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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11화 (11/188)

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11화

시안이 던전을 나왔다. 그의 어깨에는 라비린스도 올라타 있었다.

일전에 시험해 봤을 때와는 달리 라비도 던전에서 함께 나올 수 있었다.

아마 자신에게 귀속되었기 때문이리라.

“우웅……!”

처음 보는 바깥세상이 신기한지 라비가 이곳저곳을 둘러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잠시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고는 시안이 다시금 손목을 확인했다.

그의 오른쪽 손목 안쪽.

동맥이 있는 그 위치에 검은색의 동그란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정령 각인.’

정령과 계약한 계약자의 증표.

의외였다. 이걸 얻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자신은 마법사가 아닌 오로지 검만 익힌 천생 무인인 데다가.

‘애초에 반요정이 아닌 정령사는 드물기도 하니까.’

마나의 형질 때문이다.

마나를 몸속에 흐르게 하여 심장이나 아랫배에 모아두는 인간과 다르게 반요정은 마나를 모은다는 개념이 없다.

그들은 주변의 마나를 끌어다 쓰고 환원한다. 숨 쉬듯이 자연스럽게.

그 어느 것에도, 심지어 술사 본인에게도 구속받지 않는 자유로운 마나.

대부분의 정령사가 반요정에서 나오는 것이 이 형질 때문이다.

그들은 인간이나 수인보다 훨씬 자연에 가까운 존재였으니.

물론 그렇다고 인간 정령사나 수인 정령사가 아예 없다는 건 아니지만…….

“라비, 돌아와.”

“웅!”

시안이 얘기하자 근처를 돌아보느라 여념이 없던 라비가 쪼르르 달려왔다.

그러곤 검은 연기로 화(化)하더니 손목의 문양으로 쏙 스며들었다.

‘웅웅!’

손에 깃들어 있으면서도 라비의 기분은 최고조였다.

시안의 눈을 통해 손안에서도 바깥을 보는 것은 가능했고, 애초에 이렇게 누군가에게 깃들어본 일조차 처음이었다.

드넓은 하늘 아래를 자유로이 돌아다니는 일도, 계약자를 만나 함께하는 일도.

다른 정령은 평범하게 하는 일들이었지만 라비에겐 그 모든 게 새로웠다.

‘일단 씻어야겠군.’

절벽을 오른 것은 꿈속에서의 일일 뿐이지만 신기하게도 깨어난 그의 몸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정말로 그 몸으로 수련을 한 것마냥.

밤공기의 서늘함을 느끼며 시안이 수련동 바깥으로 나왔다.

그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사파이어관으로 향했다.

방으로 돌아와 깔끔히 샤워를 하고 셔츠를 입었다.

그리고 잠에 들기 전, 침대에 앉아 명상을 시작했다. 아무리 수련을 하고 온 직후라고 하여도 매일의 마나 연공은 빼놓을 수 없는 일과였다.

그런데.

“……음?”

평소와는 전혀 다른 감각이 느껴졌다.

그 맹렬한 위화감에 시안이 살짝 당황하며 눈을 떴다.

그의 눈에 보인 것은, 밤하늘을 비추는 창을 통해서 검은 기운이 들어와 그에게 깃드는 광경이었다.

“혹시…….”

무언가 감이 온 시안이 외투를 걸치고 방을 나왔다.

그리고 기숙사 뒤쪽의 뒷산으로 향했다.

조금만 산을 오르니 컴컴한 숲이 펼쳐졌다.

오로지 달빛 하나만을 의지하는.

그 한적한 곳에서 그가 다시 명상을 시작했다.

그리고 아까와 같이 호흡을 조절하며 마나를 보충했다.

‘…….’

평소와 같이 청량한 마나가 몸에 들어오는 감각.

그것이 차곡차곡 쌓이며 몸 전체를 씻어내는 느낌.

그런데 그 기운의 질이 이전과는 전혀 달랐다.

무색 무미 무취. 이전의 마나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그냥 그곳에 있다는 것만이 느껴지는 것이었다면.

지금의 기운은 새벽녘의 이슬이 내린 밤공기처럼 촉촉하고 상쾌했다.

던전에서 자신을 회복시켜 주었던 바로 그 기운.

“후우…….”

그러고 보니 얼핏 들어본 적이 있었다.

정령사들은 일반적인 무인이나 마법사처럼 대기의 마나를 곧이곧대로 흡수하는 것이 아니라고.

그들은 대기의 마나를 계약한 정령을 통해 빨아들인다고 한다.

그리하여 정령사의 마나는 그 자체로 독특한 특색을 띠게 된다.

불의 정령사는 불의 마나를, 물의 정령사는 물의 마나를.

그것이 정령사와 마법사의 가장 큰 차이기도 했다.

