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180화 (180/201)

< 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 >

외전 1. 은퇴 싸움의 승자는? (2)

황태비들이 움직이면서 루피엘의 승리로 점쳐지던 정쟁.

분명 대전 회의가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자신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던 루피엘의 표정에 불안감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건 다른 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욜로 라이프를 즐기기 위한 젊은 관료들의 계획이 자칫 무너질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모두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대전을 나오면서 카리엘과 대신들의 계획이 무엇인지 추측하기 위해 삼삼오오 모여 회의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건 루피엘 역시 마찬가지였다.

“세리엘은?”

“곧 온대요!”

미리엘이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리면서 말하자 그런 그녀를 귀엽다는 듯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차 좀 부탁하지.”

“예, 전하.”

루피엘의 명령에 방을 빠져나간 시녀들.

항상 중요한 얘기를 할 때는 이렇게 차를 내오라고 시키곤 했기에 모든 시녀들이 방을 빠져나갔다.

그러자 심각한 표정을 짓는 루피엘.

“……형님한테 뭔가가 있어.”

“뭐가요?”

미리엘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물었다.

예전보다 훌쩍 컸다고는 하지만 아직 어린 미리엘.

황궁의 내사를 관리하고 있다지만 그녀에게 정치는 아직도 어려운 것 중 하나였다.

“아무래도 형님이 뭔가를 준비하고 있는 것 같아.”

그렇게 말한 루피엘이 한숨을 쉬었다.

대체 뭘 준비하고 있는지 알 길이 없으니 불안했다.

자신이 카리엘이 없는 동안 정치 짬밥 좀 먹었다지만, 여전히 형의 그늘은 짙었다.

그렇기에 한순간도 방심할 수 없다.

“들었다. 한 방 먹었다며?”

들어오자마자 빙그레 웃으면서 말하는 세리엘.

그런 그를 보면서 루피엘이 한숨을 쉬었다.

“형님이 뭘 준비한 거 같긴 한데 뭔지 알 수가 없다. 일단 대략적인 거라도 알아놔야 대비를 할 텐데…….”

“흠…….”

걱정하는 루피엘을 보면서 세리엘은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다.

황태자는 루피엘이지 자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최악의 상황으로 흘러가도 자신이 황제가 될 일은 극히 희박했다.

루피엘과 카리엘이 작당하고 자신을 밀지 않는 이상 황제가 될 가능성도 낮았기 때문이다.

“여유롭다?”

루피엘이 눈을 가늘게 뜨면서 세리엘을 바라보았다.

수상하다는 그의 표정을 보면서 세리엘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뭐 내가 급한 건 아니니까.”

“……설마 형님이 너한테 접근한 거냐?”

눈치 빠른 루피엘이 세리엘을 보면서 물었다.

형제답게 세리엘의 특징을 가장 잘 아는 루피엘이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특히나 표정 관리 못하기로 소문난 세리엘이 최소한의 표정 관리도 없이 저렇게 대놓고 여유로운 표정을 짓는다?

‘수상해!’

대놓고 수상한 티를 팍팍 내는 세리엘을 보면서 루피엘이 위기감을 느꼈다.

‘형님이 군부를 접수한 걸까?’

그렇게 생각하며 머리를 굴렸다.

아무리 정치에 큰 관심이 없는 세리엘이라지만 꽤 똑똑한 머리를 갖고 있는 놈이다.

그런 녀석을 꾀어내려면 대체 뭘 던져 주었을지 현재의 루피엘로선 알 수가 없었다.

“괜찮아요?”

식은땀을 줄줄 흘리는 루피엘을 보며 걱정스레 물어보는 미리엘.

그녀의 걱정에도 루피엘의 굳어진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대신들과 고위 관료를 등에 업은 카리엘이 세력을 확장할 곳은 딱 한 군데밖에 없었다.

이그니트의 자유 파벌의 핵심인 군부!

그렇기에 군부의 정점에 있는 세리엘에게 접근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루피엘은 지속적으로 친목을 다지기 위해 세리엘을 찾아갔다.

형인 카리엘의 은퇴를 힘을 합쳐 막아 내기 위해.

어릴 적부터 만나기만 하면 싸워 댄 세리엘을, 분노를 참아 가며 만나 억지로 함께 밥 먹고 토론해 온 이유는 오직 이것뿐이었다.

그런데.

“눈치 빠르네?”

여유로운 표정을 짓던 세리엘이 루피엘을 보며 입을 여는 순간, 루피엘은 카리엘이 세리엘을 꼬셨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너…… 이렇게 배신할 거야?”

“어쩔 수 없잖아, 거부할 수 없는 큼지막한 선물을 주시는데…….”

