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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187화 (187/201)

< 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 >

외전 3. 이것은 신혼여행인가? 출장인가? (2)

왠지 누군가 일 더미를 던져 주는 느낌 속에서 세리엘과 본격적인 논의를 시작했다.

그리고 결국 카리엘은 아일라에게 허락을 맡고 자치령에서 홀로 벗어났다.

아닌 척하긴 했지만 서운함이 서려 있는 아일라의 눈빛에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세리엘에 의해 반강제적으로 끌려갔다.

“여깁니다.”

“뱀장어 같은 놈인가?”

“대왕 뱀장어가 과거의 잔재들이 흘린 잔여물을 먹은 것으로 추정합니다.”

세리엘의 말에 카리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잔여물이라면?”

“똥이죠.”

“아…….”

그제야 알아들은 카리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똥에도 힘이 남아 있을까?”

“과거의 잔재가 싼 똥은 뭔가 다르지 않을까요?”

세리엘도 거기까지는 확인해 보지 못했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으음…….”

카리엘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세리엘을 바라보았다.

매번 귀찮아하면서도 막상 자신에게 맡긴 일은 잘 처리했다.

지금도 과거의 잔재가 남긴 잔여물이 혹시나 남아 있는지 수색하라고 명령을 내리는 것 하며, 추가적인 의문점들을 적절하게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려 해결하게 하는 걸 보면 지도자로서 역량은 루피엘 못지않을 거 같다.

‘최근 루피엘이 힘들어하던데……. 나중에 너무 힘들어하면 세리엘을 시켜야 할지도.’

거기까지 생각한 카리엘은 본격적으로 세리엘에게 변이 몬스터들에 대한 정보를 달라고 했다.

자신이 결혼에 정신 팔려 있는 동안 세리엘은 꾸준하게 자신의 일을 처리해 왔다. 그렇기에 세계지도에 있는 주요 위험 요소들을 전부 파악했고, 그에 대한 대응 방안까지 어느 정도 갖춰 놓았다.

문제는 과거의 잔재들을 흡수한 존재들이었다.

기존의 몬스터들 중 강한 개체들이 과거의 잔재들을 흡수하면서 능력을 개화시킨 게 문제였다.

-키에에에엑!

마법사들에 의해 바다에서 공중으로 끌어 올려진 거대한 뱀장어.

전격 마법을 맞은 탓에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거대한 뱀을 보면서 카리엘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발전이 상당히 빠른데?”

싸우는 동안에도 성장하는 녀석들.

과거의 잔재들이 본래 자신의 힘을 찾기 위한 목적이 강하다면 지금 사냥하는 변이된 몬스터들은 달랐다.

몬스터 특유의 본능에 의존하는 성격이 각성했음에도 그대로 묻어났다.

무엇보다 더 큰 문제가 과거의 잔재들은 과거 자신의 격을 찾기 위해 숨어 있거나 천천히 힘을 회복하려 한다.

하지만 변이된 몬스터들은 달랐다.

한번 급격히 강해짐을 경험해서일까?

닥치는 대로 먹어 치우면서 빠르게 강해지길 원한다.

당연히 좋은 점이 있다면 나쁜 점도 있는 법.

“붕괴되기 시작하는 건가?”

닥치는 대로 과거의 잔재들이나 그들이 남긴 힘의 잔여물을 먹어 치웠기 때문인지 육체가 버티질 못하고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거대한 몸뚱어리를 지탱할 힘이 중구난방으로 흩어지니 육체가 붕괴되는 것이다.

육체도, 그 안에 든 힘도 모두 안정되지 못한 모습이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 자체는 강력했다.

“이게 고작 과거의 잔재들이 흘린 잔여물을 먹은 놈이라고?”

“네.”

세리엘의 대답에 카리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가 직접 확인해 본 결과 과거의 잔재들이 남긴 힘을 먹어 치워 스스로 각성한 녀석들은 카리엘이 상성상 우위를 점할 요소가 없었다.

과거의 잔재들은 대부분 지옥에서 건너온 자들이고, 지옥의 힘을 쌓아 생명력을 얻은 녀석들이라 조금이라도 카리엘이 더 유리하긴 했다.

하지만 이들은 달랐다.

과거의 잔재들이 가졌던 힘은 이들에게 각성을 시켜 줄 매개체일 뿐, 이들이 사용하는 힘은 본인들 스스로 개척해 나간 것이다.

“일반 몬스터라 봐야겠네.”

카리엘의 말에 세리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럼…… 과거의 잔재들이 가진 특징들은…….”

“의미가 없을 거다.”

대전쟁 시절 얻은 과거의 잔재들의 데이터가 무용지물이 되었다.

아직 대륙에 퍼져 있는 과거의 잔재들이 많이 있었고, 그들 역시 신이 되고자 하는 건 똑같았기에 그들 상대로는 효과를 보긴 할 것이다.

