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 >
23. 제국의 진짜 1인자는? (3)
또 다른 황자가 나타났음에도 카리엘이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고 북동부에 전념할 때, 황궁에서는 슬슬 데릭이라 불리는 사내가 거슬리기 시작했다.
북동부의 일이 급박했기에 놔뒀더니 계속해서 일을 키우고 있었다.
결국 황제의 귀에도 이 사실이 들어갔다.
“폐하.”
“소문의 진위 여부를 물으러 왔구나.”
초췌한 표정으로 자신을 찾아온 두 황자들을 보며 황제가 피식 웃었다.
“소문이 맞다면 어떡할 것이냐?”
“……황족으로 받아들여야겠지요.”
2황자의 말에 3황자도 같은 생각인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그런 식으로 봉합해 놓고 북동부에 집중해야 했다.
북동부에서 일어나는 일이 단순한 지진이 아니라는 정보가 속속 들어오고 있었고, 대륙 회의가 무기한 연기되면서 자신들의 국가로 돌아간 각국의 수장들이 무슨 일을 벌일지 알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남부가 이상한 짓을 하더구나.”
이미 그림자를 통해 보고받은 황제가 두 황자들에게 물었다.
“……그렇습니다. 특히 탈로스의 군사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로테온도 제국에 만든 끄나풀들을 철수시켰습니다.”
3황자에 이어 2황자가 말하면서 남부 왕국들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경계했다.
현재 상황은 겉으로는 흑마법사들을 규탄하면서 힘을 모으는 형세였지만 사실상 살얼음판을 걷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나마 아이론이 제국에 붙어 주면서 당장 남부 왕국들이 일을 벌이기 힘든 모양새가 되었다곤 하나 북동부에서 제국이 엄청난 피해를 입는다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었다.
그렇기에 두 황자들 입장에서는 수도에서 혼란을 야기하는 데릭을 황궁을 불러들여서 잠잠하게 만들 필요가 있었다.
“자신감이 있구나.”
데릭을 황자로 만들어도 괜찮다는 자신감이 두 황자들의 눈빛에서 보이자 황제는 빙그레 웃었다.
자신들의 형인 카리엘을 통해 배운 정치적 감각, 무엇보다 황태자 자리에서 물러나면서 두 황자들로 후계로 확정시킨 황태자 경합을 통해 절대 자신들의 지위를 건드릴 수 없다는 자신감이 보인 탓이다.
“일단 너희들의 질문에 답을 하자면, 모른다.”
“……예?”
“내가 젊었을 때 만난 여인들이 몇일 것 같으냐?”
황제의 물음에 루피엘이 멍청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여…… 열 명쯤 되십니까?”
“장난하느냐?”
“어…….”
루피엘이 모르겠다는 듯 세리엘을 바라보자 그 역시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쯧! 내 자식들인데 어찌 이런 숙맥들인지…….”
황제가 혀를 차며 한심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루피엘과 세리엘은 마법과 검술에 미쳐 살았고, 최근에는 카리엘 때문에 고된 일과에 치여 사느라 시간이 없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많아서 잘 모르겠단 말이다.”
“아…….”
“뭐, 그래도 아무나 붙잡고 연애한 것은 아니었다.”
황제는 잠시 과거를 회상했다.
동생보다 못한 역량을 커버하기 위해 자신이 했던 짓들.
상인, 광산, 항구, 농장 등 다양한 파벌들이 존재했는데, 그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그 파벌들에 속하는 귀족 가문의 여식들 중 하나와 연애했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친목을 다져 어느 정도 파벌이 자신의 편이 되었다 싶으면 또 다른 여자를 만났다.
“짐에게는 연애조차 정치의 연장선이었다.”
“음…….”
“…….”
침묵하는 두 황자들을 보며 황제가 피식 웃었다.
천재들은 황제의 이런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겠지만, 장자라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부족했던 그 당시 황제에게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쯧! 아직도 눈치채지 못했느냐?”
황제가 혀를 차면서 말했다.
“짐이 만났던 여인들 중에 신분이 불확실한 여인은 없었다는 것이다.”
황제가 그렇게 말하자 두 황자들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그럼 가짜일 가능성이 높은 것입니까?”
“가짜일 확률이 높지. 다만 내가 만났던 여인들 중 누군가가 몰래 아이를 낳았을 확률도 있으니 확신할 수는 없는 것이다.”
루피엘의 질문에 황제가 그렇게 답하며 빙그레 웃었다.
그러자 두 황자의 눈에 의문이 가득 찼다.
“짐이 왜 녀석을 가만 놔두는지 궁금하느냐?”
“……예.”
“네.”
두 황자의 대답에 황제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카리엘이 가만있는 것과 같은 이유다.”
그러나 두 황자는 여전히 의문스러운 얼굴을 지우지 못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황제는 생각했다.
‘그래, 이게 맞는 거지.’
지금 나이에는 아직 덜 여무는 게 맞는 것이다.
