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 >
36. 거대한 전쟁이 일어날 조짐
거대한 불이 타오르면서 이그니트의 수도 전체를 환하게 비추었다.
꺼지지 않는 불이 다시금 타오르면서 제국민들과 귀족들 전부가 환호했다.
위대한 황제의 탄생이 제국 주요 지역에 설치된 거대한 영상구를 통해 보여졌는데, 그 덕에 모든 제국민들이 일제히 환호할 수 있었다.
강력한 동맹이 된 공국 역시 이 사실에 축하해 주었다. 동맹의 강함으로 인해 공국 역시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타 국가들은 달랐다.
그나마 아이론은 친제국파 성향을 가진 이들이 축하해 주었지만 다른 이들은 똥 씹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다급한 건 남부 쪽 사신단이었다.
“하…… 최악이군.”
압도적인 지지를 받는 황제의 탄생을 보면서 로테온의 사신단장의 긴 한숨을 토해 냈다.
로테온이 그토록 걱정했던 일이 발생했다.
카리엘이 황제가 되는 것.
그런데 그자가 황실 문양을 부활시킨 것으로도 모자라 초대 황제와 같은 문양을 만들었다.
그로 인해 제국민들은 제국이 다시금 위대했던 시절로 돌아가리라 믿고 있었다.
맥이 끊겼던 황실의 정통성을 제대로 이었기에 제국을 흔들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안에서 흔들 수 없다면 외부에서 압박하는 것밖에 없는데, 그것도 쉽지 않았다.
“제국이 아이론에 개입하기 시작했습니다.”
황제의 대관식을 축하하기 위해 파견된 로테온의 사신단.
그 대표자가 부하의 보고에 한숨을 쉬었다.
눈치 빠른 황제가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대관식이라는 무기로 모두를 멈추고 혼자서 아이론을 향해 움직였다.
“결국…… 시작되었군.”
로테온의 일부 귀족들이 걱정하던 일이 결국 시작되고 만 것이다.
로테온 내부에도 제국이 내전을 끝내기 전에 아이론을 침공하자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 의견은 로테온만 단독으로 아이론 내전에 개입했다가 나중에 성국과 탈로스가 발을 빼 버리면 큰일 날 수 있으니 발을 맞춰서 움직이자는 반대 여론에 부딪쳐 사라지고 말았다.
게다가 아이론이 내세운 명분 역시 제국의 내전이 끝날 때까지 계약된 상태라 그 전까진 갈아탈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으니 명분조차 없었다.
무엇보다 로테온의 군대가 아이론에 개입한다고 하더라도 무조건 이긴다는 보장이 없었다.
친제국파에 아이론의 마스터가 함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질질 끌렸다.
“위험을 감내하고 움직였어야 했거늘…….”
이젠 너무 늦었다며 혀를 차는 사신단의 대표를 보면서 검은 머리칼의 남자가 조용히 말했다.
“전하께오서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 보라 하셨습니다.”
국왕의 명령에 사신단의 대표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현 황제는 이미 황태자 시절부터 북부의 여우를 능가한다고 평가받던 정치력의 소유자다.
그런 황제를 상대로 시간을 끌어 아이론의 개입을 늦춰 보라는 게 가당키나 한가?
“차라리 나보고 죽으라고 하지 그러나?”
현 황제를 상대로 잘못 입을 놀렸다간 이곳에서 살아 돌아가긴 어려울 것이다.
거기다 현 황제는 영악한 존재였다.
자칫 실수했다가는 안 좋은 명분을 줄 수 있었다.
“……조금이라도 괜찮습니다. 시간만 끌어 주십시오.”
“의미가 있나?”
“동쪽이 움직일 겁니다.”
부하의 말에 사신단의 대표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그러다 한숨을 쉬며 말했다.
“철벽이 있네. 그녀를 뚫을 수 있겠나?”
동대륙으로부터 서대륙을 지키는 수호신이 있는 한 뚫기는 어렵다.
그걸 알기에 제국도 아이론에 집중할 수 있는 것이다.
“제국이 도울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 것이랍니다.”
남자의 말에 사신단 대표가 침음성을 흘리며 생각에 잠겼다.
“후…… 한번 해 보지.”
아무래도 윗선과 로만 사이에 어떠한 거래가 이루어진 것이 분명했다.
이전처럼 어설프게는 움직이지 않으리라는 믿음과 함께 사신단은 황제를 설득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건 탈로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단 며칠만이라도 시간을 끈다면 그것만으로도 좋았다.
