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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30화 (30/188)

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30화

베리엄의 도주 경로는 부서진 다리와는 반대 방향이었다.

유적의 부지를 나가기 위한 우회로.

그리고 그 길에도 역시 구울들이 가득했다.

“시안!”

이안이 눈앞에 보이는 구울을 향해 불의 구체를 날렸다.

퍼퍼펑! 순식간에 3발의 화염구가 구울의 가슴에 적중하며 거죽을 완전히 박살 내버렸다.

그리고 시안이 그 안으로 보이는 마석에 성수를 바른 검을 찍었다.

파삭!

구울 한 마리가 무너져 내렸다.

본래라면 정화된 마석을 주워야 했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발을 멈추지 않으며, 그들 두 사람이 앞길을 막는 구울을 계속해서 처치해 나갔다.

‘생각보다 빨라.’

두 사람의 호흡이 딱딱 맞았다.

이안도 9위의 학생이다. 거기에 상당히 기초가 탄탄한 덕에 마법의 발현 속도와 투사 속도가 상당했다.

적을 추적 중인 지금 상황에 딱 걸맞았다.

“무시할 녀석은 무시하고.”

“어!”

두 사람이 계속해서 구울 무리를 뚫고 지나갔다.

애초에 두 사람의 목표는 구울들의 전멸이 아니다.

길을 막고 있는 녀석들만 처치하고 지나가고 있는 와중.

돌파력이 부족하다면 중간에 지쳐 포위되기 딱 좋은 포지션이었지만, 시안이 있는 한 그럴 일은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여기다.”

“여기에…….”

탑에 도착했다.

입구로 보이는 거대한 석문.

이안이 지팡이를 들어 잠시 마력을 모으더니, 지금까지보다 훨씬 강한 아케인 플레어를 한 방 먹였다.

콰아아앙―!

폭음과 함께 대기가 흔들렸다.

피어오르는 먼지와 아지랑이.

그러나.

“젠장.”

문은 멀쩡했다.

“어떡하지? 더 큰 마법으로 뚫고 갈까 아니면 다른 입구를 찾아볼까?”

이안이 빠르게 물었다.

대형 마법을 준비하기 위해선 나름의 정신집중과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지체했다간 뒤에서 다시 구울들이 쫓아올 수 있는 상황.

고로 다른 입구를 찾아보는 쪽이 정답일 수도 있다.

다만 문제는 다른 입구가 반드시 있다고는 확신할 수 없는 것.

잘못 선택하면 탑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발이 묶이게 될 것이다.

“뚫고 간다.”

시안이 자신을 바라보는 이안에게 그리 대답했다.

이것 외에 다른 답은 없었다.

이안이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지팡이를 들었다. 그리고 뒤를 한 번 확인한 후 주문을 읊기 시작했다.

구울들이 보이지만 숫자는 많지 않다.

마법을 준비할 때까지 시안이 조금만 버텨준다면…….

그렇게 생각한 이안이었지만.

“시안?”

시안은 뒤쪽으로 향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더 앞으로 걸어갔다.

뭐 하는 거야! 이안이 의아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번쩍!

“……!”

강렬히 번쩍이는 검광을 보곤 이안이 눈을 크게 떴다.

콰과과과과광!

이윽고 그의 눈에는, 거대한 짐승의 앞발에 잡아 뜯기기라도 한 듯 완전히 박살 나 있는 석문이 보였다.

이안이 입을 벌렸다.

“가자.”

그의 경악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시안이 문 안으로 뛰어들었다.

* * *

탑의 1층.

이곳에도 곳곳에 구울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놈들을 깡그리 정리한 후 시안이 베리엄의 흔적을 살피었다.

‘시안.’

이안 역시 흔적을 살피며, 시안의 모습을 힐끔거렸다.

아까 유적에서 우리 둘이면 충분하다고 했던 얘기.

사실 속으론 납득할 수 없었다.

