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 >
48. 서대륙 통일! 다음은 동대륙? (3)
동대륙에 있는 가장 강력한 국가인 로만.
신기하게도 똑같은 제국인 이그니트와 달리 로만은 동대륙의 다른 국가들에게 큰 견제를 받지 않았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단 한 번도 통일 전쟁을 일으킨 적이 없다.’
로만은 항상 일정 수준 이상의 영토를 탐낸 적이 없었다.
심지어 일시적으로 자신들의 영토를 떼어 준 적도 있을 정도였다.
오랜 시간에 걸쳐 동대륙 국가들을 관리해 왔던 로만이기에 서대륙에 간섭할 여유를 가질 수 있었고, 그 결과 이그니트를 비롯한 서대륙 국가들이 로만에 흔들려 왔던 것이다.
그걸 방지하고자 서대륙에 동대륙 국가들에게 놀아나지 말자는 암묵적인 룰까지 생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대륙 국가들은 로만에게 놀아났다.
“이그니트를 막아야 하지 않겠나?”
“우리들의 도움을 받으면 이그니트를 멸망시켜 주겠다.”
“일단 살고 봐야 하지 않겠나? 우린 철벽만 가져가지. 나머지는 그대들이 알아서 해라.”
여러 번에 걸친 꼬드김.
평소라면 개가 짖는다고 생각하겠지만 국가의 명운이 걸리자 로만의 제안은 달콤하게 변해 갔다.
결국 손을 잡았고, 남부 왕국들은 멸망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서대륙에 엄청난 혼란을 야기한 로만에게 똑같이 갚아 주기 위해선 그들이 사용한 방법을 그대로 행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카리엘은 가장 먼저 동대륙 국가들과 로만과의 사이를 벌리려 했다.
“의외로 로만과 동대륙 국가들과의 유대 관계가 상당히 깊습니다.”
처음 카리엘이 동대륙 국가들을 지원하고자 할 때 했던 타리온의 보고.
분명 제국의 돈에 매수된 자들은 상당히 많았다.
하지만 반대로 로만과 공존을 바라는 자들 역시 많았다.
그 결과 동대륙 내에서 확실히 이그니트의 편을 든 것은 윙사르뿐이었다.
과거 로만에 크게 당한 역사가 있는 윙사르만이 이그니트와 손잡으면서 견제할 뿐, 다른 국가들은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였다.
그렇기에 이번에는 단순히 자금만 때려 박는 무식한 방법 대신 시간을 들이더라도 확실한 방법을 택할 생각이었다.
“준비는?”
“끝났습니다.”
카리엘의 명령에 고개를 숙인 외무대신.
“슬슬 시작해 보자고.”
“예.”
카리엘의 명령에 고개를 대답하면서 나가는 외무대신.
서대륙 통일이 코앞으로 다가왔다지만 그만큼 제국이 할 일은 많았다.
남부를 완전히 제국의 영토로 만드는 데에는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고, 아직 미진한 부분 역시 발전을 계속해야만 했다.
하나 그렇다고 성국과 동대륙의 작업을 포기할 수도 없기에 일단 밑작업부터 시작할 생각이었다.
그 첫 번째 방법이 바로 로만을 공공의 적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흑마법사와 손잡은 로만?」
가장 먼저 사설 신문을 이용한 밑작업을 시작했다.
로만에서 넘어온 상인들로부터 들은 정보들을 이용해서 내부에 어떤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는지를 알렸다.
그들의 강력한 언론 통제와 더불어 흑마법사들이 있을 가능성이 높은 지역을 군대로 통제하고 있다는 것까지 신문에 실은 것이다.
「A상인 : 이미 마계 게이트가 열렸을 가능성도 있다.」
이런 내용까지 실렸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믿지 않았다.
대륙을 돌아다니는 상인들이 많은 정보들을 가져다주기는 하지만 그만큼 허구도 많았기 때문이다.
마계 게이트가 열렸다?
아무리 로만이라도 이걸 그냥 넘기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그들도 인간이니만큼 마족들이 대륙에 넘어오는 걸 그냥 두고 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신문은 어디서 가져왔는지 지속적으로 동대륙에 관한 정보들을 물어 왔고, 그러다 보니 제국민들도 이게 단순한 뜬소문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바로 그때 외무대신이 나섰다.
“현재 제국에 퍼지고 있는 소문의 심각성을 폐하께서도 인지하고 계십니다. 폐하께선 이 사안에 대해서 정식으로 로만이 묻기로 했고, 성국에 이 사안에 대한 협조를 얻고자 하십니다.”
서대륙을 침공하려 했던 로만에 외교 채널을 열고, 그와 동시에 제국과 전쟁 중인 성국에 이 사안에 협조할 것을 요구한다는 정식 발표에 모두가 놀랐다.
전쟁 중인 적국과 협조한다?
상식적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는 행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건 철저하게 계산된 행동이었다.
