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 >
20. 마지막 가르침? (2)
신권이 불편하지 않은 왕은 존재하지 않았다.
처음엔 이용하려 했을 것이다.
보다 쉽게 자국민을 통제하고 명분을 쌓는 데에는 그만한 게 없을 테니까.
하지만 이 신권이라는 것이 세대를 거듭하다 보면 왕이 통제하기 힘들 정도로 성장하게 된다.
그러면 나중엔 왕보다 더 강한 입김을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오랜 세월을 거쳐 온 국가들일수록 이런 현상이 두드러지는데 남부의 두 왕국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방의 지배자들을 통제하기 위해 타국의 신을 밀어줬더니 지금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강해졌다.
‘한 번은 정리해야지.’
‘어린 황태자에게 놀아나는 게 자존심은 상하지만 나쁘지는 않아.’
성국은 제국을 견제하기도 바쁠 것이니 자신들은 그저 제국이 뚫어 놓은 길을 걷기만 하면 되었다.
가끔 제국이 지친다 싶으면 뒤에서 밀어주는 정도만 해 주어도 충분하리라.
두 왕국의 국왕들이 교황을 바라보는 눈빛이 변하자 주변에 있는 귀족들 역시 생각에 잠겼다.
신권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아이론 연맹과 공국 역시 이 상황을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상인들의 연맹체에 가까운 아이론과 기사들의 나라라 불리는 공국이지만 서대륙 전체에 영향력이 강해진 성국이 불편했었다.
하지만 이번 대륙 회의를 계기로 성국의 영향력이 급감할 것 같자 회의에 임하는 태도가 적극적으로 변했다.
공국 같은 경우 몬스터들이나 동대륙에서 넘어오는 범죄자들을 소탕하느라 부상자들이 많았는데, 이럴 경우 치료사들로는 한계가 있어서 매번 성국에 아쉬운 소리를 하는 처지였다.
당연히 치료 비용 역시 그들의 입맛대로 부를 수 있었기에 매년 엄청난 자금이 소모되었다.
그런데 대륙 전체에 많은 종교들이 생겨난다면?
막대한 돈을 지불하는 공국이라는 먹잇감을 두고 경쟁하게 될 테니 그것만으로도 소모되는 자금을 엄청나게 줄일 수 있었다.
아이론 연맹 같은 경우 성국이 몰락할 경우 서대륙에 있을 파장을 계산하느라 정신없었다.
상인들답게 신전들이 빠져나간 자리를 다른 것이 채울 경우를 계산하고, 또 성국이 몰락할 경우와 제국이 더 부흥할 경우를 계산해 줄타기를 해야 했다.
“이거 내가 괜한 말을 한 것 같소.”
침묵 속에서 눈알만 굴리는 풍경을 보면서 카리엘이 여유롭게 웃었다.
“흑마법사들에 관해선 성국이 제일가는 전문가일 텐데 괜히 심기를 상하게 한 것이 아닌가 걱정되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신관들이 믿음을 보이지 못하는 것이니 성국의 잘못일 테지요.”
크게 한 방 먹었으면서도 여전히 인자한 표정으로 답하는 교황을 보며 카리엘은 속으로 감탄했다.
‘여우답게 한 방으로는 부족하다 이거지?’
카리엘이 그렇게 생각하면서 마주 웃었다.
“어떤 결정이 내려질지 모르지만 앞으로도 흑마법사에 대한 성국의 역할은 변함없을 것이오.”
“허허…… 그리 생각해 주신다면 감사할 따름이지요.”
그렇게 말하며 교황은 살짝 고개를 숙였다.
사실상 성국의 패배 선언.
대륙 회의의 전야제이자 기 싸움의 전초전에서 제국이 승리했다.
그 상황을 만들어 낸 카리엘은 만족스러운 웃음과 함께 다른 국가의 정상들과 의례적인 인사를 하고는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소문대로군요.”
“어린 얼굴에 속아 만만하게 보았다가 한 방 먹었군요.”
태양검의 말에 교황이 미소를 지으며 카리엘이 나간 문을 바라보았다.
분명 입은 웃고 있지만 눈은 어느 때보다 싸늘했다.
카리엘이 오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자신의 의도대로 놀아나던 분위기였는데, 그것을 강력한 한 방으로 박살 냈다.
제국이 압도적인 우위를 가져갈 수 있는 판이었다 하더라도 분위기 자체를 단번에 자신에게로 끌어오는 능력만으로도 그와 관련된 소문이 절대 과대평가된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대륙 회의를 버텨 내는 것이 쉽지 않겠습니다.”
교황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이미 그의 머릿속에서 배상금을 내는 선에서 마무리하고 제국 내에 신전의 숫자를 유지하겠다는 생각은 지워진 지 오래였다.
제국 내에 있는 신전을 몇 개만이라도 남겨 두는 것.
