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 >
22. 걸리면 뒈진다!
성황리에 은퇴식이 끝나자 황궁 안에 있는 대신들과 사신단은 대륙 회의를 마무리했다.
축제 역시 공식적으로는 끝이 났다.
은퇴식을 하는 날에 축제를 열기 때문이다.
화려했던 축제를 뒤로하고 각자의 삶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눈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하지만 모두가 아쉬워한 것은 아니었다.
“……저하.”
타리온이 조심스레 말을 걸었으나 카리엘은 묵묵부답이었다.
대신 무언가를 열심히 적고 있었다.
눈에는 불길이 타오르는 것 같은 분노가 깃든 상태로 밤을 새며 뭔가를 계획했다.
그렇게 아침이 되어서야 일을 다 끝낸 카리엘은 피곤한 표정으로 타리온을 찾았다.
“배고파.”
카리엘의 한마디에 즉시 푸짐한 아침 식사가 차려졌다.
카리엘은 피곤한 표정으로 아침을 먹기 시작했다.
우물거리면서 생각에 잠긴 카리엘.
‘오히려 잘됐어. 수르트를 위해서라도 한 번쯤은 그 근방으로 갔어야 해.’
카리엘은 애써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남동부에서 폭주하는 파편을 막아 낸 이후 잠들어 버린 수르트와, 정령왕의 파편.
그로 인해 그의 몸 역시 화기가 다시금 맹렬히 움직이고 있었다.
‘화산을 억누른 게 컸나?’
초대 황제의 힘이라고는 해도 폭주하는 정령왕의 파편 때문에 터져 나올 것 같은 화산을 강제로 잠들게 했다.
그로 인해 카리엘의 몸 상태는 엉망이었다.
지금이야 그동안 갈고닦은 강체술로 버틸 수 있지만, 나중에는 문제가 될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난다면 회복될 가능성이 높지만, 어떤 문제가 일어날지 알 수 없기에 다른 계약을 통해 미리 화기를 더 안정화하는 편이 좋았다.
‘이 생각은 나중에 하자.’
카리엘이 그렇게 생각하며 곧바로 침대로 들어가 눈을 붙였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타리온은 한숨을 쉬며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친위대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많이 노하신 것 같은데…….”
토토의 물음에 타리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흑마법사가 난리 칠 때보다도 더 분노한 모습을 보이는 카리엘.
타리온 입장에선 카리엘이 어떤 일을 벌일지 알 수 없기에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황태자 자리를 다시 달라고 하실 수도…….”
“그럴 일은 없어.”
타리온이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옆에서 모셔 온 타리온이기에 잘 알았다.
한 방 먹었어도 목표는 달성했으니, 다음 목표를 설정하고 다시 달성하면 그만이었다.
그것을 위해서 잠도 안 자고 계획을 세우는 것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았다.
“……그렇군. 그럼 태자 전…… 아니 황자 저하께선 이곳을 떠나시겠군.”
“아마도. 오늘 자정, 늦어도 내일 아침까진 황궁에서 떠나실 것 같아.”
타리온에게 그렇게 준비해 두라도 명했으니 거의 확실했다.
그러자 토토와 함께 있던 친위대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원한다면 황궁에 남을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말씀하셨다. 깨어나면 물어보실 테니까 준비들 하고 있어.”
어느새 친해진 친위대원들에게 그렇게 말한 타리온은 한숨을 쉬며 등을 돌렸다.
먼 길을 떠나야 했기에 준비할 것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그렇게 타리온이 사라지자 친위대 사이에서 묘한 침묵이 감돌았다.
“……아쉽긴 하네.”
평소에 말이 없던 이리스가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모든 생각이 실력 향상에만 있는 이리스였지만 최근 카리엘과 함께 생활하면서 많은 것이 변했다.
특히 자료를 조사하면서 다양한 투술에 대해 연구할 수 있게 되면서 행복했었다.
그리고 그건 다른 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신들이 원하는 게 전부 있는 이곳 황태자 궁을 떠나야 한다는 것이 몹시 아쉬웠다.
그러나 황궁에 아쉬워하는 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 * *
모두가 쉽사리 떠난다는 결정을 하지 못하고 고심에 빠져 있을 무렵, 사신단은 축제 분위기였다.
“정말이군.”
제이론이 입가에 미소를 그리면서 자신들에게 날아온 공문을 바라보았다.
