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 >
44. 생각보다 강한 황제? (2)
사실 진정한 의미의 실전이라고는 볼 수 없다.
뒤에 마스터와 황궁 기사들이 언제라도 뛰어들 수 있도록 대기하고 있는 상황이니 안전은 보장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력으로 힘을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도움이 되어 있었다.
쌓여 있었던 막대한 양의 화기를 소모하는 것만으로도 컨트롤이 늘어나고, 화기의 회복력이 빨라졌다.
-네가 앞으로 해야 할 핵심은 가름에게 닿는 것. 이거 스스로 해야 하는 일이야.
수르트의 조언에 카리엘은 입술을 깨물었다.
가름의 능력은 크게 세 가지였다.
1. 지옥화
지옥에서 건너온 망자들이 활동할 수 있는 영역을 만드는 것.
이 힘으로 인해 지옥문이 열리는 곳은 언제나 망자의 군단이 만들어졌다.
이들이야 군대로 어떻게든 뚫어 본다지만 문제는 그다음이다.
2. 용암의 대지
말 그대로 대지를 용암이 들끓는 대지처럼 만들었다.
용암 때문에 화염 내성이 있지 않는 한 건너가기 쉽지 않다.
3. 화염 폭풍
지옥문을 지키는 개답게 문을 떠나지는 않는다.
다만 다가오는 적은 물어뜯어 죽이는데, 모든 이들을 상대할 수는 없기에 다수의 적들을 거르기 위해 이런 폭풍을 만든다.
2번과 3번을 전부 뚫기 위해선 화염에 대한 강한 내성 혹은 친화력이 필요하다.
화염 폭풍이야 마스터가 전력을 다하면 한순간이나마 뚫어 낼 수 있다고 하더라도 용암의 대지를 건너고 그곳에서 가름과 싸우려면 결국 불의 친화력이 극한까지 단련되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
결국 카리엘 혼자 가름까지 도달한다고 생각했을 때, 분노한 가름을 한순간이나마 붙들고 있으려면 지금보다 강해지는 수밖에 없었다.
-나와 두 녀석을 전부 소환한다고 하더라도 가름을 붙드는 건 기껏해야 1분. 그 안에 승부를 봐야 한다.
수르트의 말에 카리엘의 표정이 구겨졌다.
설령 그랜드 마스터에 도달한다고 하더라도 온전한 힘을 가진 가름을 상대로는 승부를 장담하기 어려웠다.
그렇기에 수련이 필요한 것이다.
“닿기만 하면 될 거 같은데…….”
-그래. 문제는 가름한테 도달하는 거지. 우리가 붙잡고 늘어지는 동안 목숨을 걸고 가름의 털끝이라도 만져야 한다는 거야.
흉포함 가름이라면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카리엘을 피떡으로 만들 수 있었다.
그렇기에 몸도 단련해야 했다.
“후……후…….”
점점 지쳐 가는 것을 보자 수르트가 신호를 줘서 아그니와 스콜을 불러들였다.
그러자 뒤에서 지켜보던 황궁 기사들이 때맞춰서 나타나 카리엘을 데리고 뒤로 물러났다.
몬스터들이 더는 다가오지 못하게 막으면서 숲 밖으로 나오자 수르트를 비롯한 소환수들을 완전히 역소환시켰다.
“폐하, 괜찮으시옵니까?”
“좀 지치는군.”
걱정스레 바라보는 아켈리오를 보면서 짧게 대답한 카리엘은 늘어지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폐하, 천천히 하시지요.”
“시간이 없다.”
아켈리오의 말에 카리엘이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지옥은 점점 더 다가오고 있었다.
“재앙이 다가온다. 그리고 그 재앙을 해결하는 건 짐이 될 것이고. 그렇기에 놀고 있을 시간이 없어.”
“그래도…… 옥체를 소중히 하셔야 하옵니다. 제국은 폐하께서 계시기에 이리 발전할 수 있는 것이옵니다.”
아켈리오의 말에 모든 황궁 기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직 카리엘이기에 잡음 없이 제국이 굴러가는 것이다. 만약 카리엘이 죽는다면?
그 즉시 양 파벌로 갈라질 것이다.
“나도 그러고 싶지만 앞으로 있을 계획을 생각하면 다급해지는군.”
그렇게 말한 카리엘이 여전히 의문을 담고 있는 아켈리오와 황궁 기사들을 향해 앞으로의 계획을 설명을 해 주었다.
지옥의 수문장을 막아 지옥문을 닫는 것.
그것이 카리엘의 최종 목표였다.
“서대륙을 통일하는 것? 동대륙을 견제하는 것? 이 모든 건 재앙을 막기 위한 과정에 불과하다.”
“……지금은 못 막는 것입니까?”
한 황궁 기사의 물음에 카리엘이 쓴웃음을 지었다.
“시도해 보지 않은 건 아니다. 이 사실을 로만에도, 서대륙의 다른 국가들한테도 알려 볼 생각을 했지.”
어차피 제국 혼자만의 힘으로 재앙을 막아 낼 순 없었다.
