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 >
60. 가름의 시험
초록빛 불이 주변을 휘감기 시작하자, 수르트와 소환체들을 맹렬히 몰아붙이던 거대한 개의 뼈가 그대로 허물어지면서 그 안에 담겨 있던 힘들이 초록빛 폭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것을 본 로만의 마도사가 인상을 찌푸렸다.
“결국 못 막았나?”
로만의 황제가 그에게 했던 당부.
“막을 수 있다면 최선이겠지만, 그러지 못할 경우 시간이라도 끌거라. 적어도 우리의 대계가 완성될 때까진 시간을 끌어야 한다.”
영원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대계를 위해 시간을 끌어야 하건만, 결국 그조차도 실패하고 말았다.
이제 남은 것은 저 황제가 폭풍 속에서 죽길 바라는 것뿐.
비록 지옥문이 일시적으로 닫혔으나, 지옥의 힘은 계속해서 빠져나오고 있었고 그 덕분에 지옥의 군대는 사라지지 않았다.
로만이나 산드리아 입장에서도 이곳을 쉽게 내줄 수는 없는 노릇.
불리한 상황도 아닌 밀어붙이고 있던 상황이라 사력을 다해 적들을 공격했다.
“황제가 저 폭풍을 나오면 끝이다. 그 전에 적들에게 최대한 피해를 입혀라!”
발칸의 명령에 로만의 군대가 지옥의 군대를 이용해서 이그니트를 괴롭혔다.
하지만 이그니트군은 전원 지옥의 군대를 상정하고 만든 부대라서 그런지 힘의 상성을 이용해 버텨 냈다.
문제는 연합군이었다.
“쿨럭!”
“오래도 버텼군.”
사막의 황금매의 검이 노장 더글라스의 심장에 박히면서 피가 터져 나왔다.
그러자 더글라스의 눈에서 빠르게 생기가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마지막…… 일격…… 지옥……의 힘……인가?”
“맞소.”
“……그…… 힘 언젠…… 대가……를…….”
“그것도 모르고 썼을까.”
황금매가 알고 있다는 듯 쓴웃음을 지었다.
“먼저 지옥에 가 계시오.”
그렇게 말한 황금매가 칼을 뽑아 들었다. 그러자 간신히 서 있던 더글라스가 그대로 힘을 잃고 쓰러졌다.
노장 더글라스가 피를 토하면서 쓰러지자 가뜩이나 밀리던 연합군이 더더욱 밀리기 시작했다.
마도 왕국의 마도사 아르칸이 왔지만 때는 늦었다.
마스터급 전력을 이제 와서 맞춘다 한들 기세에서 밀려 버렸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흉포한 지옥의 군대에 힘을 못 쓰던 연합군이 연합군의 기둥 중 하나인 더글라스가 죽자 계속해서 밀려났다.
마치 강한 건 너희들이 아닌 이그니트뿐이라는 걸 알려 주듯, 파죽지세로 전선을 뭉개 버렸다.
이참에 연합군의 주력을 전멸시켜 버릴 기세로 공격하던 산드리아의 대군. 그러나 어느 순간 그들의 진격이 멈출 수밖에 없었다.
풀썩!
하늘에서 흉포한 괴성을 지르면서 사람을 잡아먹던 용들이 하나둘 힘을 잃고 지상으로 추락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산드리아의 지휘관들이 다급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을 제 집처럼 휘젓고 다니는 마룡들이 힘을 잃고 쓰러지고, 그것을 시작으로 지옥의 군대들 역시 점차 힘을 잃어 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사막의 황금매가 다급히 지옥문을 바라보았다.
“설마 벌써?”
어느새 더 활활 타오르고 있는 초록빛 불길을 보면서 인상을 찡그렸다.
그들이 예상했던 최악의 상황이 지옥문 앞에 있을 카리엘로 하여금 일어나고 있었다.
로만과 산드리아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르게 말이다.
결국 점차 힘을 잃어 가는 지옥의 군대를 미끼로 던져 주고 후퇴할 준비를 하는 산드리아.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흔들리는 거대한 지옥문을 보면서 로만의 군대 역시 후퇴를 결정했다.
하지만 밖에서 보이는 것과 달리 지옥문은 견고했다.
카리엘이 가름의 인정을 받을 때까진 절대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가름의 마지막 영혼 조각으로부터 인정을 받으십시오.]
카리엘의 머리 위에 떠 있는 반투명한 창.
그리고 그보다 더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거대한 개.
이성을 잃고 수르트를 공격했던 때와 다르게 카리엘의 힘으로 주술의 속박에서 풀려난 가름의 영혼은 온전한 형태를 띠고 있었다.
그리고 힘 역시 뚜렷한 형태만큼이나 막강했다.