그리고 각국에 있는 신전들의 영향력을 조금이라도 유지시키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래야만 나중에라도 제국에 대한 성국의 영향력이 부활할 티끌만큼의 희망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단 한 번의 기 싸움으로 교황이 기존의 전략 자체를 대폭 수정할 때, 다른 국가들 역시 전략 자체를 수정했다.
‘성국을 제물로 삼자!’
모두가 이런 생각으로 교황을 바라보았다.
카리엘이 연회장에서 교황을 물어뜯으면서 자신들에게 의례적인 인사를 한 순간 모든 국가들이 성국을 몰락시키는 데 암묵적으로 합의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 * *
그렇게 각국의 정상들을 환영하는 자리에서 공개적으로 교황을 물먹인 일은 순식간에 수도에 퍼져 나갔다.
하루가 다 지나기 전에 축제를 즐기는 사람들 대부분이 이 사실을 알 정도였다.
그런 상황에서 마침내 본격적인 대륙 회의가 시작되었다.
회의가 시작되는 당일 아침.
황태자 궁으로 급히 두 황자를 부른 카리엘은 두 사람을 앉혀 놓고 말했다.
“지금부터 두 가지 계획으로 갈 거야.”
“두 가지요?”
“그래.”
루피엘의 물음에 카리엘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지금 너희들의 수준으로는 교황을 감당하긴 어려워. 그러니까 각자 역할을 분담해야 해.”
카리엘의 말에 두 황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륙 회의를 주관하면서 자신들의 부족함을 여실히 느꼈기에 자신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자 카리엘은 그런 동생들의 어깨를 두드려 주며 말했다.
“세리엘 넌 철저하게 흑마법사를 서대륙에서 몰아내는 것에 중점을 두고 회의를 주관해.”
“몰아내는 것 말입니까?”
“그래.”
카리엘이 세리엘을 보면서 다시 한번 강조했다.
“흑마법사들의 절멸이 아니야.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들을 서대륙에서 몰아내는 것이 주된 목적이야. 교황의 간교한 혀에 속지 말고 무조건 이걸 밀어붙여.”
“굳이 그럴 필요가…….”
세리엘의 말에 카리엘이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흑마법사들을 완전히 끝장내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 것 같아?”
“그건…….”
“시간이 늘어지면 신관들이 다시금 기어오를 가능성이 있어. 그러니 서대륙에서 몰아내는 것을 목표로 움직여야 해. 그래야 성국을 나락까지 떨어뜨릴 수 있다.”
카리엘의 말에 무슨 의도인지 이해한 세리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외무대신 정도면 내 의도가 뭔지 파악했을 거야. 그러니 옆에 두고 수시로 도움을 받아.”
“알겠습니다.”
“좋아. 그럼 다음으로 루피엘. 내가 준비하라고 한 건?”
“끝났습니다.”
카리엘이 사전에 성국을 제외한 다른 종교의 신관들의 능력에 대해서 조사하라고 명했기에 루피엘은 품속에서 간략하게 정리한 정보들이 담긴 종이 뭉치를 꺼냈다.
“넌 은연중에 성국을 제외한 수장들에게 우리 계획이 이렇다는 걸 어필해야 한다.”
제국 내에 있는 민간신앙들의 부활.
이것은 남부 왕국들에게는 확실히 먹힐 카드였다.
제국이 먼저 움직인다면 남부 왕국 역시 신권을 약화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힘을 실어 줄 것이다.
문제는 교황이다.
“……교황의 견제를 뚫고 해야겠지요?”
루피엘의 물음에 카리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들의 영향력을 지키기 위해 교황이 사력을 다해 막아설 것이 분명했다.
루피엘은 그 견제를 뚫고 타국의 수장들에게 그것을 어필해야 했기에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내무대신의 도움을 받아. 교황의 말에 현혹되지 말고 옆에서 계속 그가 하는 말을 듣기만 해. 그것만으로도 어느 정도는 방어가 될 거다.”
“……예.”
자신 없는 표정을 짓는 루피엘.
그건 세리엘 역시 마찬가지였다.
서대륙에서도 유명한 늙은 여우를 아직 어린 자신들이 상대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
예전이었다면 몰랐겠지만 대륙 회의를 주관하게 되면서 카리엘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했던 것인지 뼈저리게 느꼈다.
아는 만큼 보이는 법.
두 황자는 예전과는 다르게 거인처럼 커 보이는 카리엘의 그림자에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너희들이 황제가 되려면 지금보다 더한 위기를 겪게 될 거다. 그때도 지금처럼 이럴 거냐?”
카리엘의 물음에 침묵하는 두 황자들.
아직 어린 두 황자들이었기에 카리엘은 한숨을 쉬면서 다독였다.
지금은 매를 들 때가 아니라 다독여 줄 타이밍이었다.
