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 >
25. 눈치 게임! (4)
그렇게 카리엘이 분쟁 지역 확보라고 쓰고 개인 휴양지 확보라고 읽는 꿈을 이루기 위해 동부로 향했다.
대군이 움직여서일까?
이 소식이 서대륙에 퍼지는 데에는 며칠이면 충분했다.
당연히 그동안 먼저 움직였던 성국과 탈로스는 바빠졌다.
화산처럼 꽤 시간이 걸릴 줄 알았던 것과 달리 빠르게 마수가 처리되면서 다급해진 것이다.
반면에 공국은 한시름 놓은 표정이었다.
제국의 동부군이 언데드의 뒤를 쳐 주면서 방어에 숨통이 트였고, 무슨 일을 벌일지 알 수 없었던 성국과 탈로스 역시 남진하는 제국의 본대가 견제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멸망은 피했군.”
공왕의 말에 근처에 있던 기사들이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긍지 높은 공국이 소국보다 못한 처지가 된 것에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공국을 먹기 위해 삼국이 오고 있소. 어느 쪽에 붙으면 좋겠소?”
공왕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귀족들에게 묻자 하나같이 고개를 돌려 공왕의 눈을 피했다.
긍지를 잃어버린 귀족들을 본 공왕은 손짓으로 물러나라 명하고는 조용히 성벽으로 향했다.
수많은 병사들이 언데드군과 싸우다가 목숨을 잃은 흔적들이 성벽 곳곳에 묻어 있었다.
“전하.”
“왔느냐.”
완전무장을 한 공녀가 성벽 위로 오르자 공왕이 쓴웃음을 지었다.
내정에만 집중했던 공녀였다.
어릴 때 어미를 잃었기에 귀하게 키웠던 공녀가 창을 들었다.
그저 자신의 몸이나 지키라고 가르쳤던 창술을 언데드를 베어 내는 데 사용하며 공국의 요새를 지키는 데 힘을 보탠 것이다.
그런 공녀의 모습에 공왕이 착잡한 표정으로 물었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후회하지 않겠느냐?”
공왕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은 공녀는 조용히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소녀, 공국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내놓는다 한들 아깝지 않습니다.”
공녀의 모습에 공왕이 곧바로 혀를 찼다.
“쯧! 그냥 솔직히 말하거라.”
“후후후후~.”
묘한 웃음을 짓는 공녀를 보면서 공왕이 한숨을 쉬었다.
“딸자식 키워 봤자 소용없다더니…….”
얼마 전 공국에 도착한 제국에서 온 서신.
그것은 공녀와 1황자의 혼약에 관한 내용이었다. 공왕은 곧바로 대로하면서 그것을 찢어 버리고 거절할 생각이었다.
자신이 어떻게 키운 공녀인데! 공국 최고…… 아니 두 번째로 예쁘다고 알려진 자신의 딸을 데려간단 말인가?
그런데 절대 용납할 수 없다면서 분노할 때, 이 소식을 들은 공녀가 조용히 들어와 말했다.
“공국을 위해서라면 이 몸을 불구덩이에 던진들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부디 공국만을 생각해 주세요.”
기사의 긍지와도 같은 고결한 의지가 보였던 공녀.
그 모습을 본 공왕은 눈물을 흘리려 했으나 곧 멈칫하며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공녀의 눈에 왠지 모를 기대감이 잔뜩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볼에 묘한 홍조까지 띤 것이, 평소 동대륙의 귀한 물건을 선물로 받았을 때의 표정과 똑같았다.
그 모습을 본 순간 공왕은 알고 싶지 않은 사실을 떠올리고 말았다.
대륙 회의에서 1황자의 활약을 알고 감탄사를 내뱉으면서 1황자를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공녀의 모습을…….
엿 같은 회상이 끝난 공왕이 미간을 찌푸렸다.
“1황자가 그리 좋으냐?”
공왕은 자신의 물음에 대답 대신 볼만 붉히는 못난 딸을 보며 이를 갈았다.
어떻게 키운 딸인데 이리 홀랑 채 간단 말인가!
