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3화
시안은 지금까지 작은 저택에 갇혀 오로지 염노와 둘이서 지내왔다.
그동안 그의 검술 훈련은 단 두 가지 패턴으로만 진행되었다.
홀로 단련하기.
그리고 염노와 대련하기.
확실히 자신의 실력이 일취월장한 것은 맞다. 어제의 자신보다 오늘의 자신이 강했다. 그건 자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강해진 자신이 지금 어느 정도 위치에 서 있는 건지.
그건 알 수 없었다.
‘검술대회 같은 데 몇 번 나간 적은 있긴 한데.’
그래 봤자 서너 번이다. 그 서너 번으로 뭘 알 수 있겠는가.
그는 아직, 그 자신에 대한 객관화가 부족하다.
그게 시안이 이곳에 온 이유였다.
‘골렘인가.’
―기이이잉.
한쪽에 있는 수정구를 조작하자 목각 인형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녀석의 가슴께에 있는 핵에 빛나는 문양이 그려지더니, 수련장 바닥에 쌓여 있던 모래가 목각 인형의 몸에 차곡차곡 달라붙었다.
오래지 않아 완성된 샌드 골렘.
손에는 마찬가지로 모래로 된 몽둥이를 들고 있었다.
퉁- 퉁-
녀석이 위협이라도 하듯 몽둥이로 손바닥을 두드렸다.
‘…….’
시안이 자세를 낮췄다.
기분 좋은 긴장감이 몸을 감쌌다.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딱 적당한 긴장감.
그가 손에 든 검을 꽈악 틀어쥐었다.
샌드 골렘의 내구도를 확인하는 법은 간단했다.
녀석은 내구가 깎일수록 몸에 있는 모래가 인력을 잃고 흩어 떨어진다.
그리고 모든 체력을 잃게 되면 처음의 그 매끈한 목각 인형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
‘지금의 내가 얼마나 녀석을 소모시킬 수 있는지.’
그걸 보면 지금 자신의 수준이 어떤지 객관적인 평가가 가능하겠지.
준비를 하고 있는 그에게 녀석이 다가왔다.
쿵쿵거리며 달려오는 골렘을 응시했다. 눈에 마나가 모이며 감각이 한층 더 확장되었다.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보는’ 것.
목에 칼이 들어오는 순간에도, 적의 창이 내 심장을 향하는 와중에도, 화살이 눈앞까지 당도했다 하더라도.
겁먹지 않고 끝까지 직시할 수 있는가.
그것이 무인과 무인이 아닌 자를 가르는 가장 첫 번째.
‘…….’
골렘이 몽둥이를 내려친다.
그에 맞서서, 시안의 검이 수면 위를 튀어 오르듯 녀석에게 쏘아졌다.
* * *
“흐음…….”
오닉스관. 자카르타 출신의 수인들이 주로 입사하는 그 기숙사의 4층 개인실에서, 한 여성이 찌푸린 얼굴로 거울을 보고 있었다.
딱히 기분이 나쁘거나 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오늘은 기분이 좋은 축에 속했다.
그저 평소에도 인상을 쓰며 다니는 것일 뿐.
방에 비치된 전신거울을 보며 옷을 갈아입는 그녀.
신축성이 좋은 활동용 셔츠와 면바지를 입고, 군데군데 검은 모발이 보이는 금발은 하나로 묶어 정리했다.
평소에는 풀고 다니지만 몸을 움직일 때는 방해되지 않도록 하나로 묶는 그녀였다.
“가볼까.”
쫑긋거리는 동그란 귀와 살랑이는 꼬리.
호월족(虎月族)이라 불리는 호랑이 수인으로, 자카르타의 6가문 중 하나인 아슬라 가(家)의 사람이었다.
아슬라의 가주, 산군 겐 아슬라의 딸인 란 아슬라.
그녀가 아카데미에 있는 수련동으로 향했다.
―쿠웅!
그곳엔 꽤 많은 선객이 있었다.
다종다양한 수련장 곳곳에서 땀 흘리는 학생들.
그녀가 절로 미소를 지었다.
수인족에게 있어서 몸의 단련은 삶의 일부와 같다. 때문에 함께 수학할 학우들이 수련에 열정적인 것은 그녀도 반기는 일이었다.
“흐음…… 어디로 갈까.”
어떤 수련장을 체험해 볼지 잠시 고민하던 그녀가 이윽고 한곳으로 향했다.
분명 듣기로 샌드 골렘을 이용한 전투 훈련장이 있다고 그랬는데…….
가문에도 비슷한 것이 있어서 꽤 해본 적이 있었다. 수많은 수련용 마도구나 시설 중에서도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훈련장에 도착한 그녀는.
직후, 피가 차갑게 식어 내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후우.
땀에 젖은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전투 훈련장에서 나오는 사내가 있었다.
너무나 잘 아는, 보기만 해도 짜증이 치밀어 오르는 얼굴.
시안 아그리드.
“…….”
