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 >
33. 황제의 죽음 (2)
황제의 죽음과 함께 제국 곳곳에는 검은 깃발이 걸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수도와 황궁의 문이 개방되었다.
조문하기 위해 찾아온 어떠한 이도 막지 않겠다는 의지를 문을 개방하는 것으로 드러낸 것이다.
그리고 제국이 진행하던 전쟁 역시 멈췄다.
토벌군의 진군을 일제히 멈췄으며 소국 연합과의 전쟁 역시 잠시 멈추었다.
새로운 황제인 카리엘의 명령에 따라 제국은 모든 것을 일제히 중단하고 열흘간 오직 황제의 죽음에 대한 추도만을 했다.
그러자 적대적인 움직임을 보이던 남부 왕국들 역시 군사적인 움직임을 멈추었다.
제국이 먼저 군사적인 움직임을 멈추고 물러나니 서대륙의 모든 국가들 역시 전투를 멈추고 사신단을 꾸리기 시작했다.
카리엘의 결정으로 인해 얼마 전까지 적대했던 것이 거짓말인 것처럼 모두가 황제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수도로 모였다.
제국이 먼저 굽히면서 모든 이들에게 황제의 죽음을 기려 달라고 서신을 보내니 명분 때문에라도 사신단을 보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결국 황제의 장례식 덕에 서대륙은 아주 잠깐 동안 평화를 맞이했다.
“폐하, 토벌군이 당도했습니다.”
황제가 승하한 지 이틀이 지나자 각 지역에 있던 주요 인물들이 하나둘 당도하기 시작했다.
월크셔 공작과 데이비어 공작, 그리고 변경백들이 수도에 도착했다.
그와 동시에 남부 왕국들과 성국에서도 주요 사신단이 찾아왔다.
대륙 회의 때처럼 서대륙의 주요 강국들의 사신단이 도착하자 본격적으로 황제의 장례식이 시작되었다.
“곧 시작될 것 같습니다.”
“가지.”
늙은 시종장의 말에 카리엘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황을 모셨던 시종장은 이제 카리엘을 곁에서 모시게 되었다. 동시에 카리엘의 집무실 역시 황제의 궁으로 옮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제 집처럼 지내는 카리엘을 보면서 시종장이 조용히 말했다.
“생각보다 빠르게 적응하셔서 다행이옵니다.”
옆에서 걷는 시종장의 말에 카리엘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피식 웃었다.
전생에 수없이 사용했던 궁이었기에 별 위화감 없이 쓰고 있었지만 시종장이 보기엔 빠르게 적응하는 것처럼 보인 것이다.
“폐하.”
“타국의 사신단들은?”
황급히 달려온 타리온에게 카리엘이 나직이 물었다.
“광장 근처에 있는 숙소에 있습니다.”
“소국 연합도 왔나?”
“오늘 아침에 도착했습니다.”
“반란군은?”
“아무래도 오지 않을 것 같습니다.”
타리온의 보고에 카리엘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명분상 황제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온 사신단들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제국과의 관계를 재정립할지, 아니면 끝을 보게 될지 결정하기 위함이 컸다.
새로운 황제가 된 카리엘과 마지막 협상을 위해 찾아온 손님들이 장례식을 빌미로 모인 것이다.
카리엘은 이들을 위해 귀족들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마지막 기회를 주고자 했다.
“확실한 동맹은 공국 하나뿐인가?”
카리엘이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자 뒤따르는 타리온과 시종장이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황제의 죽음을 기리기 위한 장례식이 끝나면 제국은 본격적으로 혼란의 시기에 돌입할 것이다.
본래라면 반란군을 진압하고 소국을 정벌하면서 새로이 서대륙의 질서를 재정립하려 했겠지만, 상황이 좋지 않았다.
“폐하.”
“폐하!”
전쟁터로 떠났던 두 동생들이 카리엘에게 다가왔다.
“고생했다.”
“죄송합니다.”
“빨리 끝냈어야 했는데…….”
빨리 끝내지 못했음을 자책하는 동생들을 보며 카리엘이 고개를 저었다.
반란군을 완전히 진압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했기 때문이다.
“보고는 받았다. 폐하께서 예사보다 빨리 승하하셨기에 어쩔 수 없었음을 아니 자책은 그만해라.”
그렇게 말하면서 한숨을 쉬었다.
반란군도 소국 연합도 제대로 마무리 짓지 못했기에 상황이 꼬였다.
그렇기에 장례식 이후가 중요했다.
“장례식이 끝난 후 너희들은 곧바로 전쟁에 복귀해라.”
카리엘의 말에 두 동생들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론이 심상치 않아.”
“많이 심각합니까?”
세리엘의 물음에 카리엘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그쪽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날 수도 있을 거다. 로테온이 반란 세력을 돕고 있으니까.”
“그렇다면…….”