그렇기에 서대륙의 다른 국가들과 함께 재앙을 막아 보려 했었다. 하지만 실패했다.
그림자들을 통해 알아본 결과 탈로스는 이미 로만과 손을 잡은 귀족들이 수두룩했고, 성국 역시 마찬가지였다.
“교황이 내부 단속을 잘 하지 못한다면 반란이 일어날 수도 있을 정도지.”
교황의 연이은 실패.
그로 인한 분란을 이용하는 건 이그니트뿐만이 아니었다.
로만 역시 성국에 손을 뻗치고 있었고, 흑마법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동대륙의 다른 국가들에게 알리시면…….”
“시도해 봤지. 한데 우리와 접선한 자들 대부분이 얼마 뒤에 죽었다.”
아이론의 내전이 끝나고, 여유가 생긴 카리엘이 가장 먼저 한 것은 동대륙과 접선하는 것이다.
처음에야 윙사르만 움직였다고 하지만, 로만이라는 거대한 적을 맞서기 위해선 최대한 많은 동대륙 국가들의 힘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카리엘이 해적왕을 움직여서 동대륙의 다른 국가들을 움직여 볼 생각을 했다.
윙사르처럼 이그니트의 지원을 받고자 하는 자들은 많았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을 것이라 보았다.
그런데 결과는?
윙사르만 확실하게 움직일 뿐, 다른 국가들은 이그니트의 지원만 받고 미적거리고 있었다.
처음엔 ‘돈만 꿀꺽한 건가?’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자세히 알아본 결과 이그니트의 지원을 받은 자들은 나름대로 애를 쓰고 있었다.
‘로만의 확장을 저지하는 것.’
이것에 대한 목표가 같았기에 그들 역시 전력으로 로만을 저지하기 위해 군사력을 확충하고 로만과의 국경 근처에 요새를 짓고자 했다.
하지만 그것을 반대하는 이들이 있었다. 이들로 인해 로만을 적으로 규정하는 작업이 계속해서 미뤄지고 현재에 이른 것이다.
‘친로만파는 아니었어.’
대체 어떤 세력이 방해한 것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렇지만 확실한 건 결코 이그니트에 우호적인 세력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 때문에 카리엘은 윙사르에만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오직 이들만이 로만에 대한 적대적인 감정이 강했기 때문이다.
‘산드리아도 이상했지.’
사막제국이라 불리는 산드리아지만, 실상은 수많은 부족들의 연합체에 가까운 국가.
이 국가의 경우 서대륙과 교역을 왕성하게 하고 있었기에 큰 문제가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결국 윙사르만 로만을 저지하는 데 적극적이게 된 이유는 산드리아 역시 서대륙과 ‘동맹’을 맺는 것에는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점 때문이었다.
“동대륙은 몰라도 서대륙은 우리가 발표한다고 해도 믿지 않을 확률이 높아.”
명확한 증거를 내밀지 않으면 믿지 않을 확률이 높았다.
이미 자국 내부에 혁명 세력이 커 가면서 분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런 얘기를 하면 제국이 명분을 갖고 자신들에게 내정간섭을 하려 한다고 느낄 것이다. 그렇게 명확한 증거를 찾아야 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끝까지 합류하기를 거절하는 국가도 있을 것이다.
탈로스 같은 경우 지옥을 막기 위해 이그니트와 손잡는 순간, 자신들이 먹힌다고 생각할 게 분명했다.
‘차라리 동대륙 국가들과 손잡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와 손을 잡진 않겠지.’
그렇게 생각한 카리엘이 쓴웃음을 지었다.
이미 탈로스와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까지 와 버렸다.
그렇기에 확실히 먹어 버릴 생각이었다.
그쯤 되면 로테온이나 성국도 다급해질 터. 그들까지 집어삼킬지 아니면 속국 형태로 남겨 둘지는 그때 가서 정하면 되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그때가 되면 서대륙만큼은 지옥에 대항할 확실한 세력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쉬었으면 다시 시작해야지.
“그래야지.”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 싶자 곧바로 나타난 수르트를 보면서 다시 일어나는 카리엘.
그런 그를 걱정스레 바라보는 기사들이었지만 말릴 수는 없었다.
명확한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자신의 황제를 보자 기사들의 눈에 불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황궁 기사가 되고 나서 정체되었던 기사들이 다시금 위를 올려다보기 시작하자 아켈리오가 그런 그들을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정체되었던 녀석들이 더 발전할 수 있겠군.’
어쩌면 자신들의 뒤를 이어 줄 녀석들이 탄생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미소가 지어졌다.
동시에 자신 역시 마음 한구석에 작은 불씨가 만들어졌다.
‘폐하께서 이 늙은이조차 달리시게 하는군.’
마스터에 이른 후 오랜 시간 정체된 실력에 멈춰져 있던 걸음이 다시금 움직이려 하고 있었다.
“그랜드 마스터라…….”
지금부터 노력한다고 하더라도 죽기 전에 그 근방이라도 도달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해야만 했다.
