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6화
“일어나.”
통증이 올라오는 가슴을 움켜잡으며 란이 일어났다.
그녀의 눈이 짙은 의문으로 찌푸려졌다.
아그리드의 검술이 대단한 건 그녀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저 시안이 이 정도 일격을 가해온다고?
2년 전엔 반격 하나 못하고 나한테 처맞기만 했던 개새끼가?
‘……그럴 리 없어.’
그녀가 입술을 악물었다. 그 찌릿한 통증으로 멍해지려던 정신을 부여잡았다.
‘한 수뿐이다.’
그래. 이 2년간 녀석은 이 한 수만 연습해온 게 분명하다.
실력을 급속도로 늘릴 수는 없으니, 아예 단 한 번의 카운터를 갈고 닦은 게 분명했다.
그게 바로 방금 그 일격이었겠지.
그런 란의 추측을 뒷받침하듯 시안이 다시 아까와 똑같은 자세를 취하였다.
“후…… 이제 진심으로 간다.”
란이 주먹을 맞부딪혔다. 그러곤 아까 이상으로 시안의 동작 하나하나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과연 아슬라의 이름값을 하는지, 그 자세에선 조금의 틈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시안은 알고 있었다.
‘진짜 고수들은 저런 완벽히 틈이 없는 태세는 취하지 않는다.’
그들은 수많은 빈틈으로 스스로를 무장한다.
물론 그 모든 것이 그들의 함정이다.
빈틈을 보고 좋다고 달려드는 약자들을 집어삼키기 위한, 혹은 빈틈을 보여주는 것으로 상대의 움직임을 컨트롤하기 위한 함정.
빈틈이 없는 자세라는 것은 결국 상대에게 주도권을 내어주는 것과 진배없는 일이었다.
팡!
시안의 목검과 란의 주먹이 부딪혔다.
란이 먼저 달려들었던 방금과는 다르게 이번에는 시안이 공세를 이어갔다.
[ 백화검(白花劍) - 참(斬) ]
시안의 검이 세 방향에서 란을 덮쳐 들어갔다.
백화라는 아름다운 이름과 달리 그것을 보는 란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커다랗게 입을 벌린 맹수의 이빨이었다.
아그리드의 비고에서 익힌 수많은 검술 중에 하나.
비록 비전은커녕 상급의 검술조차 아니었지만, 어떤 검술이든 펼치는 이에 따라 위력은 천차만별이게 마련이니.
“후.”
란이 양손에 마력을 둘렀다.
수인의 마력은 인간의 것과 다르게 순간의 폭발력을 가지고 있다. 그중에서도 그녀의 마력은 더더욱 민감하고 폭발력이 강했다.
방출할 수 없는 일상생활 중에는 전신이 삐걱거릴 정도로.
그녀가 항상 찌푸린 얼굴인 이유였다.
콰앙!
그녀가 양손을 떨쳐냈다. 허공에서 터져 나간 마력이 시안의 검격을 모두 걷어냈다.
그 사이로 란이 땅을 박차고 달려들었다.
[ 귀력검(鬼力劍) - 암무(暗霧) ]
또다.
달려드는 그녀의 목을 노리고 시안의 검이 뱀처럼 조용히 다가왔다. 마치 아까 나가떨어졌을 때와 같이.
란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아니, 검이 온 게 아니라.’
검이 있는 곳에 자신이 달려드는 것이다.
자신을 노린 일격이 아닌 자신이 도착할 곳을 예상하고 검을 가져다 놓는 것.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마치 검이 순간이동이라도 한 것처럼 빠르게 보이리라.
그게 방금 그 카운터의 비밀이었다.
“또 당할 줄 알고!”
어리석다. 이런 류의 기술은 한 번 상대에게 보이면 더는 효과가 없다. 이쪽이 경로를 조금만 틀어도 실패하게 마련이니까.
‘여기!’
란이 살짝 상체를 틀며 목검을 향해 짧게 훅을 쳤다.
캉!
주먹과 목검이 마주쳤다고는 상상하기 힘든 소리가 나며 목검이 크게 옆으로 흔들렸다.
란이 환호했다.
‘성공이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반격뿐!
그녀가 미리 당기고 있던 손을 시안의 가슴을 향해 내질렀다.
그 손에 담긴 폭주하는 마력을 그녀가 착탄과 함께 일거에 풀어내었다.
아니, 풀어내려 했다.
“……!”
그녀의 눈이 커졌다.
분명 잡은 줄 알았던 시안이 갑자기 시야에서 사라진 것이다.
몸을 숙인 시안이 눈을 가늘게 뜨며 검 끝을 세웠다.
‘역시 비고에서 익힌 검술은 한계가 있어.’
비고에서 그가 익힌 수많은 아그리드의 검술들.
가문의 무인을 가르치기 위한 훌륭한 검술들이었으나, 그것은 비전도 아니고 상급의 검술도 아니다.
평범한 무인이나 기사들은 이조차 감지덕지하겠지만, 시안에게는.
‘성에 안 차.’
예전부터 몸에 맞지 않는 옷과 같이 갑갑함만 느끼고 있었다.
