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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32화 (32/188)

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32화

움찔.

시안의 날카로운 눈빛 아래에서, 베리엄이 몸을 크게 움찔거렸다.

그러곤 그 얼굴을 흉악하게 구기기 시작했다.

“시안…… 역시 다 알고 있었구나! 베르페드 그 새끼도 다 알고 있었어! 우리에 대해 다 알고 있었다고! 그런 주제에 모르는 척을 해!?”

녀석이 발광하기 시작했다.

시안은 검을 찍은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베리엄의 발언과 몸짓 하나하나가 그 머릿속에 깊게 각인되는 중이었다.

“젠장! 어쩐지 살아 있더라니! 다 함정이었어! 우릴 낚으려는 함정이었다고!”

“지금 부는 게 몸에 좋을 거다. 가문에 이송되면 더는 태양 빛을 볼 수 없게 될 테니까.”

“지랄! 그런다고 내가 말할 것 같아!? 데려가 보든가!”

“네 의지랑은 관계없어. 가문엔 성능 좋은 자백제도 있고 정신마법 전문가도 수두룩하거든.”

“큭…….”

베리엄의 눈이 급속도로 떨려왔다.

요즘 시대에는 과거와 같은 야만적인 고문은 오히려 더욱 줄어들었다.

보다 효율적으로, 확실하게 정보를 빼낼 방법이 얼마든지 존재하고 있었으니까.

차라리 자수해서 감옥에 들어갔더라면 더 나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못하고 시안의 손에 잡힌 시점에서 이미 게임 오버였다.

으드드득!

베리엄이 부서져라 이를 갈았다. 시안을 보는 그의 눈에 지독한 핏발이 서 있었다.

그럼 뭐하겠는가.

검에 찍혀 엎어져 있는 녀석이.

“죽여 버리겠어!!”

그러곤, 녀석의 눈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핏줄이 도드라져 보이는 그런 것이 아니다. 흰자 자체가 붉은빛으로 화하고 있었다.

시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또 무슨 수작이지?

‘강림.’

분노에 휩싸인 베리엄의 최후의 결단.

스스로의 육신과 자아, 영혼 그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 대가로 ‘해령궁주’를 그 몸에 강림시키는 것.

바가지로 바닷물을 퍼담으려는 것만큼이나 무모한 일이다. 심지어 한 번 몸을 허락하면 두 번 다시 되찾을 수 없다.

자신의 영혼은 지옥계에 있을 해령궁의 주인에게 흘러들어 가 미래영겁 고통받게 되겠지.

그 모든 것을 알면서도.

그 이상으로 베리엄은 시안에게 살의를 품고 있었다.

“―수왕갑(水王鉀).”

호숫가의 물이 그의 몸에 스며들며 신체 자체를 하나의 갑옷으로 바꿔갔다.

상처들이 모두 물로 메워졌다. 팔이 떨어진 곳 역시 수왕갑이 강제로 틀어막는다.

강림의 후유증을 최소화하기 위한 수단.

“포기할 줄을 모르는군.”

물론 그걸 내버려 둘 시안이 아니었다.

그가 베리엄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쇄도하는 검을 보며 베리엄이 속으로 다급히 외쳤다.

‘빨리와! 어차피 내 몸만을 노리고 있었잖아! 다 줄 테니까 빨리 와서 이 새끼 죽여!’

거대한 힘이 들어올 것을 기대하며 베리엄이 몸을 긴장시켰다.

그런데.

[해령궁주가 검은 칼날을 보며 혀를 찹니다.]

[그의 발걸음이 점점 멀어집니다.]

“뭐……?”

베리엄이 멍청한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단단하게 단조되던 수왕갑이 일거에 인력을 잃고 쏟아져 내렸다.

서걱!

그런 녀석을 시안의 검이 가차 없이 베어 들어갔다.

고통이 올라온다.

그 와중에도 베리엄은 멍한 표정을 지울 수 없었다.

놈의 몸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아올랐다.

“어…… 째서…….”

베리엄의 눈에서 빛이 점차 사라진다.

그 눈에선 끝까지 의문이 사라지지 않았다.

해령궁주. 언제나 화신체의 몸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지옥계의 군주.

그러나 힘이 내려오기는커녕, 있던 힘조차 사라지고 있었다.

신기루처럼.

그것의 대부분은 대기 속에 흩어지며 차원을 넘고 있었지만, 일부는 달랐다.

