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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36화 (36/188)

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36화

다음 날.

시안은 가문의 하인이 운전하는 마차를 타고 본성을 나섰다.

가주가 있는 옆 마을로 찾아가기 위함이었다.

마차는 평소 시안과 염노가 타는 투박한 것이 아닌 부담스러울 정도로 장식이 되어 있는 마차였다.

시안이 마차를 대기시키라고 했더니 하인이 굳이 이 마차를 가져왔다.

아마 본래의 시안이 이런 마차만 고집했었기 때문이겠지.

긴장하며 발발 떠는 하인에게 바꿔오라고 하기도 뭐해서 시안은 그냥 그 마차를 타고 가주를 보러 가고 있었다.

다만 마차에 타고 있는 건 시안뿐만이 아니었다.

“넌 왜 따라와?”

시안이 앞자리에 마주 앉아 있는 그녀를 보며 얘기했다.

“그냥요.”

체샤였다.

그녀는 어제와 달리 하얀 셔츠에 검은 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허리춤엔 검 한 자루.

“어제 했던 얘기 있잖아요.”

“무슨 얘기?”

“오라버니가 제 오른팔이 되면 어떨까 하는 얘기요.”

시안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오른팔이라니……. 그녀의 부하가 되라는 제안은 받았었지만 오른팔이라고까지는 얘기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하지만 뭐, 무슨 화제인지는 대강 알겠다.

“그거라면 거절하지 않았나?”

“오라버니가 거절한 이유를 생각해 봤어요.”

시안의 눈에 이채가 흘렀다.

이 맹랑한 아가씨가 어떤 답을 내놓았을지 흥미가 생겼다.

“말해봐.”

“음 그게요. 아무래도 저랑 오라버니 사이에 아직 신뢰가 덜 쌓여서 그런 것 같아요.”

시안이 눈을 깜빡였다.

“뭐?”

“신뢰요. 우린 실제로는 어제 첫 만남이었잖아요. 신뢰도가 0인데 그런 제안을 해봤자 거절당하는 게 당연하잖아요? 그쵸?”

시안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신뢰가 덜 쌓였단 것은 맞는 말이다만 거절한 이유가 거기에 있는 건 아닌데.

“그래 봤자 소용없어. 네가 목적을 이루려면…… 그래, 가주님께서 나이를 먹어 은퇴하고 나시면 가능할지도.”

“은퇴 전엔 안 돼요?”

“안 돼.”

“그럼 만약 제가 아버님이 빨리 은퇴하도록 도와드리면요.”

“체샤…… 빈말로라도 그런 말은 하지 마라. 특히 이런 바깥에서는.”

시안이 미간을 짚었다.

물어뜯기 좋아하는 이들이 들었다간 환장할 말이었다.

“이상한 뜻으로 하는 말 아니에요. 제가 아버님의 예상보다 훨씬 성취가 빠르면 아버님도 일찍 은퇴하실 수 있잖아요.”

“그건 뭐…….”

그거야 그럴 수도 있겠다만, 그래도 여전히 현실성은 없는 말이었다.

아그리드의 현 가주, 베르페드 아그리드.

그는 가문의 역사를 뒤져봐도 첫손가락에 꼽힐 만한 사람이다.

고금을 통틀어 가장 강했던 사람들 중의 하나.

그런 가주의, 눈에 차는 정도도 아니고, 예상 이상의 성취를 보인다는 것은 지난한 일일 것이다.

“괜찮아요. 저는 옛날부터 마음만 먹으면 뭐든지 할 수 있는 아이라는 얘기도 많이 들었어요.”

“누구한테?”

“음. 메리한테도 들었고 돌로레스 선생님한테도 들었고, 소피 할망한테도 들었고…….”

메리는 가문의 하녀고 돌로레스는 체샤를 가르치는 선생 중에 하나다.

소피 할망은 누군지 모르겠지만, 어찌 됐든 그런 이들이 체샤의 재능을 완벽히 꿰뚫어 봤을 것 같지는 않았다.

어린애 기를 세워준다고 적당히 한 칭찬이겠지.

“그래그래.”

시안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이제는 그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깨달은 그였다.

말의 절반 정도는 흘려들어도 괜찮다.

“정말인데.”

그녀가 불만스럽게 볼을 부풀렸다.

“그래. 믿는다니까.”

하지만 이미 깨달음을 얻은 시안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그가 가방 속에서 책 한 권을 꺼내 들었다.

교양용으로 염노가 틈틈이 읽어두라고 했던 문학 작품 중 하나였다.

