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 >
29. 작은 항구에서 시작되는 심상치 않은 바람 (2)
명색이 1황자이기에 자금은 중앙에서 얼마든지 당겨 올 수 있었다.
문제는 사람이다.
그것도 제대로 배운 인재들.
당장이라도 지식인들을 영입하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아무나 뽑았다간 어중이떠중이까지 죄다 몰려들지도 모르는 일.
카리엘이 원하는 것은 능력 있는 자들이지 쓰레기들이 아니었기에 작업은 신중해야 했다.
어차피 지금 당장 지원자들이 몰려들어도 일할 곳이 마땅치 않기에 시간과 노력을 들였다.
그렇다면 카리엘은 그동안 무얼 했느냐?
“상단주들은?”
“모여 있습니다.”
“가자.”
집무실에서 벗어나 대형 회의장에 들어서자 옆에 있던 타리온이 보고서를 건네주었다.
“반갑다. 1황자 카리엘이다.”
반갑게 인사하는 카리엘. 하지만 그곳에 앉아 있는 상단주들의 얼굴에는 긴장의 빛이 역력했다.
수도에서 부패를 척결한다고 한차례 날뛰었을 때, 그 여파가 남부에도 크게 들이닥쳤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남부에 사는 귀족들과 상인들에게 카리엘은 사신이나 다름없었다.
“남부에선 나를 사신이라 부른다지?”
카리엘이 싸늘한 미소를 지으면서 묻자 다들 흠칫 떨었다.
“그대들에게 죄를 묻고자 부른 건 아니니 떨 거 없어.”
겁먹지 말라는 듯 말했지만, 상인들의 고개는 더욱더 바닥으로 떨궈졌다.
그 모습을 보고 피식 웃은 카리엘이 입을 열었다.
“그동안 감시가 심해지고, 제한도 많아져서 답답했을 거야?”
카리엘의 말에 고개를 숙인 상인들이지만 속으로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이곳에 모인 상인들은 자잘한 죄를 범했을지언정 숙청당하거나 상단이 박살 날 정도로 큰 죄를 지은 자들은 없었다.
하지만 남부 왕국들과 해 왔던 관행들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기에 사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라이벌로 여겨지는 서부 상인들한테서 점점 주도권을 빼앗기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래서 카리엘에게 서운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사실 남부 상단들이 그리된 건 남부 왕국들 때문이지. 아니 그러한가?”
“……예.”
“그렇사옵니다.”
몇몇 억울한 상단주들이 작게 대답하자 다른 이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서부 상단들한테 밀린 것도 기분 나쁘지?”
카리엘의 말에 몇몇 상단주들이 주먹을 꽉 쥐었다.
제국 최고의 상단은 중앙에 있을지언정 최고의 상인 연합은 남부에 있다는 자부심.
그것이 박살 나 버린 것이다.
“죗값을 받았으니 슬슬 고개를 들 때도 되었지.”
“그 말씀은……?”
“기회를 주지.”
카리엘이 그렇게 말하면서 벽에 말려 있는 종이를 풀었다.
제국에 새로 생긴 동부 항구의 발전 계획들이 적힌 것을 본 상단주들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난 이곳에 남부와 서부에 버금가는 상인 연합을 만들 생각이야. 하지만 기반이 없으니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지.”
말이 끝나자 여기저기서 침을 꿀꺽 삼키는 것이 보였다.
“이게 기회라는 건 다들 잘 알 거야. 상인 입장에선 상당히 먹음직스러운 것이겠지. 하지만 그냥 줄 수는 없다는 것도 잘 알 터.”
“저하께서 명하신 것이 조건입니까?”
한 상단주의 말에 카리엘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딱 5개 상단만 우선적으로 뽑을 거야. 5개 상단만이 이 프로젝트에 우선적으로 입찰할 수 있는 권리를 얻게 되겠지.”
빙그레 웃은 카리엘은 상단주들을 하나하나 바라보았다.