마나 자체가 색깔을 띠는 정령사와 달리 마법사는, 불의 마법사든 물의 마법사든 관계없이 마나 자체는 평범했으니까.

‘지금부터 흡수하는 마나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쌓아왔던 마나까지 변하는 건가.’

색이 입혀지고 있는 건 지금 호흡으로 쌓고 있는 마나뿐만이 아니었다.

시안이 12년간 쌓아왔던 방대한 마나.

염노의 가르침과 타고난 재능으로 이미 어지간한 현역 기사나 마법사보다도 훨씬 많은 양을 쌓아왔던 그 마나도 라비의 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정령 각인을 통해서.

“웅? 우, 우웅!”

불현듯 마나가 흘러들어오는 것을 느끼며 라비가 당황스러운 소리를 내었다.

아마 라비도 이런 경험은 처음이겠지. 범람하는 파도처럼 방대한 기운이 흘러들어 오는 감각 말이다.

라비가 떠들든 말든 시안의 집중은 풀리지 않았다.

오른손의 각인으로 기존의 마나를 밀어내고, 색이 입혀진 마나를 다시 그 몸으로 받아들인다.

12년의 세월이 덧씌워지는 것이다. 연공은 새벽 늦게까지 계속되었다.

“우우…….”

어느덧 입을 다물고 조용해진 라비.

라비도 완전히 연공에 빠져들었다. 시안과 라비와 대기의 마나. 세 존재가 긴밀하게 연결되며 ‘밤의 기운’을 쌓아나갔다.

연공은 해가 뜰 때까지 멈추지 않고 계속되었다.

* * *

에버웨일의 강의는 필수과목과 선택과목으로 구분된다.

필수과목은 말 그대로 필수로 들어야 하는 과목으로 보통 반별로 편성이 된다.

반별 선택과목은 자율적으로 신청하는 과목으로 반이랑은 상관없이 개개별로 신청해 듣는 과목이었다.

‘다행히 아직 변경 기간이 지나진 않았군.’

다음 날.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되고 시안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시간표에 선택과목 하나를 추가하는 일이었다.

정령술의 수업.

라비를 얻은 것으로 들어야 할 필요성이 생겼으니.

드르륵.

그렇게 찾아간 강의실에는 20명가량이 앉아 있었다.

시안이 새삼스러운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인간도 수인도 하나도 없다. 그들 전원이 요정궁의 반요정이었다.

“뭐야, 뭐야?”

“인간이야?”

“인간이 여긴 왜 왔대?”

“혹시 정령사라든가!”

“그럴 리가. 인간 정령사는 엄청 드물다고 하지 않았어?”

“쟤가 그 드문 녀석일 수도 있잖아.”

“그런가~?”

시안을 보고 반요정의 학생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힐끔거리는 그들의 시선을 뒤로하곤 시안이 구석 자리에 가 앉았다.

얌전히 앉아 교관이 오기를 기다리던 중.

드르륵, 거리는 소리와 함께 시안은 자신을 향하던 시선이 분산되는 것을 느꼈다.

“어? 인간 한 명 더 왔는데?”

“진짜?”

“진짜, 진짜.”

“뭐야, 인간 정령사가 딱히 드문 것도 아닌가 보네.”

“이상하다…… 진짜 보기 힘들다고 그랬었는데.”

입구를 쳐다보니 남학생 하나가 들어오고 있었다.

바다와 같은 푸른 머리칼에 눈동자.

순간 반요정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의 미남이었으나, 자세히 보면 인간이 맞았다.

녀석이 갑자기 시선이 모이는 것에 잠시 당황하는가 싶더니, 이윽고 시안을 발견했다.

반요정들 사이에서 혼자 앉아 있는 인간.

그가 시안의 곁으로 다가와 앉았다.

“소메르 사람은 우리 둘뿐인가 봐. 뭔가 긴장된다. 그치?”

“……글쎄.”

정령술 강의란 걸 생각하면 둘도 많은 것이다.

“난 알렌. 알렌 크루거라고 해.”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자기소개를 하는 그를 보며 시안이 입을 열었다.

“크루거 백작가의 사람이었군. 난…….”

“아, 말 안 해도 돼. 너에 대한 건 잘 알고 있으니까.”

그리 얘기하는 알렌을 보며 시안이 눈을 찌푸렸다.

크루거 백작가라고 하면 견실한 곳이기는 하나 중앙과는 큰 연고가 없는 지방의 가문.

그런데 그곳까지 자신에 대한 것을 알고 있는 것을 보니, 역시 망나니 도련님에 대한 소문은 소메르 전역에 퍼져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알렌의 입에서 나온 건 의외의 말이었다.

“시안 아그리드. 3년 전 발탄 백작령의 검술대회에서 우승한 아이 맞지?”