남부 왕국들의 마스터들을 앞으로 전쟁에 써먹을 것처럼 교황 역시 흑마법사들, 마족들과의 전쟁에서 최전선에 써먹을 생각이었다.
태양검과 교황이라는 두 마스터급 존재를 전쟁에 세우는 대가로 교국으로나마 자치권을 보장할 생각이었다.
성국이 가졌던 대부분의 영토를 빼앗고 수도와 인근의 영토만을 허락한 채 간신히 명맥만 남겨 둘 생각이었으나 그들은 받아들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선택을 한 것은 순전히 남부 왕국들보다 성국의 가치가 더 높기 때문이다.
1. 흑마법사와 상극이 되는 힘을 다룬다.
2. 두 명의 마스터를 보유했다.
3. 성국이 보유하고 있을 흑마법사와 마족에 대한 정보의 가치가 높다.
이 세 가지 이유 때문에 카리엘은 성국에게 자비를 베풀었다.
물론 성국도 자존심이 있으니 곧바로 이 제안을 받아들일 수는 없을 것이다. 자존심이 강한 그들이라면 마지막까지 성전이라는 미명 아래 싸울 수도 있다.
그래서 카리엘은 그동안 자신이 받은 정보들을 조금씩 풀었다.
성국이 항복할 수 있는 명분을 만드는 것이다.
“성국의 반응은?”
“아직입니다. 하오나 전쟁을 멈춘 걸 보면 확실히 내부에서 의견이 갈리는 중인 것 같습니다.”
타리온의 보고에 카리엘이 미소를 지었다.
현재 성국 내부는 카리엘이 지원하는 혁명 세력으로 골치가 아팠지만, 더 큰 문제는 로만의 세력과 손잡은 추기경들이었다.
그들이 교황에게 반기를 들면서 성국 내부가 둘로 갈라진 것이다.
“교황도 골치 아프겠군.”
“그러게 말입니다.”
카리엘의 말에 타리온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제국과 전쟁하기 전이라면 금방 정리했을 세력이지만, 현재는 곤혹스러울 정도로 커져 버렸다.
지금 당장 전쟁을 멈추고 내부를 수습하면 좋겠지만, 과연 제국이 그걸 두고 볼까?
군을 뒤로 물리는 순간 제국은 병력을 성국 안으로 들이밀 것이다.
“북부 사령관은?”
“이미 만약의 사태에 대한 준비가 끝났습니다.”
성국이 군을 뒤로 물리는 순간, 더욱 압박하기 위한 준비가 끝났다.
이미 까마귀들로 하여금 혁명 세력과 지속적으로 연락을 주고받고 있었다.
탈로스와 로테온을 집어삼킨 것처럼 혁명 세력이 들고일어나는 사이 성국의 영토를 집어삼킬 것이다.
“자! 그럼 슬슬 마지막을 장식해 보자고?”
“예.”
카리엘의 명령에 타리온이 곧바로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그날 저녁이 되기 전, 공영 신문에서 제국이 갖고 있던 증거들을 무더기로 쏟아 내며 발표했다.
「로만은 정녕 대륙에 마계의 문을 열고자 하는가?」
이그니트 제국의 질문에도 입을 꾹 닫고 있는 로만에게 하는 의문.
수많은 증좌들이 존재하는데도 침묵하는 로만을 향해 비난을 가했다. 동시에 성국을 압박했다.
신을 믿는 종자들이 마계의 문이 열리게 생겼는데 자신의 이득만 챙기려 한다는 것에 실망한다는 듯 여론을 움직였다.
그러자 성국 내부가 혼란에 빠졌다.
“이게 맞는 건가?”
“신의 자손인 우리들이 먼저 움직여야 하는 거 아닌가?”
“대체 신전은 무얼 하고 있는 거지?”
성국에 있는 국민들이 신전을 의문에 찬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흘러갔음에도 내부 다툼에 열중하는 그들을 보면서 ‘과연 이들을 믿어도 되는가?’란 의문이 생긴 것이다.
바로 그때, 불의 신전이 움직였다.
“끄아아악!”
온몸이 불에 타며 괴로워하는 한 남자.
문제는 불에 타는 남자의 몸에서 엄청난 양의 흑마력이 빠져나오고 있다는 점이었다.
“흑마법사다!”
“성국에 흑마법사가 숨어들었어!”
불의 사제들이 밝혀낸 흑마법사.
심각한 건 그들이 사제처럼 하얀 로브에 사제만이 박을 수 있는 문양을 그려 놓은 옷을 입었다는 것이다.
성국의 시골 촌구석에서 발생한 일이었기에 묻으려면 묻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때가 좋지 못했다.
하필 성국의 국민들의 믿음이 흔들리는 때에 이런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그 결과 전국적으로 국민들이 들고일어나기 시작했다.
“……일부러 이때를 노린 것인 듯싶군요.”
“그런 것 같습니다.”
교황의 말에 태양검이 이를 갈면서 답했다.