하지만 카리엘이나 세리엘 둘 다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세리엘 총사령관.”

“예, 폐하.”

“지금부터 제국의 모든 정보망을 이 녀석들에게 집중하라고 해.”

카리엘의 명령에 고개를 숙인 세리엘이 황급히 자리를 벗어났다.

촉이 안 좋았다.

전생부터 안 좋은 일이 일어날 조짐이 보이면 촉이 좋았던 카리엘은 이번 일이 결코 예삿일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대전쟁만큼 심각한 일은 아니지만, 그 이상으로 자신의 은퇴 계획에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카리엘의 촉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기어코 일이 터지고 말았기 때문이다.

「라플라 화산 인근 지역에서 대규모 유령 출몰!」

「아이사르만 인근 해역에서 거대 물고기 출몰!」

갑작스럽게 나타난 이상 현상.

카리엘이 신혼여행의 달콤함에 젖어 있는 게 아니꼽기라도 하듯 큼지막한 문제가 터져 버린 것이다.

“전조도 없이 이런 일이 발생할 수 있나?”

카리엘을 찾아온 타리온에게 묻자 그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사과는 됐고, 문제점이나 말해 봐.”

급하게 루미너스 자치령으로 온 타리온이 그동안 알아본 결과를 말해 주었다.

일단 사태가 이 지경이 된 건 이그니트의 안일한 대응이었다.

사실 안일하다 보기에도 어려운 것이 거인의 산맥에서 도망친 과거의 잔재들은 대부분 약한 존재들이다.

게다가 아스가르드에 합류하길 거부한 과거의 잔재들 역시 마찬가지다.

이그니트 입장에선 조금 더 강한 몬스터에 불과하다고 결론 내릴 수밖에 없었고, 당장에 온갖 문제들로 분열되게 생긴 제국을 안정시키는 게 더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일을 안했느냐?

그것도 아니다. 지속적으로 과거의 잔재들을 찾아 죽이는 작업을 해 왔기 때문이다.

“아스가르드가 무너지면서 퍼져 나간 힘의 파장. 그게 문제라는 거지?”

“예.”

셀 수도 없이 많은 과거의 잔재들이 죽고, 그로 인해 아스가르드가 무너지면서 그 여파는 대륙 전체로 퍼져 나갔다.

문제는 그 파장이 도망친 과거의 잔재들에게 어떠한 형식으로든 영향을 주었다는 점이다.

“거인의 산맥을 봉인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는 건가?”

“……결론적으로는 그렇게 보입니다.”

수많은 과거의 잔재들이 남긴 힘들이 대륙 전역에 퍼져 나가는 것.

사실 이것을 막을 방법도 없었다.

결국 언젠가는 일어났을 일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그 일을 가속화한 주범이 있었다.

“괴이한 힘을 뿜어내는 게이트. 그거에 대해서는?”

“현재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마계나 요정계 같은 차원이 아닌 완전 별개의 차원에서 넘어온 힘이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완전히 별개?”

“그렇습니다. 마계나 요정계 역시 이 세계에 묶여 있는 한 차원으로 본다면 지금 열리는 게이트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게이트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타리온이 그렇게 말하면서 고대의 서적에서 찾은 자료들을 보여 주었다.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이그니트에서 몇백 년에 한 번 정도 특이한 이상 현상이 나타났는데, 그때마다 전혀 다른 차원의 존재가 넘어오곤 했다는 것이다.

물론 대부분 특별한 힘을 가진 것을 제외하면 위협적인 존재는 아니라는 점도 서술되어 있었다.

“……폐하?”

갑자기 심각한 표정을 짓는 카리엘을 보면서 타리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그의 물음에도 카리엘의 표정은 펴지지 않았다.

‘설마…….’

갑자기 생각난 발드르와의 대화.

그리고 그가 사라진 후, 붕괴되었던 세계가 떠올랐다.

‘혹시 이곳 역시 신이 없으면 붕괴되는 걸까?’

이러한 가정에 카리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비록 오랜 시간 힘을 잃어 무늬만 신의 형태로 남아 있었지만, 그런 발드르라도 존재하고 있었기에 이곳이 안전할 수 있었음을 깨달았다.

‘신이 없으니 이곳은 주인 없는 땅이나 마찬가지가 되겠군.’

타 차원의 신이 보기에 이곳은 아주 먹음직스러운 먹잇감일 터.

“하…… 이 새끼.”

자신을 보면서 음흉한 미소를 짓던 발드르.

결국 녀석은 이리될 줄 알았던 거다.

한동안 괜찮을지도 모른다고 했던 녀석의 말은 정말 잠깐에 불과했다.

‘고작 몇 년이라니…….’

