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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66화 (66/201)

< 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 >

23. 제국의 진짜 1인자는? (2)

“지진이 생각보다 심각하다고?”

“그렇습니다.”

심상찮은 타리온의 말에 카리엘은 심각한 표정으로 보고서를 받았다.

한 번만 일어나는 게 아니라 반복적으로 지진이 발생하면서 피해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었다.

“진원지는?”

“진원지인 미궁이 붕괴되고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아무래도 전설로 전해지는 마수가 실존하는 것 같습니다.”

타리온의 보고에 카리엘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성국이 철저하게 정보를 가려 놨기에 확실히 알 수 없었던 부분.

전설로만 알려진 마수의 존재가 사실상 진실이라는 것을 이번 기회를 통해 공식적으로 확인했다.

‘마음 같아선 확 까발리고 싶지만…….’

지금은 성국의 도움을 받아야 할 때였다.

‘이건 나중에 까도 될 테니 지금은 제국에 집중하자.’

그렇게 마음을 정한 카리엘은 어떤 식으로 군을 움직여야 할지 생각했다.

미궁을 막기 위해 성국의 정예군이 움직였으니 제국이 다급하게 움직여야 할 이유가 없어졌다.

마수가 있는 곳은 성국과 더 가까웠기에 제국군이 다급하게 움직인다 한들 성국보다 빨리 도착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여유를 가지고 완벽을 기하며 움직이는 게 더 나았다.

“흑마력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타리온의 보고에 카리엘의 표정이 찡그려졌다.

음습한 놈들답게 쉽게 자신들의 꼬리를 드러내는 법이 없었다.

‘그나저나 흑마법사들은 이런 정보를 어떻게 아는 걸까…….’

자신조차 확실히 알 수 없는 정보들을 흑마법사들은 어떻게 알고 있는지도 궁금했으나, 더 궁금한 건 이런 정보들을 어떻게 이용할 수 있는지였다.

마수를 깨우는 것, 정령왕의 파편으로 화산 폭발을 만들어 내는 것은 단순히 정보만 알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신화급 존재들의 정보와 그것을 이용한 마법적 지식 등이 종합되어야만 가능한 일.

“흑마법사들의 뒤에 뭔가가 있는 건가?”

“예?”

“이 정도 일을 벌이는 게 과연 흑마법사들만으로 가능할까?”

카리엘의 물음에 타리온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대륙 역사를 뒤져 보면 흑마법사에 대한 악독함은 수도 없이 기록되어 있었다.

하지만 화산 폭발을 만들고 지진을 만드는 것이 가능한가?

전설상에 존재하는 대마도사급이 아닌 이상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마왕이 벌써 소환된 건 아닐 텐데…….’

전생을 기억하는 카리엘이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마왕은 지금보다 더 후에 소환된다.

그것도 제국이 여전히 썩어 빠진 상태로 유지된 상태에서 흑마법사가 모든 준비를 맞췄을 때에나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는 건 악마와의 계약만으로 이게 가능하다는 것인데…….’

단순히 ‘악마와의 계약만으로 이런 것이 가능한가?’라는 의문을 가진 카리엘은 잠시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정보가 너무 한정되어 있어서 지금 상태론 뭔가를 알기 힘들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흑마법사들과 성국이 완전히 손잡은 게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했다는 점이다.

“태양검이 직접 움직인다고?”

“그렇습니다.”

타리온의 대답에 카리엘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까마귀들이 입수한 첩보를 통해 태양검의 움직임을 확인하고, 토벌군의 규모가 엄청나다는 것을 직접 들은 그는 그제야 흑마법사의 배후에 성국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을 지울 수 있었다.

“최악은 피했네.”

흑마법사들을 동대륙으로 쫓아낸다 하더라도 성국이 배후에 있다면 향후 북부를 통해 다시 서대륙으로 잠입할 수 있다.

그렇기에 카리엘이 이런 의심을 하는 건 당연했다.

제국 내 신전과 흑마법사들이 손잡았으니 한 번쯤은 의심해 볼 만한 것이다.

하지만 지금 성국이 보이고 있는 분노는 그런 의심을 대부분 없애 버렸다.

‘제대로 빡쳤군.’

성국의 역린을 건드렸다.

태양을 삼켰다고 전해지는 신화 속의 마수가 일어나려 한다.

그야말로 성국에 치욕을 안긴 존재.

그런 존재를, 성국이 다른 이들이 토벌하도록 두진 않을 것이다.

“지진 지역의 사람들은?”

“이미 대부분 대피한 상황입니다.”

“피해 규모가 여기서 더 커질 위험도 없지?”

카리엘의 말에 타리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반복되는 지진으로 이미 대부분의 건물들이 무너졌다.