“1황자와 혼인하면 차기 공왕은 그가 될 가능성이 높다.”
“상관없어요.”
공녀의 대답에 공왕이 한숨을 쉬었다.
차기 공왕으로 유력했던 공녀.
공녀를 위해 일부러 다른 자식을 낳지 않았던 공왕이다.
그런데 그렇게 지킨 공왕 자리가 느닷없이 제국에 넘어가게 생긴 것이다.
1황자라는 신분도 부담스러운데 능력마저 뛰어났다.
거기다 제국의 영웅이라 불리고 있는 황자였기에 한숨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일단 지켜보자. 1황자가 직접 공국으로 올 것이니…… 어떤 요구를 해 올지……. 그리고…….”
‘내 딸을 내줄 만한 놈인지도.’
이를 갈면서 마지막 말을 삼킨 공왕은 성벽 너머를 바라보았다.
또다시 쳐들어올 준비를 하는지, 엄청난 숫자의 언데드 군단이 꿈틀거리는 것이 보였다.
해가 지는 순간, 시작될 전쟁을 대비하기 위해 병사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비록 상황은 좋아졌지만, 아직 전쟁은 끝난 게 아니었다.
공국의 귀족들이야 전쟁이 다 끝난 것처럼 굴었지만 공왕은 이게 끝이 아닐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느낌이 좋지 않아…….’
* * *
공왕의 이런 예감이 맞아 들어간 것일까?
공국 입장에서 최악의 상황이 발생했다.
“사령관님! 요새 뒤편에 흑마법사들이 나타났습니다!”
부관의 보고에 샤르도나 후작의 고운 미간이 찌푸려졌다.
“뭐?”
샤르도나 후작이 되묻는 순간 심상치 않은 기운이 발산되었다.
흑마법사들을 이끄는 수장이라도 나타난 것일까?
그녀조차 승부를 장담할 수 없는 막강한 흑마력의 힘이 철벽이라 불리는 요새 전체를 감싸기 시작했다.
“어딜!”
샤르도나 후작이 기세를 내뿜으면서 흑마력의 파장을 갈라냈다.
하지만 그것으로 상황은 끝나지 않았다.
“역겨운 로만 놈들…….”
도적 떼로 위장한 로만의 군대. 그런 도적 떼에게서 푸른색의 거대한 검이 만들어졌다.
자신과 수없이 부딪쳤던 로만의 마스터 중 하나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오늘이 내가 죽을 날이구나.’
샤르도나 후작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검을 꽉 쥐었다.
“모두 무기를 들어라! 마지막까지 항전할 것이다! 공국의 긍지를 잊지 마라!”
샤르도나 후작의 외침에 모든 병력이 일제히 무기를 들었다.
그들도 이제는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앞뒤에서 느껴지는 강력한 힘에 의해 여태껏 버텨 왔던 철벽이 무너질 것이라는 걸.
하지만 자신들의 영웅이자 여신인 사령관이 목숨을 버릴 각오를 했다.
그렇다면 자신들도 그 뒤를 따르는 게 마땅했다.
“우리는 오늘 여기서 죽는다!”
“우와아아아!”
죽음을 예고했음에도 불구하고 환호하는 공국의 병사들.
그런 병사들의 모습에 눈물을 흘린 샤르도나 후작이 자신의 오러를 풀어냈다.
그녀가 마스터가 되게끔 만들어 준 강력한 오러의 파장이 요새 전체에 퍼지면서 강철 같은 장벽을 만들어 냈다.
“오라! 한 놈이라도 반드시 데려가 주마!”
샤르도나가 결사의 항전을 각오한 순간, 흑마법사와 로만의 군대가 양쪽에서 철벽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대륙에서 방어를 가장 잘한다는 샤르도나였지만 마스터 두 명을 막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서대륙 최강이라 불리는 시카리오 후작조차도 마스터 둘을 동시에 상대할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그녀의 강철 같았던 마력 장벽에 조금씩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막아라!”
“적들을 막아!”
사력을 다해 자신들을 지켜 주는 샤르도나를 위해서라도 안간힘을 쓰며 버티는 공국의 병사들.