적의 실력도 규모도 제대로 모르는데 어떻게 둘만으로 충분하다고 단언하는가.

그는 그 말을 이렇게 해석했다.

우리 둘로 정찰의 역할을 수행하는 정도는 충분하다, 라고.

하지만 방금, 탑의 문을 박살 낸 그 내려치기.

몸이 떨려왔다.

그걸 보고 알 수 있었다.

녀석은 정말로, 둘만으로 적을 끝장내고자 이곳에 온 것이라고.

‘전부가 아니었어.’

결투 때 보았던 실력이, 그리고 구울을 상대하며 보였던 실력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 사실에 이안이 침을 삼켰다.

“흔적이 둘로 나뉘어 있어.”

“둘?”

잠시 후, 시안이 허리를 펴며 얘기했다.

“하나는 위쪽, 하나는 아래쪽.”

“왜 둘이지? 교란인가?”

이안의 물음에 시안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교란이라기보다는, 우리를 둘로 나눌 생각이야. 한쪽엔 놈이 있을 거고 다른 한쪽엔 레이나가 갇혀 있겠지.”

“그럼 어떡할까. 녀석의 의도대로 나뉘면 위험하지 않을까?”

시안이 고민에 빠졌다.

확실히 더 안전한 방법은 나뉘지 않고 이대로 뭉쳐서 한쪽씩 공략하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왜 굳이 레이나랑 떨어졌지?’

녀석은 레이나를 인질로 잡았다.

그 인질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자신의 옆에 두는 것이 맞지 않는가.

굳이 눈이 닿지 않는 곳에 보낼 이유가 없었다.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우리가 레이나를 구하러 가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추적자들이 인질을 구하러 가기를 바란다. 그러면 본인은 그만큼의 시간을 벌 수 있을 터.

즉 녀석이 원하는 것은 시간이다.

그게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것이든 아니면 모종의 일을 꾸미기 위한 것이든.

그렇다면 여기서의 정답은 그 허를 찔러 둘이 함께 베리엄을 치러 가는 것이겠지.

하지만.

“나뉘자. 넌 레이나를 구하러 가. 난 범인 쪽으로 간다.”

그녀를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이렇게 나뉘는 것 역시 녀석의 의도 중 하나란 것은 안다.

그러나, 그럼에도 인질을 구하러 갈 사람은 필요했다.

“……알았어. 어 근데, 어느 쪽이 레이나가 있는 곳인데?”

“그건.”

시안이 쥐고 있는 검을 바라보았다.

‘우웅!’

라비가 한곳을 가리켰다.

지하 쪽이었다.

“레이나는 위쪽에 있어.”

이안이 묘한 표정으로 시안을 보았다.

확신에 찬 듯한 그 말투. 대체 어떻게 레이나가 있는 곳과 적이 있는 곳을 구별해 낸 거지?

무척 궁금했지만, 지금은 한가로이 질의응답을 하고 있을 때도 아니었다.

“알았어.”

이안이 탑의 상층부를 향해 오르기 시작했다.

그 뒷모습을 일별하곤, 시안이 지하로 향하는 계단에 몸을 실었다.

* * *

“학생! 이쪽 좀 봐줘!”

“예, 예!”

“여기도 뚫릴 것 같아요! 엄호 좀!”

“아, 알겠어요!”

유적 안. 혼란스럽기 짝이 없는 그 공간에서 드론드가 땀을 뻘뻘 흘리며 마법을 쏴대고 있었다.

곳곳에서 들려오는 용병들의 지원 요청.

무시할 수가 없었다.

한곳이라도 지나쳤다간 곧바로 구울들이 쳐들어올 기세였다.

‘애들은 어떻게 됐지? 시안은? 이안은? 레이나는?’

정신없이 구울들에게 마력탄을 쏘고 방어막을 펼치는 와중에도 드론드의 머리에선 일행에 대한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그는 아직 레이나에게 닥친 일을 알지 못했다.