결국.
자신의 손에 맞는 검술은 스스로 만들어나갈 수밖에 없다는 뜻이겠지.
[ 상천검(霜天劍) - 섬(閃) ]
그의 발이 짓누르듯 땅을 밟으며, 검이 일 점으로 쏘아졌다.
“뭣……!”
그걸 보던 란의 눈이 켜졌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시안의 속도가 그녀보다도 빨랐다.
검이 움직이는, 점과 점 사이의 공간이 접히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호월족의 우월한 동체 시력조차도 시안의 검을 제대로 포착할 수 없었다.
그녀의 몸이 마치 사각을 찔린 것처럼 굳어졌고.
―빠악!
이윽고 정신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 * *
어릴 때는 무작정 염노가 가르쳐 주는 검술을 익히기만 할 뿐이었다.
아무런 의문도 없이 그저 주는 대로 소화하는 나날.
그런 그가 갑갑함을 느끼기 시작했던 것은 14살이 되던 해였다.
―이 동작은 필요 없는 거 아냐?
비고에서 가져온 중급 수준의 검술들. 어린 그의 눈에 그 검술들은 조악하게만 보일 뿐이었다.
왜 여기서 이렇게 움직이라는 거지? 이 부분은 빼는 게 훨씬 좋지 않을까?
그때부터 그는, 스스로가 익힌 검술들을 정련(精練)하기 시작했다.
불순물을 여과하여 흙탕물을 깨끗한 물로 만들 듯이, 의미가 없는 동작을 없애고 최대한 간결한 초식만이 남도록.
‘적의 눈을 양옆으로 현혹하며 빈틈을 만들어 내려치는 검술’ 따위 그의 눈에는 지저분하기 짝이 없었다.
그가 익혔던 것이 기껏해야 중급의 검술이기 때문일지도 몰라도…….
어찌 됐든, 그렇게 3년.
배웠던 모든 검술을 쪼개고 쪼갰다. 화려하기만 한 겉껍질을 모조리 벗겨내고 그 중심의 알맹이만을 남겼다.
신기하게도 그렇게 하자 많은 검술들이 겹쳐졌다. 처음부터 하나였다는 듯이.
결국 모든 검술의 뿌리는 같다는 것이겠지.
상천검(霜天劍).
찌르기와 내려치기, 그리고 베어 가르기, 셋으로 이루어진 그만의 검술.
익혔던 수십의 검술이 단 셋으로 줄어들었지만 시안은 전혀 불안해하지 않았다.
똑같은 초식이라도 상황과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얼마든지 변형되고 응용할 수 있는 법.
단순한 세로베기 하나만으로도 수만 가지의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진정한 고수라 불리는 이들이다.
‘아직 난 그 정도까진 아니지만.’
수만 가지라고 하기엔 아직 많이 미흡하다.
하지만 그렇게 될 것이다.
언젠간.
그런 생각을 하며, 시안이 사각사각 펜을 놀렸다.
“으응…… 여긴……?”
그러고 있자니 정신을 잃었던 란이 깨어났다.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낯선 천장에 그녀가 머리를 짚었다.
그리고 몸을 일으키다 침대 옆에 앉아 있는 시안을 보곤 경기를 일으켰다.
“시안!”
시안이 손가락을 입에 대었다.
“조용히 해. 의무실이다.”
“……뭐?”
그제야 그녀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청결하고 넓은 방에 설치된 간이침대와 커튼. 그리고 한쪽에 보이는 각종 약재와 붕대들.
의무실이 맞았다.
“내가 왜…….”
“왜긴. 결투 중에 기절해서 데려왔지.”
“읏.”
그녀가 입을 다물며 자신의 손을 확인했다. 그곳엔 여전히 292라 새겨진 반지가 빛나고 있었다.
졌다.
그것도 꼴사납게 기절까지 해버려서 시안이 자신을 업어 왔단다.
머리에 피가 확 오르며 눈앞이 컴컴해졌다.
이딴…… 이딴 쓰레기한테!
“이거 받아.”
머리를 쥐어뜯으며 박차고 일어나려는 란. 그런 그녀를 향해 시안이 어떤 물건을 건네었다.
“무슨…….”
그 물건을 보고 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시안이 건넨 것은 편지봉투였다.
“……무슨 수작이야 또.”
그녀가 거칠어지려는 숨소리를 가라앉히려 애쓰며 그리 물었다.
잔뜩 경계심을 품은 짐승 같은 모습.
시안은 그녀의 경계를 푸는 것은 포기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사과 편지다. 너 자고 있는 틈에 써놨어. 동생한테 전해.”
“뭐?”
란이 ‘이 새끼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지’라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이해한다. 자신이 그녀의 입장이었어도 똑같은 얼굴이었겠지.
“직접 만나서 사과하고 싶지만 그건 네가 바라지 않겠지.”
“당연하지! 만나서 또 뭔 짓을 하려고!”
“그래서 편지로 했어.”
란이 입을 뻐끔거리며 그의 얼굴과 내밀린 편지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러곤 탁, 하고 편지를 낚아채 봉투를 뜯었다.