그녀의 표정에 냉기가 휘몰아쳤다.
“시안…….”
“응?”
으르렁거리듯 낮게 읊조리는 소리를 듣고 시안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누구?”
그 말을 듣곤 란이 이를 악물었다.
까드득. 호월족의 날카로운 송곳니가 시안을 향해 위협적으로 빛났다.
“……혹시 나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미안하군. 큰 사고를 겪은 후로 기억에 빈 곳이 좀 생겼어.”
시안이 먼저 사과를 건넸다.
그가 그림자였다지만 본래 도련님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많은 부분, 특히 대인 관계에 있어서는 거의 모른다고 봐도 되었다.
그가 도련님을 대신하여 활동할 때는 시험이나 대회 같은 때뿐이었으니.
“후우…….”
그 태도를 보고 란이 심호흡을 하며 표정을 풀었다.
그러나 그건 분노를 가라앉힌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더욱 안쪽으로 응축해 넣은 것이었다.
“이거, 하고 나오는 길이냐?”
날카롭게 찌르는 듯한 어조.
“응? 그렇지 뭐. 꽤 잘 만든 녀석인 거 같아.”
“하! 나한테도 처맞은 놈이 얼마나 깼을지 궁금한데?”
“맞았다고?”
시안이 의아한 눈빛으로 눈을 찌푸렸다.
란의 도발적인 대사가 통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그런 것에 넘어가는 성격도 아니었거니와,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이는 것이 우선이었으니까.
‘도련님이 맞았어?’
이상한데. 그런 말은 들은 적이 없다.
도련님의 성격상 맞고 나서 조용했을 리가 없었을 텐데.
“쯧. 다 썼으면 꺼져. 나도 지금부터 해볼 참이니까. 또 맞고 싶으면 같이 들어가든가.”
“……사양하지.”
염노한테 한번 물어볼까.
아니지, 그럴 필요까진 없나. 자신이 꼭 알아야 할 일이었다면 염노가 먼저 말해주었을 테니.
그렇지 않았다는 것은 크게 중요한 것은 아니란 뜻이리라.
“그럼 이만.”
그렇게 결론을 내린 시안이 수련장을 뒤로했다.
별거 아닌 것을 보는 듯한 그 가벼운 태도에, 란이 쯧 혀를 찼다.
개자식, 약해빠진 새끼가. 언제고 기회만 되면 또 바닥에 빌빌 기게 해주마.
그런 한편으로 사소한 의문 하나가 생겨왔다.
‘그런데 원래 저렇게 목석같은 남자였던가?’
좀 더 촐싹거리고 천박한 놈이었던 거 같은데.
뭐 사소한 의문이다. 아마 자신의 착각이겠지.
애초에 녀석이랑 많은 대화를 나눴다거나 깊은 관계를 맺었거나 한 적도 없었으니.
그런 생각을 하며 그녀가 훈련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곤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을 지었다.
“흥, 역시 하는 척만 하다 갔구만. 아예 작동도 안 했었잖아?”
그곳엔 모래 한 톨 남아 있지 않은 목각 인형이 땅바닥에 얌전히 엎어져 있었다.
* * *
첫 수업의 날이 밝았다.
아침 일찍 일어나 운동을 하고 온 시안이 샤워를 한 후 아카데미의 제복으로 갈아입었다.
식사는 어제 미리 조달해 놓았던 빵과 우유.
식당에서 아침을 주긴 하지만 혼자 먹는 것이 편하기도 해서 간단히 빵으로 때웠다.
“강의동이…….”
그가 사파이어관에서 나와 강의동으로 향했다.
그중에서도 신입생들이 수업을 받는 1학년 건물.
반은 무려 열 개나 있었는데 시안의 반은 그중 1반이었다.
―드르륵.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문 바깥에까지 왁자지껄한 소리가 울려 퍼지던 교실.
그러나 시안의 등장과 동시에 싸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쟤 걔 아냐?
―아그리드 가의 양아치.
―왜 하필 우리 반이야!
작게 소곤거리는 소리들.
딴에는 들리지 않게 하는 것일 테지만 시안의 귀를 피해갈 순 없었다.
그는 ‘보는’ 훈련 말고도 ‘듣는’ 훈련 역시 빼놓지 않고 받았기에.
“…….”
뭐 익숙한 일이다.
시안이 뚜벅뚜벅 걸어 적당한 자리에 앉았다.
그가 얌전히 자리에 앉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니, 조금씩 교실의 소란스러움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자! 조용조용.”
잠시 후, 교관이 들어왔다. 아이들이 각자 자리에 찾아가 앉았다.
아이들이 모두 앉을 때까지 기다린 후 교관이 입을 열었다.
“만나서 반갑다. 너희들을 맡은 담임인 테일이다. 근접 전투 교관이고 주 무기는 검이지만 검 말고도 모두 수준급이니 물어볼 게 있으면 얼마든지 오도록.”
자신보다도 훨씬 더 강한, 상위의 격(格)을 가진 사내의 등장에 몇몇 아이들이 벌써부터 긴장감을 끌어 올리고 있었다.
