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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175화 (175/201)

175-65.종전!

마왕이 쓰러지고, 신화 속에서나 나오는 격렬한 전투는 끝났다.

신들이 사라지고 신이 되려는 자도 막았으니 인류의 승리라 볼 수 있으리라.

하지만 전쟁은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

숨이 끊어진 마왕의 시신을 데리고 마계로 돌아가려는 마족들과 그런 그들을 섬멸하기 위한 인류의 싸움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시작은 특수 전력들의 전투였다.

“폐하를 모셔라!”

“글렌 경과 시카리오 사령관도 모셔!”

그림자들이 몰려드는 흑마법사들과 마왕군의 친위대를 막아 내면서 혼절한 세 명의 영웅을 뒤로 후송했다.

그러는 동안 이그니트의 특수 전력들이 속속 모습을 드러냈다.

“마왕을 완전히 죽여야 한다!”

이미 죽은 것으로 보이지만 확실하게 죽여야 했다.

그렇기에 사방에서 마왕을 죽이기 위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명색이 마왕의 친위대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자들답게 인간들의 파상공세를 뚫고 기어코 마왕군 진형에 도착했다.

- 마왕님을 데리고 가야 합니다.

여우 마족의 말에 마군단장들이 말없이 눈을 감고 있는 마왕의 시신을 바라보았다.

목숨 걸고 마왕을 데려왔으나 그는 이미 죽어 있었다.

- 아직 돌아가신 거 아닙니다.

- 숨소리가 안 느껴지는데?

여우 마족의 말에 황소 머리의 마군단장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그러자 다른 마군단장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극한까지 달련된 그들의 신체는 마왕의 심장이 멈춘 것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들을 이끌고 신에 도전했던 자가 겨우 인간 따위에 당한 것이다.

마신의 부활 대신 그 마신을 밟고 신의 반열에 오르겠다는 야망을 가졌던 마왕.

그런 마왕이 빛나 보여서, 그 빛나는 자의 옆에 서서 신화에 이름 한 줄 남겨 보겠다고 나선 자들이 마군단장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을 이끌 자가 사라져 버렸다.

허탈감에 멍한 표정을 짓는 마군단장들을 보면서 여우 마족이 말했다.

- 다시 한번 말하지만 마왕님께선 아직 돌아가시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말한 여우 마족이 마왕의 가슴 부근에 있는 문양을 가리켰다.

- 마왕님께선 아직 지옥에 가지 않으셨습니다.

생자의 몸으로 지옥에 가면서 얻은 흔적.

죽은 이후, 지옥에서 그 죄를 받으라며 만든 흔적이 아직 육체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렇기에 아직 영혼이 육체에 남아 있다는 뜻이었다.

- 그렇다면······

- 아직은 희망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말한 여우 마족이 마군단장들을 향해 말했다.

- 부족한 마기만 전부 회복한다면 깨어나실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러니 목숨 걸고 우리들의 ‘신’을 고향으로 데려갑시다.

그녀의 말에 모든 마군단장들이 가만히 마왕을 바라보다 고개를 숙였다.

그런 그들을 대표해서 황소 머리 마군단장이 입을 열었다.

- 지금부터 마계로 돌아갈 때까지 그대의 명령을 따르겠습니다. 어떤 명이라도 좋으니 반드시 마왕님을 마계로 데려가 주십시오.

그의 말에 여우 마족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역시 마왕한테 빚이 많았다.

다른 마군단장들처럼 부족한 혈통과 마기로 인해 도태될 위기에 처했다가 마왕이 거두면서 이 자리까지 섰다.

수많은 전쟁터에서 마왕의 도움으로 살아남아 진화를 거듭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이번에야말로 마왕에게 받았던 은혜를 갚을 절호의 기회였다.

- 우리의 작전은 하나입니다. 저들의 포위망을 뚫는 것.

그렇게 말한 여우 마족은 지도를 펼치고 거인의 산맥에서 게이트까지 일직선으로 선을 그었다.

- 다른 작전은 필요 없습니다. 적들이 완전히 준비를 갖추기 전에 이곳을 뚫으세요.

그녀의 명령과 함께 마족들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적들이 움직입니다!”

정찰조의 보고에 황제를 후방으로 이송하는 데 집중하던 로칸이 빠르게 에쉬타르에게 연락했다.

“이대로 마족들을 보낼 수는 없소.”

“동의하오.”

두 명장이 의견을 교감하는 순간, 인류의 군대 역시 움직였다.

마왕군과 중간중간 나타나는 과거의 잔재들 때문에 엄청난 피해를 입은 상황이지만 그래도 움직여야 했다.

“미래를 위해 이곳에서 마왕군을 섬멸해야 한다!”

로칸의 명령에 지친 병사들이 이를 악문 채 다시금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처 입고 피로가 쌓여 죽을 것 같았지만 그 이상으로 분노가 머리를 지배했다.