조금이라도 더 강해져야 재앙에 목숨을 잃는 자들이 줄어들 것이기에……
* * *
마침내 카리엘이 수련에서 돌아왔다.
이미 근방에서 연이은 폭음이 들려와 소문이 난 상황에서 지친 표정으로 궁으로 들어간 카리엘.
그런데 그날 저녁부터 황궁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카리엘의 수행에 동행했던 황궁 기사들이 돌연 강도 높은 수련에 들어간 것이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궁금했지만, 알 수는 없었다.
그저 2~3일에 한 번씩 수련하러 다녀올 때마다 수련 대열에 합류하는 황궁 기사들의 수가 늘어날 뿐이었다.
그런데 더 시간이 흐르자, 수련 대열에 새로운 변화가 생겼다.
마스터에 이른 후 황궁을 지키는 데 주력했던 아켈리오가 폐관 수련에 들어간 것이다.
그러자 사람들 사이에서 카리엘이 또 무슨 수를 쓴 게 아니냐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그렇게 갑자기 수련광이 되기 시작한 황궁 기사들의 소문이 제국 전역으로 퍼져 나가자 궁금했는지 곳곳에서 카리엘을 찾아왔다.
“……타리온, 기사들은 다 어쩌고 그림자들이야?”
“크흠! 최근 그림자들의 정신 상태가 해이해져서…… 폐하께 도움을 받고자 찾아왔습니다.”
“하…… 그 소문을 믿냐?”
카리엘이 한심하다는 듯 타리온을 바라보았지만, 한 번만 같이 가게 해 달라는 청에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림자들이라면 황궁 기사들에 비해 실력이 달리는 것도 아니니 상관은 없었다.
문제는 그림자들마저 카리엘과 같이 갔다 오고 나서 수련광이 되었다는 점이다.
몇몇은 실력이 상승해 버리기도 하자, 수도에 묘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황제를 따라가면 새로운 경지에 대한 단서를 얻을 수 있다.’
대부분 헛소리로 여겼지만 몇몇 이들은 진지하게 이 소문을 받아들였다.
오랜 시간 동안 정체되어 포기한 자.
벽에 가로막혀 헤매는 자.
다음 단계에 대한 갈망으로 미쳐 버린 자.
이런 이들이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황궁으로 찾아오고는 했다.
그리고 그런 이들 중에는 마스터라는 거대한 벽을 마주한 대표적인 이들도 있었다.
“하…… 공작, 이런 뜬소문을 믿으시오?”
“크흠! 그냥 구경만 하겠습니다.”
헛기침을 하면서도 기어코 따라가겠다는 월크셔 공작.
그리고 그 옆에서 은근히 기대하는 눈빛을 보이는 청년.
“저도 따라가도 되겠습니까?”
글렌의 말에 한숨을 쉰 카리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간절하게 바라보는 두 사람을 내칠 수도 없었기에 수련을 따라오는 것을 허락했다.
거대한 소환체들을 목격한 글렌과 월크셔 공작.
그리고 비밀을 안 이들은 다른 사람들처럼 이를 악물고 조금씩 벽을 허물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들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카리엘은 정말 자신에게 뭐가 있나 의심했다.
“어…… 정말 나한테 뭔가 있나?”
카리엘의 이런 중얼거림에 수르트가 몰랐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말했다.
-몰랐냐? 너 사람을 각성시키는 힘이 있어.
“각성?”
카리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게 그런 힘이 있었던가?’ 하는 표정이었다.
-정확히는 네 의도대로 움직이게끔 이끄는 힘이지.
“그런 게…… 있다고?”
-군주라면 갖고 있는 카리스마. 그런 거랑 비슷한 거지.
수르트가 태연한 얼굴로 짧게 설명했다.
제국을 발전시킨다는 의지, 재앙을 막는다는 대의가 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박히기 시작한 것이다.
그 힘은 벽에 가로막혀 좌절한 자에게 다시 걸어갈 힘을 주고, 어느 정도 선에서 만족하고 주저앉았던 이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게끔 했다.
-신의 사도쯤 되면 말에도 힘이 있는 법. 거기에 군주의 카리스마가 합쳐져 화기에 융화된 거다. 잘 봐 봐.
수르트의 말에 카리엘이 가만히 월크셔 공작과 글렌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들의 가슴에 아주 미약하지만 불꽃이 타오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영웅들이 연설로 사람들의 사기를 고양시키는 것도 비슷한 거지. 그들의 연설이 단순히 사기만 끌어올리는 게 아니라 병사들의 힘 자체를 강하게 만드는 것도 다 이런 원리거든.
영웅의 마력을 연설로 퍼뜨려 자신의 생각에 동감하는 이들과 마력의 파장을 동화시켜 더 강화시키는 힘.
어느새 카리엘은 영웅의 경지에 다다른 것이다.
-뭐 대부분은 짧게 교감하는 걸로 끝이지만 네 주변 애들은 그게 아닌가 봐.
카리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
그것이 막혀 있던 벽마저 뚫어 낼 만큼 강했기에 지고한 경지마저 개척할 ‘용기’를 부여한 것이다.
“나…… 좀 대단한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