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 >
37. 미래를 위한 준비 (2)
카리엘이 움직이자 황궁은 난리가 났다.
재상이 찾아온 것을 명분으로 대전 회의를 열어 인원 부족에 대한 해결 방안을 촉구한 것이다.
귀족원의 고위 귀족들은 전원 참석하라는 명령과 함께 대전 회의를 열자, 모두가 긴장된 표정으로 대전에 들어섰다.
다들 카리엘의 인내심이 한계에 도달했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황태자 시절부터 냉철하기로 유명한 카리엘이 황제가 되고나서 조금 유해졌다고 평가받았던 것도 귀족들이 은근슬쩍 기어올라도 넘어가 주었기 때문이다.
밖에서 볼 때는 뭔 개소리냐고 싶을 것이다.
반란군을 처치하고, 그걸 명분삼아서 자신한테 반대하는 귀족들을 콕콕 골라내서 숙청한 게 바로 얼마 전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귀족원이 명분을 갖고 반대하면 카리엘은 한 발자국씩 넘어가 주었다.
황제가 되면 급격한 변혁을 이룰 것이라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크게 바뀌지 않았던 것에는 이런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것도 오늘로 끝이었다.
“폐하께서 칼을 뽑으셨군.”
“무기는 충분히 쥐셨으니…… 더 참으실 필요가 없긴 하지.”
대신들은 이번에야말로 귀족원이 갈려 나갈 것이라 생각했다.
귀족원에는 무기를 쥔 황제를 막을 명분이 없었기 때문이다.
정통성을 확보한 황제.
모자라는 인력.
기회를 주었음에도 답을 찾지 못한 귀족들.
마지막으로 아이론의 급변 사태로 인해 더욱 급박해진 상황.
이 모든 것이 카리엘에게 무기가 되어 주는 것이다.
이미 두 공작조차 황위에 대해선 포기한 상황이라 카리엘을 견제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족들도 더는 물러설 곳이 없었다.
혁명 세력을 받아들이는 순간, 그토록 막고자 했던 평민들이 정계로 진입한다.
그것만큼은 막기 위해 귀족원의 귀족들이 굳은 표정으로 마음을 다잡았다.
“모두 모였나?”
“예, 폐하.”
황좌에 앉은 카리엘이 턱을 괸 상태로 싸늘하게 귀족들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마음을 다잡고 있던 귀족들의 눈이 흔들렸다.
평소보다 몇 배는 싸늘한 표정으로 귀족들을 바라본 카리엘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다들 알다시피 현재 제국은 위기다. 성국과 남부 왕국들과 전쟁을 해야 할 상황에 몰렸다. 거기다 아이론 역시 두 파벌로 나뉘어서 싸우는 중이지.”
내전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서대륙의 강국들과 전쟁을 벌이게 생겼다.
그렇다고 물러날 수도 없었다.
여기서 물러나는 순간 제국의 영광은 영영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서대륙 최강이라는 명예도, 허울뿐인 제국이라는 위치도 완전히 사라진다.
귀족들도 그걸 알기에 전쟁을 말리지 못하는 것이다.
제국에게 물러선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다들 알다시피 아이론에서 시작될 전쟁은 흑마법사들로 인해 벌어진 전쟁 그 이상이 될 것이다. 그렇기에 제국 내부만이라도 잘 드스려야 하거늘…….”
카리엘이 말끝을 흐리면서 표정을 찌푸렸다. 그러자 모두들 긴장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일이 미어터져 업무가 마비가 될 지경이다. 그런데 방도는 찾지 못하고 나만 찾아온다고 해결이 되나?”
카리엘이 대신들을 바라보자 그들이 송구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모두들 은근한 표정으로 재상을 바라보았다.
이제 그가 나설 타이밍이었기 때문이다.
카리엘이 은근슬쩍 혁명 세력들을 등용하려 할 때마다 중간에서 막았던 것이 재상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재상조차 침묵하고 있었다.
얼굴에 힘들다는 것을 팍팍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재상도 죽겠지.’
카리엘이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서 있는 재상을 보면서 속으로 웃었다.
어젯밤, 더 이상은 안 되겠는지 짧은 문장이 담긴 서신을 보냈다.
서론과 결론을 다 제외하면 사실상…….
「폐하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이것과 다르지 않았다.
즉, 재상조차 항복을 한 것이다.
“나의 답은 하나다. 능력 있는 자들을 일단 뽑아서 쓰자는 것. 하지만 귀족들이 반대했지. 그렇다면 그대들이 알아서 해결책을 가져와야 하는 것 아닌가?”
이번엔 귀족들을 보면서 물었지만 두 공작은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다른 고위 귀족들이 당황했다.
적어도 공작들은 반대할 줄 알았다.
귀족파의 두 거두가 침묵을 지키자 다른 고위 귀족들 역시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나의 답은 여전히 동일하다. 일단 혁명 세력들을 데려다 쓰는 것.”
“하오나 그들은 너무 위험하옵니다.”
“그들이 무슨 일을 벌일까 두렵다면 그토록 두려워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끔 잘 감시하면 되는 것 아닌가?”