[친숙한 기운에 흑정령이 흥분합니다!]

흩어져 사라져 가는 기운 중 일부를 라비가 빨아들였다.

그 사념이 그대로 시안에게 이어졌다.

[흑정령이 새로운 능력에 기뻐합니다.]

[ 검령(劍靈) – 창해(蒼海) ]

들려오는 사념에 시안의 눈이 크게 뜨였다.

새로운 능력? 흑검을 익혔을 때처럼 뭔가를 익혔다는 말인가?

무척 신경이 쓰였지만, 일단은 일을 마무리하는 것이 먼저다.

시안이 아래쪽을 바라보았다.

“꺼어어…….”

베리엄은 거품을 물고 기절해 있었다.

녀석의 상태를 보곤 시안이 혀를 찼다.

결국 놈의 입으로 들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쩔 수 없지.’

협박 정도로 입을 열 것이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자신은 고문 기술자도 아니고 정보를 캐낼 만한 마법이나 기술도 가지고 있지 않았기에.

다만 소득이 없는 것은 아니다.

‘라비.’

놈이 사용하던 힘이 라비와 모종의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 힘의 정체는 아직 모른다.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라비가 있는 한 녀석들을 향한 단서는 끊어지지 않았다는 사실.

그리고 이 사실은 가주조차 알지 못하는, 자신만이 알고 있는 사실이란 점이었다.

―딸랑.

그가 철퍽거리며 이동해서는, 수면에 떠 있는 방울을 주웠다.

금령.

눈높이까지 그걸 들어 올려 살펴보았다.

정화되기 전의 구울에게서 느껴지는, 삿된 마기(魔氣)가 풀풀 풍기고 있었다.

그의 눈이 가라앉았다.

“가주를 만나봐야겠어.”

본가에 한 번 돌아가 볼 때가 온 것 같았다.

* * *

“야, 뒤로 좀 가봐!”

“어딜 가! 이제 더 갈 데도 없어!”

“진짜!?”

탑의 꼭대기, 이안과 레이나는 상당한 위기에 빠져 있었다.

도저히 아래로 내려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계단을 통해 구울이 꾸역꾸역 올라왔고, 두 사람은 점점 밀리더니 방의 구석까지 몰리게 되었다.

“마력은 어때? 버틸 만해? 체력은?”

“아니…… 이제 한계야. 너는?”

“나는 아직은 괜찮아.”

지친 기색이 역력한 이안을 보며 레이나가 강단 있게 대답했다.

하지만 말처럼 진짜 괜찮지는 않았다.

지금은 아직 버틸 수 있어도, 무슨 방도를 짜내지 못하면 얼마 안 가 쓰러질 것이 명백했다.

성수는 진작 다 떨어졌고 이쪽의 체력은 빠지고만 있다.

반면에 꾸역꾸역 올라오는 구울들은 아직도 그 끝이 보이질 않았다.

‘뭔가 수를 써야 돼.’

레이나가 힐긋 이안을 곁눈질했다.

땀범벅이 된 모습. 거칠어진 호흡. 퀭한 눈.

그는 정말로 한계였다.

그리고 그녀 역시 언제 쓰러질지 알 수 없는 상태였고.

‘어떡하지?’

그녀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주변을 살폈다.

하지만 쓸 만한 도구는 전혀 없었다. 있는 것이라곤 발에 채도록 가득 찬 구울들뿐.

방 안을 살피던 그녀의 눈이 창 쪽을 향했다.

그리고 그 아래, 몇몇 사람들이 보이는 것을 발견했다.

“이안! 사람이야! 구하러 왔나 봐!”

“진짜!?”

그 말에 이안의 눈이 대번에 반짝였다.

그가 한 번 더 힘을 내어 단검을 들었다.

이제 조금만 더 버티면…….

“저기요!”

레이나가 창밖으로 몸을 내밀고 크게 손을 흔들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1층의 몇몇이 발견했다.

대번에 손가락질을 하며 이쪽을 주목하는 것이 보였다.

레이나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구조가 올 때까지 버틸 수 있나?’

한계에 달한 이안의 체력. 자신의 컨디션. 아래쪽에 있는 사람들이 구울 무리를 뚫고 꼭대기로 올라오기까지 걸릴 시간.

조금, 아니, 많이 아슬아슬해 보였다.

‘응?’