물론 피난하러 온 사람들과 부상 입은 자들에 대한 지원이 필요했기에 많은 자금이 소모될 테지만 그건 어차피 사용해야 할 돈에 불과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완벽하게 북동부를 장악한다.”

“……장악 말입니까?”

“그래. 피해를 복구하면서 천천히 미궁으로 올라갈 거야.”

카리엘의 말에 타리온이 소름 돋는 표정을 지었다.

이번 기회에 성국의 피해를 가중하려는 카리엘의 생각을 읽어 낸 것이다.

“흑마법사에 집중해. 미궁에 있을 가능성이 높지만 녀석들이라면 또 어떤 짓을 할지 몰라.”

“알겠습니다.”

카리엘의 명령에 타리온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북부군에 명령을 전하기 위해 까마귀를 날려 보냈다.

진짜 의도는 성국과 흑마법사들이 서로 피해를 입히도록 유도하는 것이지만 겉으로는 흑마법사를 수색하는 것으로 보이도록 꾸몄다.

* * *

북동부에 잠입한 흑마법사들의 수색 작업.

겉으로 드러난 작전을 대대적으로 알리면서 제국은 천천히 북동부를 압박해 들어갔다.

카리엘을 중심으로 북부군과 동부군이 양쪽에서 압박해 들어갔고, 뒤이어 중앙군이 북동부로 파견되었다.

삼군이 천천히 북동부를 둘러싸면서 혹시라도 남아 있을 흑마법사들의 박멸 작업에 들어갔다.

문제는 성국이었다.

“빌어먹을!”

태양검이 검을 휘두르면서 언데드 하나를 뭉개 버렸다.

신성력이 가득 뭉쳐진 검을 휘두르자 수십의 언데드가 일격에 재가 되어 흩어졌다.

그럼에도 무지막지하게 몰려나오는 언데드들은 성국의 병력을 전진하지 못하게끔 발을 묶고 있었다.

“뚫어라! 한시라도 빨리 미궁에 도착해야 한다!”

태양검이 다급하게 외쳐 보았지만 쉽지 않았다.

언데드를 뚫고 들어간 성기사단 역시 미궁이 무너지면서 튀어나온 몬스터들에게 발이 묶였기 때문이다.

“내가 마스터였다면…….”

만약 마스터였다면 길을 뚫어 볼 수 있었겠지만 아직 자신은 벽을 넘지 못했다.

거의 다 왔다고 생각했던 마스터의 경지.

얇은 벽 하나만을 남겨 뒀다고 생각했지만 그 벽 하나가 가져다준 결과는 엄청난 차이를 보여 주고 있었다.

“단장님! 저희만으로 제시간에 미궁을 뚫긴 어렵습니다!”

“지원을 더 요청해야 합니다!”

태양검의 곁에 있는 성기사들이 갈수록 전황이 안 좋아져 가자 간언했다.

현재의 병력으로 미궁을 온전히 정복하기 힘들다는 것은 태양검 역시 잘 알았다.

언데드야 수만 많을 뿐 큰 위험은 되지 않았는데, 문제는 미궁에서 나오는 몬스터였다.

시간을 들이면 충분히 뚫어 낼 수 있겠지만 태양검에겐 그 시간이 없었다.

“일단 성국에 추가 지원 요청을…….”

드드드드!

태양검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지축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느껴지는 강렬한 사기에, 태양검은 그토록 걱정하던 일이 벌어졌음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망했군.”

태양검이 미궁 일부가 무너지면서 언뜻 보이는 형상에 눈을 질끈 감았다.

이제 상황은 자신의 손을 떠났다.

“성하께 보고하게. 성국의 치욕이 깨어났다고.”

교황 직속 신관에게 지금의 상황을 알린 태양검은 한숨을 쉬었다.

이 병력으로는 고대의 마물을 처리하기 어려웠다.

“……전열을 가다듬어라. 서서히 물러나 저지선을 형성할 것이다.”

“예!”

태양검의 명령에 성기사들이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 * *

한편 제국의 수도에서 성국의 군대가 목표 달성에 실패했다는 소식을 들은 교황은 무거운 엉덩이를 들었다.

“……갑시다.”

“예.”

교황의 말에 고위 사제들이 죄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성국의 치욕이 결국 깨어나고 말았으니 지금이라도 교황이 직접 가서 지휘해야만 했다.

그렇게 교황이 다급히 성국으로의 복귀를 결정하자 대륙 회의는 무기한 연기되었다.

뒤이어 공왕이 빠르게 복귀를 결정했고, 남부의 두 국왕들 역시 복귀를 결정하며 각국의 사신단이 자국으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그러자 제국 역시 더 이상 대륙 회의에 연연하지 않고 북동부에 집중했다.

