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181화 (181/201)

< 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 >

외전 1. 은퇴 싸움의 승자는? (3)

빙그레 웃은 카리엘이 세리엘과 간단히 술을 마시고 있자, 뒤이어 오늘의 주인공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폐하를 뵙습니다.”

“같이 오시었군.”

야밤을 틈타 모습을 드러낸 중년의 남자들.

“폐하, 약속하신 것이 정말 사실입니까?”

가장 앞에 선 남자의 물음에 카리엘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에 위기가 찾아오지 않는 한 그대들을 다시 불러들일 생각은 없네.”

카리엘의 말에 앞에 선 남자들의 표정이 환해졌다.

무려 황제의 약속.

구두로 한 약속에 불과하지만 약속을 한 자가 카리엘이라면 서류 쪼가리보다 더 믿음이 갔다.

이제까지 카리엘이 약속한 것치고 이뤄지지 않은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 이제 노선을 확실히 정하겠는가?”

카리엘의 물음에 가장 앞에 선 남자가 고개를 숙였다.

“신과 시카리오 후작가는 폐하의 은퇴를 지지하겠습니다.”

“신 아켈리오 역시 폐하의 은퇴를 지지하겠습니다. 그동안 고생하셨으니 여생은 푹 쉬십시오.”

두 중년 남자의 말에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카리엘이 의외라는 표정으로 데이비어 공작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대는 괜찮겠는가?”

“무엇을 말이옵니까?”

“그대가 은퇴하면 귀족파의 파벌에 문제가 생길 터.”

카리엘의 말에 데이비어 공작이 쓴웃음을 지었다.

“이제는 유명무실한 귀족파가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이젠 소신도 쉴 때가 되었지요.”

신이라 추앙받는 카리엘로 인해 이제는 귀족파 자체가 의미가 없어졌다.

게다가 혁명 세력을 비롯한 수많은 인재들이 중앙 정치를 잡아먹기 시작하면서 귀족들의 특권 역시 이제는 옛 말이 되어버렸다.

몇몇 늙은 귀족들이 아직도 과거를 잊지 못하고 난동을 부리고는 하지만 그래 봤자 감옥에 들어갈 뿐이다.

“그대가 이리 은퇴하면 월크셔 공작이 힘들어지겠군.”

“그 친구는 이제 막 마도사에 올랐는데 고생 좀 해야지요.”

오래전에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데이비어 공작이기에 암흑기 시절부터 나름 고생을 해 왔다.

남부를 견제할 때마다 마스터로서 차출되었고, 카리엘과 함께 위험 지역을 갈 때마다 중앙에 남은 월크셔 공작 대신 고생을 많이 했다.

그렇기에 당당할 수 있었다.

‘저 고생할 만큼 했습니다. 은퇴시켜 주십시오!’

강렬한 눈빛으로 이렇게 주장하는 데이비어 공작을 보면서 카리엘이 빙그레 웃은 후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이렇게 세 명이 전부 빠져 버리면 군부에서 말이 나올 텐데?”

“아! 그 부분은 걱정 마세요, 형님.”

세리엘이 걱정 말라는 듯, 품속에서 보고서를 꺼냈다.

“대공이 마스터의 벽을 두드리고 있다고 합니다. 또한 남부의 알탄 후작과 델론드 후작이 거의 벽을 넘었다고 전해 왔습니다.”

“좋군.”

새로운 마스터들은 언제나 환영이었다.

자신들이 은퇴해도 그 빈자리를 채울 인재들까지 추천한 마스터들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물론 한 명은 그랜드 마스터였지만 당장에 큰 위협이 없으니 문제 될 건 없으리라.

“그럼 모두 날 지지하는 것으로 알겠네.”

그렇게 말한 카리엘이 은퇴 예정인 마스터들과 함께 즐거운 술자리를 가지면서 평화로운 미래를 약속했다.

그리고 얼마 후, 마치 짜기라도 한 것처럼 간택식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온갖 서류 절차들을 생략하면서 가뜩이나 빨랐던 간택식 진행이 더 빨라졌다.

그러다 보니 세계 곳곳에 있던 미인들도 다급히 이그니트로 몰려들었다.

“많이 몰려드는군.”

“그러게 말이야. 근데 무슨 의미가 있겠나?”

“확실히…… 황후마마는 가까운 분들 중 한 분을 뽑겠지?”

이그니트 제국민이라면 대부분 이번 간택식이 이미 어느 정도 내정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동안 카리엘이 보인 모습을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가장 가까이 지내던 사람, 혹은 많이 봐서 익숙한 여인들이 아니면 거들떠도 보지 않았던 카리엘.

바빠선 그런 것이 컸지만 그동안 카리엘이 보인 모습을 볼 때, 이번 간택식 때문에 다른 여인에게 눈이 돌아갈 확률은 극히 적어 보였다.

“아일라 상단주가 유력하지?”

“그렇긴 하지.”

옛 공국이자 현재는 제국 자치령으로 변모한 루미너스 자치령주의 하나뿐인 딸이자 이그니스 10대 상단 중 하나의 상단주.