“헉……헉…….”
수르트도, 스콜도, 아그니도 없이 오직 홀로 이 시련을 이겨 내야 하는 카리엘은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가름을 올려다보았다.
무심한 눈으로 이를 드러내고 있는 가름을 보면서 카리엘이 이를 악물었다.
육체도 없고, 생전의 격 대부분을 잃어버린 영혼 조각.
그런 존재에게 카리엘은 고전하고 있었다.
-이게 전부인가?
가름의 물음에 카리엘이 다시금 일어섰다.
이미 한계를 넘어선 지는 오래였음에도 붉게 달아오른 몸으로 다시금 화기를 끌어 올렸다.
그것을 본 거대한 가름의 형체가 다시금 달려들었다.
형체가 없는 초록빛 몸이 카리엘이 만든 화염의 벽을 부숴 버리면서 카리엘을 공격했다.
거대한 앞발이 카리엘이 있던 곳을 강타하는 순간, 주변을 활활 타오르는 대지로 만들어 버리는 막강한 힘.
하지만 카리엘은 그것을 피해 내면서 가름에게 저항했다.
-겨우 이 정도로 나의 인정을 받고자 하는가?
가름의 말에 카리엘은 대답 대신 더 큰 불길을 만들어 냈다.
가름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카리엘을 더 맹렬하게 몰아붙였다.
-그대는 무얼 위해 이렇게까지 나의 시련을 버텨 내는가?
-그대의 바람은 무엇인가?
-그대를 이 상황에 처하게 만든 세상을 원망하지 않나?
-모든 것에서 도망쳐서 쉬고 싶지 않나?
맹렬하게 몰아붙이면서도 계속해서 묻는 가름의 영혼.
달콤한 환영을 보여 주면서 유혹하는 가름.
과거의 자신을 보여 주면서 지구에서의 행복한 삶을 사는 환영을 보여 주기도 했다.
하지만 카리엘은 대답을 하는 대신 가름에게 불길을 날렸다.
멀리서 보면 어떤 유혹해도 흔들리지 않는 영웅적인 모습. 하지만 실상은 힘든 나머지 대답할 힘도 없었던 것에 불과했다.
‘힘들어 뒈질 것 같은데 자꾸 물어 대네.’
이런 속마음이 들리기라도 하듯, 피식 웃은 가름은 계속해서 물었다.
입에 모터라도 단 것처럼 끝도 없이 질문하는 가름.
대답도 안 하는데 계속해서 묻는 가름에게 카리엘이 인상을 찡그리며 물었다.
“그렇게 혼자서만 열심히 말하면 안 지겹나?”
-혼잣말이라……. 그대는 이미 답을 하고 있지 않나?
그렇게 말한 가름이 웃으면서 거대한 앞발을 들어 카리엘의 불길을 가리켰다.
그의 불길에서 무언가 답을 얻은 것일까?
가름은 다시금 웃으면서 카리엘을 공격했다.
-자! 그럼 다시 문답을 시작해 볼까?
다시금 시작되는 공방 속에서 한쪽이 묻기만 하는 기묘한 문답의 시간이 계속되었다.
그렇게 수백 수천 번의 문답이 끝났을까?
이번엔 그 어느 때보다 큰 초록빛 화염을 만들면서 카리엘을 바라보는 가름.
-지옥의 제사장의 대의는 동대륙의 영혼 전체를 위한 것. 너의 대의는 무엇이지?
공격을 멈추고 자신을 가만히 바라보며 묻는 가름을, 카리엘은 마주 응시했다.
그러자 카리엘도 자세를 바로 하고 처음으로 제대로 된 답을 했다.
“나의 대의는 많은 이들이 평화로운 삶을 사는 것.”
-거창하군.
가름의 말에 카리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의 바람은 평화롭고 자유로운 삶을 사는 것. 그것을 이루기 위해선 세상 역시 그리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을 뿐이야.”
카리엘의 대답에 가만히 그의 눈을 바라보던 가름이 하늘을 향해 알 수 없는 울음소리를 내뱉었다.
그 순간, 가름과 카리엘만이 있던 세상이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했다.
-지옥의 제사장에 비하면 너무나도 작은 바람이구나. 허나 그로 인해 만들어진 대의는 누구보다 진실하고 크다.
그렇게 말한 가름이 웃으며 말했다.
-자유와 평화라……. 서로 같은 길을 가고 있으면서도 이리도 다른 방향이라니……. 재밌군. 지켜볼 가치가 있겠어.
그 말을 끝으로 거대한 형체가 서서히 가루가 되어 사라지기 시작했다.
-지켜봐 주마. 너의 대의가 어떻게 이루어질지……. 과연 너의 대의가 제사장의 대의를 뛰어넘을지도…….
