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 >
58. 지옥문! (2)
지옥의 기운과 카리엘의 기운이 충돌할수록 아래에서 느껴지는 진동은 더 강렬해졌다.
그런데 신기한 건 아무런 반응이 없다는 것이다.
생명체라면 가지고 있어야 할 어떤 힘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에 의아함을 느낄 때, 충돌의 여파로 변질된 힘들이 진동에 의해 균열이 일어난 대지의 틈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게 대체 뭐지?”
-글세…… 한 가지 확실한 건 이곳에 가름은 없다는 거다.
그 말에 카리엘이 수르트를 바라보았다.
“없다고?”
-그래. 있었다면 지옥문이 저럴 리가 없거든.
그렇게 말하는 수르트는 잿빛 기운이 멋대로 일렁이는 지옥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녀석이 있었다면 지옥문에서 나오는 저 기운이 이곳의 모든 물체에 스며들고 있었을 거다.
수르트의 말에 카리엘의 머릿속에 어디선가 읽어 봤던 고서의 내용이 떠올랐다.
“영역화?”
-그래. 녀석이 지옥의 수문장이라는 이명을 달게 된 이유야.
가름이 있는 곳은 그곳이 어디든 지옥의 문이 만들어질 수 있는 땅이 되는 것.
그것은 곧 지옥문이 생겨나는 대지의 모든 것에 깃든다는 뜻이었다.
-결계가 만들어지면 공기마저 지옥과 비슷하게 변하지. 그것이 바로 가름의 능력이다.
지옥과 비슷한 환경이 만들어질 시 가름은 어떤 존재보다도 강해진다.
지옥의 주인이라 불리는 헬조차 지옥에서만큼은 가름에게 순수한 무력으로는 뒤처진다는 평가를 받았을 정도.
-만약 가름이 아스가르드가 아닌 지옥에서 싸웠다면 최상위 신과 동수가 아니라 이겼을 거다.
그만큼 환경에 영향을 받는 존재가 가름이었다.
그런 존재가 지하에 있었다면 이곳에 열린 지옥문에 어떠한 방식으로든 영향이 있어야 했다.
“그럼 이 현상은?”
카리엘의 물음에 수르트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내려가 보면 알겠지.
그렇게 말한 수르트가 거대한 주먹으로 유적지를 박살 내면서 균열이 일어난 곳을 벌렸다. 그리고 스콜과 아그니가 그것을 도우면서 지옥의 힘으로 보호되던 바닥 일부를 뚫어 내자 카리엘이 망설임 없이 그곳을 향해 뛰어내렸다.
화륵!
어느새 작게 변한 수르트와 소환체들이 카리엘의 주변에 자리하며 화기로 주변을 밝혔다.
불의 문양을 개방해 공중에 몸을 띄운 카리엘은 지하를 바라보았다.
마치 무언가가 모셔진 것 같은 독특한 분위기의 유적지에 초록빛 기운들이 감돌고 있었다.
-이 기운은…….
수르트가 눈을 커다랗게 뜨면서 카리엘을 바라보자 그런 수르트의 반응에 카리엘이 ‘혹시?’ 하는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수르트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주 짧게 느껴졌던 익숙한 기운. 그것이 가름의 기운인지는 수르트도 확신할 수 없었다.
신화시대에 느꼈던 가름의 기운을 완전히 떠올리기엔 너무 오래되었고, 수르트 역시 오랜 시간 봉인되어 격을 많이 상실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음?
또다시 이상한 반응을 하는 수르트를 보며 카리엘은 인상을 찌푸렸다.
어디선가 느껴지는 묘한 느낌.
그것이 가름인지조차 불분명한 상태로 기운을 퍼뜨려 보는 카리엘.
유적지 전체에 카리엘의 기운과 지옥의 기운이 어지러이 얽혀 있는 상태에서 수르트가 움찔하는 방향을 중심으로 천천히 살펴보았다.
바로 그때, 운이 좋게도 유적지 전체를 울리는 지진이 일어났다.
쿠구궁!
-저기다!
“나도 느꼈어.”
이번엔 카리엘도 느꼈는지 빠르게 그곳을 향해 움직였다.
하지만 움직임과 달리 빨리 찾을 수는 없었다.
위쪽의 유적지만 하더라도 상당한 크기였는데 지하의 유적지는 그보다 더 컸다.
대체 이런 유적지가 이제까지 왜 발견되지 않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
“이 정도 유적지가 모험가들에게 발견이 안 되었다고?”
카리엘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대륙 전체에 몇 번이나 붐이 일어났던 탐험의 시대.
그 시대에 대륙 곳곳에 신들의 유적지들을 발견하고 유물 역시 발견했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야 지옥문이나 지하 유적지가 발견된 게 이상했다.
-특정 조건이 만족되지 않는다면 발견되지 않는 곳도 있으니까.
수르트의 말에 카리엘이 말없이 유적지를 바라보았다.