“미리엘마저 배신한다고?”

루피엘이 귀여운 미리엘 옆으로 가서 충격 먹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여유로운 표정을 짓는 세리엘이 움찔했다.

그 순간, 대화를 듣고 있던 미리엘이 충격 받은 표정으로 세리엘을 바라보았다.

“오라비…… 우리 배신한 거예요?”

“음…….”

미리엘이라는 강력한 무기를 휘두르며 바라보는 루피엘.

하지만 세리엘 역시 그동안 군부를 이끌면서 머리 좀 굴려 본 인물이었다.

정치가 싫어서 안 하는 것뿐, 못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미리엘, 잘 생각해 봐. 형님이 결혼하시면 더 이상 이렇게 일할 필요가 없어.”

세리엘의 말에 미리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황후가 탄생한 순간, 미리엘 대신 황후 마마가 황궁을 관리하시잖아.”

“아…….”

미리엘이 감탄사를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이다 떨리는 눈동자로 루피엘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미리엘은 의자와 함께 루피엘의 곁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너…… 너…….”

자신에서 멀어지는 미리엘의 모습에 충격으로 말을 잇지 못하는 루피엘.

그런 그를 보며 미리엘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오라버니, 힘내세요!”

지금의 그녀가 해 줄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었다.

황족들 중 가장 착하다고 알려진 천사표 미리엘이었으나, 아직 어린 그녀는 놀고 싶었다.

그동안 열심히 일했으니 이제는 좀 쉬고 싶은 마음도 컸다.

루피엘이 안타까웠으나 그런 마음 이상으로 쉬고 싶다는 본능을 이기지 못해 자연스레 멀어지는 미리엘을 보며 세리엘은 웃음을, 루피엘은 눈물을 흘렸다.

“아직 진 거 아니다.”

“그럼~.”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루피엘을 보며 고개를 끄덕인 세리엘은 조용히 미리엘을 데리고 방에서 나갔다.

방에 홀로 남아 좌절하는 루피엘.

하지만 그것도 잠시 뿐이었다.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세력을 불러 모았다.

세리엘이 그동안 함께했던 정이 있기에 양심상 던져 준 소중한 정보.

그것을 바탕으로 카리엘의 은퇴 계획을 저지해야 했기 때문이다.

* * *

그렇게 루피엘이 카리엘을 저지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을 무렵, 카리엘은 대신들과 모여서 여유롭게 티타임을 즐기고 있었다.

“폐하.”

“응?”

“세리엘 저하가 말하도록 내버려 두신 이유가 있습니까?”

타리온이 궁금하다는 듯, 묻자 다른 대신들 역시 카리엘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불쌍하잖아.”

카리엘의 말에 대신들이 미간을 찌푸렸다.

비록 자신들이 유리하다고는 하지만 아직 승리가 확정된 건 아니다.

그런데 이런 여유라니?

“차기 황제가 되어서 끝없이 고통받을 텐데 할 수 있는 건 전부 하게 해 줘야지. 뭐…… 마지막 배려 정도라고 해 두지.”

그런 카리엘의 말에 곰곰이 생각하던 대신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니 그 말도 일리가 있었다.

현재 카리엘이 이끄는 세력은 대신들만이 아닌 고위 관료들까지 포함된 세력이다.

이들 전부가 한적한 자리나 은퇴를 하게 된다면 남은 자리는 당연히 젊은 관료들이 채워야 할 터.

자신들이야 중년부터 고생했다지만, 이들은 먼 훗날 은퇴하기 전까지 계속해서 고통받을 것이다.

과거의 암흑기 시대처럼 어설프게 업무를 할 수도 없다.

이미 이그니트의 관료 체계는 빡세게 돌아가게끔 관료 문화가 만들어진 상태였고, 카리엘 역시 상황의 자리에 있으면서 한 번씩 관리할 것이기에 이들은 죽기 직전까지 고통받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먹은 정치 짬밥이 얼마인데…… 이 정도가지고 앓는 소리야? 그래도 마지막 은퇴 작품인데 적당한 스릴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겠어?”

“맞습니다.”

“하하! 아직 애송들이지요.”

“하긴…… 이 정도 선물은 던져 줘야 밸런스가 맞겠지요.”

대신들이 자신감을 보이면서 웃기 시작하자 카리엘 역시 진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동안이야 확실한 한 방을 먹일 방법을 못 찾아서 그렇지, 이렇게 한 방을 먹일 방법만 확실하다면야 애송이들에게 질 자신이 없는 카리엘이었다.

‘내가 그동안 먹은 정치 짬밥이 20년이야!’

전생과 현생을 합쳐 20년에 가까운 정치질.