하지만 절대적인 숫자와 힘의 차이는 어쩔 수 없는 법.
마침내 철벽의 한쪽 성벽이 무너지면서 로만의 병력이 들어오고 그곳으로 뒤를 공격하던 흑마법사들이 몰려들어 가기 시작했다.
그것을 기점으로 샤르도나 후작의 철벽마저 깨져 나가기 시작했다.
“드디어 네년을 내 손으로 죽이는구나.”
“…….”
뚫린 성벽을 막기 위해 내려온 샤르도나 앞에 수십 번이나 부딪친 동대륙의 마스터가 앞에 섰다.
그리고 그 옆에서 떠오른 채 여유롭게 샤르도나를 내려다보는 검은 로브의 마법사.
“……그대가 흑마법사들의 수장인가?”
샤르도나의 물음에 작게 고개를 끄덕인 검은 로브의 마법사.
한참을 그녀를 응시하던 흑마법사가 경의를 표하듯 심장에 손을 대며 말했다.
“……철벽의 마지막을 제 눈에 담을 수 있게 되어 영광이오.”
자신의 죽음을 확정하듯 말하는 흑마법사의 말에도 샤르도나는 반박할 수 없는 현실에 입술만 깨물었다.
지금 그녀가 할 일은 로만의 마스터의 팔 한 짝이라도 가져가는 것뿐이었다.
“팔 하나라도 지옥으로 가져가 주마.”
“건방진 년!”
로만의 마스터가 분노한 표정으로 샤르도나에게 달려드는 순간, 흑마법사가 상공에 거대한 검은 구체를 만들어 냈다.
샤르도나가 로만과 싸우는 동안 고위 마법으로 마무리를 지으려는 생각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컥!”
갑작스럽게 날아든 거대한 검에 다급히 마력 방벽을 만든 흑마법사.
하지만 다급히 만든 방벽으로 완벽하게 막을 수는 없었는지 치명상을 입었다.
“아쉽군, 일격에 끝낼 생각이었거늘……. 서대륙을 이 지경으로 만든 수장답게 제법이야.”
여유로운 표정으로 철벽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한 명의 남자.
그 뒤로 기세를 숨기고 있었던 기사들이 일제히 자신들의 힘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흑마법사들의 처리는 맡기겠네.”
“예.”
차기 마스터로 불리는 대공가의 소가주가 고개를 숙이며 기사단을 이끌고 동대륙으로 넘어가려는 흑마법사들을 추적했다.
그러자 그 모습을 본 로만의 마스터가 경악한 표정으로 말했다.
“제국의 마스터?”
“로만의 마스터인가? 반갑소. 난 아켈리오라 하오.”
자신을 간결하게 소개한 아켈리오가 싸늘한 표정으로 상공에 떠 있는 흑마법사를 바라보았다.
“황궁 기사단장이 여길 왔다고? 이런 미친…….”
경악하는 로만의 마스터와 달리 흑마법사는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황궁을 지키는 수호자를 보낸다라……. 과감하군.”
흑마법사 세력은 제국에서 마스터를 보낼 수 없도록 제국 안에서 난을 일으킬 것 같다는 낌새를 의도적으로 보였다.
그런데 황실에서는 그 문제를 데이비어 공작에게만 맡기고 황궁 기사단장을 이쪽으로 보낸 것이다.
본래의 제국이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월크셔와 데이비어가 있는데 황궁 기사단장을 밖으로 내돌리는 짓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지만 현재의 제국이라면 가능했다.
“……또 1황자인가?”
“불경스럽군. 저하께선 너 같은 하찮은 놈이 함부로 입에 올릴 분이 아니시다.”
아켈리오가 그렇게 말하며 거대한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미리 대비하고 있었던 흑마법사는 이번엔 완벽하게 대응하며 뒤로 물러났다.
“마스터! 저희가 시간을 벌겠습니다!”
“꼴에 마스터라…….”
아켈리오가 비웃듯 말하면서 도망치려는 흑마법사, 정확히는 다크 마스터를 쫓았다.
자신의 검을 막을 때 느껴지는 추악한 기운.
