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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64화 (64/201)

< 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 >

22. 걸리면 뒈진다! (2)

걱정 어린 표정으로 울먹거리는 미리엘을 겨우 달래 준 카리엘은 그녀와 같이 있는 친구들을 바라보았다.

“월크셔의 공녀와 데이비어의 공녀인가?”

“저…… 저하를…….”

일어서서 인사하려는 그녀들을 제지했다.

미리엘과 비슷한 아이들에게 과한 예를 받을 생각 따윈 없었다.

하지만 인상을 찡그려서 그런 것일까?

공녀들은 카리엘을 무서워하면서 작게 떨고 있었다.

‘동생들이 미리엘을 신경 쓴 건가?’

혼자 외로움을 타고 있을 미리엘에게 친구들을 만들어 주기 위해 두 동생들이 신경을 쓴 듯싶었다.

‘두 공작가 모두 왔다는 건…….’

미리엘이 크면 중립적인 위치에 서서 권력의 중심을 잡아 줄 수도 있다는 뜻이 된다.

‘이제 정말 이곳에서 내가 할 일이 없어지겠네.’

미래에 두 황자의 싸움이 격렬해지면 개입할 생각도 하고 있던 카리엘이었지만 미리엘이 그 역할을 해 준다면 이곳에 있을 필요가 없어진다.

두 황자가 지금 부족한 모습을 보이는 것도, 미리엘이 걱정스러운 것도 아직 어리기 때문일 뿐.

시간이 지나면 카리엘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을 만큼 성장할 것이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카리엘은 미리엘과 두 공녀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직 어린데 마법을 배우는 건가?”

카리엘의 중얼거림에 월크셔 공녀가 흠칫 놀라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아직 어린 나이임에도 마나를 각성한 것을 보고 놀랐을 뿐인데 괜히 어린아이들을 놀라게 한 것 같자, 카리엘은 애써 웃으면서 공녀들을 안심시켰다.

‘각성한 지는 얼마 안 됐군.’

몸에 있는 마나를 컨트롤까지는 할 수 없는지 공녀들의 몸에서 마구잡이로 배출되는 마나의 흐름을 느껴졌다.

‘저 정도면 미리엘도…….’

미리엘이 괜히 공녀들에게 밀리는 것 같자 심기가 불편해진 카리엘이 가만히 미리엘을 바라보았다.

처음 봤을 때부터 묘한 간질거림이 느껴졌던 미리엘.

이것이 단순히 안쓰럽고 미안해서 그런 것인 줄 알았는데, 북서부와 남동부의 일을 겪으면서 그것이 아님을 확실히 깨달았다.

‘좀 더 확실해지면 말해 주려 했는데…….’

카리엘이 아쉬워하면서 미리엘에게 말했다.

“음…… 미리엘, 혹시 재밌는 거 배워 볼 생각 있어?”

“재밌는 거요?”

울먹거리면서 자신을 올려다보는 미리엘에게 카리엘이 자세를 낮춰 눈을 맞춰 주고 말했다.

“확실하진 않지만 너의 몸에도 화기가 있는 것 같아.”

“화기?”

고개를 갸웃거리는 미리엘에게 카리엘이 차분하게 설명해 주었다.

화기를 가진 것도 놀라운 일인데, 더 놀라운 것은 정령왕의 파편과 계약할 때 느꼈던 이질감이 미리엘에게서도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이미 몇 차례 자료를 조사해 본 결과 이 이질감이 정령 친화력이라는 것을 알았다.

“어쩌면 미리엘은 정령술에 재능이 있을지도 몰라.”

카리엘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미리엘.

하지만 뒤에서 듣고 있던 두 공녀는 놀란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 궁에 가면 친위대가 있을 테니까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야.”

“……정령?”

“자세한 건 내 친위대한테 물어봐.”

미리엘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카리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가지 말라는 듯 허리를 꼭 껴안는 미리엘.

“금방 올게.”

카리엘은 거짓말하지 말라는 듯 고개를 도리도리 흔드는 미리엘을 몇 번이나 설득한 후에야 겨우 벗어날 수 있었다.

“아쉬우시다면 황궁에 남아 계시는 것도…….”

미리엘의 궁에서 나오자마자 타리온이 조심스레 제안했다.

하지만 카리엘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제일 마음에 걸렸던 미리엘에게 저렇게 친구도 생겼다는 것을 확인한 이상 황궁에 있을 이유는 조금도 없었다.

여차하면 미리엘을 데리고 나갈 생각까지 했지만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을 확인했으니 홀가분하게 황궁을 나설 수 있게 된 것이다.

* * *

궁으로 돌아온 카리엘은 마지막으로 친위대, 궁의 사람들과 조촐한 파티를 가졌다.

모두가 아쉬운 표정이었지만 카리엘이 그토록 바라던 은퇴였기에 붙잡지는 못했다.

그리고 다음 날이 밝자 새벽부터 카리엘의 궁은 부산스러워졌다.

