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 >
20. 마지막 가르침?
황궁 밖은 대륙의 각 지역에서 온 상인들과 관광하러 온 자들로 북적이며 즐거워했지만, 황궁 안은 달랐다.
서대륙 주요 국가에서 전부 모인 대륙 회의가 곧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방금 전까지 이그니트의 수도에 입성하면서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던 것이 거짓말인 듯, 모두가 굳은 표정으로 제국의 정치적 공세를 막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제국 역시 보다 완벽한 공세를 이뤄 내기 위하여 바삐 움직였다.
반면에 황태자 궁은 평온했다.
“전하, 내무부에서 보내온 서신이옵니다.”
“내무부?”
오랜 여정에 피로감을 느낄 카리엘을 배려해서 어떤 일도 상의하지 않으려 했던 귀족들.
하지만 이렇게 직접 서신을 건네올 정도라면 상당히 심각한 일이라는 것이다.
「은퇴식을 조금만 미루면 어떠실는지요.」
“내무부에서 전하가 서신을 찢으면 이걸 드리라고 했습니다.”
카리엘의 행동을 예상한 듯 말하는 타리온을 보며 카리엘이 부들거렸다.
“후…….”
첫 줄을 읽자마자 서신을 찢어 버릴 뻔했던 카리엘은 간신히 분노를 참아 내며 남은 글을 읽어 내려갔다.
내무부가 이렇게 판단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본래 입성하자마자 은퇴식을 거행하려 했지만 상황이 여의치 못했다. 두 황자들로는 대륙 회의를 완전히 주관하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계획대로 회의를 마무리하기 위해서는 중요한 부분만이라도 좋으니 카리엘의 도움이 필요했다.
카리엘이 화낼 것을 예상한 것일까, 서신의 말미에는 대륙 회의 기간 내에 은퇴식은 반드시 거행될 것이니 화내지 말라 달라고 구구절절 적혀 있었다.
“흠…… 아직은 어렵나?”
스무 살은커녕 이제 십 대 중반의 나이인 황자들.
상식적으로 지금부터 정치적 수완을 기르기엔 역부족이었다.
카리엘도 그 사실을 잘 알기에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 열심히 판을 깔아 주긴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나 보다.
“아무래도 여우가 문제인 것 같은데?”
“그런 것 같습니다.”
북부의 늙은 여우인 교황이 직접 이그니트 제국에 온다고 선언했을 때부터 카리엘이 깐 판은 조금씩 깨져 나가고 있었다.
은퇴식과 엄청난 활약으로 간신히 봉합하기는 했지만 여우의 화려한 말발을 황자들이 감당하긴 어려울 것이다.
외무대신과 내무대신이 돕긴 하겠지만 교황에 비하면 직위나 신분 모두가 달리니 대응하기 힘들었다.
황제라면 어느 정도 가능하겠지만 정신이 맑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의 능력의 편차가 너무 심했다.
“그렇게 한다고 전해.”
“예.”
카리엘의 명령에 타리온이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비밀리에 각 부처에 전해서 사람 한 명씩 보내라고 해.”
“직접 주관하시는 거 아닙니까?”
“겉으로 보이기엔 두 황자가 진행하는 것처럼 해야 해.”
“어차피 나중에 눈치챌 텐데요?”
타리온의 의문에 카리엘이 고개를 저었다.
카리엘이 대륙 회의를 주관한다는 것이 공공연하게 소문난다고 하더라도 겉으로 보이는 것만큼은 두 황자들이 해야 했다. 그래야 황자들에게 힘이 실리기 때문이다.
카리엘이 직접 작성한 서신들을 품에 안은 타리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생각보다 침착하신 것 같습니다.”
“내 잘못이니까.”
카리엘이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늙은 여우가 이렇게 나올 것까지 계산하진 않았다.
무엇보다 이미 은퇴식이 확정되어 여유가 생긴 것도 있었다.
‘후…… 폐하도 여우 같은 면이 있으시군.’
대륙 회의 기간 내라곤 하나 자신의 은퇴식을 확정시킨 것.
이 판단으로 적어도 대륙 회의 때까지는 자신이 협력하게 만들 발판을 만들어 두었다.
정신이 오락가락하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머리가 맑을 때의 황제는 확실히 무서운 면이 있었다.
“동생들에게 마지막 가르침을 내려 주는 셈 치지.”
“좋아하실 겁니다.”
“그랬으면 좋겠네.”
그렇게 중얼거린 카리엘은 타리온에게 명했다.
“준비해. 지금부터 쥐새끼들을 탈탈 털어 보자고.”
“예.”
카리엘의 명령에 고개를 숙이고 사라지는 타리온.
본격적인 회의는 3일 뒤였다.
보통 먼 거리를 온 사신들의 여독을 풀 겸 하루 뒤에 하는 게 관례였지만 각국의 수장들이 왔으니 좀 더 여유를 주는 것이다.
거기다 제국의 축제로 즐겨 달라는 의미도 담겨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진짜로 놀 수 있을까?
