

제국민들도 카리엘이 은퇴하고자 한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지만, 그동안 얼마나 관료들이 일하지 않고 황태자를 괴롭혔으면 그런 마음을 먹었겠느냐는 게 대다수의 의견이었다.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만류해야 할 놈들이 은퇴식을 계획하고 앉았으니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일부 제국민들은 황태자를 보내 줘야 한다고 말했다.

그동안 고생했으니 은퇴시켜 주고 돌아오고 싶을 때 돌아오게끔 하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다른 두 황자들에 대한 기대감 역시 섞여 있었다.

황태자만큼은 아니지만 두 황자들도 흑마법사들을 잡아들이는 과정에서 나름의 활약을 펼쳤기 때문이다.

「황태자 전하께서 직접 밝히신 두 황자의 재능!」

「제국의 미래는 밝다!」

급히 공영 신문을 통해 두 황자의 재능을 찬양해 보았으나 먹힐 리가 없었다.

예상치 못한 혼란 속에서 시선을 돌리기 위해 대륙 회의의 일정이 발표됐고, 그에 맞춰 타국의 사신들 역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분노했던 제국민들이 하나둘 화를 가라앉혔다.

그만큼 대륙 회의에 몰려오는 자들의 면면이 굉장했기 때문이다.

각국의 핵심 인사들이 모두 참석하니 당연한 결과였지만, 제국민들이 기대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남부에 이어 공국와 서부 연맹까지 마스터를 보낸다!」

「이번에 초대된 국가들의 자격은 마스터의 보유 유무?」

이런 기사들이 터져 나오면서 제국민들의 기대감을 높였다.

남부를 휘어잡는 두 명의 마스터와 성국의 마스터이자 교황이 직접 오는 것도 놀라운데, 남은 두 국가마저 마스터를 보냈다.

“서대륙의 마스터는 죄다 몰려오는군.”

“마스터들끼리 기 싸움하는 것도 재밌겠어.”

“이참에 마스터 서열도 가렸으면 좋겠네.”

서대륙의 모든 마스터들이 몰려오기 때문일까?

많은 사람들이 이번 대륙 회의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기대감에 젖었다.

그런 그들의 기대감에 발맞춰 황궁에서 대륙 회의를 하는 동안 제국은 축제를 선포했다.

그러자 각국의 사신 행렬에 수많은 상단들이 뒤늦게 따라붙었다.

기대감이 하늘 끝까지 높아진 제국민들이었지만 대륙 회의까지는 많은 시간이 남아 있었고, 서서히 일상에 녹아들다 보니 점차 시들해져 갔다.

그때 성국에서 교황이 제국의 북부에서 사죄의 순례를 하고 있다는 발표를 해 왔다.

그동안 대륙 회의에 대해서만 반복해서 기사를 내보내던 제국의 신문사는 곧바로 이것을 물었다.

「교황의 사죄의 순례?」

「피해를 입은 제국민들에게 직접 보상을 전달하는 교황」

「성국, 이번에는 진심일까?」

보여 주기식이 아닌 교황의 진심이 담긴 북부의 순례.

일부러 일찍 출발해 보름 동안 북부를 돌면서 북부인들에게 사죄하는 교황.

직접 허리까지 굽혔다는 기사까지 나오자 신전에 대한 불신으로 가득했던 제국민들의 마음에 조금씩 녹아들기 시작했다.

“여우답군.”

황제가 오늘 자 신문을 보면서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사실 교황이 마음만 먹었다면 수도에 벌써 도착했을 것이다.

교황만이 탈 수 있는 하늘을 나는 비공선도 있고, 수도까지 연결된 기차도 있기 때문이다.

아직 기술이 부족해서 각 나라에 하나씩밖에 연결되지 않았고 속도도 느렸지만 마차보다는 빠르게 갈 수 있었다.

그럼에도 교황은 굳이 마차를 타고 움직였다.

이대로 가만히 놔뒀다가는 거의 박살 나 버린 신전의 영향력이 다시금 올라올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교황의 의도는 이루어지기 어려워졌다.

“남동부의 일이 끝났다지?”

“그렇사옵니다.”

