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81화 (81/201)

< 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 >

28. 휴식을 방해한 대가는 크다! (2)

서대륙 최강인 제국이 해적들의 국가를 인정한다?

물론 이렇게 된다고 하더라도 곧바로 공식적인 국가가 되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공국도 인정해 준다면?

논란은 될지언정 시간이 지나면 공식 국가로 인정될 가능성이 높다.

문제는 그들의 정체성이 해적이라는 점이다.

“으음…….”

“약탈이 문제요?”

카리엘이 해적왕이 고민하는 바를 잘 아는 듯 빙그레 웃었다.

“기반이 해적인데 하루아침에 바꿀 수는 없는 법. 그대들도 결국 국가라는 제국의 인정이 필요한 것 아니오?”

자신들이 단순한 해적이라는 게 아니라는 것.

속은 해적이라도 겉보기에 국가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할 수 있는 게 많아진다.

겉으로나마 범죄자 집단에서는 벗어나는 것이기에 교섭권을 가질 수 있게 되고, 지금처럼 각 상단들에게 몰래 접근해 통행세 혹은 보호비 등을 받는 게 아닌, 정식 계약이 가능해진다.

그것만으로도 아이사 군도는 한 단계 발전할 터.

하지만 해적왕은 그것만으로는 만족을 못 하겠는지 조심스레 물었다.

“제국의 인정만으로 가능하겠소?”

“음…… 정식 국가로 확실히 인정받고자 한다면 결국 근본부터 바꾸긴 해야 할 것이오.”

현재 해적질로 벌어 먹고사는 것을 바꿔야 한다는 뜻이다.

그 변화의 첫걸음이 동대륙과 서대륙을 오가는 선단을 보호하는 것.

동시에 다른 섬 지역과의 교역을 통한 항로를 보호해 주는 것도 될 수 있다.

그다음은 어업이다.

해적들이라고 무조건 약탈만 해서 먹고살지는 않는다. 그들도 먹고살려면 결국 다른 것도 필요하기에 어업하고는 있었다. 약탈에 비해 비중이 크지 않다는 게 문제일 뿐.

결국 정상 국가가 되려면 이 어업량을 크게 늘려야 했다.

그리고 그다음 순서가 무역 기지다.

가장 돈을 벌어들일 방법은 결국 이것밖에 없다.

지리적으로 요충지이자 상선들이 쉬어 갈 휴양지가 되어 줄 필요가 있다.

거기다 각국의 상선들이 모여서 거래할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했다.

거기에 물품을 가공할 산업 단지도 필요할 것이다.

문제는 현재의 해적들이 과연 이걸 할 수 있겠냐는 것이다.

그렇기에 카리엘은 현실적인 방안을 내놨다.

무기를 쥐여 주고 무력으로 정상 국가가 되는 것.

한동안은 약탈이 계속될 것이지만 겉으로나마 정식 국가 행세를 할 수 있게 돕는 것.

하지만 해적왕이 고민하는 것은 그게 아닌 것 같았다.

“진짜 국가가 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습니까?”

해적왕의 물음에 카리엘은 잠시 고민했다.

어느새 존대하는 해적왕의 눈은 간절함을 담고 있었다.

해적들의 미래는 밝지 않다.

지금이야 그가 해적왕으로 군림하고 있다지만 조금만 삐끗하면 그의 가족들부터 부하들까지 전부 목숨을 잃을 것이다.

그리고 새롭게 권력을 잡은 해적 역시 다른 해적들에게 목숨을 잃을 것이다.

매번 그렇게 자중지란이 일어나 상당히 큰 섬이고 지리적 요충지임에도 국가가 되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제국이 도와준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제국이 도와주는 데는 한계가 있소.”

카리엘이 단호하게 말했다.

제국이 도와준다 한들 해적들 스스로 바뀌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다.

게다가 카리엘 역시 여전히 고민이 많았다.

아무리 탈로스를 힘들게 해야 한다고는 하지만 해적들을 여기까지 도와주어도 되는 것일까?

제국에도 해적들에게 당한 자들이 많다.

남부에서 말썽 부리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기어코 서부까지 기어 들어와 말썽을 부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 과정에서 제국민들이 목숨을 잃은 게 부지기수였다.

“…….”

해적왕은 카리엘의 대답에 침묵했다. 확실히 해적들에게 변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다면 결국 약탈은 끊을 수 없을 테니 정상 국가화는 불가능하다.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해적왕의 말에 카리엘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하께선 아이사 군도가 ‘완전한’ 정상 국가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보십니까?”

해적왕의 물음에 카리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건 해적왕이 더 잘 알 것 같소만?”

카리엘의 말에도 흔들림 없이 바라보는 해적왕.