이미 로테온은 아이론에 들어가기 직전이었고, 비밀리에 탈로스의 군대 역시 로테온을 통과해 아이론의 접경 지역에 도착한 상태였다.
남은 건 동대륙이 움직여 주는 것뿐.
탈로스와 로테온의 주력군이 아이론에 개입한다면 제국의 서부군만으로는 막기 어려울 것이다.
남부군이 뒤늦게 도착한다 한들 그때는 모든 상황이 종료된 때이니 상관없었다.
* * *
“폐하, 로테온의 사신이 폐하를 뵙길 청하옵니다.”
시종장의 말에 카리엘이 잠시 기다리라 명한 뒤 생각에 잠겼다.
그 앞에는 타리온이 서 있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지금 저 사신은 시간을 끌러 온 것이겠지?”
“그렇습니다.”
세일럼을 통해 은밀하게 전해진 해적왕의 서신.
이 서신에는 로만의 국경선 근방에 있는 병력이 조금씩 어디론가 이동하고 있다는 사실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로만의 서쪽 지역에서 다량의 물자들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도 적혀 있었다.
해적들 중에 상인으로 위장해서 동대륙에 물건을 파는 자들도 있는 만큼 소문에는 민감할 수밖에 없었기에, 그들이 접한 소문들 중 수상한 것들을 모아 전해 준 것이었다.
“탈로스는 살펴봤어?”
“병력 규모는 변함이 없습니다. 다만 몇몇 지휘관들이 사라졌습니다.”
타리온의 보고에 카리엘의 표정이 굳어졌다.
“혹시 정예만 따로 뺐을 가능성은?”
제국과의 국경선에 있던 정예군을 빼고 일반 병력으로 채워 넣어 숫자만 맞춘 뒤에 정예군을 서쪽으로 이동시켰을 가능성도 있었다.
“이미 확인해 봤습니다. 탈로스의 주요 기사들이 서쪽으로 움직인 게 확인되었습니다.”
“……로테온과 탈로스의 정예군이 아이론에 곧바로 개입할 가능성이 높다는 거지?”
“그렇습니다.”
타리온의 대답에 카리엘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내가 보낸 중앙군이 당도하기 전에 그들이 먼저 개입할까?”
“그럴 것 같습니다. 다만 서부군이 합류한다면 중앙군이 당도하기 전까진 버틸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부분은 군부대신과 상의해 봐. 이 부분에 대한 전권은 맡기지.”
“예!”
명을 받은 타리온이 창문을 통해 조용히 사라지자 카리엘은 시종장을 불렀다.
“로테온의 사신을 불러오게.”
“예, 폐하.”
로테온의 사신을 불러오라는 명에 얼마 후, 중년의 사내가 황제의 집무실에 들어왔다.
“위대하신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들어오자마자 허리를 굽히며 예를 취한 사신을 보면서 카리엘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시간을 끌려는 게 확실하군.’
얼굴을 보자마자 확신할 수 있었다.
비장함이 가득 담긴 눈에는 어떠한 굴욕도 감내하겠다는 의지가 가득했기 때문이다.
“제국의 오랜 숙원을 푸신 걸 경하드립니다.”
“고맙네.”
인사치레로 한 말을 대충 받아 준 카리엘은 용건부터 물었다.
“그래, 나를 찾아온 이유가 무엇이지?”
카리엘의 물음에 로테온의 사신이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로테온은 새로이 등극하신 폐하와 함께하고 싶사옵니다.”
“얼마 전에 전쟁이라도 할 것처럼 굴고선 이제 와서?”
카리엘이 혀를 차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재밌군. 이유가 뭐지?”
“폐하를 대적할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대적할 자신이라…….”
로테온의 사신은 서 있던 자리에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부디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자비라…….”
“제국을 적대했던 소국들에조차 몇 번의 기회를 주셨다 들었습니다. 로테온에도 기회를 주십시오.”
사신의 말에 카리엘이 턱을 괴면서 심드렁한 표정으로 물었다.
“영토라도 달라고 하면 줄 텐가?”
“예.”
사신의 말에 카리엘이 피식 웃었다.
“이미 로테온에선 사죄의 대가로 소국 연합 인근의 무역도시들을 제국에 바치기로 결정했사옵니다. 또한 향후 10년간 관세도 하향 조정해 동결할 생각입니다.”
“부족해.”
카리엘이 재미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로테온의 사신이 다급하게 말했다.
“제국에 개입했던 모든 귀족들을 보내겠습니다.
“또 있나?”
“로테온의 왕세자를 제국의 아카데미로 보내겠습니다.