지금도 제국의 공세를 막기 위해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무엇보다 대륙 회의의 시작을 알리는 파티가 저녁에 열린다.
‘진짜 싸움은 거기서부터지.’
카리엘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파티에 참가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상당히 피곤한 몸 상태였지만 그래도 늙은 여우에게 밀릴 수는 없는 법.
실로 오랜만에 시종과 시녀의 도움을 받아 파티 준비를 했다.
몸을 깨끗이 씻고 시녀들이 건네는 옷들과 액세서리 등을 정하면서 준비를 마친 카리엘이 시종들의 도움을 받아 연미복까지 입자 귀티 나는 자태가 완성되었다.
그러자 그런 카리엘을 바라보는 시녀들의 눈빛이 몽롱하게 변했다.
전생에서야 숱하게 입었다지만 이번 생에선 골골대느라 거의 입지 못했고, 몸이 좀 회복되고 나서는 바삐 움직이느라 파티에 참석할 여유가 없었다.
“가자.”
“예.”
완벽하게 무장한 카리엘이 서신을 전하고 돌아온 타리온과 함께 연회장으로 향했다.
황궁의 그랜드 홀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연회장에 설치된 영상구를 통해 안쪽의 상황을 파악한 카리엘은 피식 웃었다.
“늙은 여우가 벌써 사전 작업에 들어갔군.”
카리엘이 중얼거림에 타리온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성국의 위상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빠르게 연회장에 와서 제국의 귀족들을 상대로 입을 놀리고 있었다.
그러자 은연중에 남부의 국왕들이 그에 동조했다.
제국의 귀족들을 구워삶아서 최대한 제국의 압박을 피해 보려는 것이다.
교황이 평화와 협력을 강조하면서 흑마법사들에 대한 분노를 드러내었다.
그리고 남부 왕국들 역시 그에 동조하면서 제국의 시선을 흑마법사 쪽으로 돌려 보려고 애썼다.
바로 그때, 시종의 우렁찬 음성이 들려왔다.
“제국의 작은 태양! 카리엘 프레드리히 폰 블레이저 황태자 전하 드시옵니다!”
거대한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서는 카리엘에게로 안에 모인 모든 이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매일 헝클어뜨린 머리와 대충 걸친 구겨진 옷을 입던 모습과 달리 제대로 꾸민 카리엘은 연회장에 모인 이들 중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미남이었다.
아직 어린 티가 나긴 했지만 그렇다고 잘생긴 얼굴이 어디 가진 않았다.
‘얼굴을 이용한 건 처음인데.’
전생에선 자신의 얼굴이 이 정도로 뜨거운 반응은 아니었기에 살짝 갸웃거린 카리엘.
그때와 지금이 달라진 점이 있다면 수척했던 얼굴이 멀쩡해진 것뿐이라고 생각했지만 카리엘의 생각 이상으로 그 차이는 컸다.
얼굴로 연회장에 한 방 먹인 카리엘이 빙그레 웃으면서 교황에게 다가갔다.
“전하를 뵙습니다.”
“예하를 뵈오.”
성하가 아닌 예하라고 말한 카리엘을 보며 근방에 있던 모든 이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한 종교의 수장이자 중립국의 우두머리 정도로 격하시켰던 전성기 시절의 표현이 다시 나온 것이다.
제국이 잘나가던 시절 성국의 수장은 교황이라는 칭호를 감히 사용하지도 못했었다.
양국의 화합을 위해 제국이 했던 배려를 이용해 지금의 위치를 구축한 성국.
그런 주제에 감히 제국의 이권을 갉아먹고 자신들이 황제보다 대단한 것처럼 굴었던 것이다.
카리엘은 그런 것을 용납할 생각이 없었다.
“다들 무슨 이야기를 하길래 그렇게 재밌으셨는지 궁금하군요.”
“허허…… 이번 대륙 회의 주제인 흑마법사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습니다.”
“흑마법사라…….”
“과거부터 흑마법사들의 준동은 대륙에 큰 환난을 가져온 바, 이제부터라도 힘을 합쳐 그들을 절멸시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말한 교황은 빙그레 웃었다.
이제라도 성국이 나서서 주도적으로 흑마법사들을 소탕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만만하게 보네. 아니면 간을 보는 건가?’
자신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파악할 겸 약하게 한 방 날리는 교황.
하지만 그는 실수했다.
자신이 황제였다면 어느 정도 선을 지키며 말했겠지만 카리엘은 곧 은퇴하는 황태자다.
뒤를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이상하군.”
카리엘이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연회장이 얼어붙으며 교황과 카리엘에게 시선이 집중되었다.
“성국이 지금의 위상을 구축한 건 흑마법사에 대한 척결, 그리고 마계와의 전쟁에 큰 공로를 세운 것 때문 아니오?”
카리엘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물었다.
그러자 카리엘의 의도를 알아차린 교황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
하지만 여우라는 별명을 가진 자답게 곧바로 입가에 미소를 그리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비록 성국의 작은 실수가 있었으나 이단 심문관들을 통해 강하게 처벌하여 기강을 바로잡고 흑마법사를 향한 성전을 시작…….”