그렇게 살아남으려는 자와, 악에 받친 자의 서로를 죽이려는 싸움이 시작되었다.

산을 무너뜨리고 지형을 뒤바꿀 정도의 압도적인 힘에 비하면 병사들과 마족들의 싸움은 경이롭기는커녕 더럽고 잔혹했다.

진창에서 싸우는 듯한 느낌이었지만 인류는 그 어느 때보다 격렬하게 전투를 이어 나갔다.

“한 놈이라도 더 죽여라!”

“길목을 막아! 저들이 게이트로 가는 것을 차단해야 한다!”

대륙 최고의 명장이라 불리는 로칸과 에쉬타르가 하나의 마족이라도 더 죽이기 위해 애를 썼다.

이대로 마왕군을 그대로 보낸다면 언제 다시 쳐들어올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전면전을 할 때보다도 치열한 전투가 시작되는 동안 카리엘을 비롯한 인류의 영웅들은 조용히 이그니트로 이송되었다.

수십 기의 비공선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이송된 카리엘은 온갖 신성 마법이 부여된 관에 포션을 가득 채운 곳에 누워서 황궁 기사들과 함께 이송되었다.

황제 전용 비공선에서 황궁 기사들과 함께 내려진 카리엘.

그 모습을 곳곳에서 몰려든 사람들이 걱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쿵! 쿵! 쿵!

갑주를 걸친 황궁 기사들이 조심히 카리엘이 든 관을 들고 황제의 궁으로 이동했다.

그렇게 황제의 궁에 도착하자마자 모든 사제들과 치료사들이 황궁으로 몰려들었다.

“내상이 너무 심하시옵니다.”

“심박 수가 너무 미약합니다.”

“일단 생명 유지를 위해서······.”

신관과 치료사들이 합심해서 카리엘을 치료하기 위해 애를 썼다.

분명 마왕과의 싸움에서 이긴 건 카리엘이었다.

하지만 마지막이 문제였다.

마왕을 마무리하기 위해 바닥까지 힘을 긁어모아 사용했기에 온몸이 망가져 버린 것이다.

반면에 글렌과 시카리오 후작 역시 사경을 헤매고는 있지만 카리엘보다는 상황이 나았다.

“많이 심각한 것인가?”

“······예.”

루피엘의 물음에 치료사가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위기를 넘긴 것은 맞사오나······ 언제 깨어나실지는······.”

포션과 치유 마법을 사용한 덕분에 목숨에 지장은 없지만 의식의 회복은 다른 문제였다.

한계 이상으로 정신력을 소모했기에 카리엘이 언제까지 잠들어 있을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후······ 다른 이들은?”

“그분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마기 때문에 육체 회복이 더디기에······.”

인류를 지킬 세 명의 영웅이 전부 사경을 헤매고 있다.

이 사실을 제국민에게 발표해야 할 루피엘의 표정은 어두웠다.

“최선을 다해 주게.”

“······예, 전하.”

루피엘의 명령에 모든 신관들과 치료사들이 고개를 숙이고는 다시금 카리엘에게 집중했다.

그 모습을 다시한번 힐끔 보던 루피엘이 한숨을 쉬며 품속에 고이 품고 있던 사직서와 함께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로 향했다.

* * *

- 오랜만이야?

새하얀 공간.

그곳에서 어린아이가 카리엘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반갑게 인사했다.

그러나 카리엘은 말없이 그를 쳐다보기만 했다.

“······.”

당장이라도 죽빵을 맞을 각오를 하고 있던 어린 소년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 만나자마자 달려들 줄 알았더니 의외네?

소년의 말에 카리엘이 한참을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

“나를 회귀시킨 것. 언제부터 계획했던 거지?”

카리엘의 물음에 어린 소년은 대답하는 대신 입을 다물었다.

“지구의 신과 내기를 한 것, 그리고 나를 데려온 것. 모두 계획된건가?”

이번 물음에도 대답을 하는 대신 미소를 짓는 소년.

언제, 어디서부터 계획되었는지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그의 계획은 성공했다는 것이었다.

“개고생을 시켰으면 뭐라도 말해 주는 게 예의 아닌가?”

카리엘의 물음에 한참을 입을 다물고 있던 어린 소년은 장난기 섞인 미소를 지우고 진지한 표정으로 카리엘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작은 목소리로 설명을 시작했다.

신화시대의 멸망 이후 또 한 번의 멸망이 예정된 세계.

이곳을 지키기 위해서 신은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했다.

자신의 힘의 상당 부분을 희생해 멸망을 뒤로 미뤄 냈는데, 그때가 바로 이그니트의 초대 황제가 있던 시기였다.

그 후로도 알게 모르게 멸망을 미뤄 내기 위해 힘을 써 왔고 결국 강대했던 그의 힘은 초라하기 그지없게 변해 버렸다.

누구보다 밝게 빛나야 할 그가 작은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게 그 증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멸망은 막을 수 없었다.