“뭐 에버웨일의 수업은 대부분이 이동수업이기에 날 만나는 건 그리 많지 않겠지만 일단은 책임자다. 무슨 일이라도 있거든 부담 없이 상담하러 오도록. 그건 그렇고.”
테일 교관이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이 시안을 빤히 바라보았다.
“시안 아그리드. 네 얘기는 이것저것 많이 들었다.”
“제 얘기…… 말입니까?”
시안이 테일 교관을 쳐다보며 대답했다.
“나는 소문만으로 판단하는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올 리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지. 잘 처신하는 것이 좋을 거야. 에버웨일은 너희 아버지의 힘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곳이니까.”
그건 경고였다. 사고 치지 말라는.
쓴소리였지만 딱히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어차피 본래의 도련님에게 하는 말이지 자신에게 하는 말도 아니었으니까.
“많은 지도편달 부탁드립니다.”
그래서 순순히 고개를 꾸벅거렸다.
“……?”
시안의 솔직한 반응에 테일 교관이 눈을 찌푸렸다.
예상외였다. 좀 더 반항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무슨 꿍꿍이라도 있나.’
그러나 경계 레벨은 오히려 더 올라갔다.
오랜 교관 생활을 한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대놓고 건들거리는 녀석들은 오히려 다루기가 쉽다. 진짜 어려운 것은 앞에선 웃으면서 뒤에서 호박씨를 까는 것들이다.
그래도 뭐 당장 고개를 숙이니 더 할 말은 없었다.
“좋다. 일정을 시작하지. 다들 이걸 하나씩 가져가거라.”
테일 교관이 고급스러워 보이는 케이스 하나를 꺼내 열었다.
그 안에는 회색빛을 띠는 반지 30개가 들어 있었다.
이게 뭐냐는 질문에 일단 가져가서 끼라고 말하는 테일 교관.
반의 모두가 반지를 끼자 그가 설명을 시작했다.
“그 반지는 에버웨일에서 너희들의 랭킹을 표시해 주는 물건이다. 1학년은 회색, 2학년은 흑색, 3학년은 백색이지.”
“랭킹이요? 성적 순위 말인가요?”
“아니. 성적과는 별개야.”
테일 교관이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앞으로 너희들은 수업으로든 사적인 일로든 많은 ‘결투’를 하게 될 거야. 반지의 랭킹은 바로 그 결투의 순위다. 간단해. 도전자가 이기면 상대와 랭킹이 맞바뀐다. 이상이야.”
그건 에버웨일의 모든 커리큘럼의 근본을 차지하는 이념과 연관이 있었다.
무한경쟁.
애써 각지에서 인재를 모아 놓고 그걸 온실에 둘 에버웨일이 아니었다.
학생들은 비바람에 맞서며 스스로 양분을 찾아 뿌리를 뻗어야 한다.
때로는 옆에 있는 다른 학생을 밟고 올라서더라도.
수많은 원석들을 모아 놓고 끊임없이 부딪치게 하는 것.
그리하여 마지막에 남은 원석이야말로 진정으로 가치 있는 보석이라는 것.
그게 에버웨일의 교육이념이며, 에버웨일을 단순한 친목의 장이 아닌 명문으로 만들어주는 원동력이었다.
“저…… 그건 너무 가혹한 것 아닌가요? 성적도 따로 있는데 그렇게까지 등수를 매기는 게…….”
심약해 보이는 한 학생이 손을 들며 질문했다.
그 학생의 질문에 교관은 나약하다고 꾸짖기보다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좋은 질문이다. 매번 나오는 말이기도 하지. 지나친 경쟁을 조장하는 것이 아니냐고. 하지만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 반지의 랭킹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그 숫자로 너희들이 차별받거나 반대로 우대받는 일은 결코 없을 거라 맹세하지. 고로 관심 없는 이들은 그냥 무시하고 지내면 그만이야.”
그 말에 손을 든 학생뿐만 아니라 모든 학생들의 얼굴에 의문부호가 떠올랐다.
그럼 왜 굳이?
등수를 매기는 것은 결국 그 등수로 무언가를 하기 위해서다.
목적이 없다면 등수를 매길 이유도 없지 않은가.
“잘 모르겠다는 얼굴들이 많군. 이해한다. 처음 들으면 다들 그래. 하지만.”
그런 학생들을 보면서 테일 교관의 눈이 가늘어졌다.
“단언컨대 너희들 중에도 나올 거다. 그 어떤 이익도 보상도 없는데도, 자신의 숫자를 못 견뎌 하는 녀석들이.”
그럼에도 아직 절반은 잘 모르겠단 표정이었다.
하지만 절반은 표정이 가라앉았다.
에버웨일의 생활이 결코 평탄하지 않으리란 걸 직감한 것이다.
그 절반 중에는 시안도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
<1>
그의 반지엔 1이란 숫자가 빛나고 있었기에 더더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