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 >
43. 이그니트 연방!
제국을 견제하기 위한 연합이 무너졌다.
대규모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무난하게 넘어가 버렸다.
제국의 압도적인 능력으로 스스로 물러나게끔 유도한 것이다.
범죄 집단에 휘둘려 회군할 수밖에 없었다는 굴욕적인 결과에 탈로스는 최대한 언론을 통제하려 했다.
하지만 그게 통제한다고 될 리가 없었다.
제국이 대놓고 탈로스의 상황을 비웃는 기사들을 쏟아 냈기 때문이다.
「치안이 엉망인 탈로스. 완벽한 치안은 과거에 불과하다?」
「한때 서대륙 최고의 관광지를 갖고 있던 탈로스. 현재는 그저 범죄자가 넘쳐 나는 국가?」
「남 신경 쓸 시간에 자국부터!」
대놓고 까는 기사들이 나오기 시작하자 탈로스에서도 나름 반박을 하긴 했다.
「범죄 집단들의 배후에 제국이 있다는 정황이 발견되었다!」
이런 기사를 내놓기는 했지만, 의미가 없었다.
증거를 내놓지 않는 한 그저 지금을 넘기려는 변명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인지 탈로스도 적극적으로 반박하지는 않았다.
탈로스가 최악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바로 옆 국가인 로테온 역시 온갖 비난이 쏟아졌다.
아이론에 개입해 놓고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막대한 자금을 퍼부어 놓고 어떠한 이득도 없이 돌아왔기 때문인지 견고했던 로테온의 왕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전하, 탈로스를 버리십쇼.”
“분열되는 순간 제국에 먹힘을 모르는가?”
“하나 이대로는…… 귀족들을 제어하기 힘드옵니다. 차라리 국력을 모아 후에 있을 전쟁을 대비하시지요.”
신하의 조언에도 로테온 국왕은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탈로스를 버리면 당장의 안정은 확보되겠지만 미래가 없어진다.
어쩌면 제국이 아이론을 집어삼키는 순간, 곧바로 탈로스로 눈길을 돌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감싸 줘야 했지만, 여론이 너무 안 좋았다.
“상황이 너무 안 좋습니다.”
귀족들만 반발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미 로테온 내부에 침입한 제국의 그림자들 때문에 견고한 신분제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아이론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로테온에도 혁명 세력이라는 불안한 불씨가 심긴 것이다.
“일단…… 지켜보지. 한동안은 내부를 수습하는 데만 주력하겠네.”
“하오나…….”
국왕의 말에 신하가 뭐라 말하려다 입을 닫았다.
이대로 제국을 내버려 두었다가는 미래가 없었다. 하지만 로테온도 더는 여력이 없었다.
‘국운이 얼마 안 남았구나.’
그렇게 생각한 젊은 신하가 한숨을 쉬었다.
아이론에서는 운이 너무 없었다.
제국이 지금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면 첫 번째 타깃은 탈로스가 될 터.
그때를 대비해 국력을 모으고, 탈로스를 전쟁터 삼아 제국과 전쟁을 벌이면 로테온이 살아남을 가능성이 있었다.
위에서 성국이 압박을 가하고, 로테온이 탈로스를 도우며 전장을 장기전으로 끌고가는 것.
하지만 로테온 국왕은 그런 리스크를 짊어지는 것보다 당장의 동맹을 안고 가며 안정을 꾀하고자 했다.
크게 보면 맞는 말이지만, 자국 내에 있는 혁명 세력들이 문제다.
강력한 왕권이 아닌, 지금처럼 흔들리는 상황이 지속되면 반드시 문제가 될 것이다.
이런 상황은 성국 역시 마찬가지였다.
스스로 마도사급에 이른 강자이자 오랫동안 성국을 키워 온지라 별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교황은 너무 오랫동안 자리를 지켰다.
성국의 관례상 물러날 때가 되면 스스로 차기 교황을 위한 준비를 하고 원로원으로 물러났으나 현 교황은 권력욕 때문에 계속 그 자리를 지켰다.
지금까지야 흠잡을 게 없었기에 별문제가 없었으나, 최근들어 연이은 실패를 하면서 추기경들 사이에서 불만이 나오기 시작했다.
“최근 들어 성국의 힘이 너무 줄었소.”
“후…… 확실히 위기긴 하지요.”
추기경들이 그렇게 말하면서 서로 눈치를 보았다.
대놓고 교황이 잘못했다고 말은 못 하지만, 은근히 현재의 성국이 나쁘다는 것을 강조하는 모습들.
멀리서 그걸 보던 한 성기사는 이를 악물었다.