“난 무조건적으로 희생을 강요하지 않는다. 다들 알다시피 난 남부 왕국들을 견제하기 위해 그대들을 불렀다. 그 과정에서 그대들의 희생은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다는 걸 안다. 그렇기에 이 보상안을 제시하는 것이지.”
그 말에 다들 희열이 가득 담긴 눈으로 카리엘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직 부족했다.
카리엘은 이들이 아주 미쳐 버릴 수 있도록 더 큼지막한 것을 알려 줄 생각이었다.
“그리고 하나 더 선물을 주지. 내가 너희들에게 줄 선물은 정보다.”
“정보…… 말입니까?”
“그래. 다들 내가 휴양지에서 놀고만 있었다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카리엘의 물음에 상단주들이 속으로 ‘놀고 계신 것 아니었습니까?’란 생각을 품었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기대감에 찬 표정으로 카리엘을 바라보았다.
“해적들과 거래를 했다.”
카리엘의 한마디에 상단주들의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 한마디에 머리 좋은 상단주들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단번에 파악했다.
‘양방향으로 칠 생각이야.’
‘일단 우리로 하여금 남부 왕국들의 시선을 잡아 둘 생각인가?’
그러나 몇몇 경험이 많은 상단주들은 좀 더 깊게 생각했다.
‘정확히 어떤 거래를 한 거지? 어디까지 생각하시는 걸까?’
‘해적들을 이용한다면 혹시 동쪽 무역로 자체를 장악하시려는 걸까?’
상단주들이 충분히 생각할 수 있도록 입을 다물고 기다리던 카리엘은 가볍게 책상을 손으로 두드렸다.
그제야 상념에 빠져나온 상단주들이 카리엘에게 집중했다.
“해적들과 정식으로 거래할 생각이다. 일단 확정된 건 그들에게 무역로의 보호를 맡기는 거야.”
“아…….”
“혹 그다음 계획도 있으신 것입니까?”
한 상단주의 물음에 카리엘은 빙그레 웃을 뿐 답하진 않았다.
마치 너희들에게 제공할 수 있는 정보는 이것뿐이라는 듯 단호함이 담긴 눈빛에 상단주들은 다시금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방금 공개된 정보만으로도 상단주들이 더 적극적으로 변하기에는 충분했다.
“다들 알다시피 너희들에게 주어진 임무는 단순히 이 항구를 차지하기 위한 거래가 아니다. 너희들의 미래를 위해서도 해야 될 일일 뿐. 그러니 최선을 다해라.”
“예!”
어째서 움직여야 되는지 확실하게 알려 준 카리엘은 굳이 더 말하지 않았다.
남은 건 실무자들이 해야 할 일뿐이다.
“아 참! 오늘부로 그대들에게 그림자들이 한 명씩 찾아갈 거다.”
카리엘의 말에 흠칫 놀라는 상단주들.
“겁먹을 거 없다. 방금 말한 정보는 기밀 사항이기에 때가 될 때까지만 그림자들이 함께할 뿐. 오히려 좋을 것이다. 남부에서 찾아오는 손님들도 그림자들이 알아서 처리해 줄 것이니.”
그렇게 말을 끝맺은 카리엘이 자리를 뜨자 다들 멈췄던 숨을 길게 토해 내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모두 카리엘이 자신들에게 어떤 기회를 준 것인지 잘 알았기 때문이다.
들뜬 표정으로 나가는 상단주들을 보며 타리온은 한숨을 쉬었다.
카리엘의 덫에 걸려든 저들의 미래가 보였던 탓이다.
“좋아. 상단 쪽은 해결했고…… 남은 건 군부인가?”
그렇게 중얼거린 카리엘은 이번엔 군부를 만났다.
잘 차려입은 근육질의 남성이 카리엘의 옆에 두 손을 모으고 서 있었다.
그런 그에게 카리엘이 진중한 음성으로 물었다.
“소국 연합군은?”
“탈로스 내부로 더 깊숙이 숨어들었습니다. 더 압박하는 건 어렵지 않을까 싶습니다. 남부군까지 합세하면 얼추 가능하겠지만…….”