능력도, 혈통도, 미모도 출중한 그녀.

그런 그녀를 가장 크게 위협하는 건 오랫동안 지기로 지내온 마스터 샤르도나 후작이었다.

카리엘보다 나이는 많지만 마스터라는 점에서 그 점은 크게 문제가 될 게 없다.

앞으로 몇십 년간은 외모가 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둘은 카리엘이 황태자였던 시절부터 황후 후보로 거론되었던 인물들이다.

하지만 황제가 되고 난 후, 새로운 후보들 역시 많이 나오기 시작했다.

“사실 아일라 상단주도 괜찮지만 난 마르니에 폴 상단주도 괜찮은 거 같아.”

“그렇긴 하지. 아일라 상단주가 귀염상이라면 마르니에 상단주는 좀 더 요염함이 있달까?”

광장에 모이면 아일라와 마르니에 상단주를 중심으로 서대륙의 수많은 미인들을 들먹이며 카리엘과 어울릴 만한 사람들을 주장하고는 했다.

하지만 이런 이들의 주장은 한 사람이 나오면 조개처럼 입술이 닫혔다.

“뭐 아무리 예뻐 봐야 샤르도나 후작만 하겠어?”

서대륙 최고의 미인이라 불리는 샤르도나 후작.

예전이었다면 그녀의 이름이 나올 때 모두가 입을 다물었겠지만 이제는 달라졌다.

“룬디아 성녀라면 비벼 볼 만하지.”

“그럼!”

교황과 태양검의 사후, 한차례 내홍을 겪은 교국은 새로이 성녀가 나타나면서 다시금 자리 잡았다.

아직 마스터급에 오르지 못했지만 차기 마스터급이 될 강력한 후보 중 하나였다.

동시에 그녀의 미모 역시 뛰어났기에 현재는 교국을 넘어 서대륙 전체에서 인기몰이 중이었다.

“어허~ 그래도 샤르도나 후작만할까!”

어느새 샤르도나 후작과 룬디아 성녀를 중심으로 서로 누가 예쁜지 싸우는 이들.

슬며시 아일라와 마르니에도 끼워 넣으면서 누가 서대륙 최고의 미인인가를 두고 다투었다.

누구 하나 물러서지 않는 이들.

하지만 이것과는 다르게 카리엘을 놓고 내기하는 자들도 존재했다.

“과연 폐하께서 황후 한 명만 들이실까?”

“그러게. 황비는 두지 않으실지 궁금하긴 하네.”

다들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이야 제국의 위기, 그리고 대륙의 위기까지 겪으면서 혼인을 할 정도로 여유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에 이해는 했다.

문제는 평화로운 지금이다.

전쟁이 끝난 후, 평화로운 상황 속에서도 혼인을 극구 밀어낸 카리엘.

은퇴 싸움 때문에 그렇다는 건 이해하고 있었지만, 너무 오랫동안 혼자 지내다 보니 몇몇 의심병자들이 카리엘의 신체적 문제를 의심했다.

“사실 폐하께서 그곳에 문제가 있는 거 아닐까?”

“뭐?”

“고…….”

“어허! 이 사람이?”

“솔직히 그렇잖아. 아니 황후마마야 정치적 문제 때문에 그렇다 치더라도 저렇게 젊은 분께 애인 하나 없다는 게 말이 되나?”

한창 혈기왕성할 카리엘이 애인 하나 없다는 점 때문에 사실 많은 제국민들이 겉으로 내색만 안 할 뿐 속으로는 의심을 하고 있었다.

신이라 추앙받는 카리엘이기에 대놓고 말은 못해도 다들 걱정하는 것이다.

위대한 혈통을 잇지 못할 수도 있다는 걱정.

근거도 여러 가지가 있었다.

전쟁이 끝난 후, 열린 연회에 거의 참석하지 않고 귀족들이 은근히 밀어 넣은 미모의 시녀들을 거들떠도 보지 않는다는 점.

무엇보다 루피엘이 황태자 자리에 앉은 것이 카리엘이 사실은 신체적 결함이 있어 자신 대신 황위를 잇게 만들려는 건 아닌가 하는 의심이 있었다.

이런 의심이 제국 전체로 퍼져 나가자 어떤 신문은 용맹하게 카리엘을 까는 기사도 게재했다.

「사실 폐하께선 신과 거래를 한 게 아닐까?」

밑도 끝도 없는 제목뿐인 기사였지만 제국민이라면 보자마자 이게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있었다.

대륙을 지키기 위해 소중한 무언가를 희생하고 힘을 얻은 게 아니냐는 기사.

이런 기사가 나올 정도로 카리엘은 일에 치여 살았다.

그러다 보니 황후 간택식을 진행한다고 했을 때, 사람들이 쉬이 믿지를 못하고 몇 번이나 확인하기도 했다.

“흠…… 폐하의 성정상 황후마마 한 명만 간택할 확률이 높긴 하지.”

“그렇지.”

이렇게 생각하는 제국민들.

하지만 다른 대륙의 사람들은 달랐다.