“대대적으로 발표해라, 황태자가 서북부와 남동부에서 어떤 일을 벌였는지.”

황제의 말에 시종장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황제의 혼란스러운 마음을 잘 알고 있는 시종장이기에 조심스레 물을 수밖에 없었다.

“짐은 교황이 끔찍하게 싫다, 여우 새끼를 잡을 수 있다면 어떠한 고통도 감내할 준비가 되어 있느니. 게다가 황태자는 짐의 아들 아닌가? 아들의 잘난 점을 발표하는 것인데 꺼릴 게 무에 있으랴.”

황제의 말에 시종장이 고개를 숙였다.

그림자에 의해 황제에게만 보고되었던 황태자에 대한 소식.

서북부와 남동부의 화산을 해결하는 데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 상세한 보고를 들은 황제는 마음속에서 질투심이 치솟았으나 곧 교황에 대한 분노에 밀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지난 시간 제국을 농락하며 간교한 혀로 성국의 위상을 올렸던 여우.

늙은 여우를 잡기 위해선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의지를 불태우며 황제가 오랜만에 황제의 궁을 빠져나왔다.

황제가 직접 황태자를 띄워 주기 위해 움직이자 교황에 대한 기사를 내보내던 신문사들도 일제히 황태자에 대한 소식을 전하기 시작했다.

황제도 머리가 있기에 카리엘이 초대 황제의 불을 이었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발표하진 않았다.

평소 고대 서적을 탐독하던 카리엘이 이번 흑마법사 토벌과, 흑마법사와 손잡은 반역자들을 처단하는 데 큰 기여를 한 것만 발표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교황의 소식을 가리기엔 충분했다.

“허…… 어마어마하구만.”

“그러게 말이여.”

서북부와 남동부에서 일어난 화산 폭발을 막아 낸 그 순간.

그 장면을 마법 영상구에 담았고, 광장에 설치된 거대한 영상구에서 반복적으로 보여 주고 있었다.

그러자 막연히 ‘화산 폭발이 심각하구나!’라고 생각하고 있던 제국민들이 영상을 보면서 자신들의 생각 이상으로 심각한 상황이었음을 인지하면서 이것을 막아 낸 카리엘에 대한 호감도가 증폭되었다.

그 상황을 뒤집기 위해 성국에서 교황에 대한 영상을 만들어 보았지만 황태자에 비할 바는 못 되었다.

결국 성국은 패배를 시인하고 간간이 교황의 근황을 신문에 내보내는 것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 * *

그렇게 제국과 성국이 물밑에서 서로를 물어뜯는 동안 대륙 회의를 개최하는 날이 다가왔다.

축제로 선포된 날이었기에 엄청난 숫자의 상인들이 이그니트의 수도로 몰려들었다.

수많은 행렬들이 각 관문으로 몰려들었는데, 광장에 설치된 시계탑이 정오를 가리키는 순간 수도의 기사들이 통제하기 시작했다.

일순간 수도의 관문으로 향하는 길이 비는 순간, 그토록 기다려 왔던 행렬이 하나둘 들어왔다.

모두 사전에 이날 이 시간에 같이 들어오기로 약속했기에 내무부가 정한 절차에 따라 순서대로 이그니트의 수도로 입성했다.

가장 먼저 성국이 움직였다.

본래라면 가장 후순위에 배치되어야 할 성국이었건만 이번 흑마법사 사태에 대한 사죄의 의미로 스스로 위상을 낮춘 것이다.

하지만 순서는 순서일 뿐, 교황은 조금도 그리 생각하지 않는다는 듯 마차의 창문을 열고 제국민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 옆에서는 차기 마스터라 불리는 태양검이 근엄한 표정으로 백마를 탄 채 움직였다.

“저게 차기 마스터인가?”

“확실히 기세는 상당하군.”

일부러 기세를 내뿜으며 걷는 태양검을 보며 기사들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에 있는 기사들 중 태양검의 검을 받을 수 있는 자들은 마스터를 제외하고는 거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제국의 기사들이 태양검을 보며 경계심을 끌어 올릴 때였다.

성국의 뒤를 이어 움직인 것은 탈로스와 로테온이었다.