“비록 해적이지만 나름 정보망은 갖추고 있어 알고 있습니다. 제국에서 저하가 어떤 평가를 받는지…… 그리고 서대륙의 혼란들을 어떻게 헤쳐 나갔는지. 그러니 다시 묻겠습니다. 아이사 군도가 ‘진짜’ 정식 국가가 될 수 있겠습니까?”

해적왕의 물음에 카리엘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카리엘에게 역량과 식견이 있음을 알고 있느니, 단순히 해적들을 이용만 하려는 생각이 아니라면 구체적인 방안을 말해 달라는 뜻이었다.

“두 가지만 갖춰지면 가능할 것이오.”

“두 가지?”

해적왕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카리엘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첫째, 정상 국가가 될 기반을 다지는 것. 둘째,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자들을 잘라 내는 것. 하지만 이 두 가지가 선행되지 않는 한 완전한 정상 국가는 어려울 것이오.”

카리엘의 말에 해적왕이 입술을 깨물었다.

“제국의 도움이 있어도 ‘잘라 내야’ 합니까?”

“그렇소.”

두 번째 조건이 걸린다는 듯 말하는 해적왕.

하지만 이 부분에서만큼은 타협의 여지가 없었다.

해적으로 살고자 하는 자들이 아이사 군도에 남아 있는다면 정상 국가로 가는 상황에서 두고두고 발목을 잡을 것이다.

그렇기에 무조건 잘라 내고 가야 했다.

기반을 다지는 것만으로도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판국에 발목까지 잡힌다면 가능성은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

“어려울 것은 없소. 서부에 있는 그대들의 기지가 벨푸르스 잔당에 의해 위협받고 있다고 들었소.”

“그곳으로 보내는 것이군요.”

카리엘의 제안에도 해적왕은 쉬이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자신의 형제 중에도 해적 생활을 즐기는 자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 해적왕에게 카리엘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길게 고민할 필요 있소? 일단 내 제안대로 정상 국가라는 껍데기를 두르는 것부터 시작하시오.”

침묵하던 해적왕이 고개를 들어 카리엘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카리엘이 빙그레 웃으면서 설명을 이어 나갔다.

“일단 정상 국가가 어떤 것인지 맛이나 보여 주시오. 선택은 그 뒤에 해도 늦지 않소.”

아무리 해적들이라도 약탈하러 나가는 건 항상 긴장감을 동반하는 일이다.

상선들이 바보도 아니고, 위험지역을 홀로 항해하지는 않았다.

용병들을 고용하고, 각국에 도움을 받아 호위 선박들을 고용하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전투가 벌어져서, 한번 약탈할 때마다 죽는 사람들이 필히 발생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그렇기에 노예를 사거나 포로를 회유해 해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겉으로나마 정상 국가가 된다면?

이런 위험이 대부분 사라진다. 약탈하기 전에 정기적인 통행료와 보호비를 받으며 교섭할 수 있으니까.

‘안전함을 맛본 자들이라면 정상 국가라는 꿈을 꿀 수밖에 없지. 거기에 무역이라는 달콤함만 추가한다면…….’

아이사 군도의 완전한 정상 국가화도 불가능은 아니었다.

“만약 정말로 원한다면 제국에서도 지원을 논의해 볼 수 있소.”

카리엘의 말에 해적왕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물론 공짜는 아니오.”

“원하는 것이 있습니까?”

“타 국가에 비해 보호비와 통행료, 그리고 아이사 군도의 시설에 대한 사용료 절감 정도?”

“그것이면 됩니까?”

해적왕의 물음에 카리엘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해적왕의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이 정도라면 사실상 제국이 거의 공짜로 도와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카리엘의 생각은 달랐다.

후에 정말로 아이사 군도가 국가가 된다면 이는 제국에 막대한 이득이 될 것이다.

“자! 미래를 위한 얘기는 이쯤하고 본격적인 거래를 해 볼까 하는데, 어떠시오?”

“좋습니다.”

카리엘의 말에 해적왕은 빙그레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먼저 결정된 것은 제국의 상선들에 대한 보호비 및 탈로스를 괴롭히는 대가로 10만 골드를 선지급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신식 대포를 판매하는 것.

그런데 제국이 아이사 군도에 파는 무기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제국에서는 마력에 밀려 사장되다시피 한 무기들도 있었다.

대표적인 예로 머스킷이 있는데, 현재 해적들은 약탈하다 죽으면 먼저 챙기라고 할 정도로 머스킷은 귀한 무기였지만, 제국에는 창고에 버려지다시피 했다.

더 좋은 무기 체계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니 구식 체계인 머스킷들을 적정 가격에 해적들에게 넘기고, 현금이 부족한 해적들을 배려해 아이사 군도에 있는 값비싼 물건들로 대금을 치르게 할 생각이다.