떠나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황제와 대신들이 무리해서라도 카리엘에게 권한을 부여하려 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대륙 회의가 끝난 이후 혼란스러운 서대륙의 상황이 예측되기에 적어도 북부만큼은 안정시켜 달라는 마음에 강력한 권한을 준 것이다.

물론 크게 한 방 먹은 성국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알 수 없기에 견제해야 한다는 이유도 있었다.

“감찰부에서 자료 받아 와.”

“예.”

카리엘의 명령에 고개를 숙이며 나가는 타리온.

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며 카리엘이 생각에 잠겼다.

대신들과 마스터들이 자신을 엿 먹인 것은 열받는 일이지만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자신의 영지 근처에 쓰레기들이 있는 것이 꺼림칙했기에 이참에 싹 다 정리하고 적당히 성국을 견제할 방안도 마련해 두기로 한 것이다.

‘욜로 라이프를 위한 사전 준비한 셈 치지.’

관광지로 유명한 영지를 받았으니 적당히 북부가 안정화되기만 한다면 정말로 편안한 삶을 영위할 수 있으리라.

으득!

좋게 생각하려고 마음먹긴 했지만, 그게 어디 마음먹는다고 쉽게 되는 일이던가?

카리엘은 가슴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분노에 이를 바득 갈며 살벌하게 눈을 떴다.

“아무래도 누구 하나는 조져야 풀릴 것 같은데…….”

카리엘이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누굴 조져야 이 분노가 가라앉을지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화기가 감정에 동화되어 다시금 술렁거리자 황급히 명상하면서 분노를 잠재웠다.

하지만 부상을 입어서 그런지 쉽게 잠잠해지지 않았다.

“쯧!”

혀를 찬 카리엘은 계속해서 누구를 조질지 곰곰이 생각했다.

자신을 엿 먹인 대신들과 관료들이야 지금도 열심히 구르고 있기에 건드릴 타이밍이 아니었다.

마스터들 역시 각국의 마스터들을 견제하느라 바빴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북부 귀족들? 아니면…… 북동부의 상인들? 아니면 성국의 신관들을 조져야 하나?”

잘 생각해 보니 조질 애들은 넘쳤다.

귀족들치고 뒷돈 안 받은 놈들이 드물었고, 상인들 역시 뒷거래를 안 하면 크게 클 수 없는 구조다.

한차례 걸렀다지만 성국과 가까운 북부 지역에선 여전히 신관들이 힘 좀 쓸 거다.

신전이야 다 날려 버렸다고 하더라도 방랑하는 신관들이 헌금이라는 명목으로 북부인들의 돈을 쓸어 담고 있을 게 뻔했다.

‘수도사 주제에 돈과 여자는 그렇게 밝힌다지?’

청결하고 고결해야 할 수도사들.

신관들 중에서도 신의 말씀을 가장 많이 들어야 할 존재들.

차기 추기경이나 주교급이 될 존재들을 육성하는 수도원의 수도사들이 사실은 제일 더럽다는 게 아이러니했다.

“역시 수도사들부터 조져야 하나?”

성국을 조지기엔 지금이 제일 적기였다.

괜히 시간을 줬다간 다시금 기어오를 수 있었기에 대륙 회의에서 한번 밟아 준 후, 자신이 추가적으로 한 번 더 밟아 줘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후…… 좋아. 수도사들부터…….”

카리엘이 첫 번째로 조질 사람들을 정하며 고개를 끄덕일 때였다.

타리온이 다급하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저하!”

“무슨 일이야?”

“큰일 났습니다.”

타리온이 숨을 헐떡이면서 카리엘에게 서신을 전했다.

“북동부에서 이유를 알 수 없는 대규모 지진이 발생했다고 합니다.”

“……뭐?”

갑작스러운 보고에 카리엘이 미간을 찌푸렸다.

“지진이 산발적으로 계속 일어나고 있는 것이,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것 같습니다.”

“진원지는?”

“제국과 성국의 접경 지역 같습니다.”

타리온의 말에 카리엘이 머릿속에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

“흑마법사들에 대해 조사해 봐.”

“안 그래도 정보부에서도 그것을 의심하고 조사에 들어갔습니다.”

타리온의 보고에 카리엘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이야 몰랐다고 하더라도, 이제 제국도 흑마법사들을 겪어 봤으니 당연히 의심해야 했다.

하필 지진이 일어난 것도 북동부였다.

수백 년간 잠잠했던 지역에서 지진이 일어난다?

그것만으로도 이상한 일인데, 흑마법사의 도주 루트에서 일어났으니 수상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화산 폭발이라는 자연재해를 만들려 했던 흑마법사였기에 어렵지 않게 의심할 수 있었다.

“저하, 아무래도 지금 영지로 떠나시는 것은 위험할 것 같습니다.”

타리온이 걱정 어린 표정으로 말하자 카리엘도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특수 권한을 쥐었기에 황궁 기사들 일부가 따라가겠지만 그것만으로는 확실히 안전을 보장받기는 어려웠다.

