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 >
21. 드디어 은퇴다!
각국의 사신단이 대륙 회의에 집중하는 사이 뒤통수를 세게 후려친 카리엘 덕에 제국은 압도적 우위를 점하며 교섭을 이어 나갈 수 있었다.
제국이 받아야 할 배상금도 중요했지만 가장 중요한 건 흑마법사들이었다.
적어도 그들이 서대륙에서 완전히 사라지기 전까지는 각 국가의 협력이 필요했기에 마냥 때리기만 할 수는 없었다.
제국이 자비를 보여야 각국이 반강제적으로라도 협력을 의지를 가지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카리엘의 포지션이 굉장히 중요했다.
“뒤에서 때리고 앞에서 달랜다라…….”
아이론 연맹의 수장인 제이론 폴이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바로 어제만 하더라도 카리엘과 기 싸움을 하고 왔던 게 무색하게, 두 황자는 카리엘을 달래 보겠다는 말과 함께 흑마법사의 협력에 좀 더 힘을 보태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이제 중반부로 접어드는 대륙 회의 일정 동안 카리엘은 지독하게 그를 괴롭혀 왔다.
그나마 아이론은 사정이 나은 편에 속했다.
성국 같은 경우 정말 무서울 정도로 물어뜯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첫날만 해도 좋았던 교황의 인상이 그 이후로 계속 굳어 있을 정도로 상황이 좋지 않았다.
평생 웃는 얼굴로 지내왔던 교황의 표정조차 바뀔 정도로 카리엘이 괴롭혔다는 의미니까.
교황뿐만 아니라 각국의 수장들 전원이 굳은 표정으로 대륙 회의에 참여하고 있었다.
모두 지친 표정으로 겨우 앉아 있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그런 그들에게 2황자인 루피엘이 웃으며 말했다.
“음…… 마지막으로 여러분들에게 한 가지 좋은 소식을 들려드릴 것 같소.”
루피엘의 말에 다들 고개를 갸웃거렸다.
모두 ‘너희들에게 좋은 일이지!’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루피엘을 바라보았다.
“제 형님이 은퇴하실 것 같습니다.”
루피엘의 말에 다들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한마디씩 건넸다.
다들 안타깝다는 말과 함께 어려운 결정을 했다는 기계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미 카리엘이 보인 능력이 있는데 황태자 자리에서 내려오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냐는 표정이었다.
그런 그들의 반응을 보면서 루피엘이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황태자 자리에서 내려오는 순간 모든 업무에서 손을 떼겠다고 말하셨습니다. 아마 곧바로 폐하께서 지정해 주신 영지로 떠나실 것 같습니다.”
루피엘의 말에 회의장에 있는 수장들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은퇴식이 정해졌습니까?”
“이틀 뒤가 될 것이오.”
제이론 폴의 물음에 루피엘이 침울한 표정으로 답했다.
그런 황자의 반응을 본 제이론은 이것이 거짓이 아님을 깨달았다.
‘황자들을 키우기 위함인가?’
제이론이 그렇게 생각하며 두 황자들을 바라보았다.
이미 완성된 존재인 카리엘의 은퇴가 확정된 상황에서 남은 건 두 황자의 성장이었다.
그리고 차기 황제에 대한 시험도 겸할 것이다.
제국의 압도적 우위로 대부분의 협상이 마무리된 상황에서 남은 건 자잘할 것들뿐이었기에 가능한 조치였다.
물론 배상금을 토해 내는 입장에서야 크겠지만 제국 입장에선 중요도가 떨어지는 것이니 두 황자에게 완전히 맡기려는 것 같았다.
각국의 수장들이 자존심이 상한다는 듯 표정을 구겼지만, 그것과 별개로 이건 기회였다.
제국의 황위 다툼을 통해 각국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기회.
“모두 형님의 은퇴식에 참석해 빛내 주셨으면 좋겠소.”
묵묵히 침묵을 지키던 세리엘의 말에 각국의 수장들이 웃으면서 참석하겠다고 답했다.
혹시라도 기분이 나빠져 대륙 회의 이후로 미룰까 봐 얼른 답하는 수장들을 보며 두 황자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제는 온전히 자신들의 힘으로 여우 같은 수장들과 싸워야 했다.
엄청난 부담감에 축 처진 어깨로 빠져나가는 두 황자.
하지만 그 둘을 보는 각국의 수장들의 표정은 어두웠다.
카리엘이라는 괴물에 가려져서 그렇지, 두 황자 역시 충분히 천재라 불릴 만했다.
차기 마스터와 마도사가 될 가능성이 있는 천재들이 이른 나이에 정치 경험까지 쌓았다.
그런데 그게 평범한 것도 아닌, 괴물이 짠 판에서 쌓은 실전 경험이었다.
‘누가 황제가 되든 험난해지겠어.’
