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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136화 (136/201)

< 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 >

51. 드러나는 로만의 전력 (2)

로만이 준비한 한 수가 펼쳐지면서 압도적일 것으로 보였던 이그니트의 군대가 고전하기 시작했다.

단숨에 뚫을 수 있을 것 같은 거인의 요새를 결국 뚫지 못하고 뒤로 물러선 이그니트 제국의 주력군.

뒤이어 오는 군대들 역시 마족과 마인들에 의해 묶여 버렸다.

“역시 쉽지 않네.”

수도에서 전쟁 상황을 보고받은 카리엘은 피식 웃었다.

그러자 군부대신이 그 모습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긴장하면서 보고를 올린 것과 다르게 카리엘의 기분이 그리 나빠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군이 고전하고 있는데 기뻐 보이십니다.”

곁에 있던 타리온조차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적들이 숨겨 놓은 힘을 드러냈으니까.”

카리엘이 그렇게 말하면서 한시름 놨다는 표정을 지었다.

만약 마지막까지 숨겨 놓은 힘을 드러내지 않았다면 자신이 생각한 것 이상으로 심각한 계획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야 했으니까.

그렇기에 오히려 이렇게 드러내는 편이 좋았다.

“군단장급 마족까지 나타났다지?”

“예. 글렌 경이 잘 막고는 있지만 아직 경험이 부족하기에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타리온의 보고에 카리엘이 피식 웃었다.

“그건 걱정하지 마.”

“예?”

“글렌이라면 잘 막아 낼 거야.”

“하오나 기록에 따르면 마군단장은 평균적으로 마스터 중에서도 상위급 힘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새 마군단장에 대해 조사를 해 왔는지 타리온은 어떤 특징들이 있는지 읊어 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리엘은 여유로웠다.

‘그 녀석이라면 마군단장을 상대하면서 더 성장하겠지.’

회귀 전에는 이번 생보다 더 늦게 재능을 개화했던 글렌.

그런 그가 삼십이 되기 전에 그랜드 마스터급에 올라섰던 이유는 딱 하나였다.

흑마법사들과 마족들을 처단하면서 미친 속도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마스터가 되기 전부터 고위 마족들을 썰고 다녔으며, 마스터가 되고 나선 마군단장급 존재들과 수없이 전투를 벌여 왔다.

한동안 그를 제외한 모든 마스터들이 죽었을 때 홀로 제국을 지탱해 온 존재가 글렌이다.

그런 그가 고작 마군단장 하나 만났다고 헤맬 리는 없었다.

“글렌은 됐고, 시카리오 후작과 교황 쪽은 어때?”

“압도적입니다.”

이번엔 타리온이 걱정할 것 없다는 듯이 말했다.

서대륙 최강의 검과 마족들과 상극이라는 교황이 있는 군대다.

정예군으로 유명한 북부군과 다수의 성기사들과 사제들로 조합된 군인데, 마인에게 습격당한다고 큰일이 일어나는 건 이상한 일이다.

“하긴…… 마왕이라도 나타나지 않는 이상 그쪽을 제압하긴 어렵겠지.”

현시점 서대륙 최강의 군을 웬만한 마인이나 마족으로는 상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고서에 기록된 것과 달리 마족들은 무적의 군대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마족의 군대가 소환된다 한들 큰 걱정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마왕만큼은 달랐다.

수많은 고서에 기록된 마왕에 대한 기록.

그리고 그를 무찔렀던 용사들의 기록을 보면 대부분 마왕을 죽이기는커녕 마계로 되돌려 보낸 게 고작일 만큼 막강한 힘을 가졌다.

그렇기에 현시점에 마왕이 나타난다면 카리엘도 긴장할 것이다.

‘아직 그 정도까진 아니겠지.’

마왕이 대륙에 나타날 조짐을 보이면 필시 대륙에 영향을 끼친다.

로만의 내륙에서 소환된다 해도 거인의 산맥에서 검은 폭풍이 보일 정도로 강력한 마기의 폭풍이 발생할 터.

그게 아닌 이상 현시점의 카리엘에게 위협이 될 만한 건 없었다.

문제는 지옥이다.

전생을 겪어 본 카리엘이기에 마왕의 힘이 전설에 묘사된 것처럼 강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만약 지옥도 그러하다면?

‘무조건 막아야겠지.’

지옥문이 잠깐 열리는 것만으로도 일부 지대를 죽음의 땅으로 만들 정도이니 무조건 막아야 했다.

문제는 아직까지도 지옥문이 있을 만한 곳을 찾지 못했다는 점이다.

“타리온, 마족들의 게이트가 있을 지점은?”

“로만과 유목 민족들의 분쟁지역 같습니다.”

“지옥문은 아직인가?”

“예.”