그것의 정체가 단순한 흑마력이 아닌 악마의 기운임을 느꼈기에 마도사의 경지에 오른 자에 대한 최소한의 경의마저 내버렸다.
악마와 계약한 대가로 오른 마도사의 경지 따윈 조금도 존경받을 가치가 없었다.
“오늘 이 자리에서 흑마법사들은 절멸할 것이오. 그러니 그대는 그대가 할 일을 하시오.”
“……도움을 주셔서 고맙소.”
“제국은 제국의 적을 처리할 뿐. 오히려 철벽에서 싸울 수 있도록 배려해 주어서 고맙소.”
아켈리오가 빙그레 웃고는 다크 마스터를 쫓기 위해 움직였다.
그러자 샤르도나 후작이 철벽을 만들어 내며 로만의 마스터에게 검을 겨누었다. 어느새 다시 완벽하게 만들어진 철벽을 본 로만의 마스터는 지겨운 표정을 지었다.
언제나 저 지긋지긋한 철벽에 가로막혀서 매번 무승부를 이루었었다.
“또! 또 이리 막히는가?”
로만의 마스터가 허탈한 표정으로 전력으로 오러 블레이드를 만들어 냈다.
전력으로 만든 거대한 검을 휘둘렀음에도 흠집 하나 나지 않은 마력 장벽. 그것을 보며 이번에도 이 빌어먹을 철벽을 뚫지 못할 것이라는 걸 직감했다.
* * *
그렇게 로만의 마스터가 샤르도나에게 붙잡혀 있는 동안 흑마법사들은 대공가의 기사단과 아켈리오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고 있었다.
“적들을 몰아내라!”
“철벽은 영원하리!”
기세가 오른 공국의 병사들이 함성을 지르면서 무너진 성벽 안으로 들어온 로만의 병사들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그러자 안으로 진입했던 로만의 병사들이 서서히 뒤로 물러났다.
그 결과 로만의 마스터 역시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고, 공국군과 제국군은 무너진 성벽 너머로 침입한 병력을 완전히 몰아내는 데에 성공했다.
“흑마법사들을 좀 더 추격하고자 하오.”
“공국도 돕겠소.”
아켈리오의 말에 샤르도나가 흑마법사들은 자신들의 적이기도 하다는 듯 병력에게 추격할 것을 명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지금의 상황을 공왕에게 알리라는 명령을 내렸다.
* * *
그렇게 두 명의 마스터가 패퇴하는 적들을 쫓기 시작할 때, 한참 언데드 군단과 싸우던 공왕에게 이 소식이 전달되었다.
“철벽이 뚫려?”
“하오나 제국의 마스터와 기사단이 도착해 무사히 막아 냈사옵니다! 지금은 적들을 추격하는 중이옵니다!”
“허…… 제국이?”
공왕이 당황할 때, 또 한 가지의 소식이 전달되었다.
“분쟁 지역 아이사르만을 제국이 점령했습니다. 하온데 조금 이상합니다.”
“뭐가 이상하다는 것이냐?”
제국이 분쟁 지역을 노리고 있다는 것은 이미 알았기에 살짝만 인상을 찡그릴 뿐 크게 노하지 않았던 공왕.
그런 그가 다음 보고를 듣는 순간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지역들을 제국이 지켜 주겠다고 선언했다고?”
아이사르만에 있는 공국의 핵심 지역들.
그곳들을 지켜 주겠다고 말하며 탈로스가 점거하고 있던 지역만 점령한 제국군.
“제국은 공국의 위기를 노리는 승냥이들로부터 평화를 지키기 위해 움직였다고 전하라 했습니다.”
“그게 무슨 개소리…….”
“전하! 제국의 1황자가 성국과 탈로스의 군대를 공국에서 몰아내라 명했다고 하옵니다. 또한 자신들 역시 언데드 군단의 섬멸과 동시에 공국의 영토에서 물러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연이어서 올라온 보고에 공왕의 눈동자가 떨리기 시작했다.
지금 이 상황이 어찌 된 것인지 모르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근처에 있던 기사들의 얼굴엔 제국군에 대한 호감이 깃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