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35화
“……가주에게 들었나?”
시안이 물었다.
당연한 질문이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체샤는 고개를 저었다.
“듣지는 않았지만 그 정도는 눈치로 알죠.”
눈치로?
시안이 의외라는 듯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꽤 감이 좋은 아이인가 보다. 아니, 감이라기보단 통찰력이라고 해야 하나?
“그 말대로, 도련님은 돌아가셨다. 나는 가주님의 명으로 그분의 대역을 하고 있는 것이고.”
“언제부터요?”
“언제부터?”
“제 생각엔 꽤 오래됐을 거 같은데. 음…… 오라버니가 12살 때, 뭔지 기억은 안 나지만, 무슨 대회에서 상을 타 왔다고 했었는데 그때도 오라버니가 아니라 오라버니였나요?”
다소 두서는 없었지만 무슨 얘기인지는 잘 알아들었다.
시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도 나였겠지. 대부분의 대회나 귀찮은 일정은 모두 내가 떠맡았으니까.”
“어쩐지. 그 바보 같은 오라버니가 상 같은 걸 타 올 리가 없는데 이상하다 싶었어요.”
쩝.
시안이 입맛을 다셨다.
본래의 시안은 여동생을 굉장히 귀여워했었다고 들었는데, 여동생 쪽은 꽤나 신랄하지 않은가.
‘감이 좋은 것 때문인가?’
그 어릴 때부터 자신의 존재를 짐작할 정도로 뛰어난 감.
어쩌면 애초부터 오라비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신사적이고 멋있는 오라비를 연기하였다고 해도 그 망나니 시안이 이 체샤를 속일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 본성을 처음부터 꿰뚫고 있었다면 이런 신랄한 어조도 납득이 되었다.
“그래서 언제부터예요?”
“가주님께 주워진 건 5살 때부터. 처음 대역으로 바깥에 나온 건 11살 때였어.”
“와.”
그 말에 체샤가 작게 입을 벌리며 눈을 깜빡거렸다.
“되게 오래됐네요.”
“뭐 그렇지.”
그녀가 시안을 빤히 바라보았다.
본래의 시안과 다른 모습이라도 찾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외형적으로 다른 점은 거의 없다고 봐도 되었다.
그의 외모는 애초부터 시안과 똑 닮아 있었고, 염노에 의해 세부적인 차이조차 모두 메워졌으니까.
그런 그를 바라보다, 체샤가 드레스의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부스럭부스럭.
시안이 의아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나 드세요.”
체샤가 꺼낸 것은 잘 포장된 초콜릿이었다. 고급 다과로 사교계의 부인들 사이에서 대인기라는.
“……고맙다.”
“뭘요.”
갑작스러운 선물에 시안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것을 받았다.
찌익.
체샤 역시 하나 꺼내 포장을 뜯고는 입에 넣었다. 우물우물. 다람쥐마냥 우물거리는 모습이 인상적이라면 인상적이었다.
시안도 사양하지 않았다.
마침 연공을 하던 중이라 배가 허해진 타이밍이기도 했고.
‘오…….’
처음 먹어보는 초콜릿이었으나 상당히 달콤했다. 혀 위에서 부드럽게 녹아들며 넘어가는 것이 일품이었다.
과연 비싼 건 비싼 값을 하나 보다.
“오라버니.”
“응?”
과자의 덕분일까? 둘 사이의 분위기가 조금은 누그러진 것처럼 느껴졌다.
그나저나 진짜 오라비가 아니라는 걸 아는데도 오라버니란 호칭은 계속 유지하는 건가…….
“예전부터 아버님이 이런저런 말을 많이 해주셨는데, 그중에 이런 게 있거든요.”
예전부터?
시안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그 말이 어딘가가 걸렸다.
“어떤 말?”
“너의 사람은 네가 알아서 구해라. 나의 사람을 그저 물려받기만 한다면 가문은 쇠락의 길에 들어설 터이니.”
“가주님다운 엄하신 말씀이군.”
시안이 적당히 대꾸해 주었다.
체샤가 자신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었다는 건 의외긴 했지만, 그와는 별개로 그녀와 그다지 접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은 여전했다.
특히 베리엄의 사건을 겪은 직후인 지금은 더더욱.
배리엄의 정체나 그 배후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이 체샤에게까지 눈독 들이기 시작하면 여러모로 피곤해질 것이다.
