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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20화 (20/188)

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20화

“가서 골라봐라. 등급만 맞으면 뭐든 상관없으니까.”

지급권의 확인이 끝나 경비원이 한쪽으로 비켜주었다.

시안과 에르제가 비고 안으로 나란히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것은 크고 작은 유리 케이스가 질서정연하게 늘어져 있는 모습.

흔히 상상할 만한 금화가 잔뜩 쌓여 있는 보물고의 이미지는 아니었다. 갑부들이 수집품을 모아 놓은 창고 같은 모습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리라.

그리고 각각의 케이스 앞에 보관 중인 장비의 설명이 적혀 있었다.

“시안, 시안. 저기 좀 봐봐.”

“?”

에르제가 시안의 어깨를 콕콕 찌르곤 어딘가를 가리켰다.

시안이 그녀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엔 이곳의 입구와 같은, 아니, 그보다 훨씬 엄중해 보이는 문이 자리해 있었다.

“저기가 C급 이상이 보관되어 있는 곳인가 봐.”

“그런가 보군.”

입구와 달리 이 문은 열리지 않았다. 아직 그들에게 허락된 구역이 아니기에.

허가가 없고서는 설령 헬 파이어가 떨어진다 하더라도 결코 열리지 않으리라.

그럼에도.

‘…….’

그 문에서 새어 나오는 밀도 높은 마력만은 숨길 수 없었다.

섬뜩할 정도의 기운. 이 바깥에 서 있는 것만으로 솜털이 곤두서는 것만 같은.

당연히 C급 때문은 아닐 것이다.

아마, 에버웨일에서 보관 중이라는 S급, 고대 시대의 유물 때문이겠지.

그것의 정체까지 알려져 있진 않았지만 에버웨일에서 최상격의 유물 한 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는 널리 알려져 있었다.

“가자. 아직 우리에겐 이른 곳이야.”

“그렇겠지?”

시안이 미련 없이 발을 돌렸다.

에르제도 입맛을 다시며 시안의 뒤를 쫄래쫄래 쫓았다.

저 안에 있는 거 하나만 가질 수 있어도 인생역전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는 표정.

그러나 무리였다. 300위인 그녀는 저 안쪽에 들어갈 생각보단 퇴학당하지 않을 걱정부터 해야 하는 처지였으니.

“난 무기 쪽에 가볼 건데, 넌?”

“나는 무기 말고 다른 걸 살펴보려고.”

두 사람이 둘로 갈라졌다.

시안은 무기가 모여 있는 구역으로 이동했고 에르제는 방어구가 주로 모여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그녀가 생각하기에 자신에게 부족한 것은 무기가 아니었다.

‘아니, 부족하다고 치면 사실 전부 부족하긴 한데…….’

요는 당장 급한 것은 무기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지금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스스로의 능력을 보완해줄 무언가.

‘검은 선은 효과는 좋은데 약점이 너무 명확해.’

그녀가 어릴 때 마나를 각성하며 동시에 습득한 능력.

검은 선을 볼 수 있게 되고, 그 선을 밟을 시 상대에게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게 된다는 훌륭한 능력이다.

그러나 훌륭하긴 해도 확연한 페널티를 가지고 있었다.

선 바깥에선 무력하다는 페널티.

‘결국 내 스타일은 숨어서 습격하는 것밖에 없어.’

이제 와서 다른 스타일을 개발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자신이 밀어야 할 것은 저 한 가지.

그걸 위해선 선 바깥에서 은신 능력이 급감한다는 단점을 보완해야 했다.

그걸 위해 그녀가 아티팩트를 찾았다.

“오.”

그리고 이윽고 발견한 물건.

D급 아티팩트, 켈하자드의 망토.

후드가 달린 망토로 내부에 사일런스가 걸려 있어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으며, 험지에서의 오랜 생활에도 견딜 수 있도록 체온 조절과 피로 회복의 룬이 새겨져 있었다.

뒤의 것들은 약간 보너스 같은 것이고 중요한 점은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는다는 점.

“이거다!”

그녀가 망설임 없이 금고를 열어 망토를 꺼냈다.

제복 위에 그걸 둘러보고는 그녀가 작게 감탄했다.

얼핏 볼 때는 그냥 칙칙한 검은 망토라고만 생각했는데 막상 보니까 그렇지만은 않았다.

색감은 티 하나 없는 어두운 묵빛이었으며 촉감 역시 보들보들한 것이 100점 만점이었다.

그녀가 한쪽의 유리 케이스를 통해 스스로의 모습을 비춰보았다.