긴 한숨을 내쉰 카리엘이 인상을 찡그리자 옆에 서 있던 타리온이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많이 심각한 것이옵니까?”

카리엘이 무언가 비밀을 숨고 있다는 건 가까이 있는 이들은 전부 알고 있었다.

그것이 신 혹은 세계의 비밀에 관한 것일 가능성이 높기에 섣불리 묻지 못하고 있을 뿐.

“타리온.”

“예, 폐하.”

“지금 당장 황궁으로 돌아가서 비밀 수호대를 재소집해.”

카리엘의 명령에 타리온이 눈을 커다랗게 떴다.

사실상 모든 비밀이 드러났기에 해산되다시피 한 비밀 수호대.

그들이 다시금 부활한다는 것은 타리온의 생각 이상으로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뜻했다.

“……전 시종장도 부를까요?”

노쇠하여 은퇴를 한 전 시종장.

“그를 대신할 인재가 있나?”

“비밀 수호대의 임무가 끝나 버려 만들지 않을 것으로 압니다.”

“……하는 수 없지. 불러.”

한번 은퇴한 이를 다시 부른다는 것은 못할 짓임을 안다.

하지만 현재 돌아가는 상황이 그것까지 챙겨 줄 정도로 녹록치 않았다.

“세리엘!”

멀리 서 있던 세리엘을 부른 카리엘.

“부르셨습니까?”

“넌 지금 당장 신대륙으로 넘어갈 준비 해.”

“지금 당장 말입니까?”

“그래. 내가 황궁에 도착하는 대로 급한 일만 처리하고 바로 신대륙으로 넘어갈 거다.”

그렇게 명령을 내린 카리엘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오랜 시간 홀로 지켜 왔던 신의 자리에서 벗어나 자유의 몸이 된 발드르.

그가 소멸되었는지 아니면, 다른 어떤 거대한 흐름 속으로 사라진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녀석은 이리될 줄 알고 있었음에도 말 한마디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하…… 다시 만나면 꼭 쥐어 패야지.”

그렇게 중얼거린 카리엘이 이를 악물면서 루미너스 자치령으로 향했다.

“흠흠. 황후, 할 말이 있소.”

황후가 된 아일라를 향해 더듬거리면서 말을 시작한 카리엘이 사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주된 내용은 간단했다.

1. 아무래도 예정보다 일찍 황궁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다.

2. 아일라를 혼자 놔두고 신대륙으로 가 봐야 할 것 같다.

3. 앞으로의 일 때문에 달콤한 신혼 생활은 못 할 것 같다. 양해해 달라.

처음 황궁으로 일찍 돌아간다는 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여 준 아일라가 신대륙으로 가야 할 것 같다는 말부터 표정이 어두워지기 시작하더니 신혼생활이 쫑 났다는 말에는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지금 자신이 듣고 있는 말이 정말인지 의심부터 하는 아일라.

결혼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밖으로 나돌겠다는 카리엘의 말을 부인 입장에서 납득할 자가 얼마나 될까.

“여…… 여보, 미안해.”

근엄한 모습을 집어던지고 처음으로 살갑게 말해 보았지만 의미가 없었다.

카리엘은 울먹거리는 아일라를 밤새 달래느라 수척해진 얼굴로 예정보다 일찍 루미너스 자치령에서 벗어나 황궁으로 향하는 비공선에 올랐다.

“폐하.”

예정보다 일찍 도착한 카리엘이 아일라를 잘 다독이며 황후궁까지 직접 데려다준 후 곧바로 황제의 궁으로 향했다.

그러자 그곳에 모여 있는 대신들과 루피엘이 카리엘을 맞이했다.

“모두 얘기는 들었겠지?”

“예, 하온데 정말 신대륙으로 가시려는 겁니까?”

루피엘의 물음에 카리엘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신대륙에 가지 않아도…….”

“나한테 호의를 갖고 있는 신에 가까운 존재는 현재 그 녀석 하나잖아.”

루피엘의 말에 카리엘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자신도 가기 싫었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대륙에도 신대륙의 거대한 뱀처럼 오랜 시간 살아오며 영성을 지닌 존재들이 있다.

그런 이들이 과거의 잔재를 먹었으면 신대륙의 거대한 뱀과 같은 존재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카리엘에게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들이 적대적인지, 혹은 케찰코아틀만한 존재인지 알 수가 없었다.

“시간이 많지 않아. 그러니 확실한 존재와 대화를 나누어 봐야 해.”

그렇게 말한 카리엘은 루피엘과 대신들에게 신대륙의 왕국들과 접선해 외교적으로 문제없게끔 만들어 달라는 것과, 지금의 사실들을 순차적으로 대륙에 풀어 줄 것을 주문했다.

그리고 얼마 후, 제국의 공영 신문에 충격적인 사실이 게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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