그녀가 어떻게 되든 알 바 아니지만 문제는 가주가 자신을 절대 내버려 두지 않을 거란 점이다.
때문에 그로서는.
“오라버니. 내 사람이 되지 않을래요?”
체샤의 말이 꽤나 의외일 수밖에 없었다.
“네 사람?”
시안이 살짝 찌푸린 얼굴로 반문했다.
“네. 아버님의 사람이 아니라 내 사람.”
“나는 이미 가주님께 충성을 맹세한 몸이다. 농담이 지나쳐.”
“농담 아닌데.”
시안이 그냥 가볍게 듣고 넘겼다.
가주가 저렇게 말을 했다지만 그 진의는 다를 터였다.
가문의 일원들에게 인정받는 후계자가 되어라, 그리고 가문 바깥에서도 인재를 찾는 것을 게을리하지 말아라.
대충 이 정도 뜻이겠지.
‘가주의 사람이 아닌 나의 사람’, 같은 것을 구하라는 뜻일 리가 없지 않은가.
“가주님의 사람에게 인정을 받는다면 그게 곧 너의 사람이야. 둘을 분리할 필요는 없을 텐데.”
“나랑 아버님이랑 마음이 맞지 않는 일이 있을 수도 있잖아요.”
후계자가 가문의 주인의 뜻에 반한다고? 그건 그거대로 문제다.
뛰어난 감에 첫인상은 다소 놀랐다만 역시 어린애는 어린애란 건가.
“마음이 맞지 않는 일은 가주님의 뜻을 따르는 게 옳지. 정 그게 싫으면 가족회의라도 하든가.”
“대화 정도로 해결이 안 될 것 같은 일이면요?”
“예를 들면?”
“오라버니에 대한 일이라든가.”
우뚝.
시안의 손이 잠시 멈췄다.
“아버님은 오라버니가 죽든 말든 별로 신경 쓰지 않을 거예요. 쓰다 버리는 패라는 얘기죠. 오라버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나요?”
“…….”
“저는 달라요. 오라버니 정도의 인재를 버리는 패로 쓰기는 아깝잖아요?”
표정으론 내지 않은 채, 시안이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염노가 했던 말. 체샤 쪽이 오히려 가주의 피를 짙게 이은 것 같다던 그 말.
정말이었다.
일순간이지만, 정말로 가주와 대화하는 듯한 느낌까지 들어왔으니.
“아버님 밑에 있으면 언젠가 죽을 거예요. 제게 오세요. 제가 오라버니를 살려 드릴게요. 괜찮은 가문을 찾아서 혼약도 맺어드리고 자식에 손주까지 보게 해드릴게요. 좋은 조건이죠?”
그녀가, 정말로 좋은 조건을 제시하고 있다는 듯이 의기양양하게 손을 내밀었다.
사실 좋은 조건은 맞긴 했다.
가주가 자신을 그저 미끼로만 바라보는 것도 사실이고, 그러다간 언젠가 정말로 버려지리라는 것도 사실이다.
시안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역시, 그녀는 아직 어렸다.
“제안은 고맙지만 사양하지.”
“예? 뭐라구요?”
“거절이라고.”
딱 잘라 거절했다. 여지도 남지 않을 정도로 단호하게.
체샤가 눈을 깜빡이는 속도가 두 배는 빨라진 것 같았다. 방금 들은 말이 잘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당연히 자신의 제안을 받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나 보다.
“왜요? 제가 싫어요?”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시안이 쓰게 웃으며 할 말을 정리했다.
뭐 어차피 이 자리에서 뱉을 수 있는 말은 정해져 있다.
어찌 됐든 지금의 자신은 가주의 충성스러운 부하를 연기하고 있으니.
“버리는 패든 뭐든 상관없다. 가주님이 주워주시지 않았다면 나는 5살 때 이미 죽었을 테니까.”
실제로는 신전에 고아로 가게 되었겠지만 이 정도 양념은 괜찮겠지.
“그래도 죽는 건 싫잖아요.”
“싫지.”
“그럼 왜……?”
“싫다는 건 배신의 이유가 되지 못해.”
그래. 그런 이유로 배신할 수는 없다.
시안이 가주를 적대시하는 이유는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아그리드 가의 그늘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그리하여 완벽한 자유를 손에 넣고 싶어서.
나 자신의 이름을 되찾고 싶어서.
그저 죽는 게 싫었다면 오히려 더더욱 가주에게 빌빌 기었을 것이다.