오늘부터 대륙 회의에서 제국에 대한 배상금 문제도 같이 논했으면 좋겠다는 제안서가 날아왔기 때문이다.
진짜로 황태자가 모든 일에서 손을 뗀다는 것을 뜻했기에 다들 웃을 수밖에 없었다.
“후…… 그럼 이제부터 손해 본 것을 최대한 메워 봅시다.”
제이론의 말에 아이론의 사신단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건 다른 사신단 역시 마찬가지였다.
황태자 하나 빠졌다고 승리를 장담하는 게 이상했다.
분명 제국의 실무자들 역시 아이론 이상 가는 능력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승리를 장담하는 건 그들의 중심에 서서 지휘할 지휘자의 차이가 심했기 때문이다.
“약속을 지킨 황태자에게 경의를!”
교황이 와인 잔을 들어 올리면서 말하자 모든 신관들이 잔을 들어 올렸다.
다른 사신단 역시 약속을 지켜 준 카리엘에게 고맙다는 서신까지 작성하며 서둘러 대륙 회의의 준비에 들어갔다.
벌써 일정의 절반이 훌쩍 지나갔지만, 진짜 시작은 이제부터였다.
어차피 어느 정도 내줄 것은 감안했기에, 남은 부분에서라도 이득을 보는 것으로 방향을 바꾸어 움직여야 했다.
그러자 제국의 대신들 역시 바쁘게 움직였다.
황제가 도와주었으면 싶었지만, 대신급 이상은 황제의 몸이 매우 안 좋음을 다 알고 있었다.
사실 황태자에게 한 방 먹인 것도 기적같이 몸이 회복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두 황자를 믿고 움직여야 하는 상황이라 평소보다 더 많은 자료를 준비하고, 더 세밀하게 계획을 짤 수밖에 없었다.
“……전하가 그립군.”
외무대신의 말에 외무부에 있는 관료들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황태자의 밑에 있다면 미친 듯이 굴려지는 운명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쓸데없는 일이 최소한으로 줄어드는 것과 동시에, 일이 끝나면 확실한 휴식이 보장된다.
게다가 자기가 일한 만큼 성과급 역시 확실히 주어진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본래라면 없었을 쓸데없는 일이 부쩍 늘어 버렸다.
모두가 그것을 체감하기에 최근 들어 한숨이 부쩍 늘었다.
“후…… 얼른 움직이자.”
“예.”
한숨 쉬고 있을 시간도 없었다.
황태자가 없는 대륙 회의가 당장 오늘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외무부는 부산한 움직임을 보이면서 황태자가 없는 대륙 회의 일정의 첫날을 소화해 나갔다.
* * *
그렇게 외무부를 비롯한 여러 부처들이 평소보다 배는 많아진 것 같은 일 더미 속에서 허우적거리면서 첫날을 보내는 동안, 깊게 잠들어 있던 카리엘은 피곤한 눈꺼풀을 힘겹게 뜨고 앞을 보았다.
“저하, 깨셨습니까?”
타리온이 뜨거운 차를 가져오면서 묻자 카리엘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 더 주무시지요.”
“일찍 가야지. 대륙 회의가 끝나기 전까지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카리엘은 친위대를 불렀다.
이곳을 떠나기 전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었기 때문이다.
“결정들은 했나?”
카리엘의 물음에 대답을 망설이는 친위대.
그들의 눈빛에서 이곳 황태자 궁을 떠나는 것이 많이 아쉽다는 것을 느낀 카리엘은 혹시나 해서 준비한 것을 제안했다.
“원한다면 이 궁에 남아도 좋아.”
카리엘의 말에 친위대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혹…….”
“다시 황태자가 될 생각은 없어.”
토토의 말을 끊고 카리엘이 단호하게 답했다.
“하지만 너희는 너희의 꿈이 구축된 이 궁을 떠나는 게 아쉽겠지.”
카리엘의 말에 자신들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인 친위대원들.
“원한다면 남을 수는 있다. 다만 지금처럼 연구같이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여유롭게 지낼 수는 없을 거야.”
그렇게 말한 카리엘은 탁자에 종이를 떡하니 올려놨다.
토토 - 제국군을 위한 기초 운동 방법과 제국민을 위한 생활 체육 연구
이리스 - 병사들을 위한 기초 무술 연구
아르슈나 - 화기 연구(정령 및 고대 주술법 연구 추가)
브리온 – 외과 계열 연구 및 몬스터의 특징에 대한 연구
비록 괴짜들이지만 이들의 실력은 웬만한 기사단장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뛰어났다.
