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 >
24. 흑마법사들의 한 방! (4)
카리엘의 대답에 교황 역시 더는 요구할 수 없었기에 한동안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이였다면 제국의 비밀이라 뻥치고 주도권을 잡으려 한다고 할 수 있지만, 교황에게는 그럴 수가 없었다.
명색이 ‘신에게 가장 사랑받는 자’란 타이틀을 갖고 있는 교황답게 조금이지만 진실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수를 확실히 잠재울 수 있는 겁니까?”
“모르오. 하지만 뭐라도 해 봐야 하지 않겠소?”
카리엘의 대답에 교황이 잠시 고민했다.
치욕이 다시 깨어난 것만으로도 골치 아픈 일인데, 제국에 마수를 맡겨 둔다면 과연 성기사들과 고위 사제들이 납득할 것인가?
그런 교황의 고민을 예상했는지 카리엘이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명분이 걱정된다면 미궁을 탐사하는 게 어떻겠소?”
“미궁 말입니까?”
“그렇소. 어떻게 저 마수를 깨웠는지, 그리고 미궁 안에서 어떤 수작을 부리지 않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지 않겠소?”
카리엘의 말에 교황이 미간을 찌푸렸다.
“흑마법사들이 아직도 뭔가를 준비하고 있다고 보는 겁니까?”
“그간 겪어 본 바에 따르면 그럴 가능성이 높소.”
마수를 깨운 게 전부가 아닐 수도 있다는 말에 교황의 눈이 가늘어졌다.
카리엘의 말을 믿을 수가 없어서였다.
마수를 깨운 것만으로도 이미 서대륙의 북동부는 초토화될 예정인데 여기에 뭔가가 더해진다?
이미 다수의 흑마법사가 거인의 산맥에 있는 몬스터들까지 끌어왔기에 더더욱 믿을 수가 없었다.
‘이 양반이 아직 흑마법사를 덜 겪어 봤군.’
카리엘이 그렇게 생각하면서 속으로 혀를 찼다.
매일같이 마수와 싸우느라 지쳐서 머리가 안 돌아가는 건지 한참을 멍하니 있는 교황.
아무리 마도사의 경지에 이른 교황이라지만 매일같이 성력을 쥐어짜 내며 싸우면 지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사람은 몸이 지치면 머리도 잘 안 돌아가게 된다.
가뜩이나 흑마법사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데 피로까지 쌓였으니 곧바로 판단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그런 교황을 위해 카리엘이 친절히 설명해 주기 위해 입을 열었다.
“흑마법사가 그동안 했던 짓을 생각해 보시오.”
“……?”
“미궁을 지키려고 했던 것 같지 않소?”
카리엘의 물음에 교황이 혀를 찼다.
“그건…….”
“가장 결정적인 건 산사태를 일으킨 것이오.”
표정을 찡그리며 입을 여는 교황의 말을 끊고 카리엘이 말했다.
그러자 교황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폭발력으로 미궁을 무너뜨린다면 마수가 더 날뛸 수도 있을 텐데 굳이 산사태를 일으켜서 몬스터를 불러 모았소.”
카리엘의 말에 교황 역시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대부분 마수라는 재앙을 막느라 정신이 없었기에 생각하지 못한 부분.
그리고 ‘설마 이거 이상 가는 게 더 남았을까?’ 하는 생각.
그 두 가지가 무의식에 남아서 당장의 위협에만 대응하게 했다.
게다가 마수를 막는 것만으로도 힘겨웠기에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기도 했다.
반면에 카리엘은 여유가 있었다.
뒤에서 조용히 흑마법사들에 대한 정보를 받으면서 차분하게 생각할 시간이 있었기에 이런 결론에 다다를 수 있었다.
“이미 제국의 정보부와 상의가 끝난 일이오. 제국은 8할 이상 미궁 안에 뭔가가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소.”
“8할…….”
“만약 미궁 안에서 흑마법사들이 뭔가를 하고 있었다면 그것을 저지하는 것이 성국이 되는 것이오.”
카리엘의 말에 교황이 입을 다물었다.
치욕을 내주고 명분을 찾으라는 카리엘의 제안에 교황이 침음성을 삼켰다.
머리로는 이것이 최선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감정은 성국의 치욕을 자신들이 처리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고 싶어도 답이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교황이 할 말은 정해져 있었다.
“……상의해 보겠습니다.”
카리엘의 말에 교황이 그렇게 말하며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교황도 머리가 돌아가는 양반이니 이미 계산이 끝났을 것이다.