그렇기에 멸망이 예정된 세계를 두고 내기를 했다.

다른 차원의 신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온갖 방법을 사용했다.

그 덕분에 수많은 도전자가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대륙 곳곳에서 일을 벌였다.

그 중에는 지구의 사람들도 있었다.

조건은 간단했다.

「일정 수준 이상의 조건을 클리어할 것.」

자신이 사랑하는 세계가 다른 신들의 장난감이 되는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멸망을 막고자 했다.

소설에 적힌 용사처럼 강대한 힘과 재능을 주는 것은 재미가 없었다.

최악의 조건 속에서 클리어하는 것.

하지만 그 누구도 최악의 조건 속에서 일정 수준 이상의 목표를 달성한 이는 없었다.

좀 더 쉬운 조건에서 멸망을 막을 수 있던 수많은 기회가 사라지고 결국 마지막으로 카리엘에게까지 이어진 것이다.

- 넌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기어코 제국을 지켜 냈지. 결국 지구 신의 힘을 빌려 너를 회귀시키는데 성공했고, 나 역시 아껴 놨던 내 마지막 힘을 모조리 사용할 상대를 찾아낼 수 있었지.

그렇게 말하면서 빙그레 웃는 소년.

아니, 소년이었던 신의 얼굴은 어느새 자글자글한 주름으로 가득해져 갔다.

- 나 원래 잘생겼었어.

주름이 자글자글한 손을 보며 장난스레 말하는 신에게 카리엘이 무거운 표정으로 물었다.

“······이름이 뭐지?”

자신을 환생시키며 온갖 고생을 시킨 신.

하지만 끝내 알 수 없었던 그 신의 이름을 묻자 노인으로 변한 신이 웃으며 말했다.

- 발드르.

그렇게 말한 노인이 말없이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그러자 어느새 바닥에는 대륙의 전경이 보이고 있었다.

그가 그렇게 지키고자 했던 대륙은 아직도 치열한 전쟁 중이었지만 인류는 여전히 살아남아 있었다.

“어째서 나지?”

카리엘이 궁금하다는 발드르를 보며 물었다.

“신이 되고자 희망했던 마왕도 있고, 부활하려던 헬도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나지?”

그런 그의 물음에 발드르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 지옥이 대륙을 집어삼키는 순간, 다른 차원이 이곳을 집어삼켜 버릴테니까.

뒤틀린 차원을 통해 다른 차원이 연결되는순간 이곳은 멸망할 것이다.

어쩌면 식민지 형태로 살아남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가 그토록 사랑하는 생명체들이 영원토록 노예처럼 살아갈 바에 스스로 세계를 멸망시키는 게 나으리라.

“마왕은? 그라면······.”

카리엘의 물음에 이번에도 발드르는 고개를 저었다.

힘에 미친 마왕이 신이 된 순간, 또 다른 전쟁을 찾기 위해 움직일 것이고, 그 즉시 다른 차원과 세계를 건 전쟁이 시작될 것이다.

어떤 결과가 되었든 발드르의 세계는 멸망 할 것이다.

- 뭐······ 지금은 다를지도 모르겠네.

그렇게 말한 발드르가 패배해 생각에 잠겨 있는 마왕의 영혼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단 한 번의 패배로 인해 마왕은 발드르가 보았던 미래와는 다른 존재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지옥 역시 혼돈 대신 안정화되면서 대륙과 좋은 방향으로 연결될지도 모를 일.

한 가지 확실한 건 이 모든 게 눈앞에 있는 카리엘 덕분이라는 점이다.

- 고맙다.

그렇게 말하는 발드르의 몸은 조금씩 빛으로 변해 갔다.

“너······.”

- 아까 말했잖아, 모든 힘을 쏟아부었다고.

그렇게 말한 발드르가 빙그레 웃었다.

- 멸망을 막는 대가치고는 싼 편이지.

“······네가 없으면 이 세계는 어떻게 되는 거지?”

- 글쎄. 한동안 괜찮을지도? 새로운 신이 태어나 이 자리를 물려 받을지도 모르지.

그렇게 말한 발드르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멸망을 막은 시점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끝났다.

미래의 일은 후손들이 알아서 할 일.

자신의 할 일은 끝났다는 듯 후련한 표정으로 말하는 발드르.

이제 그 역시 먼저 떠난 형제들이 있는 곳으로 마음 편히 갈 수 있다.

- 그동안 고생했다. 그리고 이곳을 지켜 주어서 고맙다.

마지막까지 장난스레 웃은 발드라가 빛으로 변해서 사라졌다.

동시에 그의 힘으로 유지 되던 공간 역시 조금씩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모든 공간이 무너져 내리는 순간 카리엘의 눈이 번쩍하고 떠졌다.

“여긴······.”

익숙한 공간.

그리고 그토록 오기 싫었던 고풍스러운 장신구로 가득한 방이 눈에 보였다.

“황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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