타리온의 대답에 카리엘이 한숨을 쉬었다.

지하에 있더라도 로만을 집어삼킨 마족들이라면 어떻게든 찾아냈을 터.

하지만 타리온의 보고에 따르면 마족들은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지옥문을 찾지는 못한 것일 터다.

“지하나 산드리아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건데……. 시종장, 산드리아 쪽은?”

“아직 별다른 성과가 없사옵니다. 송구하옵니다.”

시종장의 말에 카리엘이 괜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사막 지역은 이그니트에게도 미지의 영역이다.

가장 큰 문제는 무엇보다 그 광활한 영토에 얼마나 많은 부족이 있을지 모른다는 점이다.

소수 부족까지 전부 찾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산드리아 제국이 어떻게 움직일지는 카리엘도 알 수 없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주요 부족들이 로만과 접선한 흔적을 찾은 것으로 보아 결코 인류에 좋은 방향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는 것.

그렇기에 지금 당장은 그들이 움직이지 않기를 바라야만 했다. 지옥문이 산드리아에 있다면 그들이 향후 지옥을 이용할 수도 있다는 점도 배제할 수 없었다.

‘아직은 산드리아까지 커버할 상황이 아니야.’

그렇게 생각한 카리엘이 군부대신을 바라보았다.

“일단 각 군의 지휘관들에게 급하게 움직이지 말라고 당부해 두도록.”

“알겠습니다.”

“이미 단기전은 글렀다. 그렇다면 완전히 장기전으로 트는 것도 답이 될 수 있어.”

카리엘의 말에 군부대신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생각해 두신 바가 있습니까?”

“그래.”

카리엘이 그렇게 말하면서 지도를 펼치고 동대륙의 북쪽 지역을 톡톡 두드렸다.

“유목 민족이 움직이기 전까지 대치만 하는 것.”

“동대륙의 국가들이 그걸 받아들이겠습니까?”

카리엘의 말에 타리온이 표정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그니트조차 장기전으로 흘러가면 버거울 것이다. 제국조차 이럴진대 하물며 다른 국가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괜찮을걸.”

카리엘이 그렇게 말하면서 빙그레 웃었다.

사실 맨 처음부터 카리엘은 로만과의 전쟁을 단기간에 끝낼 수 있다고 보지를 않았다.

‘로만의 황제가 쉽게 당할 리가 없지.’

그렇기에 초장기전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일단은…….”

카리엘이 군부대신과 타리온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거인의 요새 점령에 실패한 이상 로만을 사방에서 압박하는 형태로 말려 죽일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서 군부대신과 타리온과 함께 밤늦게까지 회의를 했다.

바로 그때, 외무대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이지?”

“윙사르 진영에 마족들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또한 동쪽에서 진입 중인 군대 역시 마룡 떼가 나타나서 진격에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현재 동대륙 국가들이 마족들로 인해 일단 후퇴한다고 전해 달라 했습니다.”

갑작스럽게 들어온 소식에 외무대신이 식은땀을 흘리면서 보고를 올리자 카리엘은 이번에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군부대신의 안색은 어두워졌다.

“마룡 떼가 나타났다지만 모여 있는 병력만 보면 충분히 뚫을 만한데 그냥 물러나는 것이오?”

“마도사가 나타났다고 하오.”

“마도사?”

군부대신의 물음에 외무대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곳 모두 로만의 새로운 마도사가 나타났습니다.”

외무대신의 말에 카리엘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마인일 가능성이 높군.”

글렌처럼 엄청난 천재가 나타나지 않는 이상 이렇게 갑작스럽게 마도사가 나타날 리 없다.

월크셔 공작조차 벽을 넘고서도 완벽한 마도사가 되기 위해 엄청난 시간을 소비해야 했다. 이런 시간이 없이 갑작스레 마도사가 나타났다면 한 가지뿐이다.

“군부대신.”

“……예.”

카리엘의 물음에 군부대신의 고개를 숙였다.

그 역시 카리엘의 작전을 완전히 받아들인 것이다.

장기전을 염두에 두고는 있지만 동대륙 국가들의 연합군이 어떻게 활약하느냐에 따라 단기전으로 끝낼 수도 있다고 보았다.

그런데 그 희망마저 완전히 끝나 버렸다.

“이것으로 단기전에 대한 희망은 완전히 끝났으니 장기전으로 완전히 방향을 틀지.”

“……예, 폐하.”

카리엘의 말에 군부대신이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전쟁에서 최선은 전쟁을 하지 않고 끝내는 것이지만, 차선은 단기전으로 피해를 최소화해서 끝내는 것이다.

피해가 없다 한들 장기전으로 끌고 가는 것 자체가 많은 물자의 소비가 일어남으로 최악이나 다름없게 되는 것이다.