그렇게 기면서 가주의 자비를 바라며, 얌전히 버리는 패로 쓰이는 게 차라리 생존율이 높다.
지금처럼 가주에게 대항하는 것보다는.
그 사실을 그녀는 모르고 있었다.
‘아마 그녀에게 있어 가주는 온전한 아군이기 때문이겠지.’
가족 사이. 서로 반목하는 경우는 있어도 적대하는 경우는 없는.
그렇기에 그녀는 시안의 속내를 알지 못했다.
시안은 그들의 가족이 아니었으니까.
“초콜릿도 줬는데…….”
체샤가 실망했다는 듯이 축 늘어졌다.
“나중에 한 상자 사주지.”
“한 상자? 진짜로?”
“진짜로.”
그 말에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아그리드의 영애라는 사람이 초콜릿 한 상자 정도로 기운이 든 것은 아닐 테지.
그냥 이 말을 계기로 방금까지의 대화는 털어버리겠다는 뜻이리라.
“후, 알았어요. 오라버니가 싫다면 어쩔 수 없죠.”
그녀가 탈탈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런 그녀를 배웅하기 위해 시안 역시 일어났고.
그때, 일어선 그를 체샤가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나저나 진짜 똑같다.”
본래의 시안과 똑같다는 얘기겠지.
그럴 수밖에. 그러려고 12년간이나 길러진 것이 자신이 아닌가.
“5살 때부터라고 하셨죠? 그때부터 지금까지 오라버니랑 완전히 똑같은 얼굴로 사신 거네요.”
“그런 셈이지.”
그녀가 다 먹은 초콜릿 봉지를 잘 접어서 주머니에 넣었다.
그녀의 것만이 아니라 시안의 것도 받아가더니 똑같이 넣었다.
고급 포장지를 수집이라도 하고 있는 건가?
“그래도 앞으로는 달라지겠네요. 더 이상 나이를 먹지 못하는 오라버니랑은 다르게 오라버니는 계속 자랄 테니까.”
“…….”
“저 갈게요.”
그렇게 한마디 남기고는, 그녀가 수련장을 떠났다.
그 등을 배웅하며 시안이 눈을 깜빡거렸다.
“하.”
이내 그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이것도 그녀의 감이 좋기 때문일까?
가주랑 다르게 버리지 않을 테니 자신의 손을 잡으라는 제안도 그렇고, 이 마지막 말도 그렇고.
‘하인들이 그녀를 아끼는 이유를 알 것 같군.’
사람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하는 재주가 있는 아이였다.
* * *
시안의 수련장에서 나온 체샤는 방으로 향하지 않고 곧바로 자신의 수련장으로 향했다.
그때.
“참으로 건방진 놈이더구나.”
어떤 노파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분명 이곳엔 그녀 혼자뿐이고 아무도 없는데도, 그럼에도 목소리는 선명했다.
“건방지다뇨? 오라버니가요?”
“그래. 모처럼 네가 먼저 손을 내밀어주었는데 감히 그걸 거절해? 건방진 게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아버님에 대한 충성심이라잖아요.”
“쳇, 그놈의 충성심은. 염노 그놈은 대체 어떻게 교육을 시켰는지, 애가 아주 인형 같더구나.”
“인형이 아니라 사람인데.”
“말이 그렇다는 거지 말이!”
노파가 구시렁거리며 불평을 내뱉었다.
그 말에 적당히 추임새를 넣어주며 체샤가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부스럭부스럭.
거기서 나온 것은 아까 먹었던 것과 똑같은 포장의 초콜릿이었다.
“뭐 괜찮아요.”
그녀가 부스럭 포장지를 열었다.
“결국엔 저한테 올 수밖에 없을 테니까.”
“체샤…….”
노파가 말끝을 흐렸다.
자신감의 발로.
비록 아직은 근거가 빈약한 자신감에 불과했지만 그녀는 자신 있었다. 반드시 그렇게 만들고 말겠다는 자신이.
그리고 그것은, 노파가 생각하기에, 가문의 후계자로서 가장 필요한 덕목이었다.
그녀가 입에 초콜릿을 가져갔다.
그러곤.
“과자는 하루에 하나씩이라고 말하지 않았느냐.”
“…….”
노파의 지적에, 조용히 그걸 내려놓았다.
쳇. 오라버니랑 먹은 건 카운트 안 할 줄 알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