“피해가 크겠지?”
“……예.”
군단장의 대답에 카리엘이 잠깐 고민했다. 한창 도시가 발전할 시기에 쓸데없이 탈로스와 기 싸움하는 데 시간을 뺏길 수는 없었다.
결정을 내린 카리엘이 무거운 음성으로 말했다.
“후…… 우리는 여기까지 하지.”
“그 말씀은…….”
“군대를 물려서 이곳을 기점으로 방어선을 짜도록.”
“소국 연합은 내버려 두는 것입니까?”
군단장 신분으로 돌아온 장군이 카리엘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니. 천천히 압박해야지. 하지만 주는 우리가 될 필요가 없지.”
“남부군의 부담이 커질 겁니다.”
지금 남부군은 남부 왕국들을 견제하며 동시에 내부의 반란 진압까지 동원되고 있었다.
동시에 소국 연합까지 견제하긴 어려워 카리엘에게 도움을 청한 것인데 이렇게 빼 버리면 남부군의 피로도가 가중될 것이다.
“걱정 마. 곧 남부군도 여유로워질 테니까.”
카리엘이 빙그레 웃으면서 말하자 군단장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의 의문을 풀어 주기 위해 카리엘은 그동안 있었던 일이 간략하게 적힌 보고서를 내밀었다.
그것을 읽은 군단장이 놀란 표정으로 카리엘을 바라보았다.
“이젠 급할 게 없어. 천천히 가자고.”
그렇게 말한 카리엘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상인들이 1차적으로 남부 왕국에 한 방 먹일 것이다. 그리고 정신없는 사이 해적들이 한 방 더 때릴 예정.
그러니 무리하게 칠 필요가 없었다.
한 방 크게 때리는 것보다 오히려 야금야금 탈로스 쪽 분쟁 지역을 건드리면서 신경을 거슬리는 게 하는 편이 더 나았다.
“탈로스와 제국 사이에 국경선이 완전히 그어지지 않은 지금밖에 할 수 없는 일이지.”
“으음…… 확실히 영토 확장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긴 합니다. 하지만 아직 탈로스의 제1검이 분쟁 지역 근방에 주둔 중입니다.”
“그러니까 지금은 신경을 건드리는 선에서 멈춰.”
“예.”
카리엘의 목적을 확실히 파악한 군단장이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이것으로 지금처럼 남부 왕국들이 설칠 수 없도록 제동을 거는 계획이 끝났다.
남은 건 반란 분자들과 소국 연합뿐이었다.
“그 정도는 지들이 알아서 해야지.”
카리엘이 그렇게 중얼거리는데, 타리온이 들어왔다.
“작업은?”
“남부와 동부는 확실히 퍼졌습니다. 슬슬 중앙 지역에서 작업 중입니다.”
혁명가들을 자발적 노예로 만들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아직은 소문을 퍼뜨리는 단계이기에 한 명도 찾아오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면 하나둘 이곳으로 올 것이 분명했다.
“감찰부한테 액션만 취하라고 해.”
“예.”
카리엘의 당부에 타리온이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머리가 좋은 만큼 눈치도 빠른 놈들이기에 자칫 잘못했다간 정부가 사기 치는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감찰부에게 적절히 긴장감을 심어 줄 겸 수상한 움직임을 감시하라고 할 생각이었다.
“그래도 아쉽네. 정말 오겠다는 놈들이 한 명도 없었어?”
“예. 그래도 각 지역에서 서로 모임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괜히 잡아들이려 하지 말라고 해. 훌륭한 관료가 되실 분들인데 억압하면 안 되지. 딱 감시까지만. 알겠지?”
“……예.”
타리온의 대답에 작게 고개를 끄덕인 카리엘은 창문을 바라보았다.
다들 힘들다고 투덜대면서도 은근슬쩍 일을 더 하려고 한다.
일한 만큼 수당이 나오는 것만으로도 감격스러운 일인데, 상위권에 들면 보너스도 나온다.