처음 생각하는 게 어려울 뿐이지, 화두만 던져 주면 알아서 결론까지 내 버리는 천재들이기에 흑마법사들의 계획까지 얼추 유추해 낼 것이다.
‘지휘관들이 그러했지.’
전생의 제국의 지휘관들이 카리엘이 자신의 생각을 말하면 알아서 모든 계획을 짜 오는 자들이었다.
그 당시 인재 부족으로 어설픈 이들까지 끌어다 썼음을 생각하면 지금의 유능한 지휘관들은 그보다 더할 것이다.
“저하, 정말 정보부와 조사하신 것입니까?”
어느새 나타난 시카리오 후작의 물음에 카리엘이 웃으면서 답했다.
“뻥이오.”
“뻐…… 뻥?”
“그렇소. 나도 이제 겨우 추측한 것에 불과한데 정보부와 조사할 틈이 어디 있겠소?”
카리엘은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시카리오 후작이 헛웃음을 지었다.
교황을 거짓말로 낚아 버린 카리엘이 그저 대단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래도 완전히 거짓은 아니오.”
살며시 웃은 카리엘은 차분하게 자신의 생각을 설명해 주었다.
교황에게 했던 말에 덧붙여서 그동안 흑마법사들의 행동 패턴을 분석한 것을 시카리오 후작에게 들려주었다.
전생에 흑마법사들을 조사하면서 얻은 정보와 이번 생에서 얻은 정보를 적절하게 섞어서 설명해 주자 시카리오 후작의 얼굴에 흥미로움이 감돌기 시작했다.
“확실히 흥미롭군요. 까마귀들에게도 분석시켜 봐야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시카리오 후작은 카리엘이 가만히 바라보았다.
후작의 묘한 눈길에 카리엘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위험하군.’
마치 먹잇감을 바라보는 듯한 눈빛.
전생에 자신이 쓸 만한 인재를 발견했을 때의 눈빛과 흡사하다는 것을 깨달은 카리엘은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
“이제 마수를 처리할 방법을 구상해야 하지 않겠소?”
“그렇습니다. 사실상 지금 이 시점에선 전하께 의지해야 하는 처지이지요.”
무리한다면 마수를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수도에 있는 황궁 기사단장까지 불러온다면 처리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게 문제였다.
지금 제국에는 많은 문제들이 산적해 있었기에 아켈리오가 수도를 비울 수 없었다.
“마수와 단둘이 있을 공간을 만들어 주시오. 가능하시겠소?”
“화산에서처럼 하실 생각입니까?”
“그렇소.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시도는 해 볼 생각이오.”
카리엘의 말에 시카리오 후작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이라도 위험할 것 같으면 소리치십시오.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시카리오 후작의 말에 카리엘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고개를 숙인 후작이 다급히 사라졌다.
새로운 작전 형태가 만들어졌으니 세세하게 채워 넣는 건 아랫사람들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후…….”
카리엘이 착잡한 표정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분명 욜로 라이프를 꿈꿨을 뿐이다.
그런데 상황은 점점 복잡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처음엔 그저 황제파만 박살 내고 황태자를 은퇴할 생각이었는데 흑마법사가 끼어들면서 판이 커져 버렸다.
지금에 와선 서대륙 전체의 일로 번져 가고 있었다.
“일이 더 커지기 전에 끝내야겠지.”
마수를 처리하면 사실상 끝이었다.
‘이참에 부상당한 척 연기해야겠어.’
속으로 그렇게 생각한 카리엘은 한숨을 쉬었다.
은퇴하는 게 이렇게 힘들 줄 몰랐다.
“전생엔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너무 날뛰었나?”
그렇게 중얼거리던 카리엘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제 와서 후회해 봤자 늦었다.
* * *
그것을 증명하듯 늦은 밤 성국의 진영으로 돌아간 교황은 추기경급과 고위 성기사들을 불러 모아 놓고 밤늦게 회의했다.
그 결과, 카리엘의 의도대로 마수를 제국에 맡기기로 결정이 내려졌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기회가 된다면 이곳에서 카리엘 황자를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
교황의 말에 모든 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은퇴했음에도 너무 위험했다.
그렇기에 모두가 이 결정에 찬성했다.
“은퇴한다고 다가 아니에요. 그가 있는 것만으로 성국은 멸망의 위협을 겪을 수밖에 없을 겁니다.”
교황이 그렇게 말하며 싸늘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제국의 생각은 반대였다.
“저하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지켜야 하네. 마수의 처리는 2순위이네.”