한 번 봉한 것이 뜯어지는 셈이었지만 시안은 말리지 않았다.
“……이상한 건 쓰여 있지 않네.”
편지를 끝까지 본 그녀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혹시 따로 만나자는 얘기나 협박문 같은 것이 적혀 있지 않을까 경계했지만 그런 것은 없었다.
오히려 변명도 자기변호도 하지 않는 깔끔하고 정성이 느껴지는 사과문이었다.
하지만.
“싫어. 내가 왜 네 편지를 샨한테 전해줘야 하는데.”
그녀가 편지지를 테이블에 툭, 던졌다.
“그럼 그냥 태워버려도 돼. 너한테 건네준 거니 네가 알아서 해.”
“뭐?”
“그리고 이쪽은 아슬라의 가주님께 보내는 편지야.”
“아빠한테도 썼다고?”
“그게 예의라고 생각해서.”
덤덤히 할 일만 한다는 듯한 시안의 태도에 란이 얼떨떨하게 편지를 건네받았다.
이쪽은 방금처럼 확인해 보지는 않았다.
동생이 아닌 아빠에게 보내는 편지까지 점검할 필요는 없었으니까.
“그쪽은 꼭 전달해 줬으면 좋겠군. 이건 가문과 가문 사이의 일이기도 하니까.”
“…….”
란이 얼굴을 찡그리며 고심하기 시작했다.
그걸 보며 시안이 생각했다.
동생 쪽은 모르겠지만 가주 쪽은 제대로 전달되겠군.
고민한다는 것 자체가 결국 마음이 동한다는 얘기다.
‘미끼를 걸기 잘했군.’
사실, 샨에게 보내는 편지는 미끼의 의미도 있었다.
흔한 협상의 기술이다.
무리한 요구를 늘어놓은 다음에 진짜 요구를 얘기하여 거절하기 어려운 심리를 만드는 것.
물론 사과의 뜻이 거짓이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가 진정으로 원하는 바는 가주에게 보내는 편지 쪽.
지금쯤 란은 ‘샨 앞에선 이 자식의 화제도 꺼내기 싫지만 아빠라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테지.
‘그런 일이 있었으니 아그리드와 아슬라는 앙숙에 가깝겠지.’
큰일로 번지지는 않은 것을 보아 내밀히 협상을 잘한 것 같긴 하지만, 그렇다 해도 과거의 일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둘의 사이는 최악이라고 봐도 좋으리라.
그렇다면 그걸 이용하지 않을 수 없다.
아슬라의 가주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일 수만 있다면 아그리드에서 벗어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테니까.
‘물론 성공률은 낮긴 하지만.’
문제는 자신이 지금 망나니 도련님의 탈을 쓰고 있다는 것에 있었다.
아슬라의 가주를 아그리드의 아군으로 만드는 것조차 어려운 일일진대, 그걸 넘어 ‘아그리드의 아군은 아니지만 시안의 아군’으로 만든다고?
어디서부터 풀어야 하는지 실마리 하나 보이지 않는 문제였다.
하지만 그만큼.
‘가주는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겠지.’
성공한다면 이보다 좋은 패는 없다.
시도해 볼 가치는 충분했다. 실패해도 본전일 뿐이고.
“편지는 둘 다 내가 맡아두지.”
고민을 끝냈는지 란이 편지를 품속에 넣었다.
그러곤 조금 우물거리다 얘기했다.
“둘 다 바로 전달할 생각은 없어. 내가 전해도 좋을 것 같다고 판단하면 전할 거야.”
“그래.”
이 정도면 당장은 성공이다.
시안이 바지를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난 가보지. 너는 좀 더 쉬도록. 내가 아니라 치유사가 얘기하고 간 거니까 이상한 생각 말고.”
“쳇.”
란이 홱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오늘 하루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기에 머리가 너무 복잡했다.
허접한 벌레 새끼라고 생각했던 시안에게 결투로 지고, 거기에 무슨 사과 편지까지 받았다.
그것도 동생뿐만 아니라 아빠에게까지 전해달라고 한다.
시안의 뒷사정도 속내도 알지 못하는 그녀였기에 혼란스러운 건 당연한 일이었다.
“너희 동생.”
그런 란을 두고 의무실을 나가기 전, 시안이 문득 질문했다.
“혹시 후유증이나 정신적인 문제라도 남았다면…….”
그답지 않게 말끝을 흐리는 시안을, 란이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다 코웃음 치며 얘기했다.
“너 따위가 트라우마가 될 정도로 걘 약한 놈이 아냐. 누구 동생인데.”
그 말에 시안이 웃었다.
“그거 다행이군.”
그 표정을 보곤 란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러나 웃음은 일순간.
곧 평소의 덤덤한 표정으로 돌아온 시안이 의무실을 뒤로했다.
“후우…… 대체 뭐가 뭔지.”
저게 정말로 그 시안이라고?
혼란이 가득한 얼굴로 란이 머리끝까지 이불을 끌어 올렸다.
어느덧, 미간의 주름이 조금 풀려 있는 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