“그럼 이제 확실하게 방향을 정할 수 있겠군.”

카리엘은 그렇게 말하면서 빙그레 웃었다.

“대신들 전부 불러와. 전략 변경이다.”

“예! 폐하.”

* * *

카리엘의 명령에 야밤에 슬슬 퇴근하려고 각을 잡던 대신들이 일제히 황제의 궁으로 모여들었다.

“오늘 집에 갈 생각은 말도록.”

카리엘의 말에 대신들이 고개를 숙이면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너희들이 오늘 할 일은 이것이다.”

그렇게 말한 카리엘은 종이에 크게 작전명을 적어 주었다.

「작전명 : 로만 말려 죽이기!」

카리엘이 로만을 말려 죽이기 위해 장기전으로 돌입하는 작전의 뼈대를 만들어 주자 모든 대신들이 달려들어 살점을 붙이고 피부를 만들었다.

1. 밀고 들어간 지점에 요새를 만들어 영역을 굳힌다.

2. 로만의 국경 근처에서 지속적으로 첩보전을 펼친다.

3. 대규모 전쟁의 발발 시점은 유목 민족들이 움직이는 때로 정한다.

4. 산드리아가 로만과 접선하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차단한다.

크게 네 가지의 방침을 정한 그들은 장기전에 돌입하기 위한 작전의 세부 사항들을 짰다.

점령한 로만의 영토를 나누는 건 나중에 본격적으로 정하도록 하고 일단 로만과 연결된 국가 위주로 땅을 갈랐다.

철저하게 본국에서 물자를 용이하게끔 하는 것.

그리고 마치 당장에라도 로만을 칠 것처럼 지속적으로 괴롭히는 것.

어떤 나라와도 교역을 허락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국지전을 일으켜 말려 죽이는 것이 이 작전의 핵심이었다.

“페하께선 유목 민족이 움직일 거라 보십니까?”

타리온의 물음에 카리엘은 확신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군부대신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로만이 바보가 아닌 이상 여기서 적을 더 만들 리가 없습니다.”

“로만은 그러겠지.”

카리엘이 그렇게 말하면서 빙그레 웃었다.

“그래.”

확실히 로만은 여기서 더 적을 만들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마족들도 그러할까?

전생을 경험한 카리엘을 단호하게 고개를 저을 수 있었다.

마기를 다룬다는 것 자체가 정신적으로 불안정함을 안고 가는 것인데 그 정점에 이른 마군단장이라는 놈들이 과연 전부 정상일까?

아니다.

그들 중에는 마왕이 직접 명령을 내리지 않는 한 제멋대로 행동하는 놈들이 태반이었다.

자신의 강함에 취해 미친 듯이 돌격하는 놈들이 많았고, 전생의 제국은 그것을 이용해 글렌이 한 놈씩 박살 냈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겠지.’

이미 이번 생에서도 마군단장이 넘어온 것이 확인한 만큼 로만 내부에 더 많은 마군단장이 있을 확률이 높았다.

그놈들이 과연 지루하게 가만히 있는 걸 참기만 할까?

그럴 리가 없었다.

다른 곳으로 움직이지 못한다면 주변의 인간들이라도 학살하려 할 터.

동맹인 로만을 건들지 못하니 남은 곳은 하나뿐이었다.

“마족 놈들이 로만의 국경 주변의 부족들을 박살 낸다면 골란이 움직일 거다.”

카리엘의 말에 대신들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아직까진 미심쩍은 표정들이 대부분이었다. 골란의 부족장에 대한 정보도 부족했고, 마족들에 대한 정보도 부족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의 카리엘은 대신들에게 이런 말밖에 할 수 없었다.

“믿어라.”

그저 믿으라는 말뿐.

하지만 대신들은 그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가끔 자신들의 예상과 다른 명령을 내렸지만, 그 명령들 중에 성공하지 않은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역시 그와 같은 결과를 낼 것이라 생각하며 고개를 숙였다.

“골란이 움직이면 곧바로 치는 것입니까?”

타리온의 물음에 카리엘은 고개를 저었다.

“그가 북부를 통일할 시간은 줘야겠지.”

“골란에 접선하는 게 그때군요.”

타리온의 말에 카리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완강히 밀어 내는 골란도 북쪽을 통일하려면 막대한 물자가 필요할 터.

그때가 되면 이그니트와 손잡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밤늦게까지 이어진 새로운 계획은 그날 곧바로 인류 연맹의 다른 국가들에게도 전해졌다.

* * *

그리고 다음 날,

“모든 국가가 폐하의 제안에 동의했습니다.”

“좋아. 본격적으로 로만을 말려 죽여 보자고.”

시종장의 보고에 카리엘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

그리고 그날 곧바로 거인의 길 중간에 새로운 요새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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