시카리오 후작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마수야 나중에 여유가 되면 처리하거나 이 지역을 봉인하며 방관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제국의 현 위기를 돌파하는 데에 카리엘은 반드시 필요했다.
“흑마법사만 경계할 게 아니네. 성국 놈들은 여우 같은 놈들이니 저하를 위협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어.”
숱하게 성국과 싸워 온 시카리오 후작의 말에 모든 지휘관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전 병력을 저하를 중심으로 재편하겠습니다.”
모든 지휘관들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제국과 성국이 암중에서 서로를 견제할 방도를 마련하기 시작했다.
겉으로는 합심해서 싸우는 척했으나, 실상은 카리엘을 두고 암중에서 싸우는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다.
“교황이 이 사안을 받아들인다 합니다.”
“좋소. 바로 시작합시다.”
시카리오 후작의 말에 카리엘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며 전군에게 진군을 명했다.
그러자 성국 역시 모든 병력을 미궁으로 움직였다.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성국이었다.
미궁의 뒤편으로 빙 돌아서 안쪽으로 진입할 각을 보았다.
그러자 제국군이 마수에게 선제공격을 하면서 시선을 돌렸다. 동시에 카리엘과 시카리오 후작이 선두에 서서 마수를 향해 움직였다.
“저하를 지켜라.”
황궁 기사단이 일제히 발검을 하면서 고함쳤다.
카리엘이 앞으로 나오자마자 귀신같이 숨어 있던 흑마법사들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거인의 산맥에서 전부 죽었을 거라 생각했던 것과 달리 아직 흑마법사들이 남아 있었다.
이 사실을 곧장 성국에 알리자 아직도 의심하며 미적거리던 성국의 진군이 더욱 빨라지기 시작했다.
“성국 측에서 변복한 이들이 빠져나왔습니다.”
“저하를 노릴 가능성이 있다. 감시망을 촘촘히 형성해라.”
시카리오 후작의 말에 까마귀들이 고개를 숙이고 흩어졌다.
“공격을 멈춰라!”
후작의 명령에 마수에게 향하던 공격이 일제히 멈췄다.
그러자 제국군을 향해 팔을 휘두르던 마수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몰래 미궁 안으로 진입하는 성국을 발견한 마수가 이를 드러내면서 공격을 시작했다.
“이 미친놈들이……. 이건 약속과 다릅니다!”
“제국에서 우리가 몰래 뺀 기사들을 발견한 것 같소.”
분노하는 추기경을 보면서 태양검이 답했다.
그러자 모두가 교황을 바라보았다.
“일단 불러 모으시오. 미궁 안으로 진입한 후에 기회를 봅시다.”
“예!”
교황의 명령에 모두가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시간은 많았다.
아무리 제국의 비밀과 얽힌 해결책이라 해도 마수를 단숨에 처리할 수는 없을 것이라 생각하며, 미궁 안에 일을 벌이고 있을 흑마법사들을 처리하기 위해 움직였다.
미궁 안에 있는 흑마법사들을 처리하면 바닥까지 추락한 성국의 위신 역시 조금이라도 회복할 것이다.
그다음 황태자를 죽일 기회를 노리면 된다.
그러나 그런 성국의 속내를 알아챈 제국군은 성국군을 예의 주시하며 그들이 미궁의 아래층으로 내려갈 때까지 마수를 견제할 뿐 확실하게 막지 않았다.
마침내 성국의 병력이 미궁의 아래층으로 완전히 사라지자 시카리오 후작 역시 본격적으로 움직였다.
“길을 뚫겠습니다.”
“알겠소.”
시카리오 후작의 말에 카리엘이 고개를 끄덕인 순간, 수천 개의 검은 환영이 만들어지면서 근방에 있던 몬스터들과 미궁의 잔해를 베어 나갔다.
뻥 뚫려 버린 길을 따라 시카리오 후작이 움직이자, 카리엘과 기사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크어어엉!
시카리오 후작을 따라 마수에게 다가갈수록 커지는 울음소리.
기사들이 귀를 막을 정도로 큰 괴성이 들려왔지만 카리엘은 미간만 찌푸릴 정도였다.
오히려 안쓰러움이 느껴질 정도로 가슴 아픈 울음소리가 들렸다.
“또…….”
북서부와 남동부에서 느꼈던 것처럼 고통에 찬 울음소리에 카리엘이 한숨을 쉬었다.
“이제 나와.”
카리엘이 부름과 동시에 나오는 작은 불덩이.
그와 동시에 울부짖던 거대한 마수가 움직임을 멈췄다.
동시에 카리엘을 거대한 눈으로 가만히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