자신이 영지에 도착하는 즉시, 흑마법사들이 습격해 올지도 모를 일이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할 때였다.

[가여운 늑대를 구해 주세요. 임무를 완료할 시 특별한 보상이 주어집니다.]

[몇백 년간 숨겨 온 비밀을 밝혀 주세요. 임무를 완료할 시 대륙에 숨겨진 비밀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앞에 보이는 반투명한 창을 본 카리엘은 인상을 찡그렸다.

마치 이 순간이 오기를 기다렸다는 듯 나타나는 반투명한 창의 존재에, 그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마치 예측이라도 한 것처럼 하나하나 해결하게끔 카리엘을 몰아가는 신.

이것이 정말 신이 안배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상황은 맨 처음 자신의 몸을 회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제시된 신화급 존재 넷과 전부 계약할 기세로 몰아붙이고 있었다.

“저하?”

“……타리온.”

“예!”

타리온을 부른 카리엘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북동부 지도를 먼저 가져오고, 그곳에 있는 미지의 지역에 대한 모든 자료들도 가져와.”

“신화적 존재가 연관되어 있다고 확신하시는 겁니까?”

“……그래. 북서부와 남동부에서 그 지랄을 떨었으니 이번이라고 못할 건 없겠지.”

그렇게 말하며 타리온을 보낸 카리엘은 한숨을 쉬었다.

타리온에게 말은 못 했지만 카리엘은 이미 흑마법사들이 어디서 일을 벌이고 있는지 확신하고 있었다.

“태양을 삼킨 미궁인가?”

성국에서는 ‘반역자의 미궁’이라 불리는 그곳에 있는 마수에게 흑마법사들이 무슨 짓을 한 게 틀림없었다.

* * *

얼마 후, 타리온이 가져온 정보들을 훑어보다 미궁에 관한 정보들을 자세히 알아보았다.

그렇게 반나절이 넘도록 미궁에 관한 대략적인 정보를 파악한 카리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군부에 지원 요청하고, 북부군에도 지원 요청해. 목표는 태양을 삼킨 미궁이다.”

“예.”

“성국에도 흑마법사의 목표가 고대의 마수라고 전해. 그러면 알아서 움직일 거다.”

카리엘이 그렇게 말한 후, 곧바로 움직일 준비를 했다.

북서부와 남동부 때처럼 자신이 직접 그곳으로 가야 함을 본능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후…… 아무래도 쥐어 패 줄 놈들은 너희들인 것 같네.”

얌전히 동대륙으로 꺼지면 신경 끄려고 했던 흑마법사들이 자꾸만 자신의 신경을 거슬렀다.

놓아주겠다는데, 자꾸 서대륙에서 깽판을 치려고 하면 이쪽도 다시금 몽둥이를 들 수밖에 없었다.

자기들이 처맞겠다고 설치는데 참고 있는 쪽이 병신이다.

그렇게 카리엘이 미궁을 공략하기 위한 준비, 그리고 자신을 건드린 흑마법사들을 쓸어버리기 위한 준비를 할 때 타리온이 명령한 걸 끝내고 돌아왔다.

“저하! 명한 것을 전부 전했습니다. 하온데 북부 사령관인 시카리오 후작이 저하와 동행하길 원하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래 주면 나야 좋지.”

카리엘이 그렇게 말하면서 3개의 서신을 더 타리온에게 전했다.

“하나는 동부 사령관, 하나는 공국, 마지막 하나는 세리엘에게 전해.”

“예!”

“시간이 급하니 곧바로 북동부로 움직일 거다. 정보들은 그림자를 통해 받을 거야.”

“알겠습니다!”

카리엘의 명령에 또다시 사라지는 타리온.

전력을 다해 사라졌는지, 검은 마력 파장이 만들어졌다.

타리온이 만든 마력 파장을 잠시 바라보던 카리엘은 싸늘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떤 보상인지 모르겠지만 제대로 된 걸 내놔야 할 거야.”

카리엘이 반쯤 협박이 섞인 말을 내뱉으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여차하면 대륙이 망하든 말든 파업할 생각까지 갖고 있었기에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 신을 생각하며 이를 바득 갈았다.

얼마 후, 타리온이 다시금 돌아오자 모든 준비를 끝낸 카리엘은 궁을 나섰다.

그런데 궁 앞에 친위대원 전원과 궁을 지키는 황궁 기사단이 부복하고 있었다.

“저하! 소신들도 함께 가겠습니다!”

카리엘은 그들을 잠시 쳐다보며 갈등했다.

어제 작별 인사까지 해 놓고 다시금 동행하게 된 것이 모양새가 이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황이 이러니 어쩔 수 없었다.

카리엘은 한숨을 쉬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분노의 몽둥이를 휘두르러 함께 가 보자.”

기어코 자신을 귀찮게 만든 흑마법사들을 향해 분노의 몽둥이를 휘두르기 위해 카리엘은 마차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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