그동안 제국이 너무 썩어 있어서 가려져 있었지만, 성국 역시 많은 부분이 썩어 있었다.
제국에서 벌어들이는 막대한 돈은 고위 사제들로 하여금 그들의 신실함을 저버리게 만들기 충분했다.
많은 이들이 비자금을 만들고 세력을 만들었다.
그것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신을 모시는 사제들이라는 이름 아래 이쁘게 포장되어 있을 뿐, 안은 썩어 문드러진 지 오래였다.
그걸 터지지 않게 봉합해서 끌고 온 게 현 교황이었다.
그런데 그걸 아는 추기경급과 주교들이 가장 먼저 교황을 비난하는 것이다.
“……그들의 말이 맞을지도…….”
믿음이 굳건하기로 유명한 성기사였음에도 불구하고 썩어 버린 고위 사제들을 볼 때면 그 믿음이 흔들렸다.
성국 안에 있는 혁명 세력.
신을 모시는 자들답게 일반적인 혁명 세력과는 달랐다.
현재의 주교들이 신의 말을 잘못 해석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
분명 일반적인 혁명 세력과는 달랐지만, 한 가지 닮은 점이 있다면 현재의 체제에 불만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견고하다 생각했던 성국마저 불안의 씨앗이 심기는 동안, 제국은 변혁을 일으킬 준비를 시작했다.
* * *
귀족들도, 마탑도, 무너뜨린 카리엘에게 남은 건 발전뿐이었다.
강력한 황권을 이룩했다면 쉴 만했지만, 카리엘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대신들을 더욱 채찍질하면서 발전 속도를 가속화했다.
마치 시간에 쫓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개혁을 이뤄 나가자, 귀족들을 비롯한 기득권층은 그 개혁에 쫓아가기 바빴다.
불만을 갖기도 애매한 것이 카리엘의 개혁에 반발할 경우 중심에서 밀려날 것이 분명했고, 무엇보다 카리엘의 개혁안을 잘 따라가다 보면 이득을 얻을 수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아무나 따라갈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철저하게 능력을 우선하는 카리엘의 성정에 따라 중앙에 붙어 있으려면 자신들의 능력을 증명해야만 했다.
“제국이 부러운 적은 처음이군.”
“그러게. 그래도 이제 우리에게도 기회가 오지 않겠나?”
“그러길 바라야지.”
아이론의 상인들이 시시각각 변화하는 제국을 보면서 부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서대륙의 진정한 중심인 이그니트의 수도와 거래를 트기 위해 모인 상인들.
그런데 모인 이들은 상인들뿐만이 아니었다.
내전을 종식시켜 준 황제를 보기 위해 아이론의 많은 사람들이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제국의 수도에 왔다.
그에 질세라 공국의 귀족들 역시 다수가 제국의 수도로 몰려들었다.
반면에 남부 왕국들과 성국에서는 사절단조차 보내지 않았다.
내부를 단속하기도 바빴기 때문이다.
이를 보고 동대륙에선 이렇게 말했다.
「그들만의 축제!」
친제국파로 이루어진 자들만으로 이루어진 제국의 축제.
이미 한참이나 지난 황제의 생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탄신일이라며 갑자기 황제의 생일을 챙기려는 이유는 간단했다.
즉위한 후 첫 번째 생일을 그대로 넘어갈 수는 없기에.
두 번째로는 미뤄 두었던 ‘발표’를 하기 위함이었다.
그렇기에 조촐하게 생일 파티를 하려고 계획했던 것을 미루고 지금에서야 황제의 탄신일이라는 명목하에 축제를 여는 것이다.
남부 왕국들과 성국이 참여하지 않았음에도 대륙 회의 때보다 더 많은 인파가 몰려들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황제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보기 위해서 광장 주변에 숙소를 잡거나 그곳에서 진을 치고 있기도 했다.
그런 그들에게 비싼 값에 음식을 팔거나 물건을 파는 상인들.
공식적으로는 황제의 탄신일을 기념하는 것이기에, 카리엘의 생일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명목상의 ‘축제’는 이어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축제 분위기를 즐기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수도의 분위기와 달리 황궁은 바빴다.
대신들을 비롯한 관료들이 매일같이 앓는 소리를 낼 정도로 바빴다.
“폐하, 아이론 연맹주와 루미너스 공왕이 뵙기를 청합니다.”
시종장의 말에 카리엘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후, 두 사람이 집무실로 들어왔다.
“폐하를 뵙습니다.”
“폐하를 뵙습니다.”
한때 강국이라 불렸던 두 지도자가 카리엘을 향해 고개를 숙이자 그런 그들에게 웃으면서 앉으라고 했다.