“우린 친제국파를 도와야겠지.”
카리엘의 말에 세리엘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 말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대리전입니까?”
“시작은 그럴 거다. 하지만 곧 확전되겠지.”
제국이 온전히 부활하는 것을 지켜볼 남부 왕국들이 아니었다. 이미 막대한 배상금을 주고 있는 현 상황에서 소국들까지 죄다 집어삼킨 제국의 다음 목표는 자신들이 될 거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혼란스러운 지금 아이론을 자신들의 세력으로 끌어들여서 압박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성국 역시 조금씩 칼을 꺼내 들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이미 성국과 남부 왕국들은 밀약을 맺었어. 그러니 사실상 아이론만 남은 상황이지.”
아이론을 누가 먹느냐에 따라 앞으로의 향방이 달라질 것이다.
아이론이 밀약을 맺은 성국과 남부 왕국들의 동맹에 추가된다면 제국은 어려운 싸움을 할 것이고, 반대로 제국에 집어삼켜진다면 서대륙은 제국의 천하가 될 것이다.
“이대로 멈출 가능성은 없는 겁니까?”
루피엘의 물음에 카리엘이 피식 웃었다.
“소국 연합이 제국의 속국이 되고, 남부 왕국들이 아이론에 하는 짓을 멈춘다면 가능할 수도 있지. 하지만 그게 가능할까?”
카리엘의 물음에 두 황자들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어. 이번에 만나는 것은 서로 간의 생각을 상대방에게 알리는 것에 불과해.”
그렇게 말한 카리엘은 두 동생들의 어깨를 잡았다.
“그러니 최대한 빨리 마무리 지어야 한다.”
“예.”
“네.”
동생들에게 다시 한번 강조한 카리엘은 작게 고개를 끄덕인 후 황제의 관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황궁의 문을 지나 광장에 도착한 그는 하루를 지낸 뒤 북문부터 4개의 문을 지나 역대 황제들이 묻힌 묘지로 향했다.
황제의 관이 움직일 때마다 같이 움직이는 카리엘과 주요 관료들이 함께 움직인다.
마지막으로 관이 묻히는 순간 공식적인 행사는 끝나며, 사흘간 황제를 위해 밤에 불을 밝히는 것으로 모든 장례식 일정이 끝난다.
“가자.”
카리엘의 말에 황제의 시신이 담겨 있는 관이 들어 올려지더니 천천히 광장으로 움직였다.
행렬 맨 앞의 관이 움직이자 그에 따라 행렬이 이동하는 것과 동시에 모든 이들이 검은 깃발을 들어 올리며 고개를 숙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행렬이 움직일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양쪽으로 줄을 섰다.
이윽고 광장에 미리 준비한 곳에 관이 안착했다.
그러자 각국의 사신들이 가장 먼저 와서 황제의 관에 꽃을 놓는 것을 시작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광장에 꽃을 올려 두며 황제의 죽음을 기렸다.
그렇게 모두가 황제의 죽음을 기릴 때, 가장 먼저 꽃을 올려 둔 사신들이 카리엘을 찾았다.
“폐하를 뵙습니다.”
“로테온인가?”
“그렇습니다.”
“그쪽은 탈로스인가?”
“예, 폐하.”
남부 왕국들의 사신을 본 카리엘은 한적한 건물로 들어가 모든 사람들을 물렸다.
“먼저 황제 폐하의 죽음을 애도합니다.”
사신의 말에 카리엘이 작게 고개를 숙이면서 인사를 받아 주었다.
“날 찾아온 이유는?”
“전쟁을 멈춰 주시길 청합니다.”
탈로스의 사신이 고개를 숙이며 청하자 카리엘이 눈을 돌려 로테온의 사신을 바라보았다.
“소국 연합이 제국에 한 장난질은 잘 알 텐데?”
“예, 그렇기에 중재하고자 합니다.”
그렇게 말한 로테온의 사신이 멀리서 간절하게 바라보고 있는 소국들의 사신을 마주 보았다.
그러자 카리엘이 탈로스의 사신을 보았다.
“그쪽도 이 사안 때문에 찾아온 건가?”
“그렇습니다.”
“멈추면? 그대들이 소국을 대신해 배상금이라도 줄 생각인가? 아니면 영토?”
카리엘의 물음에 두 사신의 조용히 소국 연합이 준비한 것들을 보여 주었다. 영토 일부 그리고 소정의 배상금, 마지막으로 철저히 중립국이 되겠다는 서약서였다.
서약서에는 남부 왕국과 제국의 중간에서 중립국으로서 어떠한 편도 들지 않겠다는 약조가 담겨 있었다.
동시에 남부 왕국들 역시 제국이 수입하는 필수품에 한해서 세금을 내려 주겠다는 문서를 보여 주었다.