카리엘의 힘과 지옥의 힘이 충돌하지 않았다면 절대 알 수 없었을 지하 유적지.
지옥문조차 로만의 황제와 마왕이 직접 나서기 전까지 그토록 찾아 헤매도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었다.
즉, 이곳으로 오는 것 자체가 특정한 조건이 만족되어야만 올 수 있다는 뜻이 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증명하듯, 카리엘의 힘이 지하 유적지를 가득 메우기 시작하자 위쪽에 벌어졌던 틈이 다시금 메워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유적지 잔체에 초록빛 불이 타오르면서 주변을 환하게 밝혔다.
-이곳에는 오직 ‘너’만이 올 수 있도록 안배되어 있는 것 같네.
오직 초대 황제의 힘을 가진 자만이 들어올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결계.
그것이 지하 유적지 전체에서 느껴지고 있었다.
“이곳이 신의…… 안배라고?”
-장난질이지. 그놈들이 안배 따위를 할 거 같아?
수르트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말했다.
그가 신화시대에 겪은 신들의 모습은 결코 자비롭지도, 위대하지도 않았다.
그들의 왕이라 불리는 ‘주신’ 역시 공명정대와는 거리가 먼 신이었다.
과거를 생각하며 투덜거리는 수르트를 뒤로하고 유적지를 둘러보던 카리엘은 문득 심장에 묘한 기운이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두근!
“이젠 확실히 알겠네.”
오랜 세월이 지나 여기저기 무너진 유적지를 뒤로하고, 한쪽 방향으로 달려 나간 카리엘.
그곳엔 낡은 제단 하나가 놓여 있었다.
여기저기 세월의 흔적들이 남아 있었지만 제단만큼은 초기의 온전한 형태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기이한 모습.
그것을 보면서 천천히 계단을 올라갔다.
두근!
제단에 있는 거대한 보석.
그것이 카리엘이 다가올수록 더 크게 움직이면서 묘한 파장을 만들어 냈다.
한쪽은 잿빛 기운에, 다른 한쪽은 붉은 기운이 맴돌면서 묘한 파장을 만들어 내는 그 힘은 이내 초록빛 기운으로 변해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가름의 영혼 조각인가?
수르트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 카리엘의 앞에 반투명한 창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름의 영혼 조각을 찾았습니다. 보상으로 한 가지 질문을 하실 수 있습니다.]
궁금한 게 있으면 자신에게 물어보라고 적힌 반투명한 창을, 카리엘이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 머리를 굴렸다.
아직 자신이 알지 못한 비밀이 너무 많았다.
하지만 질문은 한 가지뿐이기에 신중해야 했다.
“가름의 위치.”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모든 조각을 모은 이후에 하실 수 있습니다.]
그렇게 답한 반투명한 창이 카리엘에게 퀘스트를 내려 주었다.
[가름의 영혼 조각을 완전히 깨우십시오. 그러면 현재 만들어진 지옥문을 완전히 닫을 수 있습니다.
보상 : 1.다음 영혼 조각의 위치 2.지옥의 권능 일부]
“뭐?”
카리엘이 멍청하게 되묻는 순간 다시 한번 반투명한 창이 떠올랐다.
[※모든 영혼 조각을 모을 시, 가름의 육체가 잠든 위치를 알 수 있습니다.]
[※지옥의 권능으로 지옥문을 닫을 수 있는 힘이 강해집니다.(영혼 조각을 모을수록 권능이 강해집니다.)]
“영혼 조각이라고?”
그렇게 중얼거린 카리엘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지옥문이 하나가 아니었나?”
카리엘이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가름의 영혼 조각이 있는 곳이 지옥문이 생겨날 수 있는 환경으로 변화하는 거라면 흩어져 있는 영혼 조각들이 있는 곳 전부가 지옥문이 될 예정지라고 봐야 했다.
바로 그때, 또다시 반투명한 창이 나타났다.
[첫 번째 영혼 조각이 깨어나면서 다른 조각들도 영향을 받기 시작합니다.]
카리엘의 힘을 본격적으로 빨아들이면서 색이 선명해지자 거대한 보석이 떨리기 시작한 것이다.
‘공명.’
이미 몇 차례 겪어 봤던 현상이기에 카리엘은 지금 이게 어떤 건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소환체들과 공명을 일으켰을 때 일어난 현상이었다.
문제는 지금의 공명은 자신과 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반투명한 창이 말한 것처럼 다른 영혼 조각들과 공명을 일으키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멈춰야 할까?
그 생각이 들자 잠시 멈칫한 카리엘이지만 결국 힘을 불어 넣을 수밖에 없었다.
지옥문을 완전히 닫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고, 마왕과 로만의 황제를 막기 위해서라도 일단 가름을 찾아야 했기 때문이다.
카리엘이 힘을 불어 넣는 걸 멈추지 않자 다시금 반투명한 창이 모습을 드러냈다.