‘대해적 시대가 만들어질 수도 있겠네.’

제국에 남아도는 재고를 해적들에게 처분하면 자금에 여유가 생길 터.

동시에 탈로스와 로테온을 압박하는 효과도 가져올 수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일석이조였다.

“하나 더 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오?”

카리엘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묻자 해적왕이 헛기침하면서 목을 가다듬고는 입을 열었다.

“기술자들을 보내 주었으면 합니다.”

“……기술자?”

“아! 무기 기술자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카리엘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묻자 해적왕이 다급히 손을 내저었다.

“설마…… 기반을 다지려는 것이오?”

해적왕의 의도를 단번에 눈치챈 카리엘이 놀랍다는 듯 묻자 해적왕이 헛기침하면서 볼을 붉혔다.

“일단 시작은…… 해 볼 생각입니다.”

진짜 ‘왕’이 되는 것.

그것은 해적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꿈꿔 보는 것이었기에 해적왕은 이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카리엘의 생각은 부정적이었다.

“기술자들이 아이사 군도를 가는 것은…… 어렵지 않을까 싶소.”

“으음…….”

카리엘의 대답에 실망하는 해적왕이었지만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 그에게 카리엘은 대안을 제시했다.

“영민한 자들을 추려 보시오.”

“예?”

“이곳에서 가르쳐 줄 수는 있을 것이오.”

카리엘의 말에 해적왕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직접 가는 것보다야 시간은 걸릴 테지만…….”

“충분합니다.”

“좋소. 중앙에 얘기해 보겠소.”

“감사합니다. 수업료는 확실히 치르겠습니다.”

해적왕의 말에 카리엘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상 국가로의 ‘발돋움’이라는 희망이 생겼으니 해적들이 탈로스를 치는 데 본격적으로 움직일 것이다.

제국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을 테니 개처럼 뛸 것이 분명했다.

‘위험하긴 하지만 가릴 처지가 아니긴 하지.’

카리엘이 그렇게 생각하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해적을 이용한다는 것만으로 리스크를 안고 시작하는 것이었지만 위기를 넘으려면 어쩔 수 없었다.

모든 거래가 마무리되자 카리엘은 다음 일정을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때 해적왕이 그를 붙잡았다.

“이것을 가지고 가십시오.”

“이건…….”

해골 문양이 그려진 검은 패.

그 중앙에는 붉은 보석이 박혀 있었다.

“한 번쯤은 해적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아…….”

해적왕의 설명에 카리엘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해적들에게 큰 도움을 준 이만이 받는다는 검은 패. 그것을 카리엘에게 쥐여 준 것이다.

아이사 군도 역사상 이 패를 받은 이가 손에 꼽는 걸 생각해 보면 엄청난 보물을 받은 것이다.

“정당한 거래였을 뿐인데…….”

“받는 이가 은혜라 여겼으면 그것은 은혜인 법. 황자 저하는 아이사 군도의 은인이오.”

해적왕이 그렇게 말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근방에 있던 해적들 역시 다 같이 고개를 숙이고는 조용히 좁은 방을 빠져나갔다.

그렇게 해적들이 전원 건물에서 빠져나가자 카리엘도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건물 밖으로 나왔다.

“너무 위험한 것 아닙니까?”

“어쩔 수 없지. 주변 국가들이 저리 나오니 어느 정도 위험은 감수하는 수밖에.”

타리온의 물음에 카리엘이 한숨을 쉬면서 답했다.

“이제 남은 건 성국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인데……. 이건 좀 고민해 봐야겠네.”

감찰부에게 처리를 맡기긴 했는데 그것만으로는 부족할 것 같았다.

“일단 좀 쉬자. 후…… 유명한 도시까지 왔는데 일만 할 수는 없지.”

“좋은 데 알아봐 놨습니다.”

“그래.”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는 듯 곧바로 말하는 타리온을 보면서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카리엘.

그는 옆에 서 있는 샤르도나를 돌아보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오늘 고생 많으셨소.”

“……아닙니다.”

아름다운 얼굴로 미소를 띠며 말하는 샤르도나.

보는 이가 잠시 멍해질 만큼 수려한 얼굴에 미소가 지어지니 천하의 카리엘도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을 느꼈다.

“크흠! 바로 돌아가실 생각이오?”

“그래야겠지요.”

오랫동안 철벽을 비워 둘 수는 없는 법.

본래의 자리로 하루라도 빨리 복귀해야 했다.

어느새 주변에 모인 기사들과 시종들의 얼굴에 살짝 아쉬운 표정이 떠올랐으나 카리엘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등을 돌렸다.

망설임 없이 등을 돌린 카리엘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샤르도나는 방금 전의 일을 가만히 돌이켜 보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