“대륙의 평화를 위해서 제국이 한 발자국 물러서길 바랍니다.”
자신들이 이 정도 했으니 그만 물러나 달라는 말에 카리엘이 피식 웃었다.
그럴듯하게 보이는 문서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냥 제국보고 이제 그만하라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고작 땅덩어리 조금에 쥐알탱이만 한 배상금이라……. 거기에 필수품에 대한 관세를 낮춰 주겠다?”
어이가 없다는 듯 웃는 카리엘.
어차피 소국 연합은 곧 박살 날 것이고, 그럼 그 땅과 재물들은 전부 제국이 갖게 될 것이다.
거기다 제국이 동부의 아이사르만을 먹은 이상 동대륙에서 수입하는 필수품들 역시 굳이 남부 왕국들을 거칠 필요가 없었다.
“거절하지. 전쟁을 멈추고 싶으면 더 내놓으라고 해.”
“더 이상 바라시는 것은 불가능하옵니다. 이 이상 바라신다면…….”
“바란다면? 제국과 전쟁이라도 하고자 하는가?”
로테온의 사신을 보면서 싸늘하게 말한 카리엘이 기세를 드러냈다.
그러자 자연스레 드러나는 이마의 문양.
그것을 본 두 사신이 침을 꿀꺽 삼켰다.
황실의 문양이 다시 나타난 이상 제국이 흔들릴 일은 없었다.
모든 것이 카리엘의 뜻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는 건 지금 카리엘이 보이는 모습이 앞으로 제국이 나아갈 방향이라는 뜻.
“로테온을 적으로 돌리시려는 것입니까?”
“마치 우리가 죄를 지은 것처럼 얘기하는군. 소국 연합을 갖고 장난질을 친 건 그대들이 먼저 아닌가? 무엇보다…… 전쟁을 정말 멈추고자 했으면 아이론을 건들지 말았어야지.”
다 알고 있다는 듯 카리엘이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어차피 그대들도 의견이 좁혀지지 않을 거란 걸 잘 알고 있겠지. 서로의 입장을 확인하러 온 것 아닌가?”
“…….”
“…….”
“성국과 그대들이 밀약을 맺었음을 알고 있다.”
카리엘은 테이블을 ‘탕!’ 하고 내려치면서 말했다.
“그대들의 왕에게 전하라. 제국의 다음 전쟁 지역은 아이론이 될 것이니 제대로 붙어 보자고.”
그 말을 끝으로 카리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폐하를 위해 여기까지 와 준 점은 고맙게 생각하지. 그 점을 가상히 여겨 장례식이 끝나고 보름간은 그대들에 대한 압박을 멈춰 주겠다.”
그 말과 함께 건물에서 벗어나 황궁으로 돌아가는 카리엘.
“결국 이렇게 되는군.”
“후…… 제국과의 전쟁이라……. 쉽지 않겠어.”
하나로 뭉친 제국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는 몇백 년간 뼈저리게 느껴 왔다.
그렇기에 서대륙의 모든 국가들은 막대한 자금을 쏟아부어 제국이 분열되게끔 조장해 왔다.
제국의 귀족들은 그걸 알면서도 눈앞의 돈에 정신을 팔며 분열해 왔었다.
그런데 지금 그 제국을 한데 모을 황제가 남부 왕국들을 상대로 선전포고한 것이다.
“어서 보고하러 가야겠군.”
“그래.”
서로 가까운 두 나라의 사신이 각국의 왕에게 보고하러 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다 문득 생각났다는 듯, 로테온의 사신이 소국들의 사신들을 바라보았다.
“저들은 이제 끝이군.”
“우리도 저 꼴이 나지 않으려면 열심히 움직여야겠지.”
로테온 사신의 말에 탈로스의 사신이 한숨을 쉬었다.
로테온의 사신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상 황제의 장례식은 서대륙의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이뤄지는 마지막 휴식 같은 것이었다.
장례식이 끝나는 순간부터 남부 왕국들과 성국은 바삐 움직일 것이며 제국 역시 거대한 힘을 서서히 서쪽으로 움직일 것이다.
* * *
“타리온.”
“부르셨습니까.”
“대신들을 비밀리에 소집해.”
“예.”
타리온에게 명령을 내린 카리엘은 작게 한숨을 쉬면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간다.
“은퇴는 글렀을지도…….”
그렇게 중얼거린 카리엘이 한숨을 쉬었다.
한발만 물러섰으면 편안한 황제 생활을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음속에 남아 있는 자존심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물러선단 말인가?
“잘됐어. 이참에 전생에 당했던 것을 이자까지 쳐서 갚아 주자.”
그렇게 중얼거린 카리엘이 오히려 좋다고 애써 되뇌었다.
하지만 작게 말아 쥔 그의 주먹은 이미 떨리고 있었다. 이번 결정으로 그의 은퇴는 한없이 멀어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