“호…….”
이 부분은 흥미로웠는지 카리엘은 다시금 자리에 앉았다.
“재밌군. 정말로 로테온이 그런 결정을 내렸다고?”
“그렇습니다.”
절박한 표정으로 말하는 사신을 보면서 피식 웃었다.
“탈로스를 설득해 와. 그럼 믿어 주지.”
“조건이 있으시옵니까?”
“분쟁 지역에서 완전히 물러나는 것.”
그 말을 끝으로 나가 보라고 하자 로테온의 사신은 굴욕감을 참아 내면서 집무실에서 나갔다.
“확실하네.”
그래도 서대륙의 남부를 장악한 로테온이다.
선황의 장례식에서도 자신을 상대로 건방지게 굴었던 그가 갑자기 이렇게 저자세로 나온다?
“시간을 끌어 보겠다는 게 확실하군.”
그렇게 중얼거린 카리엘이 재밌는 생각이 났다는 듯 진한 미소를 지었다.
악동 같은 미소를 지은 카리엘이 시종장을 시켜 곧바로 외무대신을 불러들였다.
“장난을 좀 쳐야겠어.”
“장난 말입니까?”
갑자기 불려 와 들은 황제의 뜬금없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외무대신이.
그런 그에게 카리엘이 설명했다.
“축제가 며칠 정도지?”
“일주일 정도는 지속될 것이옵니다.”
시종장의 대답에 카리엘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외무대신에게 말했다.
“탈로스와 로테온과 실무 협상에 들어가. 첫 번째 조건은 성국과의 밀약을 깨는 것, 두 번째는 영토 협상.”
“예.”
“진짜로 준비하는 것처럼 협상에 임해. 이게 거짓이라는 것은 자네만 알고 있어야 한다.”
외무대신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남부 왕국들과 정말로 협상을 진행하는 것처럼 믿게 만들라는 뜻이었다.
“그리하겠습니다.”
“좋아. 믿어 보지.”
명을 받은 외무대신이 물러나자 카리엘이 장난기가 가득 담긴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
로테온과 탈로스에는 이것으로 한 방 먹였고, 성국에는 북부 변경백이 있으니 남은 것은 동대륙뿐이다.
“로만이 자꾸만 거슬리는군.”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카리엘은 대륙 지도를 바라보았다.
현재 동대륙의 로만에 저항하는 나라는 크게 3개의 나라였다.
사막을 통일한 제국 산드리아.
기사 왕국 윙사르.
마도 국가 미켈란
다른 이들은 마법으로 이름 높은 로만과 무역하면서 스스로 속국을 자처하지만 이들만큼은 달랐다.
하지만 로만이 워낙 압도적이라는 게 문제였다.
그런데 만약 이들 중 한 국가에 제국이 지원해 준다면?
무역으로 막대한 돈을 벌어들이고 있는 미켈란은 제국의 지원이 딱히 필요하진 않을 것이다.
사막 제국은 제국이 접근하기가 쉽지 않다.
“윙사르.”
너로 정했다는 것처럼 손가락으로 윙사르가 있는 지점을 ‘톡!’ 하고 친 후 미소를 지었다.
생각난 김에 움직이겠다는 듯 대신들을 불러 모으려 했으나 시종장에 의해 막혔다.
“오늘부터 연회에 참석하셔야 하옵니다.
“아…… 그렇지.”
“며칠만이라도 푹 쉬는 게 어떠십니까?”
시종장이 걱정스레 바라보면서 말하자 카리엘은 어느새 까칠해진 피부를 쓰다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참. 내가 일중독이 될 줄은 몰랐군.”
욜로 라이프를 꿈꾸는 자신이 어느새 일중독에 걸렸다는 사실에 충격을 먹었는지 카리엘은 양손으로 뺨을 세차게 때린 후, 고개를 붕붕 돌렸다.
“됐네. 가지.”
정신을 차렸다는 듯 말하는 카리엘을 보며 빙그레 웃은 시종장이 연회장에 갈 복장을 준비했다.
* * *
그렇게 카리엘이 자신의 즉위를 축하해 주러 오는 사람들을 맞이하러 며칠간 연회에 참석하는 동안 물밑에서는 외무대신과 로테온과 탈로스의 치열한 협상이 일어났다.
그리고 마침내 카리엘의 즉위를 축하하는 축제의 마지막 날이 되었다.
“낚였군.”
“……그래.”
로테온과 탈로스에서 날아온 특급 서신.
거기에는 제국의 중앙군이 아이론의 영토에 들어섰다는 글이 적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