그저 일행들도 각자의 장소에서 힘쓰고 있을 거란 생각밖에는.

‘막아야 돼. 지원이 올 때까지!’

드론드가 펑펑 마법을 날려댔다.

그의 마법에 격추된 구울들이 속수무책으로 떨어졌다.

그럼에도 구울들의 공세는 전혀 줄지 않았다.

마법에 어깨가 날아가고 머리통이 격추당해도, 녀석들은 계속해서 바리케이드에 기어올랐다.

불사의 몬스터, 언데드.

그 질기고 지독한 공세에 모두가 빠르게 지쳐가고 있었다.

이내.

“뚜, 뚫렸다!”

“구울들이 들어온다!”

“젠장! 막아!”

기어코 가장 약했던 바리케이드 하나가 뚫렸다.

드론드는 모르고 있었지만 그건 혈기사가 억지로 부수고 들어온 그곳이었다.

급하게 엉성하게나마 막아놓았지만 얼마 버티지 못하고 다시 부서져 버린 것.

그때부터가 진짜 시작이었다.

우르르 몰려온 구울들에 의해 유적 내부는 엉망진창이 되어버리고, 차례차례 다른 바리케이드도 뚫려갔다.

“아, 안 돼! 시안! 이안! 레이나! 어딨어!?”

유적 안이 난전 상태로 변하자 드론드가 일행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그쪽도 위험할 거란 생각에.

그런 드론드를 누군가가 발견했다.

“혹시 동료분을 찾고 계신가요!?”

혈기사의 습격에서 시안이 구했던 용병이었다.

“네, 네! 제 친구들 어디 있는지 아시나요? 아무리 찾아봐도 안보여요!”

“사실 아까 전에…….”

구울의 목에 칼을 찔러 넣으며 용병이 큰 소리로 설명했다.

그 말을 들을수록 드론드의 눈이 점점 커졌다.

“나, 납치……?”

“예. 다른 두 분은 다급히 쫓아가셨습니다. 시간이 급해서,”

따악!

용병이 달려드는 구울의 이빨을 반사적으로 피하며 말을 이었다.

“……시간이 급해서 학생분께는 미처 알리지 못한 것 같습니다. 범인을 놓치면 큰일이니까요.”

“그런…….”

드론드의 눈이 파르르 떨려왔다.

자신이 잠깐 없던 사이에 그런 일이 있었다고?

‘X신 같은 놈! 미련 곰탱이 새끼! 왜 알아차리지 못했어!’

모두가 이 혼란 탓이었다.

이것 때문에 레이나의 일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래도 죄책감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같은 팀인데…… 팀원인데…….

“구, 구울이!”

“도망쳐! 더는 안 돼!”

“도망치라니 어디로! 포위됐다고!”

“몰라 새꺄! 그냥 알아서 빼!”

상황은 점점 악화되어 갔다.

한 마리 한 마리는 용병들의 상대가 되지 않았지만 숫자가 너무 많았다.

용병들은 점점 구석에 몰려갔다.

‘어떡하지?’

드론드가 이를 악물었다.

애들을 도와주러 가야 한다.

그런데 지금 상황은, 도우러 가기는커녕 나 자신조차 위험했다.

“어, 어떡하면…….”

그의 눈이 점점 어두워졌다.

포기할 수는 없다. 포기할 생각은 없지만…… 상황이 너무 나빴다.

외부의 도움이 오지 않으면 자신들도 전멸이다. 이제 더 이상 버틸 여력이 남지 않았다.

그 최악의 상황에서.

[ 백련화(白蓮花) ]

온 세상이 얼어붙었다.

드론드가 눈을 의심했다.

유적 안, 이 실내에 눈이 내리고 있었다.

정적.

모든 소리를 집어삼키는 듯한 눈과 얼음.

보이는 것 모두가 얼어붙어 있었다.

“부상자는? 다친 사람은 있나!”

