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 >
45. 서대륙을 흔드는 이그니트 연방 (2)
카리엘의 계획은 곧바로 남부 왕국들에 전달되었다.
고위 귀족들과 왕이 뭉갤 수 없도록 일부러 공개적으로 발표한 후, 정식으로 제안서를 넣었다.
그러자 두 왕국 모두 당황했다.
‘이제 와서?’
처음엔 이런 반응이었으나, 숨겨진 의도를 파악하고는 이를 갈았다.
“이걸 받아들일 경우 발생할 문제를 말해 보시오.”
로테온 국왕의 말에 체스터 후작이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부유층이 급격하게 많아질 겁니다. 문제는 그들 대다수가 평민이라는 것이지요.”
재무 대신이자 대상인인 체스터 후작의 말에 로테온의 왕이 한숨을 쉬었다.
“우리의 힘이 약해지겠군. 그럼 거절해야 하는 것이오?”
“제국의 의도가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는 이상 쉽지 않습니다. 어쩌면 이걸 명분으로 바로 전쟁을 하려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의 힘이 깎여 나가게 둘 수는 없지 않소?”
“그렇긴 하옵니다만…….”
체스터 후작이 말끝을 흐리자 로테온 국왕이 한숨을 쉬며 물었다.
“만약 받아들인다고 하면 혁명 세력이 더 날뛸 터. 이걸 막을 수는 있겠소?”
“혁명 세력이 중립 지대를 근거지로 삼는다면 더는 확장을 막기 어려울 것입니다.”
정보부 수장인 델론드 후작이 고개를 숙이면서 말하자 로테온 국왕은 눈을 질끈 감았다.
지금도 정보를 통제하며 간신히 틀어막고 있는데 혁명 세력을 제어할 방법이 사라진다면, 그 순간부터 귀족들의 체제는 빠르게 무너져 내릴 것이다.
“그래도 저희는 상황이 좀 낫습니다. 탈로스는…….”
델론드 후작이 말끝을 흐리자 다들 한숨을 쉬었다.
이대로 있으면 제국에 그대로 흡수되게 생겼다. 시간이 지나면 속국이 될 상황에 처했기에 나름의 준비를 했다.
멸망이 예정되어 있다 한들 마지막 발악은 해 봐야 하지 않겠는가?
그걸 위해서 로테온은 최대한 정보를 틀어막고 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탈로스 역시 최대한 자금을 끌어모아 대규모 지하 시설을 만들고 전쟁 무기를 개발하고 있었다.
그런데 제국은 그 시간조차 주지 않으려는 것 같았다.
“분명 제국도 힘들진대…… 정녕 우리와의 전쟁을 감수하려는 건가?”
로테온 국왕의 말에 다들 무거운 표정으로 침묵했다.
분명 제국 역시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기에 서로가 시간을 가지고 마지막 전쟁을 준비하려 했다.
그런데 제국이 갑자기 치고 나오니 당혹스러웠다.
“어찌하시겠습니까?”
피레스 공작의 물음에 국왕이 한참 동안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비밀리에 군사를 모으시오.”
“예.”
“전하! 곧바로 전쟁을 하시려는 것입니까?”
곧바로 대답하는 피레스 공작과 달리 체스터 후작은 절대 안 된다는 듯이 말했다.
지금 당장 전쟁하는 건 위험했다.
적어도 해적들과 범죄 집단은 완전히 처리해 뒤를 안정시켜 두고 전쟁에 임해야 했다.
“바로 하려는 것이 아니오.”
국왕의 말에 다들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귀족들이 적극적으로 협조할 마음을 먹었을 때. 그때가 우리가 전쟁을 하는 타이밍이 될 것이오.”
“이번 기회를 노리는 것이군요.”
체스터 후작이 무슨 의도인지 알았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무리 로테온이라도 혁명 세력을 계속 묶어 둘 수는 없다. 그렇다면 이들이 날뛰게끔 만들고, 귀족들의 힘을 한데 끌어모아야 했다.
이때가 로테온이 제국에 대항할 거의 마지막 타이밍일 것이다.
“델론드 후작은 탈로스와 성국에 이 사실을 알리시오.”
“그리하겠습니다.”
피레스 공작과 델론드 후작이 물러나자 남아 있던 체스터 후작이 조용히 물었다.
“전쟁 시기는 언제쯤으로 생각하십니까?”
“혁명 세력이 들고일어날 때. 그때가 귀족들의 힘을 한데 모으기 좋을 것이오.”
“그럼 사전에 작업을 해야겠군요.”
귀족들에게 제국에 넘어가면 자신들의 미래가 없음을 주지시켜 주어야 했다.
적어도 귀족들의 힘이라도 뭉쳐서 대항해야 제국의 공격에 조금이라도 버틸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최악의 상황에서 귀족들을 모아 마지막 항전을 준비하는 로테온.
그리고 그건 탈로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개판이군.”
탈로스 국왕이 쓴웃음을 지으며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이미 탈로스의 미래는 끝이 났다.
제국의 파상 공세를 버텨 낸다고 한들 국력이 약해진 탈로스의 미래는 어두웠다.