거기다 휴가까지 더해진다.
이런 기회가 쉽게 오는 게 아니었다.
벌써부터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런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바짝 벌고 노후를 즐기자.”
“지금이 대박 날 기회다!”
반면에 가정이 있는 자들은 안정을 원했다.
하지만 그들 역시 열심히 일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바짝 벌어 놓으면 만약의 상황이 발생해도 벌어 놓은 돈으로 버틸 수 있으니.
딱 몇 달만 바짝 벌고 늘어질 생각을 하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카리엘은 그들을 그렇게 놓아줄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이제 슬슬 다음 단계를 준비하자.”
카리엘의 말에 타리온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노예들이 슬슬 자발적으로 일하기 시작했으니 다음 계획을 시작할 때였다.
인간이란 두 종류가 있다.
돈을 벌어도 끝없는 욕심에 더욱 열심히 일하는 스타일.
이런 인간들은 카리엘이 딱히 신경 쓰지 않아도 알아서 일할 사람들이다.
문제는 두 번째다.
어느 정도 노후가 보장되면 쉬고자 하는 사람들.
바로 카리엘 같은 부류였다.
이런 인간들의 경우 방법은 하나뿐이다. 더 많은 돈을 벌 기회를 주어 노후를 즐기려는 시기를 늦추는 것!
“그들의 욕망을 부추겨야겠지?”
빙그레 웃으면서 카리엘이 타리온을 바라보았다.
“노동자들이 우선적으로 투자……할 수 있도록 준비하겠습니다.”
“그래.”
이 도시는 이제 막 성장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지을 것도 많고, 해야 할 것도 많았다.
게다가 돈도 많이 들었다.
분명 미래의 가치는 지금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클 것이 분명했다.
그것에 노동자들이 우선적으로 투자할 수 있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성과에 따라 우선순위를 나누고 근면성실한 자들에게 투자금의 최대치를 늘려 준다면?
미래에 큰돈을 만질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더 열심히 일할 것이다.
“노후 보장은 확실하게. 대신 젊을 때는 열심히 일해야지?”
그렇게 중얼거린 카리엘이 타리온을 보며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흠칫 놀라면서 식은땀을 흘리는 타리온.
‘저하께서 황제가 되신다면…… 제국은 지옥이 되는 걸까?’
어쩌면 죽기 직전까지 굴려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타리온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디 아파?”
“……아닙니다.”
“몸조심해. 건강만큼 소중한 건 없다?”
“……예.”
카리엘의 걱정에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숙이는 타리온.
하지만 걱정은 걱정이고, 맡은 일은 완벽히 해야 하는 법.
오늘도 한차례 털린 타리온은 곧바로 밖을 나섰다.
상사에게 털리고 아랫사람에게 푸는 전통적인 관례에 따라 고위 관료들과 그림자들이 욕을 처먹은 후 분노로 번뜩이는 눈동자로 도시를 배회하기 시작했다.
“나쁘지 않군.”
이 모습을 보면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는 카리엘.
강도 높은 노동에 모두가 죽을 것 같은데도 신기하게도 포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보상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해 줄 노동 환경 등이 개선되기 시작하면서 어찌어찌 버틸 수 있는 작업 환경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소문은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제국민들의 마음속에 혁명의 불길을 지폈다.
당연한 줄만 알았던 임금.
당연한 줄만 알았던 작업 환경.
당연한 줄만 알았던 복지.
귀족들에게 쥐어짜이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이 바뀌었다.
그리고 마침내 이 소문이 제국의 수도를 강타하면서 음지에 숨어 있던 혁명가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저하께 가야겠소.”
“그분이 우리의 희망이오.”
“갑시다. 그분이라면 우리의 말을 들어줄 것이오!”
수도를 중심으로 각 지역에 숨어 있던 혁명가들이 하나둘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 멀리 제국에 새로이 생긴 항구를 향하여…….
그 중심엔 혁명 세력의 중심 마르크스 베버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