자신 같은 경우 황제가 되고도 십여 년이 지나서야 지금에 이르는 관록을 손에 쥘 수 있었다.
한데 카리엘은 벌써부터 자신에 버금가는, 아니 그 이상의 능력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래도 이 녀석들은 인간미가 있어서 좋군.’
속으로 그렇게 생각한 황제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놈의 배후에 있는 녀석들이 튀어나올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다.”
“아…….”
“음…….”
“뭐가 불안하느냐? 너희들이 형이 모든 판을 다 만들어 두었다. 그놈과 배후 세력이 무슨 짓을 저지르든지 이 판이 깨질 일은 없다. 설혹 판이 흔들린다 한들 무엇이 문제겠느냐?”
황제의 말에 두 황자들이 잠시 누군가를 떠올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이 흔들린다면 녀석이 알아서 처리해 줄 것이다. 그러니 신경 쓰지 말고 너희들의 할 일을 하거라.”
“예!”
“네!”
두 황자의 대답에 황제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손을 내저었다.
그러자 조용히 고개를 숙인 황자들이 궁을 빠져나갔다.
문이 닫히자 방 안이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황좌에 태연하게 앉아 있던 황제는 돌연 손으로 입을 가렸다.
“쿨럭! 쿨럭!”
황자들의 앞이라 참고 있던 기침을 격하게 내뱉은 황제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검은 피가 나오는 것을 보니 그리 오래 버틸 수는 없을 것 같았다.
“……폐하.”
황급히 약을 가져온 시종장이 황제를 살폈다.
“……괜찮다.”
손을 내저어 보인 황제가 자조 섞인 미소를 지었다.
“아들놈들이 이제야 나한테 찾아오는군.”
그렇게 중얼거리며 황제는 멀리서 고생하고 있을 첫째를 생각했다.
분명 연약하기만 한 녀석이었다.
자신보다 더 재능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녀석.
그런데 언제부턴가 활약하기 시작하더니 제국을 뒤바꾸어 놓았다.
그 모습에 분하고 질투심이 솟았던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녀석이 낙향을 결심한 후 그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가끔씩 질투가 나기는 했지만, 개고생하면서 구르는 모습을 보면 솟구쳐 오르던 질투심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심병은 괜찮으시옵니까?”
심병을 언급하는 시종장을 보며 황제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짐의 의도대로 녀석을 굴리고 있는데 심병이 생길 이유가 있겠는가?”
은퇴하려는 녀석을 붙잡고 굴리고 있었다.
거기다 자신을 제외한 다른 대신들도, 그토록 자신을 괴롭혔던 귀족들도 함께 구르고 있었다.
이런 상황인데 어찌 즐겁지 않을 수 있을까?
“말년에 즐겁게 놀다 가는군.”
수많은 여인들과 만났을 때도, 제위에 올랐을 때도 이 정도로 즐겁진 않았다.
“쿨럭! 쿨럭!”
다시 한번 기침한 황제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이제 겨우 삶을 즐기고 있는데 몸은 마지막을 향해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
“……좀 더 버텨 보고 싶군.”
황제가 열심히 구르고 있는 첫째를 생각했다.
무슨 일을 벌일 때마다 제국에 큰 변화를 가져왔던 첫째였기에, 이번에는 어떤 기발한 방법으로 이 혼란을 수습하고 제국을 발전시킬지 궁금했다.
“필시 이번에도 일을 수습하면 조용히 은퇴하려 하겠지.”
“……그럴 것이옵니다.”
“한 번 정도는 더 녀석의 은퇴를 막고 싶군.”
황제가 웃으면서 시종장을 바라보았다.
“자네도 그렇지 않은가?”
“……폐하께서 마음만 먹는다면 무엇이든 가능하실 것이옵니다.”
“큭큭큭! 자네도 내심 첫째 녀석이 이 자리를 물려받았으면 하는군.”
황제가 그렇게 말하자 시종장은 말없이 침묵했다.
그런 시종장을 보면서 웃던 황제가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첫째가 황제가 된다라…….’
끔찍해하는 표정을 지으면서 현실 도피를 하는 카리엘이 떠올랐다.
즉위식에서 한껏 표정을 구긴 채 황관을 쓰고 일하기 싫어하는 표정으로 대전 회의를 주관하는 모습이 황제를 즐겁게 했다.
“재밌을 것 같구나.”
황제가 묘한 눈빛을 흘리면서 말하자 옆에 있던 시종장이 침음성을 내뱉었다.
아무래도 카리엘이 원하는 삶은 이뤄질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 * *
죽어 가는 황제가 마지막 힘을 쥐어짜 내 카리엘의 욜로 라이프를 방해할 생각에 골몰할 무렵, 두 황자는 말없이 자신들의 일에 몰두했다.
그 때문인지 숨겨진 황자라고 알려진 데릭에 대한 소문은 더욱 부풀려져서 제국 전역에 퍼져 나갔다.