제이론이 그렇게 생각하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나마 ‘괴물’이 황위에 관심이 없는 것에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하며 자리를 떴다.
괜히 괴물이 다시금 황위에 관심을 보이지 않도록 최대한 은퇴식을 축하해 주기 위해 귀한 선물을 구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자 다른 국가의 수장들 역시 괴물이 마음을 바꿀까 봐 서둘러 발걸음을 놀렸다.
* * *
그렇게 회의장이 비워지며 고요한 상태가 만들어질 무렵, 황제의 궁은 주요 인사들로 북적거렸다.
“폐하를 뵙고자 한다.”
데이비어 공작의 말에 시종장이 황급히 황제에게 알현 요청을 알렸다.
잠시 후 시종장의 알현 요청이 받아들여져 안으로 들어간 데이비어 공작은 뜻밖의 인물들이 황제와 같이 있는 것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자네…….”
“늦었군.”
월크셔 공작이 내무대신과 외무대신, 감찰총장과 함께 있었던 것이다.
“폐하를 뵙습니다.”
“황태자 문제로 자네들까지 올 줄은 몰랐군.”
황제가 피식 웃었다.
은퇴를 반기던 이들이 찾아온 것도 웃긴데 중립을 지키던 이들까지 찾아와 황태자의 은퇴를 만류하려는 게 웃겼다.
“미리 말해 두자면 황태자의 은퇴를 더 이상 미룰 수는 없네.”
황제가 미리 마스터들이 할 요구를 칼같이 잘라 냈다.
이미 한계까지 미뤄 두었기에 또다시 미뤘다간 카리엘이 무슨 일을 벌일지 알 수가 없었다.
일단 파업은 기본이요, 분노에 눈이 돌아가면 제국을 떠나기 위해 흑마법사와 손잡을지도 모를 일이다.
망상에 가까운 일이지만 카리엘의 성정을 어느 정도 파악한 황제는 어쩌면 그가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은퇴가 어렵다면 재상직이라도 유지시키심이…….”
“일하기 싫다고 은퇴하는 판국에 재상 자리를 유지시킬 수 있겠소?”
아켈리오의 말에 월크셔 공작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카리엘이 황태자 자리를 내려놓는 궁극적인 이유는 일하기 싫어서였다.
처음엔 정치적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동안 카리엘이 해 온 일들과 행동들을 보면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매일같이 일하기 싫어 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으니까.
심지어는 ‘이것만 끝나면 은퇴다!’, ‘조금만 있으면 은퇴할 수 있다.’, ‘은퇴까지 머지않았어!’ 같은 말을 중얼거린다는 소문으로 나돌 정도였다.
그런데 월크셔 공작은 이게 단순한 소문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도 대전 회의가 끝나고 궁을 나가는 도중에 들어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은퇴를 향한 갈망이 얼마나 대단한지 흑마법사를 박살 내고 대륙 회의를 만들어 명분을 만들고 튀려고 하고 있었다.
그런 이를 황궁에 남겨 둔다?
무슨 일을 벌일지 알 수 없었다.
“일단 태자 전하의 은퇴는 막을 수는 없을 겁니다.”
이 자리에 모인 이들 중 황태자와 가장 가까운 포돌스키가 담담히 말했다.
그러자 모두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은퇴시킨 후를 생각해야 합니다.”
포돌스키의 말에 다들 그를 바라보았다.
황제 역시 무슨 방안이 있냐는 듯 바라보자 포돌스키가 빙그레 웃었다.
“전하가 폐하께 작은 영지 하나만 달라고 하셨다지요.”
포돌스키의 말에 황제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수도에서 멀지만 작고 한적한 영지로 보내는 게 핵심입니다.”
포돌스키의 말에 외무대신이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듯 빙그레 웃었다.
“그렇지요. 작고 한적한 영지지만 그 근방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알 수 없는 법.”
“허…… 그렇군. 제법 그럴듯한 생각이야.”
황제도 눈치챘는지 빙그레 웃었다.
머리가 맑을 때의 황제는 황태자조차 한 방 먹일 수 있을 정도로 영민했기에 곧바로 의도를 파악했다.
“북동부와 남동부 둘 중 하나로 결정하면 되겠군.”
흑마법사의 도주 루트인 북동부와 남부 왕국들과 공국의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남동부 중 하나에 영지를 줄 생각을 한 황제가 피식 웃었다.
그 미소를 보고 황제의 생각을 눈치챈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포돌스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가장 중요한 점은 노골적으로 국경 근처의 영지로 보내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렇지. 안전한 영지로 ‘착각’할 수 있는 곳으로 보내야겠지.”
황제가 포돌스키를 바라보았다.
중앙정치에 남길 수 없다면 아직 황자들에게 ‘무리’인 굵직한 사안들 중 하나를 전 황태자에게 맡기면 될 일이다.