이미 탈로스 자체가 타국의 놀이터가 된 지 오래였다. 그런 국가의 미래란 타국에게 이권을 강탈당하며 눈치만 보는 소국과 다름없으리라.
그렇기에 이제는 선택을 해야 할 시기가 다가왔다.
“조금은 시간이 더 있을 줄 알았거늘…….”
탈로스 국왕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의 선택은 명예롭게 싸우다 멸망을 당하는 것이었으나, 이제 와서 자꾸만 국민들이 눈에 밟혔다.
“전하, 로테온에서 비밀리에 서신을 전해 왔습니다.”
시종이 건네는 서신을 읽은 탈로스 국왕은 피식 웃었다.
로테온의 서신은 자신의 마지막 고민마저 지워 버리고는 한 가지 선택을 강요했다.
“시기는 혁명 세력의 준동인가?”
그렇게 중얼거린 탈로스 국왕이 비밀리에 주요 대신들을 불러 모았다.
마지막까지 망설였으나 결국 전쟁을 하기로 마음먹었다면 더는 미적거릴 수 없었다.
“공작.”
“예, 전하.”
“칼을 뽑아야 할 것 같소.”
“……준비하겠습니다.”
조용히 고개를 숙이며 물러가는 클레타 공작을 보며 고개를 끄덕인 탈로스 국왕은 이번엔 알탄 후작을 바라보았다.
“후작.”
“예, 전하.”
“나의 왕국에 숨어든 쥐새끼들을 잡아내시오.”
“전부 처단하면 되겠습니까?”
알탄 후작의 물음에 탈로스 국왕이 고개를 저었다.
“기회를 주시오. 그동안 국가를 팔아 벌어들인 재물은 회수해야 하지 않겠소?”
“그리하겠습니다.”
목숨을 살려 주는 대가로 탈로스의 정보를 팔아 재물을 긁어모은 이들의 재산을 환수할 예정이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최후의 항전을 준비해야 했다.
* * *
탈로스 국왕의 명에 비밀리에 나라 안에 숨어든 쥐새끼들을 찾아 나가는 알탄 후작과, 찾아낸 쥐새끼를 처단하기 위해 직접 움직이는 클레타 공작.
그렇게 한창 바쁜 움직임을 보일 때, 제국에서 사신이 도착했다.
“받아들이겠소.”
“탈로스의 결단에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삼국의 평화가 오래 지속되길 바라며 이 기쁜 소식을 곧바로 폐하께 전하겠습니다.”
외무대신이 직접 결단을 내려 준 탈로스 국왕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며 물러났다.
그리고 얼마 뒤, 탈로스가 황제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는 발표와 함께 옛 소국의 영역이자, 현재는 제국의 영역이 된 트리아와 탈로스, 로테온의 국경이 겹친 지역에 자유 무역도시가 세워졌다.
세 나라의 국경이 겹쳐진 곳에 세워진 거대한 도시.
「새로운 제국의 자유 무역도시 그리햄! 삼국의 평화의 상징이 되다!」
거창하게 발표되는 서대륙의 새로운 자유 무역도시 그리햄.
많은 사람들이 ‘이제 정말로 평화가 도래한 것인가?’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국가를 오가는 상인들은 이 평화가 그리 오래가지는 못할 것임을 눈치챘다. 조금만 큰 상단이라면 남부 왕국들이 비밀리에 철과 마정석을 대량으로 매입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귀족들로 하여금 막대한 자금을 모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남부 왕국들이 평화 뒤에 숨어 칼을 갈고 있음을 알 수밖에 없었다.
상인들조차 아는 정보를 제국이 모를 리 없었다.
제국과 남부 왕국들이 바라보는 미래는 같았다. 그 날을 위해 그리햄을 주시했다.
정확히는 그곳에 모여든 혁명 세력과, 돈을 벌기 위해 모여든 수많은 사람들을 보았다.
「혁명 세력의 크기를 최대한 키우게. 그들이 들고일어나는 순간이 전쟁의 시작일 것이니…….」
트리아의 총독으로 임명된 마르크스는 황제의 비밀 서신을 보고선 한숨을 쉬었다.
자유와 평등이라는 기치를 걸고 만들어진 혁명 세력이 전쟁의 수단으로 이용되는 것에 한숨이 나왔으나 어쩔 수 없었다.
이미 황제의 말이 되기로 마음먹은 이상 철저하게 따라야 했다.
“지금부터 트리아의 주요 도시에 혁명 세력을 위주로 관료를 뽑게.”
마르크스가 트리아의 중요 관료들을 보면서 명령을 내리자 다들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귀족들이 반발할 것이옵니다.”
“폐하께서 허락하신 사안일세.”
“예? 폐하께서요?”
모두들 의아한 표정을 지었으나 마르크스는 더는 묻지 말라는 듯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다들 고개를 숙이며 알겠다고 말한 후 물러났다.
그리햄에 모여드는 수많은 사람들과 그들을 고용하는 수많은 상인들과 관료들, 그리고 그리햄과 거래하는 트리아의 주요 도시들이 전부 혁명 세력에 장악된다면?