카리엘의 대답에 앞으로 나섰던 귀족의 입이 다물렸다.
바로 그때, 한 여인이 앞으로 나섰다.
허락을 구하는 듯 허리를 굽히는 여인을 보면서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입을 열었다.
“폐하, 폐하의 뜻대로 세일럼에 한해서 혁명 세력을 기용한 결과가 현재의 동부이옵니다.”
“현재의 동부라…….”
더 말해 보라는 듯 카리엘이 턱짓으로 발언을 허락하자 용기를 얻은 귀족이 자신이 준비한 판을 가져와서 모두에게 보였다.
거기에는 영지를 잃은 귀족들과 그 원인인 영지민의 이탈, 그리고 부유한 평민들의 압박으로 인한 귀족들의 권위 추락 등이 있었다.
특히 귀족의 권위가 추락한 게 가장 컸다.
제국인 엄연히 신분제 사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유한 상인들이 몰락한 귀족들보다 더 우위에 있다는 게 말이 되지 않았다.
“폐하! 동부에서 귀족의 신분을 사고파는 이들이 현격하게 늘어났습니다. 이는 제국의 근간을 뒤흔드는 일. 세일럼에 한해서 등용했음에도 이럴진대 혁명 세력을 중앙에 등용하오시면 제국 전체가 위험해질 것이옵니다!”
확실히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소신들이 마냥 반대만 하는 것이 아니옵니다. 부유한 평민들이 늘어나야 제국이 더 안정되고 풍요로워진다는 것쯤은 인지하고 있사옵니다. 하오나 이렇게 급격하게 변혁을 이루게 된다면 간신히 안정된 제국은 다시금 혼란에 빠질 것이옵니다.”
진심으로 걱정 어린 표정을 지으며 말하는 여인을 보며 카리엘이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짐도 그건 원하지 않는다. 귀족들의 권위는 보장해 줄 것을 수차례 말했노라. 그대는 짐을 믿지 않는 것인가?”
카리엘의 물음에 더욱 허리를 굽힌 여인이 입을 열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하오나 폐하의 의도와는 달리 저들은 더 큰 욕심을 낼 것이고 그러면 종국에는 혼란이 찾아올까 염려되어 드리는 말씀이옵니다.”
자신이 두렵다는 듯, 몸을 떨면서도 결국 할 말은 전부 하고 마는 여인을 보면서 카리엘이 빙그레 웃었다.
“재밌군. 그래서 그대의 답은 무엇인가? 설마 해결 방안도 없이 반대하지는 않았겠지?”
“……현재 동부에 있는 혁명 세력은 아니 될 것이옵니다.”
“그렇다면?”
“아직 각 지방에 평민 출신의 학자들이 남아 있을 것이옵니다. 그들을 우선적으로 등용하시옵소서.”
“턱없이 부족할 것이다.”
“그렇지 않사옵니다. 예를 들어…….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듯 고개를 가로젓는 카리엘에게 차분히 설명을 시작한 여인의 계획은 이러했다.
1. 중앙에서 밀려난 준귀족들을 우선적으로 등용한다.
2. 능력을 인정받을 시 평민들이라도 준귀족(당대에 한한 남작위)에 봉한다.
3. 그래도 부족할 경우 아직 동부로 향하지 않은 혁명 세력들을 등용하는 걸 허용한다.
그녀의 설명을 들은 카리엘이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그러자 모두들 긴장한 표정으로 카리엘의 얼굴만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사실 이 정도 방안도 귀족원 입장에선 납득할 수 없는 일이기는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인의 말을 자르지 않고 내버려 두었던 것은 오늘 본 카리엘의 기세를 보아하니 동부에 있는 혁명 세력을 통째로 들고 올 것 같았기에 차라리 이 정도 선에서 막아 보자는 계산이 깔렸기 때문이다.
“그대의 이름이 뭐지?”
“샤스타 대처라 하옵니다.”
카리엘이 들어 본 적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자 근처에서 대기 중이던 시종장이 조용히 귓속말로 알려 주었다.
오래전에 중앙 정계에 있었으나 암군의 시대가 시작되면서 밀려났던 가문이었다.
본래는 귀족파에 있었던 가문은 아니었으나 여인이 가주가 되면서 귀족파로 갈아탔고, 결국 중앙 정계까지 입성할 수 있었다.
‘대단하군.’
카리엘이 여인을 보면서 순수하게 감탄했다.
제국에서 여성이 가주가 되는 게 없는 건 아니지만 굉장히 힘든 일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해낸 것으로도 모자라 귀족파로 갈아타고 당대에 중앙 정계까지 입성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대단한 것은 여인의 얼굴이 굉장히 젊어 보인다는 것이었다.
“재밌군. 그대의 말처럼 혁명 세력을 너무 많이 등용하면 문제가 생길 수 있지. 하나 인력 부족이 심각한 바, 그대의 말대로 준귀족들과 지방으로 좌천된 평민 출신 관료들을 우선 등용하지. 그럼에도 부족할 경우, 그 부족한 자리에 한해 동부의 인사들을 데려올까 하는데…… 어떤가?”