그때, 그녀의 눈에 한 사람이 보였다.

눈의 요정과 같은 하얀 머리칼을 가진 학생.

그녀와 같은 4반의, 신입생들 사이에선 화제인 인물.

유설.

그녀를 보자 레이나가 결단을 내렸다.

“이안.”

“왜! 너도 생각은 그만하고 손 좀 움직여! 나 혼자 힘들어!”

“뛰어내리자.”

“……뭐?”

이안이 무슨 소린지 이해를 못 했다는 듯이 되물었다.

설명할 시간은 없다. 그녀가 한 손으로 이안의 허리를 휘감고 창틀에 발을 올렸다.

“뭐, 뭐 해 인마!”

당연하게도 이안이 기겁했다.

그를 무시한 채 레이나가 아래쪽을 향해 소리쳤다.

“유설! 우리 좀 받아줘!”

“야 인마! 레이나!”

“이 악물어!”

그러곤 뛰어내렸다.

얼굴에 부딪히는 강한 바람을 맞으며 그녀가 이안을 감싸듯 끌어당겼다.

자신이 뛰어내리자 결정했으니 이 정도는 당연한 일이었다.

“으아아아아아악!”

갑작스럽게 투신을 하게 된 이안이 떠나가라 비명을 질렀다.

그 소리는 당연하게도 1층에도 울려 퍼졌다.

받아달라는 한마디를 던지곤 뛰어내린 레이나를 보며 유설의 눈이 당혹감에 흔들렸다.

그럼에도, 그녀가 입을 달싹이며 반사적으로 마법을 자아냈다.

“……아이스 월.”

그럼에도 그녀는 반사적으로 마법을 자아냈다.

얼음의 막을 만드는 얼음 계통의 기초 마법.

그러나 유설이 만든 것은 일반적인 아이스월보다 훨씬 더 얇았다. 거의 종잇장만큼이나.

챙그랑!

레이나와 이안의 신형이 그것을 깨며 떨어졌다.

그러나 그 아래엔 또 하나의 얼음이 있었다.

그 아래에도, 그 아래에도.

순식간에 수십에 달하는 얼음의 막이 두 사람의 낙하 경로에 생겨났다.

채채채채채챙!

그것들을 깨부수며 두 사람이 떨어져 내렸다.

얇은 막이었기에 쉽게 깨졌다.

그리고 쉽게 깨졌기에 오히려 두 사람은 충격을 덜 받을 수 있었다.

깨져 나간 얼음막이 충격에너지를 모두 받아갔기에.

그렇게 수십의 얼음막을 모두 깨고 이윽고.

쿠웅―!

짙은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유설을 비롯한 정화교단의 사제들이 다급히 그곳으로 다가갔다.

“아야야…….”

“레, 레이나! 너 누굴 죽일 셈이야!”

“죽긴 누가 죽어. 다 승산이 있으니까 한 일이라고.”

레이나와 이안이 흙먼지 속에서 몸을 일으켰다.

낙하로 생긴 부상이라곤 이안을 감싸듯이 떨어지느라 레이나의 한쪽 발이 삐끗한 것뿐이었다.

저 높은 곳에서 떨어진 것 치고는 경상이었다.

유설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안! 레이나! 무사했구나!”

드론드가 울먹이며 두 사람에게 달려들었다.

* * *

시안이 남은 자리를 정리했다.

정리라고 해도 별건 없었다.

베리엄이 죽지 않도록 간단히 응급처리를 하고 남은 구울을 정리하고.

구울의 정리에 다소 시간이 걸릴 거라 생각했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베리엄이 떨어뜨린 방울을 주우니 덤벼들지 않았던 것이다.

“역시 이걸로 조종하던 게 맞았군.”

무기보다도 이 방울 하나를 더욱 소중하게 들고 있길래 범상치 않은 물건이라고는 생각했었다.

그래서 천장에서 습격했을 때 가장 먼저 차냈던 것이기도 하고.

이게 아마 구울을 조종할 수 있었던 아이템인 모양이었다.

‘조종하는 법까지는 모르겠지만 덤비지 않는 것만 해도 어디야.’

덕분에 일이 쉬워졌다.

코앞에 다가가도 멀뚱멀뚱 서 있는 구울들의 가슴에 칼만 한 번씩 박아주면 끝났으니까.

그렇게 시안은 수십의 구울을 별다른 수고도 없이 처치할 수 있었다.