다들 음흉한 눈빛으로 합의를 마치자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황제의 궁에 또 하나의 무리가 찾아왔다.
“폐하, 변경백들이 폐하를 보고자…….”
“들어오라 하라.”
황제의 명령에 문이 열리고 변경백들이 찾아왔다.
현 황제의 재임 기간에 한자리에 있는 것이 손에 꼽을 정도였던 변경백들이 황제의 궁에 직접 찾아왔다.
그들이 무엇 때문에 알현을 청한 것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으나 지금까지의 상황이나 알현을 요청한 시기를 보면 황태자의 은퇴를 막기 위함이라고 짐작할 수 있었다.
“폐하를 뵙습니다!”
“그대들도 은퇴를 막고자 온 것인가?”
변경백들의 인사에 황제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물었다.
“예, 폐하. 혼란스러운 정국에 은퇴라니요. 적어도 제국이 안정된 이후로 미루시옵소서.”
시카리오 후작의 말에 모든 변경백이 같은 뜻이라는 듯 고개를 숙였다.
모든 변경백의 주청에, 이곳에 모인 모든 이들은 현 황태자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지금 당장 황좌에 오르는 것도 문제없겠군.’
‘황좌에 마음이 없다는 걸 다행이라고 여겨야 하나?’
각각 다른 황자를 밀고 있는 월크셔 공작과 데이비어 공작이 황제의 주위에 앉아 있는 변경백들과 대신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빛은 반쯤 황태자를 지지하고 있었다.
제국의 안정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중립파와 변경백에게 현 황태자는 매력적인 인물이었다.
장자라는 명분과 황태자라는 직위, 무엇보다 제국의 혼란을 잠재우고 다시금 대륙 최강의 국가로 이끌 인물로 본 것이다.
문제는 당사자가 그럴 생각이 없다는 것이지만…….
“대전 회의라도 열린 기분이군.”
황제의 말에 다들 헛기침하면서 고개를 돌렸다.
“후…… 그럼 다들 원하는 바를 말해 보거라.”
황제의 말이 떨어지자 다들 눈빛을 보냈다.
그 자리에서 순식간에 동맹이 만들어졌다.
아무리 제국의 고위 귀족이라도 타국과 협상할 때는 상당히 피곤하다.
하지만 전 황태자라면?
거기다 황자였기에 큼지막한 직분을 주는 데 아무런 걸림돌도 없었다.
여차하면 특수한 부서를 신설해 그곳의 장을 맡길 수도 있었다.
거기다 은근 일 처리가 꼼꼼한 황태자이기에 일단 그쪽 지역에 박아 놓으면 자잘한 문제들까지 일사천리로 끝날 가능성이 높았다.
귀족들 간의 자잘한 다툼으로 은근 스트레스를 받는 대신들과 고위 귀족들이기에 황태자를 데려가는 것을 모두가 반길 것이다.
“결정됐군.”
몇 시간 동안 이어진 설전 끝에 마침내 한 지역이 결정되자 승자의 위치에 있는 자들은 웃음을, 패자의 위치에 있는 자들은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하온데 황태자 전하가 이를 받아들이겠습니까?”
가만히 듣고 있던 시종장이 조심스레 말했다.
그러자 황제가 웃음을 터뜨렸다.
“받아들일 것이다, 내가 그리 만들 것이니.”
황제가 그렇게 말하자 다들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그렇게 황제의 궁에서의 은밀한 회담이 끝나고, 마침내 은퇴식 날이 되었다.
아쉬운 표정을 짓는 대신들, 황자들과 달리 환하게 웃음 지으며 카리엘의 은퇴를 반기는 각국의 사신단.
서로 상반된 표정으로 은퇴식이 거행될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바라시던 일이 이루어지는군요.”
“그래. 오래 걸렸지.”
카리엘이 지겨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지만 타리온은 오래 걸렸다는 말에 동의할 수가 없었다.
‘본격적으로 움직이신 지 1년도 안 됐습니다!’
카리엘의 전생을 모르는 타리온 입장에서는 순식간에 지나간 일이었지만 어찌 되었든 모시는 주군이 그토록 바라는 일이 이루어졌으니 축복해 주어야 했다.
“경하드립니다.”
“고마워.”
카리엘이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궁을 둘러보았다.
은퇴하고 한적한 영지로 떠나야 할 테니 이곳에 다시 올 일은 없으리라.
시원섭섭한 표정으로 방을 둘러보던 카리엘이 타리온에게 말했다.
“가자.”
“예.”
문이 열리자 카리엘과 타리온은 화려하게 치장된 마차에 올라탔다.
황금으로 치장된 마차가 황태자 궁에서 그랜드 홀까지 이어지는 꽃길을 따라 움직였다.
그렇게 그랜드 홀에 다가갈 때, 앞에 있던 기사 하나가 발검을 하며 외쳤다.
“황태자 전하의 은퇴식을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