“데릭이라는 자에 대한 소문이 여기까지 퍼졌군요.”
지진의 피해에서 자유로운 한 시골 마을에서 쉬고 있는 카리엘에게 타리온이 조용히 말했다.
그러자 카리엘이 말했다.
“놔둬.”
그리고 전생을 생각했다.
한차례 반란으로 박살 났던 제국에 데릭을 이용해 추가적으로 반란을 일으켰던 흑마법사들.
그들은 그것으로 카리엘의 눈을 돌리고 다른 짓을 벌였다.
이번에도 똑같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때는 고작해야 흑마력을 이용해 테러를 저지르는 정도였지.’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렇게 제국의 눈을 피한 뒤, 인접 국가들로 하여금 침공하게끔 유도한 것이었다.
마스터들이 죄다 죽고 병력이 약해졌으니 인접 국가들도 충분히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을 터.
그러니 흑마법사들의 간교한 혀 놀림에 넘어간 것이다.
몬스터 웨이브까지 흑마법사들과 연관됐을 거라 추정한다면…….
반란-인접 국가 침공-몬스터 웨이브순으로 제국의 힘을 갉아먹은 것이다.
그 후에 인마 전쟁이 일어난 것을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이번에도 그와 비슷한 방법을 쓸 게 분명했다.
두 번의 화산 폭발을 큰 피해 없이 막아 냈으니, 이번엔 더 큰 무언가를 계획했을 게 분명했다.
“무엇일까…….”
“예?”
“흑마법사 놈들이 겨우 이 정도로 끝낼 놈들 같지는 않아서 말이야.”
자신과 제국의 병력 상당수를 북동부에 몰리게끔 하고 수도에 혼란을 유발했다.
그렇게 시선을 돌렸으니 흑마법사들이 몰래 준비한 한 수가 나와야 했다.
“동생들은? 혼란스러워하지 않아?”
“예, 각자 할 일에 집중하고 계시다 합니다.”
타리온의 대답에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은 카리엘은 턱을 문질렀다.
아직 어리고 여물지 않아 혼란스러워할 걸 예상했는데 동생들의 심지가 생각보다 단단해, 좀 더 일을 맡겨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서신을 동생들에게 전해. 급하니까 최대한 빠르게.”
“예!”
타리온이 그림자들에게 명령을 전하러 사라진 사이, 카리엘은 지휘관들을 불렀다.
중앙군에서 온 군단장과, 동부 변경백 그리고 북부 변경백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제 슬슬 성국을 압박해야 할 타이밍 같은데…… 다들 어떻게 생각하시오?”
“소신도 그리 생각하옵니다. 교황이 참전한 이상 성국이 더 피해를 받길 기다리는 건 의미가 없을 듯합니다.”
북부 변경백의 말에 동부 변경백이 첨언했다.
“오히려 더 빠르게 움직여야 할 것 같습니다.”
“이유가 무엇이오?”
“보고에 따르면 미궁 속 몬스터들의 수준이 상당하다 하옵니다. 지휘관의 관점에서 보면 그들이 더 퍼지기 전에 유리한 지점을 선점해야 한다고 봅니다.”
“중앙군 군단장의 생각은?”
“소신도 같은 생각이옵니다.”
지휘관들의 생각에 북부 변경백은 살짝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아직 교황이 북동부에 도달하지 않은 만큼 좀 더 피해를 입었으면 했기 때문이다.
성국을 홀로 견제해야 하는 입장인 북부 변경백 입장에선 이참에 성국의 병력이 더 죽었으면 싶었다.
북부 변경백이 아쉬워하는 것이 보였지만 카리엘은 단호하게 결정했다.
“빠르게 움직입시다.”
카리엘의 결정에 동부 변경백과 중앙군단장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출정 준비를 하기 위해 자리를 떠났다.
카리엘은 홀로 남은 북부 변경백 시카리오 후작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아쉬운 기색이 남아 있었다.
“내가 이리 결정한 건 성국에 괜한 트집 잡힐 거리를 주어선 안 된다 보기 때문이오.”
카리엘은 시카리오 후작에게 이렇게 결정한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우리는 이미 미궁의 정보를 알게 되면서 미래에 성국을 압박할 카드 하나를 얻은 것이오. 성국의 힘이 더 약화되지 않은 것은 아쉽겠지만 크게 보면 이게 맞는 결정일 것 같소.”
“……예.”
“나중에 더 크게 한 방 먹여 줄 테니 아쉬워도 이번엔 따라 주시오.”
“믿겠습니다.”
시카리오 후작이 고개를 끄덕이자 카리엘이 미소를 지었다.
성국에 한 방 먹이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다.
‘미궁의 일만 끝나면 바로 한 방 먹일 테니 조금만 기다리시오.’
카리엘은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도 출정 준비를 했다.
그리고 얼마 뒤 카리엘은 제국군과 함께 목적지로 출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