하얀 입김을 뱉는 그녀 옆에서 몇 명의 사내가 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기다리던 정화교단의 사제들.

그러나 정작 이 얼음지대를 만든 그녀는 정화교단의 사제복이 아닌 다른 옷을 입고 있는 이였다.

“사, 살았다!”

“구조가 왔어!”

잠시 고요함이 감싸던 유적 안이 용병들의 환호로 울려 퍼졌다.

그 환호 아래에서 정화교단의 사제들이 구울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 속에 드문드문 보이는, 사제복이 아닌 다른 옷을 입고 있는 이들.

드론드가 그들을 보고 울먹였다.

잘 아는 옷이다. 자신이 입고 있는 것과 같은, 에버웨일의 제복이었다.

“……무사해?”

그중에 그녀, 이 자리에 눈을 내리게 한 장본인.

유설이 드론드를 발견하곤 물었다.

“나, 난 괜찮은데! 근데 다른 애들이!”

드론드가 황급히 정신을 차리며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 * *

서걱!

시안이 구울을 베어내곤 뛰었다.

아래로, 더 아래 지하 깊은 곳으로.

그 몸을 검에서 흘러나오는 밤의 기운이 감싸고 있었다.

‘고맙다.’

‘웅!’

유적에 진입해 구울들을 사냥.

그 뒤로 특이한 복장의 구울과 대치.

유적에서 베리엄과 만난 일.

그리고 이 탑까지 구울들을 뚫으며 돌파한 것까지.

한나절도 되지 않은 시간에 너무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그럼에도 아직 안정된 호흡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모두 라비의 회복 능력 덕분이었다.

‘이안 쪽은 괜찮나?’

때문에 이안이 조금 걱정이 되었다.

그에겐 라비와 같은 체력 회복 능력은 없을 터인데.

그나마 다행인 점은 그쪽은 아마 일반 구울밖에 없을 거라는 점.

베리엄도, 예의 특이한 구울도 아마 둘 다 지하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역시.”

그것을 증명하듯 녀석이 나타났다.

특이한 복장의 구울.

혈기사 프레델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물로 된 장검.’

녀석의 손에는 베리엄이 만들어준 걸로 보이는 수검이 들려 있었다.

이전의 수막이나 단검보다도 훨씬 신경을 쓴 것이 보이는 수려한 검.

검의 외형만 저런 것이 아닐 것이다. 아마 강도나 성능 역시 훨씬 업그레이드된 것이겠지.

시안이 검을 겨눴다.

혈기사 역시 그에 맞춰 검을 들었다.

처음 만났을 때와 달리 이빨을 딱딱거리는 것이 아닌, 온전히 검을 겨누는 모습.

그게 더 위협이었다.

구울의 본능보다도 생전의 무의가 더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뜻이었으니.

“후우.”

시안이 숨을 뱉었다.

‘단번에 끝낸다.’

시간을 끌기를 바라는 베리엄에게 더 시간을 줄 수는 없다.

이미 두 번이나 대치했던 상대.

서로 탐색은 충분했다.

“…….”

“…….”

서로의 눈이 서로를 살핀다.

금방이라도 출수할 것 같은 일촉즉발의 분위기.

얼핏 가만히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둘 사이에선 타이밍을 점하기 위한 수많은 대치가 오가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때가 왔을 때.

두 사람이 동시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래에서 위로, 수검을 베어 올리는 혈기사.

반대로 위에서 아래로 흑검을 내려치는 시안.

언젠가 생각한 적이 있다.

진정한 고수는 단순한 내려치기 하나로도 수만 가지 일을 할 수 있다고.

자신에게 아직 그런 것은 불가능했다.

내려치기 하나로 할 수 있는 일은 한정되어 있었으니.

그러나 그 하나만큼은.

쿠구구구궁―!

무엇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 상천검(霜天劍) - 천뢰(天雷) ]

치켜든 검.

그 검에 하늘이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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