“그걸 왜 성국이 하는 것이오?”
카리엘의 물음에 교황의 눈이 떨렸다.
여우 같은 입놀림으로 선수 쳐서 카리엘이 말하려는 의도를 뭉개 보려 했으나 빙그레 웃는 카리엘에게 저지되고 말았다.
“작은 실수? 흑마법사와 결탁한 것이 언제부터 작은 실수였소?”
“신을 모시는 자들의 잘못은 곧 성국의 잘못. 그렇기에 교황인 제가 직접 그들을 처벌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걸 왜 성국이 바로잡는 것이오?”
카리엘이 교황의 말에 정면으로 반박했다.
이제야 사람들도 카리엘의 어떤 의미로 교황의 말에 반박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제국 내에서 감히 흑마법사들과 결탁한 쓰레기들을 성국이 무슨 권리로 처벌하려는 것이냐고 물었소.”
“……신을 모시는 자들에 대한 처우는 제국의 성황께서 못 박으신 걸로 압니다.”
“그걸 어긴 것은 성국 아닌가?”
카리엘은 기계적으로 짓던 웃음마저 지우면서 교황을 바라보았다.
“귀족들만이 아니라 황궁에도 쓰레기 짓을 일삼던 것이 그대들이었지. 감히 황궁에 수작을 부린 신관들의 숫자가 수십이 넘소.”
“……그 역시 책임을 통감하며 성국은 제국에서 원하는 배상금을 전부 드릴 용의가 있습니다.”
카리엘이 강하게 나오자 교황 역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치를 꺼내 올인했다.
하지만 카리엘은 속으로 웃을 수밖에 없었다.
천하의 교황이 내민 패가 겨우 저것이었다.
애초에 판 자체가 제국에 압도적으로 유리한 형국이니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예하께선 한 가지 착각하고 계시는 것 같소.”
“착……각 말입니까?”
“그렇소. 배상금? 그거야 제국에 피해를 입힌 것에 대한 보상이니 당연히 줘야 하는 것들 아니오? 우리가 대륙 회의에서 주로 논할 주제는 흑마법사와 관련된 것으로 알고 있소.”
카리엘의 말에 교황의 눈이 떨렸다.
자신이 어떤 의도로 이런 말을 했는지 눈치챈 것이다.
그토록 피하고자 했던 주제.
일부러 배상금이란 먹이를 던져 주면서까지 막으려 했던 주제를 카리엘이 꺼내 들었다.
“제국은 더 이상 성국을 믿을 수가 없을 것 같소.”
카리엘의 말에 연회장은 순식간에 사람들의 웅성거림으로 가득 채워졌다.
“흑마법사란 놈들은 간교하오. 내가 직접 겪어 봐서 잘 알지.”
카리엘이 그렇게 말하면서 자신이 수도에서 흑마법사들을 찾아냈던 일과 서북부, 남동부에서 겪은 일을 각색해서 말해 주었다.
그러자 어느새 연회장은 카리엘의 말을 경청하는 분위기로 흘러갔다.
“클레타 공작과 피레스 공작도 알다시피 흑마법사들을 토벌하는 것은 굉장히 힘든 일이오. 그런 이들을 아직 내부도 완벽하게 정리하지 못한 성국 혼자 감당할 수 있겠소?”
일부러 남부의 마스터들을 끌어들인 카리엘이 빙그레 웃었다.
그러자 두 공작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남동부에서의 싸움이 쉽지 않았음을 인정하자 다른 이들이 공감했다.
그들 역시 광장에서 카리엘이 어떤 싸움을 해 왔는지 간접적으로나마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자 교황이 이 분위기를 바꿔 보고자 나섰다.
“그러니 더더욱 힘을 합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성국은 이미 가장 낮은 곳에서 제국과 다른 국가를 도울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아! 물론 힘은 합쳐야 하오. 그러기 위해 대륙 회의를 연 것 아니겠소?”
스스로 낮춰서 봉사하고자 하는 교황.
정말 신을 따르는 성자와도 같은 모습이었지만 카리엘은 진한 미소를 지으면서 여유롭게 대처했다.
“한데 흑마법사와 싸우기 위한 신관들의 숫자가 너무 부족하다고 생각지 않으시오?”
몸을 돌려 남부의 국왕들에게 묻는 카리엘.
그러자 남부 연합의 인원들이 웅성거렸다.
서대륙의 종교를 통일하다시피 한 성국.
하지만 여전히 남부에는 민간신앙의 형태로 그들의 전통 신앙이 남아 있었고, 그들 역시 ‘신성력’을 사용할 수 있었다.
‘더 이상 성국에 맡겨 둘 수만은 없다.’
카리엘이 각국의 신앙을 부활시켜 흑마법사에게 대응하자는 의견을 돌려서 제시하자 남부의 두 왕의 눈이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너희들도 신권이 거슬리잖아? 이참에 같이 정리하자.’
카리엘의 물음에 숨겨진 제안에 두 왕이 묘한 눈빛으로 교황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