명실상부 세계 최강의 국가로 군림하는 황제이기에 황후는 어렵더라도 황비라도 한자리 차지하면 대박이라는 생각을 한 것이다.

황후 자리야 내정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황비 자리도 그럴까?

“황비 자리는 희망이 있다.”

“혼인 동맹을 위해서라도 다수의 황비를 들일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생각하며  동대륙,  서쪽의 신대륙, 남쪽의 거대 섬 아오니아에서 수많은 여인들이 몰려왔다.

대륙 최강이라 불리는 이그니트의 명성답게 추리고 추려도 몇백 명이었다.

문제는 카리엘이 황비를 과연 들이겠느냐는 것이다.

누가 황후가 될지와 비견될 정도로 뜨거운 관심을 갖는 주제.

여러모로 세계의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고 있는 간택식이었지만, 정작 황궁은 고요했다.

“루피엘은?”

“일단 간택식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흠…… 포기한 건가?”

카리엘이 김샜다는 표정으로 말하자 타리온이 쓴웃음을 지었다.

황태자 시절부터 정치력으로 재상까지 꺾고 세력을 만든 인물답게 루피엘을 가지고 놀듯 흔들고 있었다.

자신이 루피엘의 입장이었어도 버티지 못했을 것 같았다.

“그보다 폐하.”

“응?”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말해 봐.”

타리온의 물음에 카리엘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말했다.

“황비를 들이실 겁니까?”

“응? 황비?”

“예. 다들 폐하께서 이번에 황비들까지 간택하는 건가 궁금해하고 있습니다.”

그의 말에 카리엘이 미간을 찌푸렸다.

“혼인 동맹 때문인가?”

“그것도 있지만 워낙 출중한 미모의 여인들이 많으니…….”

타리온의 말에 카리엘이 생각에 잠겼다.

“황비라…….”

조용히 중얼거린 카리엘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 시점에서 굳이 황비가 필요할까 싶긴 한 것이다.

역대 황제들이 황비를 들이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1. 예뻐서.

2. 혼인 동맹으로 결속을 다지기 위해.

3. 세력을 맞추기 위해.

이 세 가지를 봤을 때, 2번과 3번은 해당 사항이 없었다.

카리엘은 굳이 동대륙에 관여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고 세력을 맞추는 것 역시 관심이 없었다.

이미 카리엘의 존재감만으로도 절대적인 권력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남은 건 예뻐서인데…….

“확실히 다들 예쁘기는 하지.”

황후감으로 거론된 여인들을 보면서 카리엘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남자라면 가슴이 콩닥거릴 정도로 아름다운 샤르도나와 성녀.

그에 비견되는 아일라와 마르니에 상단주.

네 명 다 능력도 좋고 예쁘고 성격도 좋았다.

문제는 카리엘은 전생과 현생 모두 겪어 보면서 황비를 두는 것이 얼마나 멍청한 짓인가를 봐 왔다는 것이다.

전 황제이자 자신의 아비가 세력을 맞춘다고 황비를 들이면서 얼마나 문제가 많았던가?

어느 날에는 어떤 황비를 찾아야 하고, 그럼 또 달래 준다고 또 다른 황비를 찾아가야 했다.

한 명만 총애하면 괜히 세력이 요동칠 수 있으니 적절히 균형을 잡아 줘야 하는데 그게 얼마나 피곤한 일인가?

지금의 카리엘이야 이런 부분에선 다소 자유롭다고는 하지만 여인들의 질투심까지 그러할까?

황후만 총애했다간 황비들의 질투를 받을 것이요, 황비들을 총애했다간 황후의 분노를 감당해야 할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한 카리엘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우, 끔찍하네.

몸을 부르르 떤 카리엘이 타리온에게 말했다.

“황비는 안 들일 거야.”

단호하게 말하는 카리엘을 보면서 타리온이 그럴 줄 알았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아쉽긴 하군요.”

“뭐가?”

“황비까지 들였으면 외가를 더 돌아다니면서 시간을 끌어 봄직했을 텐데요.”

타리온의 말에 카리엘의 머리가 맹렬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신혼여행과 외가를 방문하는 동안 열심히 일할 루피엘. 하지만 언젠가는 황궁으로 돌아가야 한다.

물론 다음 계획도 준비되어 있지만, 일단 황궁으로 돌아가서 간을 봐야 하는 것이다.

한데 만약 황비들을 들이면서 그녀들의 외가까지 돌게 된다면?

‘어쩌면 황궁에 돌아오지 않고 계획을 진행시킬 수도…….’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카리엘.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러기엔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이미 카리엘은 황궁에서 대신들과 관료들이 아내한테 잡혀 사는 걸 수없이 봐 왔다.

매일 야근을 밥 먹듯이 하는 관료들이 자신에게 찾아와 아내 핑계를 대며 하소연하는 것을 수도 없이 들었다.

“그래도 아니야.”

한 명도 감당하기 어려운데 황비들까지 감당하기엔 카리엘은 너무 지쳤다.

“그냥 황후만 간택하는 걸로 해.”

“……예, 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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