미리 파악해 놓은 흑마법사를 성국이 가장 취약한 때에 맞춰서 잡았다.
지금 제국은 성국에서 선택을 강요하고 있었다.
“얌전히 항복하라는 뜻이군요.”
교황이 허탈한 웃음을 터뜨리다가 한숨을 쉬었다.
남부 왕국들처럼 성국의 정예 병력을 사용하기 위해 자비를 베푸는 척 항복할 기회를 주었다.
하지만 이게 과연 좋은 것일까?
언제든 반란을 일으킬 수 있는 자신들을, 제국이 과연 가만 놔둘까?
절대 그러지 않을 거다.
삼엄한 감시 속에서 전쟁터에서만 힘을 발휘하게끔 제약을 가할 것이고, 성국과 남부 왕국들의 정예 병력 역시 사방으로 찢어 놓을 것이다.
철저하게 동대륙과의 전쟁에만 사용하게끔 만들 게 분명했다.
“사실 제국이 이렇게까지 하는 건 이상하긴 합니다.”
태양검의 말에 교황 역시 같은 생각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남부를 점령한 시점에서 강하게 밀고 들어와 끝내면 그만인 것을, 이렇게 스스로 항복할 기회를 준다는 것 자체가 제국이 자비를 보인 것이다.
교황이나 태양검이 아는 황제는 그런 자비를 보일 자가 아니었다.
“우리의 목숨을 살려 줄 정도로 동대륙의 사태가 심각하긴 한 것 같군요.”
교황이 그렇게 말하면서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최근까지 발표한 것들을 전부 들은 교황은 로만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이 정말 심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다시 치욕을 감내하고 미래를 보아야 하는가?”
성국으로 독립하기 전, 기나긴 세월을 치욕 속에서 살아왔다.
하지만 또다시 제국의 그늘에 들어가야만 하는 처지가 되었다. 하필 그것이 자신이 집권하는 기간에 일어난 것에 신을 원망하면서 한숨을 쉬었다.
* * *
며칠 후, 결단을 내린 교황이 홀로 제국군으로 찾아갔다.
“폐하를 뵙고 싶습니다.”
“홀로 온 것이오?”
시카리오 후작의 물음에 교황이 입술을 깨물다가 말했다.
“성국은 제국과 함께 마족들을 처단하고자 합니다.”
“폐하께 그대의 뜻을 말씀드리겠소.”
시카리오 후작이 그렇게 말한 후, 사라지자 교황의 주위로 데이비어 공작과 월크셔 공작이 가까이 다가왔다.
허튼짓이라도 할 경우 곧바로 공격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교황은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신을 찾을 뿐이었다.
교황이라는 인물이 홀로 제국군을 찾아왔기 때문일까?
이 소식은 순식간에 북부 전체로 퍼져 갔고, 며칠 후 카리엘이 직접 비공선을 타고 북부로 찾아왔다.
“앞으로 잘해 봅시다.”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카리엘의 악수를 받으며 교황이 고개를 숙였다.
악수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협정문과 항복의 대가로 성국의 교황만이 들 수 있는 홀을 카리엘에게 넘겨주었다.
그 순간 제국을 비롯한 서대륙 전체에 교황이 항복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대의를 위해 항복한 교황! ‘지금은 싸울 때가 아닌 힘을 합할 때! 동대륙에서 일어난 일을 막기 위해 모든 힘을 다할 것이다!’」
「교황의 숭고한 뜻에 감명한 카리엘 황제! ‘교황의 숭고한 뜻을 존중하는 바, 교국의 지위를 유지하고 자치권을 보장하겠다!’」
성국이 갖고 있던 많은 땅들이 제국에게 돌아갔지만 그런 건 상관없었다. 그들이 가졌던 명예와 자부심만은 지켰다는 게 중요했다.
성국의 지위를 잃고 교국으로써 서대륙 유일의 중립지대가 된 것으로 만족하게 된 상황.
그들이 힘들게 쌓아올린 대부분의 힘을 잃고 나락으로 떨어진 좌절감과 분노는 교황에게 반기를 든 추기경과 그 세력에게 돌아갔다.
“사…… 살려…….”
“늦었습니다. 참회는 지옥에 가서 하시길.”
단호한 음성과 함께 직접 추기경을 죽인 교황이 얼굴로 튄 피를 닦아 내며 말했다.
“전부 쓸어버리세요. 앞으로의 성전에 악마의 하수인들은 필요 없습니다.”
“예.”
교황의 명령에 태양검이 고개를 숙이고는 조용히 검을 뽑아 들었다.
* * *
그렇게 교황이 성국의 지존으로서 마지막 명령을 내릴 때, 제국은 본격적으로 동대륙의 분란을 일으킬 준비를 시작했다.
막대한 자금을 투입하면서 동대륙의 모든 국가에 하나의 여론을 만들었다.
「인류의 적인 로만을 그대로 둘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