시안을 보는 그의 눈에는 다른 아이들 같은 경멸이나 혐오가 아닌, 순수한 호의가 깃들어 있었다.

시안이 눈을 깜빡거렸다.

설마 이런 시선이 돌아오리라곤 생각도 못 하고 있었는데.

“그런 예전의 일을 잘도 기억하고 있네. 규모가 큰 대회도 아니었는데.”

“응. 아버님의 명령으로 여기저기 여행을 하고 있던 때거든. 아, 지금 말하는 아버님은 친부가 아니라 크루거 백작님을 말해. 난 백작가에 입양된 몸이거든.”

“그래?”

크루거 백작에게 수양아들이 있다는 말은 얼핏 들어본 적이 있다.

그 아들이 이 녀석인가 보군.

시안이 홀로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널 보고, 같은 나이인데도 진짜 멋있다고 생각해서. 그래서 나도 검을 배우기 시작했거든.”

“…….”

시안이 슬쩍 녀석의 허리춤을 보았다.

정령술 수업을 받으러 온 놈이 왜 검을 차고 있나 싶더니만 그런 이유가 있었나 보다.

뭐 3년이면 기초나 겨우 떼었을 수준이다.

아마 아직은 검술보단 정령술 쪽이 메인이겠지. 그래서 이 수업을 들으러 온 걸 테고.

“그래서 말야, 아버지한테 졸라서…….”

친근한 인상에 어울리게 말도 잘하는 놈이었다.

녀석의 말에 적당히 대꾸해 주며 기다리던 중.

드디어 기다리던 정령술의 교관이 들어왔다.

“어머, 인간이 둘이나 있네요? 둘 다 정령사신가요?”

“예.”

“맞아요.”

시안과 알렌이 나란히 대답했다.

“어머어머 굉장해라. 한 기수에 인간 정령사가 둘이나 되다니 대단하네요. 올해는 무슨 날이려나~?”

“교관님! 역시 인간 정령사는 드문 게 맞죠?”

“그럼요. 어디 보자, 최근 10년 간 입학생 중에서는…… 한 5명 정도 있었네요. 이 둘을 포함해서요.”

“그럼 쟤네를 빼면 3명이었단 말씀이네요?”

“그렇죠.”

시안과 알렌을 두고 감탄의 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른 학생들은 이미 교관과 친숙한 모습이었다.

아마 같은 종족이고 같은 출신이기 때문이리라. 교관도 당연히 반요정이었으니까.

“그럼 각자 자기소개부터 하죠. 제 이름은 융이에요. 여기 오기 전에는 궁의 기사였답니다. 왕족분들을 호위하는 수호성에 있었죠.”

수호성이라는 말에 학생들의 눈빛이 초롱초롱 빛나기 시작했다.

시안과 알렌은 잘 모르고 있었지만 요정궁에서 수호성 소속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다는 뜻이다.

거의 모든 반요정들이 존경을 보내며 선망해 마지않는 자리.

“그럼 다음은…… 앞자리에 있는 분들부터 할까요? 뒤의 두 분은 마지막 순번이 좋을 것 같네요.”

잠시 자기소개가 이어지고.

이윽고 시안과 알렌의 소개를 마지막으로 모든 자기소개가 끝이 났다.

반요정들 중에서도 시안의 소문을 아는 이는 있었는지 새된 눈빛이 몇몇 있긴 했지만, 그래도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짝.

자기소개가 끝난 후 교관이 손뼉을 치며 살짝 시끄러워진 좌중을 정리했다.

“자, 그럼 수업을 시작할 건데요. 그전에…….”

이내 그녀가 꺼내 든 것은 어린아이의 머리통만 한 크기의 큼직한 수정구슬이었다.

투명하고 하얀 구슬 내부에 오색찬란한 빛깔이 헤엄치듯 유영하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보통 구슬은 아니었다.

“다들 잘 알겠지만 정령사의 마나는 다른 무인이나 마법사와는 살짝 다르죠. 이건 정령사의 마나를 측정하는 구슬이에요.”

그녀가 구슬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눈을 감는 듯싶더니, 이내 그녀의 쇄골 근처에 보이는 각인에서 빛이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파앗―!

구슬에선 더욱 휘황찬란한 빛이 번졌다.

싱그러운 느낌의 연녹색의 빛. 그 빛은 강의실 전부를 덮고도 남아 한가득 채울 기세로 퍼져나갔다.

“빛의 색은 속성을, 세기는 마나의 크기를 측정해 준답니다.”

오오―

학생들 사이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융 교관이 보여준 빛은 그야말로 수호성의 기사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빛이었으니.

“한 명씩 나와서 해볼게요. 여러분의 수준을 알아야 앞으로의 수업 강도를 결정할 테니까.”

그녀가 덧붙였다. 순서는 자기소개를 했던 순번대로.

시안의 차례는 가장 마지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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