게다가 각자가 가진 독특한 개성 역시 잘만 활용한다면 제국에 큰 도움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면 그들의 특징을 살려서 이곳에서 남을 방법을 찾아야 했다.
“폐하께 너희들이 이곳을 사용할 수 있도록 요청드릴 거야. 다만 대신들을 설득하기 위해선 근거가 필요해.”
괜히 흠 잡힐 일은 남겨 두지 않는 편이 좋았다.
그래서 보다 완벽한 근거를 만들기 위해 이런 제안을 하는 것이었다.
“이제 그만 떠돌고 자리 잡아야지.”
카리엘의 말에 친위대원들이 말없이 침묵했다.
그러자 이리스가 조심스레 물었다.
“저하,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나중에 저하를 찾아가도 되겠습니까?”
“나를?”
“예, 저하의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습니다. 잘만 된다면 제국에도 도움이 될 일입니다.”
이리스의 말에 잠시 그녀의 눈을 바라본 카리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혼란이 어느 정도 잠재워진다면.”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자 아르슈나와 브리온 역시 비슷한 약속을 받아 냈다.
“토토는 뭐 없어?”
“저도 하나 있긴 합니다만…… 제일 나중에 해도 될 것 같습니다.”
“흠…… 그렇다면 모두 남는 것으로 하지.”
그렇게 말한 카리엘은 이따가 저녁이나 같이 먹자고 말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친위대의 일을 다 끝냈으니 남은 것은 하나밖에 없었다.
“미리엘에게 가자.”
“예.”
카리엘에게 남은 한 가지 걱정.
그것은 바로 황궁에 남겨질 미리엘에 대한 걱정이었다.
하지만 이런 걱정은 미리엘의 궁에 도착하자마자 기우에 불과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저하눈 강하시니 괘차늘 거에요!”
“마자요!”
“우우…… 겨우 친해졌눈데…….”
울먹이는 미리엘을 향해 두 소녀가 자신들이 옆에 있겠다며, 자주 놀러 올 거라고 손을 붙잡고 약속했다.
두 명의 어린 소녀들이 미리엘의 궁에 와서 카리엘이 떠나는 것에 우울해진 미리엘을 토닥여 주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카리엘은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언제…… 친구가 생긴 거지?”
“얼마 안 되었을 겁니다.”
최근 부쩍 친해졌기에 자신이 떠나면 울먹이며 따라나선다고 할까 봐 걱정했었다.
그런데 이제 보니 그런 걱정은 하등 쓸모없는 일이었다.
“……친구랑 놀고 있는 것 같으니 방해하지 말아야겠다.”
어개를 늘어뜨리면서 말하는 카리엘의 모습에 타리온이 황급히 말했다.
“미, 미리엘 저하께서 저하가 오시기를 많이 기다렸습니다.”
“……정말?”
“예.”
타리온의 말에 우울했던 카리엘의 눈에 다시금 생기가 돌았다. 용기가 생긴 카리엘이 표정을 가다듬고 옆의 시녀를 바라보자 카리엘이 왔음을 알리면서 문을 열었다.
그러자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던 미리엘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카리엘의 품에 폭 안겼다.
“오라비…….”
카리엘은 울먹이는 미리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왜 울고 그래?”
“오라비 친구 없짜나! 미리엘이 친구 해 줘야 하눈뒈…… 오라비 멀리서 외로워하는 거 시러!”
미리엘의 말에 카리엘의 표정이 굳어졌다.
“오…… 오빠도 친구 있어.”
카리엘의 말에 미리엘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카리엘이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어…… 진짜 친구가 없네?’
잘 생각해 보니 그는 친구가 없었다.
비슷한 나이대라면 글렌이 있지만 엄밀히 말하면 황자들과 친구를 해야 하는 나이였다.
“음…….”
“풋!”
당황하는 카리엘을 본 타리온은 자신도 모르게 입 밖으로 웃음소리를 냈다.
그러자 타리온을 곁눈질로 노려본 카리엘은 속으로 생각했다.
‘나도 친구 있어, 저 멀리 지구에…….’
이곳으로 오기 전에 살았던 저 멀리 차원 너머 지구에 있을 친구들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