타국에서 그리햄으로 모여든 사람들도 혁명 세력들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전쟁이라…….”
마르크스가 혁명 세력으로 인해 전쟁이 일어날 것을 알고 있음에도 속도를 늦추지 않고 더 빠르게 세력을 확장시키려는 이유는 황제의 의중을 어느 정도 간파했기 때문이다.
자세한 건 알지 못하지만 카리엘이 서대륙의 통일을 단기간에 끝내고 싶어 하는 것을 눈치챘다.
그는 그 이유가 동대륙에 있음을 알기에 희생이 있을 걸 알면서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것은 폐하의 뜻대로…….”
마르크스는 얼마 전 불의 신전에서 구한 목걸이를 한 손으로 꽉 쥐면서 황제를 생각했다.
밑바닥 삶을 전전하던 자신들을 구원해 준 성자를 생각하며 자신의 임무를 위해 바삐 움직였다.
* * *
새로이 만들어진 트리아와 삼국의 자유 무역도시인 그리햄까지 생기면서 오랜만에 제국 남부에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반면에 서대륙 북부의 상황은 최악이었다.
겉으로나마 평화로운 상황을 만든 남부와 다르게 성국과 제국의 상황은 여전히 좋지 못했다.
게다가 마침내 성국에서도 일이 터지고 말았다.
“성하.”
“아직은 아닙니다.”
자신을 부르는 태양검의 말에 교황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대는 벽을 넘는 데 주력하세요.”
“……알겠습니다.”
로만인지 흑마법사인지 모를 세력에 의해 만들어진 모종의 세력이 성국 내부에서 세력을 불려 가고 있었다.
이미 혁명 세력이 내부에 침투한 지 오래였지만 그들과 다른 점은 대부분이 평신도에 불과한 혁명 세력과 달리 이번 세력에는 주교급 인원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몇몇 추기경마저 그들에게 합류했다는 첩보를 들었다.
이것을 알고 있음에도 가만 놔두는 건 뿌리가 어디인지를 아직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저들이 온전히 모습을 드러낼 때까진 절대 우리가 알고 있음을 티 내서는 아니 됩니다.”
교황의 당부에 친교황파의 추기경들과 성기사단장들이 고개를 숙였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전쟁을 앞두고 썩어 버린 내부를 정리하기 위해선 내부의 적들이 모조리 모습을 드러내야 했다.
그걸 위해서 온갖 굴욕을 참아 내며 때를 기다리는 교황.
그렇게 삼국이 마지막 때를 위해서 인내의 시간을 다지고 있을 때, 제국은 정신없이 발전하고 있었다.
* * *
“그리햄의 발전 속도는 어떻지?”
“세일럼보다 빠르옵니다.”
카리엘의 물음에 그리햄의 발전 상황을 보고하는 재무대신.
보고서를 받아 든 카리엘이 재무대신을 바라보며 물었다.
“우리가 계획한 때는 언제쯤 가능할 것 같나?”
“늦어도 20개월, 빠르면 1년이 채 지나기 전에 일이 터질 것 같습니다.”
“준비 기간으로는 충분하군.”
재무대신의 설명에 카리엘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당초에 예상한 것보다 1년 이상을 앞당긴 것이기 때문이다.
제국이 준비할 시간을 벌고, 서대륙의 통일 작업까지 앞당길 수 있는 계획이 순조롭게 흘러가자 이제야 한시름 놓았다는 듯 미소를 짓는 카리엘.
그런 카리엘의 미소를 보면서 재무대신 역시 웃었다.
“이대로만 가지.”
“예.”
황제의 칭찬에 활짝 웃은 재무대신.
실로 오랜만에 받은 칭찬에 그는 그날 술을 마시면서 동료 대신들에게 그 사실을 자랑했다.
그러자 은근히 그런 그를 부러워하는 내무대신과 군부대신.
이 계획의 수립자인 외무대신과 그리햄의 무역도시를 정상궤도로 올린 재무대신은 칭찬을 받았으나 아직 그들은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부럽나?”
“부러울 리가……. 내 나이가 몇인데.”
외무대신의 말에 코웃음 치는 내무대신.
하지만 그의 눈은 어느새 황제에 대한 서운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그건 군부대신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 서운함은 부하들의 닦달로 이어졌고, 관료들이 더 바삐 움직이게끔 하는 원동력이 되고 말았다.
카리엘이 의도하진 않았으나, 각 부처마다 은근히 경쟁의식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스스로 야근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중앙 관료들이 바삐 움직이니 지방 관료들 역시 조금이라도 더 움직이게 되면서 제국의 발전이 더 가속화되기 시작했다.
이런 선순환을 통해 제국의 개혁의 핵심인 세일럼과 그리햄의 발전은 더 빨라졌고, 그로 인해 제국 전역에 깔리는 유통망 역시 좀 더 빠르게 완성되어 갔다.
그리고 마침내, 제국과 삼국이 기다리던 시간이 도래했다.
“폐하! 그리햄에서 혁명 세력이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타리온의 보고에 카리엘이 벌떡 일어났다.
그리햄이 만들어진 지 1년.
기다리던 혁명 세력의 준동이 시작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