빠짐없이 망토를 두르고 머리엔 후드를 깊게 눌러쓴 모습.

솔직히 말해 수상한 녀석의 표본과도 같은 모습이었으나, 기쁨에 겨운 그녀는 그걸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흐흐.”

왠지 이걸 두른 것만으로 자신감이 차올랐다. 더 강해진 것만 같은 기분.

그렇게 그녀가 황홀해하고 있을 때.

“흐음.”

시안은 각종 검 형태의 아티팩트를 하나하나 차분히 살펴보고 있었다.

당분간 애용할 검을 고르는 일.

그의 판단 기준은 까다롭기 그지없었다.

‘이건 검신이 너무 길군. 아이템 효과는 좋아 보이지만 안 돼. 효과보단 내 손에 맞는 게 중요하니까. 이쪽은 내 검술이랑 전혀 어울리지 않는 효과를 가지고 있으니 안 되고, 이쪽은…….’

뛰어난 장인은 도구를 가리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그들은 같은 도구로도 최고의 명검을 만들어낸다고.

얼핏 맞는 말이었으나 현실은 조금 다르다.

현실에선 오히려 실력 있고 자부심 있는 장인일수록 더욱 까다롭게 도구를 가리는 법이었다.

결과물에 타협하지 않는 장인들이 아무런 도구나 가져다 쓸 리가 없었다.

‘이건 좀 괜찮아 보이는데…….’

시안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물며 검이라고 하는, 그에게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물건을 고르는 일이다.

적당히 고를 수는 없는 일.

‘아니, 이것도 아냐. 다음.’

그러나 그 때문에 선택이 지지부진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집중력을 전혀 떨어뜨리지 않은 채 하나하나 무기들을 살펴나갔다.

각각의 케이스 앞에, 아티팩트에 새겨진 마법의 종류와 효과가 자세히 적혀 있었기에 판단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결국 다 거르고 있긴 했지만.

그러던 중.

‘웅! 웅웅!’

그의 손목에 깃들어 있는 라비가 갑자기 깨어났다.

평소에 하루 절반은 자고 있는 녀석인데 의외였다.

‘라비?’

‘우웅! 웅웅웅!’

녀석의 말을 알아듣지는 못했으나 대략적인 기분 정도는 알 수 있다.

라비는 지금 대흥분 중이었다.

‘뭐 좋은 거라도 발견했어?’

무기고에서 흥분한 것에 다른 이유가 있을 리가 없지.

무언가 라비의 감각에 걸린 아티팩트가 있을 거라는 생각에 시안이 물었다.

아니나 다를까 라비가 한곳으로 그를 안내했다.

‘웅!’

‘이건…….’

그곳에 있던 물건은, <빈 정령의 검>.

시안이 디스플레이에 적힌 설명을 읽어보았다.

일단 외형은 그냥 평범해 보이는 검이고 효능은…….

―사랑스러운 정령들을 위하여 ‘정령 전용 공간’을 선물하세요!

―정령은 몸을 웅크리고 숨을 수 있는 장소를 좋아합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정령들 사이에서 자아를 확립하려는 습성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합니다. 정령이 안정을 느낄 수 있는 장소 마련은 필수!

―정령은 때때로 단단한 물건에 몸을 비비거나 계약자를 툭툭 건드리기도 합니다. 이는 자신의 영역이라 주장하는 역할 외에도 그 행동 자체로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역할도 해요.

―정령은…….

가만히 그걸 읽던 시안의 눈앞이 아찔해졌다.

차마 끝까지 다 읽지 못하고 그가 미간을 짚었다.

‘무슨 고양이 집이냐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무슨 아티팩트 설명이 이래?

보나 마나 어떤 정령사가 쓴 설명일 텐데, 정령사란 것들은 다 이런 놈들인가?

확실히 융 교관의 수업 때 봤던 반요정 학생들 중에 장난기 많은 애들이 많았던 것 같기도…….

‘웅! 우웅- 웅웅!’

시안의 난색에도 아랑곳 않고 라비가 졸라댔다.

이거라고. 이거밖에 없다고. 이보다 좋은 물건은 없을 거라고.

‘우웅!’

‘뭐? 안 사주면 울겠다고?’

이상하다.

지금까지 들었던 라비의 말 중에서 이렇게 또렷하게 뜻이 들리던 말이 있었던가?

그냥 어렴풋한 기분만 느껴지던 지금까지와는 달리 방금의 말에선 강렬한 의지가 느껴졌다.