신기루처럼 들리는 가름의 음성.
동시에 고정되어 있던 반투명한 창이 새로 생겨났다.
[모든 가름의 조각에게 인정을 받으셨습니다. 그로 인해 가름의 시련을 받을 진정한 자격을 획득하셨습니다.]
[보상으로 지옥의 기억 일부를 받았습니다.]
가름의 초록빛 가루들이 흡수되면서 보이는 환영들.
그것은 현재 지옥에서 일어나는 일들이었다.
스스로 지옥에 뛰어든 마왕이 고대 신의 유물을 뿌려 과거의 망령을 부활시켰다.
산 자는 지옥에 있어선 안 되는 법.
이미 지옥에서 튕겨 나가 마계로 돌아간 마왕은 다시금 대륙으로 넘어오기 위한 준비를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하지만 그가 뿌린 유물들을 통해 드높았던 망령들이 부활하며 지옥은 혼돈 그 자체가 되었다.
이것만으로도 지옥은 경계선이 죄다 박살 난 상황인데, 로만의 황제가 헬의 흔적들을 이용하여 거대한 제단을 만들면서 지옥의 옛 궁전(엘류드니르)를 부활시키려 하자 헬의 휘하에 있던 망령들이 부활해 고대의 망령들과 싸우기 시작했다.
마왕과 로만의 황제로 인해 지옥은 끝없는 전쟁에 휘말리고 말았다.
이미 죽은 헬을 대신해 지옥을 관리하던 모드구드의 역량을 넘어설 정도의 상황이었기에 머지않아 혼돈의 여파가 대륙까지 튀어나올 것이다.
“…….”
현재 지옥에서 일어난 현상을 모두 본 카리엘은 말없이 이를 악물었다.
이로써 가름의 인정을 받아야 하는 이유가 하나 더 늘어났다. 가름을 이용해 지옥을 막지 못하면 대륙은 멸망 확정이었다.
[가름의 영혼 조각이 한데 뭉쳤습니다. 가름의 영혼이 어딘가에 있을 육체로 향합니다.]
반투명한 창의 말이 끝나는 순간, 카리엘의 몸에 엄청난 양의 초록빛 가루들이 전부 흡수되었다.
동시에 온몸에 새겨진 문양들이 빛을 발하면서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대륙의 어딘가에 잠들고 있을 가름의 육체로 사라진 영혼.
그로 인해 충만했던 가름의 기운이 완전히 빠져나가면서, 공허함이 차올랐다.
“헉……헉…….”
빛의 기둥과 함께 사라진 폭풍.
그와 동시에 모습을 드러낸 카리엘은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바닥에 주저앉았다.
-버텨 내. 그리고 그 감각을 잊지 마라.
어느새 다가온 수르트가 카리엘에게 조언했다.
가름의 열 번째 조각을 얻으면서 터질 듯 몸 안을 채웠던 힘과 그로 인해 일시적으로 높아졌던 격.
그 감각은 지독한 공허함 속에서도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수르트의 조언 덕분일까?
공허함에 허덕이던 카리엘은 눈을 감고 거칠었던 숨을 차분하게 진정시키면서 감각을 조금이라도 떠올리려 노력했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을 충만했던 힘을 떠올리던 카리엘은 마침내 눈을 떴다.
“폐하.”
“지옥문은?”
다급히 다가온 타리온의 부름에 지옥문을 올려다본 카리엘이 한숨을 쉬었다.
가름의 거대한 영혼 조각으로 유지되던 지옥문은 다행히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지옥문이 완전히 닫힌 덕분인지 지옥의 군대 역시 완전히 사라진 상황.
남은 것은 엄청난 피해를 입은 연합군과 이그니트의 병력의 신음 소리뿐이었다.
“최대한 빨리 병력을 추스르도록 해.”
“로만의 황제를 치러 가십니까?”
타리온의 물음에 카리엘이 고개를 저었다.
“여길 가야 해.”
카리엘의 손에서 나온 화염. 그것이 곧 화살표 모양으로 바뀌더니 한쪽 방향을 가리켰다.
“……이곳이 어디를 향하는 것입니까?”
“가름의 육체가 잠들어 있는 곳.”
지옥의 수문장이었단 가름의 육체가 잠든 곳.
이제는 완전해진 영혼을 흡수해서 보다 완벽해졌을 가름이 카리엘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로만의 황제를 저지하는 것.
마족들을 막아 내는 것.
지옥문을 막는 것.
이 모든 것을 이루기 위한 전제 조건인 가름의 인정.
그것을 받기 위해 카리엘은 친위대와 타리온, 소수의 황궁 기사들만 비밀리에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