카리엘의 물음에 대처는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결국 막지 못한 것에 분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에게 주어진 임무를 다하지 못했으니 귀족원에서의 쓰임도 다한 것이다.
온갖 고생을 다 해 가면서 겨우 이 자리까지 왔는데, 결국 지방으로 다시 밀려나게 생긴 것이다.
그런 그녀의 생각을 읽은 카리엘이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도 모처럼 쓸 만한 의견을 제시했으니 그대에게 기회를 주지.”
“……예?”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든 그녀에게 카리엘이 말했다.
“그대에게 귀족들을 대표해 혁명 세력들을 감시할 수 있는 권한을 주겠다.”
“헉!”
“그대의 말대로 급격한 변혁은 혼란이 올 수 있지. 그것을 막아라. 또한 적절히 변화할 수 있도록 흐름을 주도해 보아라.”
카리엘의 말에 멍하니 있던 대처가 황급히 무릎을 꿇었다.
“폐…… 폐하의 은혜에 반드시 보답하겠습니다.”
대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카리엘은 대신들을 바라보았다.
“이번엔 제대로 뽑아라. 더 이상의 기회는 주지 않을 것이니 또 한 번 저번과 같은 일이 발생한다면…….”
카리엘이 더는 말하지 않고 검을 곁눈질하자 사색이 된 대신들이 황급히 허리를 굽혔다.
그 모습에 만족하며 고개를 끄덕인 카리엘은 다음 안건으로 넘어갔다.
“탈로스와 로테온의 마스터가 이끄는 군대가 아이론에 들어섰다.”
“소신이 가겠습니다.”
데이비어 공작의 말에 카리엘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카리엘이 명을 내리기 전에 자진해서 나서는 공작의 모습에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전쟁을 치른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다시 전쟁터로 보내 미안하군. 전쟁이 끝나면 그대의 희생은 반드시 보답하겠다.”
그렇게 말한 후 중앙군 일부를 움직일 권한을 주고 곧바로 다음 안건으로 넘어갔다.
“공국에서 제국에 지원 요청을 해 왔다.”
“설마…….”
“로만이 대군을 이끌고 공격할 준비를 한다더군.”
그렇게 말한 카리엘이 그림자들이 가져온 자료들을 나눠 주었다. 해적왕으로 전해 들은 소식을 기반으로 그림자들에게 조사시켜 완성된 자료들이 뿌려지자 귀족들의 얼굴에 노기가 사리기 시작했다.
“탈로스와 로테온은 오늘부로 명확히 제국의 적이 되었다. 이에 반대하는 이가 있는가?”
카리엘의 물음에 대전 안에 모인 모든 이들이 고개를 숙였다.
자료에 담긴 탈로스와 로테온이 로만과 밀약을 맺은 정황과 때맞춰 대군을 움직인 로만의 정황은 사전에 준비가 된 것이 아니고서야 있을 수 없는 것이었다.
“공국으로 보낼 병력의 사령관을 정할까 하는데…….”
“소신이…….”
“그대는 남게.”
월크셔 공작이 나서려 하자 카리엘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대는 오늘부터 폐관에 들어가게. 이것은 짐의 명령이다.”
“폐하…….”
“제국을 위해 벽을 깨고 위대한 경지에 오르게. 그것을 최우선으로 삼아야 할 것이야.”
마도사의 경지를 코앞에 둔 월크셔 공작.
소드 마스터와 달리 마법사라는 족속들은 벽에 다다를 때마다 명상을 통해 그동안 습득한 것에 대한 고찰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게 자신이 익힌 마법에 대한 모든 것을 다시 들여다본 후에야 비로소 마도사라는 경지에 오를 수 있음을 알기에 카리엘은 월크셔 공작에게 시간을 주기로 했다.
“공국은 아켈리오 후작을 보내도록 하지.”
“폐하! 수도에 마스터 한 명은 있어야 하옵니다.”
월크셔 공작의 말에 카리엘이 고개를 저었다.
“제국의 수도는 마스터가 없어도 강력하다. 그리고 불안하다면 그대가 마도사가 되면 될 일 아닌가?”
카리엘의 말에 월크셔 공작은 눈을 커다랗게 떴다가 허리를 숙였다.
“……폐하의 기대에 반드시 부응하겠습니다.”
“그렇다고 너무 조급해 말도록.”
그렇게 말한 카리엘이 아켈리오 후작을 불렀다.
얼마 후, 아켈리오 후작이 도착하자 카리엘은 보검을 들어 그에게 건넸다.
“황궁 기사단 1개조와 중앙군 기사단 2개조를 붙여 주지. 대공가의 기사단도 합류할 걸세.”
“예.”
“동부 사령관과 함께 철벽을 돕게.”
“명을 받듭니다.”
아켈리오 후작이 고개를 숙이면서 답하자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인 카리엘이 대전 회의를 파했다.
이로써 서대륙에 있을 거대한 전쟁을 대비할 모든 준비가 끝났다.
이제 남은 건 당당히 승리해 과거의 영광을 되찾는 것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