물론 거기에서 떨어진 마석은 덤이었고.

‘보수는 잔뜩 나오겠군.’

오전에 사냥했던 분량과 합쳐서 마석이 수없이 쌓였다.

후작가에서 오는 지원금을 모아두고 있는 만큼 아직 돈이 모자라진 않았지만, 본디 금전이라 함은 다다익선이다.

다만 자리를 정리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만, 오히려 어려운 것은 지상으로 올라오는 길이었다.

“이걸 괜히 막아놨나…….”

통로를 가득 메운 돌무더기를 보며 시안이 한숨을 쉬었다.

스스로 배수의 진을 치는 의미에서, 그리고 베리엄의 퇴로를 끊는 의미에서 막아놓은 통로.

그게 지금 그의 앞을 막고 있었다.

이걸 뚫고 가랴 구속한 베리엄을 메고 가랴, 이래저래 험난한 여정이 예상되었다.

“어쩔 수 없지.”

누굴 원망할 수도 없다. 자신의 판단이었으니까.

거기에 만약 그때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그는 이 통로를 막았을 것이다.

만에 하나의 가능성도 모두 차단하고자 한 행동이었으니.

툭.

그가 묶어놓은 베리엄을 잘 보이는 곳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어깨를 잠시 풀고는 돌무더기를 치우기 시작했다.

작업은 매우 빨랐다.

손에 끼고 있는 파워 건틀릿의 힘도 있었고, 그리고.

“웅웅!”

베리엄에게서 기운을 빨아들이고 난 후 마치 취한 것처럼 방방 뛰고 있는 라비도 있었으니까.

그 묘한 기운 덕분에 라비의 힘이 매우 커졌고, 동시에 회복 능력의 효과도 맹렬히 돌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파삭.

툭. 투툭.

능숙하게 길을 뚫으며 시안이 라비에게 물었다.

“라비, 친숙한 기운이라는 게 대체 뭐지?”

“우웅?”

“네가 방금 흡수한 기운. 네 정체나 살던 곳과 관련이 있니?”

“우우웅.”

시안의 어깨에 달라붙은 채로 라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천진난만하게 활짝 웃으며.

‘말을 못 하니까 결국 정체는 모르겠군…….’

다만 여기까지는 당연하게 추측이 가능한 부분이다.

시안이 알고 싶은 건 그 이후의 정보. 라비의 정체나 살던 곳과 같은 것이었지만.

라비가 말을 할 수 없기에 알아낼 수는 없었다.

‘꿈의 시련.’

심지어 자신이 라비와 만난 곳은 꿈의 시련이다.

스스로의 심상세계를 기반으로 만들어진다는 그 시련 속.

그 말은 즉 이 정체 모를 기운과 자신 역시 심상 깊은 곳에서 관련이 있단 뜻일까.

시안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전혀 모르겠다.

정보가 없어도 너무 없다.

“넌 대체 누구니?”

“우웅?”

시안의 말에 라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통로의 잔해를 치우느라 먼지가 잔뜩 묻은 손가락으로 라비의 콧잔등―이 있으리라 생각되는 부분―을 문질렀다.

“우웃!”

라비가 눈을 꾹 감으며 간지럽다는 듯 도리질을 쳤다.

순둥순둥한 고양이 같은 모습에 시안이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뭐 됐다.”

만난 지 그리 오래되진 않았지만, 라비는 염노에 이어 두 번째로 그가 마음을 열 수 있는 존재였다.

그를 시안의 거죽을 뒤집어쓴 존재가 아닌 그 자신으로 봐주는 유이(唯二)한 존재.

이 녀석의 정체는 앞으로 차차 알아가는 걸로 하자.

‘일단 지금은 지상으로 올라가고.’

잔해를 치우는 그의 손이 더욱 빨라졌다.

일단은 위로 오르는 것이 먼저다. 이안 쪽이 어떻게 됐는지도 걱정되었으니.

그렇게 잠시 후.

기절한 베리엄을 둘러멘 그가 지상으로 올라왔다.

탑의 1층이었다.

“어?”

“저쪽에 사람이다!”

그곳엔 못 보던 이들이 몇몇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정화교단의 사제복을 입은 사제들.

그리고.

“시안!”

드론드와 유설을 비롯한 몇 명의 학생들이었다.

다들 무사한 모습을 보며, 시안이 작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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