“너희는 잘하고 있어. 어차피 판은 우리가 압도적으로 유리해. 조금 손해 본다고 하더라도 티도 안 날 만큼 유리하니까 쫄지 말고 해.”
“……예.”
“알겠습니다.”
두 황자들의 자신 없는 목소리에 카리엘이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한 가지 도움이 되는 말을 해 주자면 대륙 회의에 참가하는 수장들은 회의에 집중할 수 없을 거야.”
“예?”
“무슨 말씀이십니까?”
카리엘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두 황자들.
방금 전까지 자신 없던 표정은 사라지고 의문만 가득 담긴 표정을 보이는 귀여운 동생들에게 카리엘은 선물을 주었다.
“내가 직접 회의를 주관하지 않는 게 궁금했지?”
“예.”
세리엘의 대답에 카리엘이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직접 타국의 사신들을 하나하나 만나 볼 생각이야.”
“예? 설마…….”
루피엘이 설마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 배상금 문제를 마무리 지어야지.”
카리엘의 말에 두 황자들의 얼굴이 환해졌다.
“대륙 회의는 흑마법사들에 대한 것이 주된 주제지. 그러니 배상금 문제는 따로 만나야 하지 않겠어?”
“예! 그렇지요.”
“맞습니다.”
“그러니까 부담 갖지 말고 해. 가드 올리고 방어만 잘하고 있으면 내가 알아서 쥐어 패 줄게.”
카리엘의 말에 든든한 형님 뒤에 숨은 꼬맹이들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교황의 말에 현혹되지 않고 카리엘이 명령한 것만 잘 수행하자고 몇 번이나 되뇌면서 황태자 궁을 빠져나가는 동생들.
그런 동생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카리엘은 타리온을 불렀다.
“사신들과 만날 준비를 해.”
“미리 연통을…….”
“그러면 안 되지.”
바로 행동으로 옮기려는 타리온을, 카리엘이 멈춰 세웠다.
“연통은 대륙 회의가 시작된 직후에 해.”
그렇게 말하며 카리엘은 활짝 웃었다.
악마와도 같은 웃음에 타리온은 자신도 모르게 움찔거렸다.
타국의 수장들과 격을 맞추기 위해 차기 황태자 후보들을 대륙 회의에 보냈다.
그런데 배상금 문제를 처리할 사신들은 어떨까?
격의 차이가 심각하게 나는 터라 황태자가 반은 이기고 시작하는 상황에서 기울어진 판을 뒤집을 힘이 있을까?
“흠…… 누굴 먼저 만나야 하나?”
카리엘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재밌다는 듯 웃었다.
이미 며칠에 걸쳐서 사신들을 반쯤 죽여 놓을 자료들을 준비해 놓았다.
남은 건 팩트를 기반으로 한 방씩 날리면서 다져 놓는 것뿐.
“시작한 것 같습니다.”
여유롭게 차를 마시면서 회의가 시작하기를 기다리자 타리온이 다급히 들어와 회의의 시작을 알렸다.
“분위기는?”
“나쁘지 않습니다. 일단 두 황자 저하들께선 철저히 교황을 무시하며 회의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괜찮은 전략이야. 외무대신이 짠 건가?”
“그런 듯합니다.”
황자들의 부족한 실력으로 괜히 교황과 말을 섞어 봐야 좋을 게 없다.
이럴 땐 철저하게 무시하는 전략으로 가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후에 말이 나올 수 있다고 해도, 일단 이기는 게 중요했다.
“이 정도면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네.”
“그런 듯싶습니다.”
두 황자들이 교황을 무시하는 전략을 취했으나 남은 국가의 수장들 역시 만만한 존재들이 아니었다.
교황만큼은 아니라고 해도 다들 정치 짬밥은 꽤나 먹은 자들.
특히 아이론 연맹의 수장 같은 경우 상인들의 수장이나 다름없기에 입놀림 역시 상당했다.
“시간을 오래 끌어서 좋을 게 없지. 바로 시작하자.”
동생들을 위해서 빠르게 움직이기로 한 카리엘이 타리온을 바라보자 그가 고개를 숙이며 물었다.
“어디부터 연통을 넣으면 되겠습니까?”
“일단 가볍게 아이론부터 가 볼까?”
카리엘의 말에 타리온이 고개를 숙이고는 궁에서 빠져나갔다.
상인들의 연합체인 아이론.
그런 만큼 돈에 민감한 놈들이었다.
그런 놈들을 상대로 배상금을 왕창 뜯어낼 수 있다면? 그것 자체가 기준점이 되어 다른 국가들을 압박하기도 쉬워질 것이다.
“자! 그럼 오랜만에 혓바닥 싸움 좀 해 보자고.”
그렇게 중얼거리는 카리엘은 어느 때보다 즐거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