“바쁜 사람들을 불러서 미안하오.”
“아니옵니다.”
카리엘의 말에 두 지도자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한창 바쁜 두 사람을 이리 일찍 부른 건 할 말이 있기 때문이오.”
공왕과 아이론의 연맹주는 한창 바쁠 시기이긴 했다.
일정에 맞춰 왔다면 며칠 뒤에 도착해야 했을 그들을 이렇게 일찍 부른 이유는 한 가지를 묻기 위함이었다.
“마지막으로 묻겠소. 둘 다 후회하지 않겠소?”
카리엘의 물음에 두 지도자가 고개를 들어 카리엘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예.”
단호하게 대답하는 제이론 폴.
그러자 공왕도 뒤이어 답했다.
“어차피 통일할 거라면 조금이라도 일찍 제국의 품에 안기는 것이 나을 테지요. 저 역시 후회는 없습니다.”
공왕의 말에 제이론 폴이 피식 웃었다.
그의 말이 맞았다.
지금의 제국이라면 서대륙을 통일하는 것도 가능할 터.
그렇다면 조금이라도 일찍 제국의 품에 안겨 이득을 보는 편이 나았다.
둘의 진심을 마지막으로 확인한 카리엘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기관을 작동시켰다.
쿠구궁!
“이건…….”
기관이 작동되자 서재 일부가 열리면서 지도가 걸려 있는 벽이 나왔다.
서대륙이 그려진 지도에 표시된 거대한 나라.
그 중심에 이그니트 연방이 적혀 있었다.
중심엔 이그니트.
서쪽엔 아이론 연합.
동쪽엔 루미너스 공국.
남쪽엔 트리아 자유 연합.
이 네 개가 합쳐져서 하나의 연방을 이루는 것이 이그니트 연방이었다.
제국이 점령한 소국들은 하나하나의 규모는 작을지언정 모아 놓으면 로테온의 절반이 넘는 크기를 자랑한다.
거기다가 각각의 개성들도 넘쳐서 지금도 제국에 반발하는 세력이 있었다.
강제로 점령할 수도 있지만, 카리엘은 그냥 그들을 한데 묶어서 한때 자유를 갈망하는 자들이 모아 만들었던 자치구의 이름인 트리아를 붙여서 연합국을 만들어 버렸다.
“비록 이그니트라는 이름에 묶여 있으나 자치권은 보장할 생각이오.”
약속했던 자치권.
그것을 보장한다는 말에 공왕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폐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반면에 제이론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저희는 제국이 완전 흡수해도 될 것 같습니디만…….”
제이론의 말에 카리엘이 피식 웃었다.
그의 말처럼 아이론 내부에선 이미 제국에 완전 흡수되는 것조차 환영하는 이들이 대다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론에게 자치권을 부여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아이론을 온전히 먹어서 새로이 땅을 배분하거나, 관리할 자들을 뽑는 건 몹시 귀찮은 일이다.
그 때문에 점령한 아이론과 남쪽의 소국들을 기존처럼 별개의 지역으로 분류하여 아이론 연합과 트리아 자유 연합으로 만든 것이다.
“후에 정말로 제국에 완전히 흡수되길 원한다면 그리하겠소.”
카리엘의 말에 제이론이 쓴웃음을 지었다.
아직 자신들이 카리엘에게 신뢰받지 못함을 느낀 것이다. 그런 기색을 느낀 카리엘이 단호하게 말했다.
“오해 마시오. 그대를 신뢰하지 못해서가 아니오.”
그렇게 말한 카리엘이 한숨을 쉬었다.
“지금의 난 기존의 제국을 관리하는 것만으로 벅차오.”
“천천히 하시면 되옵니다. 아이론은 기다릴 수 있습니다.”
“시간이 없소.”
제이론의 말에 카리엘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더 큰 위협이 오고 있소. 재앙이라 불릴 그 위협이 서대륙에 당도하기 전에 제국은 더 강해져야 하오.”
“위협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카리엘의 말에 제이론과 공왕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들에게 쓴웃음을 지으며 기관을 작동시켰다.
그러자 벽에 붙은 수많은 자료들이 두 사람에게 보였다.
비밀 수호대가 대륙 각 지역을 돌면서 박박 긁어모은 자료들은 앞으로 있을 재앙에 대해 경고하고 있었다.
“멸망을 대비하기 위해 난 서대륙을 통일할 생각이오. 도와주시겠소?”
카리엘의 물음에 두 남자가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테이블의 중심부가 열리면서 종이 한 장이 턱 하니 올라왔다.
「이그니트 연방 비밀 협정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