녀석이 얼마나 이걸 원하는지는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지금은 라비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무기를 고르고 있는 자리였으니.

‘안…….’

당연히 단칼에 거절하려던 시안의 눈이 문득 케이스의 아래쪽을 향했다.

위쪽의 맥 빠지는 홍보글과는 전혀 다른, 검의 기능에 대한 설명이 적혀 있는 부분이었다.

“호…….”

그걸 읽으며 시안의 눈이 점차 이채를 발했다.

―정령이 깃든 검은 해당 정령과 동화됩니다.

―정령이 성장함으로써 검의 기운도 성장합니다.

―정령과 동화된 검은 영체 상태로 변할 수 있으며, 정령각인에 수납이 가능해집니다.

막상 읽어보니 기능이 썩 나쁘지 않았다. D급치고 이 정도면 훌륭하다.

거기에 이걸로 끝이 아니었다.

―영체가 된 검은 사용자의 취향에 맞게끔 미세조정이 가능해집니다.

턱을 쓰다듬던 시안의 눈이 반짝거리며 빛나기 시작했다.

사용자의 취향에 맞게 미세조정이 가능하다고?

그 말은 즉 이 세상 어떤 장인들도 만들 수 없을 나 자신만의 검이라는 말이 아닌가.

심지어 자신의 단련 상태나 컨디션, 혹은 키나 체중 변화에 따른 조정까지 모두 가능한.

‘미세’라고 붙인 것을 보니 검신을 장병기 수준으로 늘리거나 반대로 단검처럼 짧게 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이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자유자재로 변화하는 무기가 아닌, 그에게 딱 맞는 단 하나의 마스터피스였으니.

딸각.

“웅!”

검을 꺼냄과 동시에 시안의 손목에서 라비가 튀어나왔다.

녀석이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그를 올려보았다.

고개를 끄덕이자 라비가 기뻐하며 검에 뛰어들었다.

본래 평범하기 짝이 없던 회색의 검이, 라비가 들어감에 따라 점차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손잡이부터 시작해서 검신 끝까지.

새까만 색으로.

[흑정령이 새로운 능력에 기뻐합니다.]

[ 검령(劍靈) – 흑검(黑劍) ]

새로운 능력을 얻었다는 라비의 사념 같은 것이 머릿속에 전해졌다.

검령.

이게 아마 검을 영체 상태로 만든다는 그것이겠지.

시안이 당장에 그걸 사용해 보았다.

‘우웅.’

라비가 깃든 검이 라비와 마찬가지로 통째로 흐릿한 영체가 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그의 손목에 있는 각인에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마치 그의 손이 검을 집어삼키기라도 하는 것 같은 장면.

눈 깜짝할 사이에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검을 보며 그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아공간 아티팩트가 A급이었던가.’

황금을 산처럼 가져와야 구할 수 있다는 A등급.

심지어 그마저도 검 서너 자루나 갑옷 한 세트 수납하는 걸로 끝이라고 들었다.

그런 와중에 검 자체적으로 수납기능이 있는 것은 달가운 일이었다.

‘괜찮은 검을 얻었어.’

거기에 성장도 가능하고 검 자체를 나 자신에게 딱 맞게 조정하는 기능도 있으니.

성능만 보자면 C급 이상도 충분히 받을 만한 녀석이다.

이 검이 D급으로 등록된 것은 아마 정령사만이 사용 가능하다는 제약 때문이겠지.

“다 골랐니?”

“예.”

입구를 지키고 있는 경비에게 미리 꺼내놓았던 빈 정령의 검을 보여주었다.

라비도 미리 꺼내놓아 본래의 회색 검의 형태였다.

누가 봐도 인간인 시안이 정령사용의 물건을 골랐다는 사실에 경비가 놀라긴 했으나, 굳이 참견해 오진 않았다.

별다른 해프닝 없이 확인 작업이 끝나고, 시안이 수업을 받기 위해 계단을 올랐다.

스르르…….

오르는 도중, 다시 라비가 들어가 영체가 된 검이 내 손목에 빨려들 듯이 수납되었다.

“아, 시안! 다 골랐어?”

“기다리고 있었구나.”

“응. 강의실까지 같이 갈까 해서.”

올라가 보니 에르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와 함께 시안이 강의실이 있는 본관으로 향했다.

그러던 중.

“음?”

“…….”

똑같이 비고에서 나온 것으로 보이는 두 사람과 마주쳤다.

란 아슬라와 유설.

전 2위와 현 2위라는 묘한 조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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