바로 그때, 제국에 수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황태자가 될 기회가 있는 건 두 황자만이 아니다!」

남부 일부 영지에서 시작된 이 소문은 순식간에 제국의 수도에까지 퍼졌다.

처음엔 사람들에게 별다른 관심을 받지 못했다.

북동부 일이 너무 컸고, 또다시 흑마법사들이 나타났다는 소문이 돌면서 그쪽으로 모든 이목이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도까지 번진 소문은 계속해서 사람들의 입을 통해 흘러갔고, 마침내 광장 게시판에 수상한 글이 게시되었다.

「황제의 숨겨진 아들이 있다!」

황제의 숨겨진 아들의 존재를 언급하는 그 글에 사람들은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하루가 지날 때마다 건물 곳곳에 황제의 숨겨진 아들에 대한 증거들이 몰래 게시됐다.

그중에는 황제의 연인이었던 여인들의 초상화도 있었는데, 이들 중 하나의 자식들이 아닌가 하는 추측성 글들이었다.

그러자 처음엔 믿지 않았던 사람들도 이제는 고개를 갸웃거리기 시작했다.

몇몇 여인들은 제법 그럴듯했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의 황제는 꽤 방탕하게 놀았기에 한 명쯤은 사생아가 있을 법도 했기 때문이다.

황제의 젊은 시절을 기억하는 늙은 귀족들은 사생아가 한 명도 알려지지 않은 것이 황실이 의도적으로 숨긴 증거라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그렇게 사람들이 저마다 추측성 의견을 내놓을 때쯤 데릭이라 불리는 자의 특징이 소문으로 나돌기 시작했다.

「암흑가 붉은 거미의 수장 데릭이 숨겨진 또 다른 황자이다?」

「붉은 거미가 10년간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

「데릭의 얼굴과 머리색은 황족과 닮았다!」

의도적으로 알린 것이 분명한 소문들.

하지만 가십거리를 좋아하는 사람들 입장에선 이만한 얘기가 없었기에 순식간에 소문이 퍼져 나갔다.

그런 상황에서 데릭이라 불리는 사내가 광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별다른 말도 없이 그저 얼굴을 보이고 사라졌을 뿐이지만, 황족의 특징이 드러나는 얼굴과 머리색에 사람들을 마냥 근거 없는 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게다가 황제는 궁에 박혀 있었고, 황실은 별다른 해명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 귀족들 역시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며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 * *

이러한 수도의 혼란은 북동부에 숨어든 흑마법사들을 잡아내며 천천히 전진하고 있던 카리엘에게도 전해졌다.

“현재 수도에서는 또 다른 황자가 있다는 게 거의 기정사실처럼 굳어지고 있습니다. 심지어 ‘데리엘’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도 있습니다.”

데릭의 이름에 ‘엘’을 붙여 만든 이름에 카리엘이 피식 웃었다.

‘이 이름은 전생이나 지금이나 똑같네.’

그렇게 생각하며 웃기만 했다.

그러자 타리온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자칫 제국에 혼란이 올 수도 있습니다.”

“그럴 일은 없어.”

카리엘은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다.

이미 흑마법사가 북서부에서 수를 쓸 때부터 언젠가 놈이 나타날 것을 예측했었다.

전생에서도 반란으로 제국이 반쯤 망가져 카리엘의 힘이 대폭 축소될 때, 녀석이 나타났었다.

황제조차 죽어서 ‘진실’을 알기 어려웠지만, 녀석을 죽인 후 조사 과정에서 정체가 드러났다.

“이제 와서 저렇게 나서 봤자 동생들을 흔들 수는 없어.”

이렇게 될 가능성을 예상하고 모든 것을 준비했다.

미리엘의 가능성조차 제한하며 두 황자 중 하나에게 황태자가 될 것이라고 못을 박았다.

거기다 두 황자들에게 일찍부터 정계에 발을 들이게 해서 귀족들의 파벌을 나눠 놓았다.

이런 상황에서 흔들어 보려 한들 큰 의미는 없었다.

‘한번 당한 걸 또 당하면 등신이지.’

카리엘이 그렇게 생각하며 웃었다.

“동생 놈들은 그리 약하지 않아. 그러니까 여기에 집중해.”

“예.”

카리엘이 여유로운 표정으로 말하자 타리온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굳건한 주군의 모습에 불안했던 타리온이 안정감을 찾으면서 다른 이들 역시 안정되기 시작했다.

두 황자나 황궁이 흔들릴 수는 있다.

하지만 카리엘이 있었기에 제국은 굳건했다.

‘저하가 계시는 한 제국이 흔들릴 일은 없다.’

속으로 그렇게 생각한 타리온은 북동부에 집중했다.

제국이 흔들리는 순간 카리엘이 나설 것이기에 그는 그저 명령을 따르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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