그렇기에 고작 몇 년에 불과한 애송이들에게 당하기엔 자존심이 상했다.

스스로 패널티를 줘서 어느 정도 밸런스를 맞춘 카리엘과 대신들은 여유로운 움직임과는 다르게 일은 확실히 처리했다.

가장 먼저 내무대신이 카리엘과 혼약할 처자 후보들을 추리고, 외무대신이 외국에 알리면서 빠르게 진행했다.

본래라면 태황후가 했어야 했지만 그 빈자리를 두 대신들이 완벽히 처리한 것이다.

그리고 다른 대신들 역시 일 처리를 완벽하게 했다.

그동안 힘들다고 은근슬쩍 아래로 미루던 일들을 본인들이 빠르게 처리해 버리면서 산더미처럼 쌓인 일들을 빠르게 줄여 나갔다.

그 모습을 보면서 평소라면 좋아해야 했을 젊은 관료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대신들이 이렇게 살신성인의 자세로 열심히 일하는 이유가 뭐겠는가?

‘은퇴하기 전에 내 일은 마무리하고 가마!’

이런 마음가짐으로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후배들을 위해서 일한다?

물론 그런 것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은퇴 후에 다시 불려 나올 빌미조차 주지 않겠다는 그들의 의지로 인한 것이 컸다.

“……칼을 뽑아 드셨군.”

황후 간택식을 진행하면서 밀려 있던 일들을 순식간에 정리해 나가는 대신들과 카리엘을 보는 루피엘의 표정은 어두웠다.

여전히 카리엘이 숨긴 무기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 상황에서 간택식은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이러다간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고 처맞는 걸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들 정말로 짐작되는 게 하나도 없나?”

루피엘의 물음에 루터를 포함한 신진 세력은 고개를 떨구었다.

“후…… 결국 얌전히 칼이 날아오기를 기다려야 하나?”

좌절감에 한숨을 쉬는 루피엘.

그런 그를 보면서 침울한 표정을 짓는 신진 세력.

최근 보여 주는 대신들의 행보는 그동안 기고만장했던 이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다 주었다.

매일같이 카리엘에게 불려 가는 것을 두려워하며 한숨만 쉬는 대신들로 보이던 이들.

그저 능력 있는 자신들을 욕받이로 세워 둔 것이라 생각했던 중년의 대신들이 마치 그동안은 봐줬다는 듯,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신진 세력에게 좌절감을 안겨다 주었다.

이들이 뭔가를 해 보려 하면 귀신같이 알아채곤 방해하는 것은 물론이고, 신진 세력이 이렇게 나올 줄 알았다는 듯 간택식을 방해할 모든 루트를 틀어막아 버리고 있었다.

게다가 더 좌절감이 느껴지는 건 그들보다 훨씬 빠른 일 처리를 보여 주고 있다는 점이다.

「황후 간택식! 시작!」

「대륙 전역에서 모여드는 미모의 여인들!」

「어떤 간택식보다 호화로운 대륙 최고의 간택식이 시작되었다!」

마침내 본격적으로 시작된 간택식.

사람들은 미루고 미루던 카리엘이 결혼을 하려하자 그곳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리고 그런 루피엘을 비롯한 신진 세력 역시 마찬가지였다. 일단 조금이라도 시간을 끌기 위해 간택식에 모든 힘을 쏟아붓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모든 이들이 간택식에 집중할 때, 군부에선 조용히 모종의 일을 꾸미고 있었다.

「위험한 과거의 잔재들. 이들을 상대할 특수한 전력이 필요하다.」

「과거의 잔재들만을 위한 특수병과 창설을 준비해야 한다?」

「마스터급 이상이 다수 필요할지도?」

간택식에 묻힌 주제들.

하지만 후에 카리엘의 은퇴를 위한 근거가 되어 줄 증거들이 조용히 준비되기 시작했다.

“형님. 준비 끝났습니다.”

“그들은? 동의했나?”

“물론이죠. 그들 역시 은퇴가 간절한데 거절할리가 있겠습니까?”

카리엘의 물음에 빙그레 웃은 세리엘.

야밤을 틈타 조용히 만난 세리엘이 자신이 설득한 마스터들을 보여 주었다.

모두 나이가 지긋한 마스터들.

본래라면 죽기 직전까지 굴러야 할 그들을 ‘은퇴’라는 미끼로 설득한 세리엘이 카리엘에게 자랑스럽게 설득한 증거들을 건넸다.

지장이 찍힌 몇장의 서류들을 보면서 빙그레 웃은 카리엘이 나직히 말했다.

“그런 루피엘 황제 만들기 프로젝트를 시작해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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