[질문을 해 주십시오.]
반투명한 창의 말에 고민하던 카리엘이 입을 열었다.
“마왕과 로만의 황제의 목적.”
카리엘이 고심 끝에 한 질문은 적들의 목적이었다.
지옥문이야 가름을 찾다 보면 해결될 일.
그렇다면 적의 목적을 아는 것이 최선이었다.
[마왕은 고대 신의 부활을, 로만의 황제는 지옥의 일부를 이 땅에 강림시켜 죽음의 여신을 깨우려 합니다.]
“신을 부활시킨다고?”
카리엘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수르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 역시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신들은 죽으면 소멸한다는 것이 그가 아는 상식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 사실이 깨어지려 하고 있었다.
“그게 가능한가?”
[신을 구성하던 힘의 일부가 특정 조건을 만족한다면 가능합니다. 다만 해당신이 과거의 존재와 똑같은 모습으로 부활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답변을 들은 카리엘이 더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표정을 지었다.
대체 왜?
과거의 존재를 부활시키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쳐도 대체 왜 그들을 다시 부활시키려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대체 왜? 무엇 때문에 부활시키려는 거지?”
카리엘의 물음에도 반투명한 창은 더 이상 답변하지 않았다.
제 할 일이 끝났다는 듯 말도 없이 사라지는 반투명한 창 대신 수르트가 말했다.
-로만의 황제가 왜 그러는지는 알겠군.
“……왜?”
-과거에도 있었으니까.
그렇게 말한 수르트는 과거에 있었던 일 일부를 말해 주었다.
신화시대의 지옥은 지금과 같은 모습이 아니었다. 죽은 자들이 생명을 다하고 영혼으로 남아 소멸되어 거대한 흐름의 일부가 될 때까지 쉬는 곳.
그곳이 바로 그 시절에 지옥이라 불리던 곳이었다.
비록 감옥처럼 밖으로 나갈 수는 없으나 평온과 안정을 주는 궁전 같은 곳이라 했다.
그렇기에 일부 사람들은 지옥의 신인 헬만을 믿으며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전사가 되고는 했다.
“로만의 황제는 그곳을 부활시키려는 건가?”
-그런 것 같네. 하지만 뜻처럼 될지는 모를 일이지.
이미 지옥은 변질된 지 오래.
여신 하나가 부활한다고 이미 변질된 지옥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올까?
무엇보다 부활한 여신이 과거의 여신과 똑같은 존재일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나마 지옥의 여신은 지옥에라도 그녀의 힘이 남아 있다.
그렇다면 마왕이 부활시키려는 이는 누굴까?
“마왕은 대체 어떤 자를……”
-한 가지 의심되는 자는 있다.
카리엘의 말에 수르트가 아까보다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저승과 관련된 신이 또 있다고?”
-지옥과 관련된 신은 아니지. 하지만 죽음과 관련된 신은 있다.
수르트의 말에 카리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이 아는 바로는 없었기 때문에 그가 말해 주기만을 기다렸다.
그러자 수르트가 어느 때보다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오딘.
“뭐?”
-과거의 주신. 그가 바로 죽음의 신이자 마신이라는 또 다른 이명을 가진 신이다.
수르트의 말에 카리엘의 표정이 굳어졌다.
“신화시대의 주신이…… 마신이라고?”
-그래.
“하지만 오딘은 완전히 소멸했을 텐데?”
-그건 확실하다. 내가 직접 확인했었으니까. 다만…… 나처럼 유물 안에 영혼 조각이 남아 있다면 어떤 형태로든 부활할 가능성이 있지. 다만 신의 형태로 부활하려면…… 지옥의 힘이 있다 한들 막대한 대가가 필요할 거다.
여기까지 들은 카리엘은 순간 전생의 기억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이번 생처럼 지옥에 대한 어떤 정보도 없이 그저 막기에 급급했던 시절. 그 당시, 마왕은 자신들의 부하들이 죽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그저 인간들을 더 많이 죽이는 것에 더 즐거움을 느끼는 미친놈이었다.
글렌에게 막혀 마계로 다시 돌아가는 그때까지도 웃고 있던 미친놈.
만약 그게 아니라면?
이미 목적한 바를 전부 이룬 것이라면?
마신은 깨어났을 것이고, 동대륙을 장악한 로만에 의해 지옥 역시 강림했을 것이다.
“……희망이 없었군.”
제국을 지켜 낸 것에 만족했던 과거의 자신이 얼마나 오만했던 것인지 이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동시에 신이 어째서 자신을 다시 환생시킨 것인지도 제대로 알 수 있었다.
-괜찮냐?
“……그래. 일단은…… 복잡한 생각은 뒤에 하기로 하고, 저 빌어먹을 지옥문부터 닫아 보자.”
수르트의 물음에 그렇게 답한 카리엘은 모든 힘을 쥐어짜 내 가름의 영혼 조각에 쏟아붓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