두 나라의 왕을 태운 마차가 동시에 입성했는데, 그 옆에는 그들이 자랑하는 클레타 공작과 피레스 공작이 함께했다.

본래라면 이들 역시 후순위였으나 이번 남동부에서 일이 있었기에 그들 역시 스스로 선순위에 들어가기를 희망했다.

비록 적국에 가깝지만 마스터를 직접 본다는 것은 기사들에게도, 일반 제국민들에게도 영광스러운 순간이었다.

남부의 제1검을 다투는 두 마스터의 모습을 보면서 환호하는 제국민들.

그러는 사이 아이론 연맹이 움직였다.

“살바토르다!”

“미남 기사 살바토르!”

아이론 연맹이 자랑하는 마스터인 살바토르의 등장에 여인들이 환호하기 시작했다.

서대륙의 여인들이 원하는 1등 신랑감.

미남인데 심지어 마스터라는 지고한 경지마저 개척한 자.

사십 대에 다가간 그였지만 여전한 미모를 자랑했기에 제국의 여인들의 마음을 들뜨게 했다.

결혼하지 않은 여인이야 그럴 수 있다지만 유부녀들까지 환호하는 모습에 옆에 있는 남편들이 슬쩍 째려보았다.

하지만 그런 그들 역시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살바토르의 외모.

그런데 이번엔 여인들이 남편을 째려볼 수밖에 없었다.

루미너스 공국의 최고 사령관이자 서대륙을 지키는 방패라 불리는 여인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샤르도나 후작!”

“대륙 최고의 미인!”

이십 대 후반에 마스터를 개척한 천재이자 이제 막 삼십 대에 진입한 여인.

무엇보다 아직도 결혼하지 않았다는 것이 중요했다.

그런 그녀가 얼굴마저도 상당히 예쁘장했기에 남성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손이라도 흔들어 주세요.”

“……아닙니다.”

공국 최고의 상인이자 왕녀인 아일라가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자신도 어디 가서 꿀리는 외모는 아니었고, 공국 내에선 첫손에 꼽히는 미인이라 추앙받고 있지만 샤르도나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압도적인 인기를 자랑하는 샤르도나는 그녀가 지나가고 나서도 한동안 환호성이 들려올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환호성은 곧 잦아들 수밖에 없었다.

곧 주인공이 등장할 타이밍이었기 때문이다.

“오신다!”

저 멀리서 모습을 보이는 군대.

평소 마차를 타고 가던 모습과 달리 선두에 서서 말을 타고 오는 영웅.

특유의 나른한 얼굴을 한 황태자가 제국의 영웅들과 함께 수도로 복귀하고 있었다.

처음 나섰을 때와 달리 황태자의 주위에는 마스터들이 호종하고 있었고, 그 뒤에는 변경백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카리엘은 전장에서 승리한 개선식처럼 제국민들의 환호와 사방에서 뿌려지는 꽃가루 속에서 위풍당당하게 입성했다.

“천천히 가시지요.”

쑥스러워서 빠르게 말을 몰려고 했던 카리엘에게 아켈리오가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항상 얼굴에 짜증과 나른함만을 담고 있는 카리엘. 가끔가다 웃는 것을 제외하면 일관된 표정을 짓는 그 카리엘이 보기 드문 표정을 짓자 모두가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흠흠! 얼른 갑시다.”

시선을 깨닫고 카리엘이 쑥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몰자 뒤에서 지켜보던 타리온이 입을 가리고 웃었다.

제국의 기둥들이 있음에도 오직 황태자만을 연호하는 제국민들 때문일까?

얼굴이 살짝 붉어진 카리엘은 황급히 말을 몰았다.

짜증스럽게 말은 했지만 어느새 그의 입가엔 옅은 미소가 감돌고 있는 것을 본 마스터와 변경백은 피식 미소를 지으면서 말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제국군까지 모두 입성하자 폭죽이 터져 나오면서 본격적으로 제국의 축제가 시작되었다.

동시에 서대륙의 대륙 회의 역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동안 당했던 설움을 풀려는 제국과 그것을 막으려는 국가들의 싸움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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