그 뒤로도 체샤의 재잘거림은 멈추지 않았다.

그것에 적당히 대꾸해 주며 페이지를 넘기고 있으려니.

―도착했습니다.

마차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아그리드 영지에 속해 있는 마을 중에 하나.

천둥마탑이 자리해 있는 커다란 도시였다.

* * *

가주가 있는 곳은 천둥마탑의 꼭대기.

그곳의 대회의실이었다.

천둥마탑의 마탑주인 클로드와의 회담이 오늘의 일정이었다고 한다.

회담 내용은 뭔지 모른다. 큰일은 아니라고 했으니 대충 영지의 발전 방향과 같은 것이었겠지.

또각, 또각.

마탑의 수많은 마법사들과 직원이 업무를 보고 있는 저층을 지나쳐 시안과 체샤가 꼭대기로 올라왔다.

그곳의 대회의실로 향하는 복도.

가주를 보러 가던 두 사람이 한 노인과 마주친 것이 바로 이곳에서였다.

“호오, 이게 누구신가. 후작의 아들딸내미들이 아닌가? 아빠 만나러 왔나?”

천둥마탑주 클로드 데 칸.

하이마스터의 경지를 쉴 새 없이 두드리고 있는 마스터급의 마도사.

몇몇의 마법사를 뒤에 거느린 채 그가 둘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시안 아그리드입니다. 얘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탑주님.”

“체샤예요.”

“으하하하! 이거이거 애들이어서 그런가 풋풋하고 좋구먼. 그 목석같은 애비한테서 이런 귀여운 아이들이 나올 줄이야.”

클로드가 폭소를 터뜨렸다.

그리고 그 뒤에서, 마법사들이 두 사람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아니 정확히는 두 사람이 아닌 한 사람. 시안을 향해서.

‘저게 그 시안 아그리드…….’

‘버릇없는 건달 같은 놈이라고 하던데…….’

‘탑주님은 왜 이렇게 환대하는 거야? 방금까지 아그리드 후작하고는 그렇게 신경전을 벌였으면서.’

오전의 회담에서 분위기는 결코 좋지 않았다.

영지의 주인인 아그리드 후작과 그 영지에 살고 있는 천둥마탑의 탑주.

어떤 사안에는 분명히 손을 잡을 수밖에 없는 사이지만, 어떤 사안에는 적대할 수밖에 없는 사이다.

오늘의 회담 내용은 후자였다.

그러나 탑주가 저러고 있는데 일개 마법사들이 대놓고 불평을 할 수도 없는 노릇.

그냥 뒤에서 분을 삭이고 있는 게 그들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시안 꼬맹아. 언젠가 꼭 한 번 얘기를 나눠보고 싶었다.”

“저와 말입니까?”

“그래. 듣자 하니 그레이트 힐에서 고블린 킹을 사냥했다며?”

클로드의 입에서 고블린 킹을 잡았던 얘기가 나오자 뒤에 있던 마법사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어린아이가 고블린 킹을 잡았다고?

아직 17살인데?

“운이 좋았습니다.”

“택도 없는 소리! 그걸 누가 운이라 생각할까. 그래서 말인데, 혹시 마법에 관심 없나?”

“네?”

“마법 말야, 마법.”

싱글거리며 얘기하는 클로드를 보며 시안이 살짝 눈을 찌푸렸다.

“저는 검사입니다. 천둥마탑에 소속할 수는 없을 거 같은데요.”

“마도의 진리를 걷고자 한다면 손에 든 게 검이든 지팡이든 무에 중요할까. 뭣하면 마검사 같은 느낌으로 어때? 세 보이고 좋지?”

“…….”

“그리고 듣자 하니 시안 꼬맹이는 정령도 가지고 있다며? 그것만으로 탑에 들어올 자격은 충분하지. 정령과 어떻게 계약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힘을 키워볼 생각은 없나? 내 그쪽 부처에 잘 말해보지.”

“아뇨 그럴 필요는…….”

시안이 쓴웃음을 지으며 손을 저었다.

자신에 대해 참으로 관심도 많은 노인이다.

뭐 마탑이 자리한 영지의 차기 후계자―대외적으론―니까 당연한 일이긴 하겠지만.

“그래? 나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제안 자체는 감사할 따름입니다. 단지 아직 검의 단련조차 미흡한 몸입니다. 그걸 놓고 어찌 진리의 탐구에 매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얘기가 아니라 말이지. 왜 그런 거 있잖나. 가문에만 매여 있으면 답답하거나 그런 거.”

클로드가 한 발짝 그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방금까지의 우렁찬 목소리와는 다른 조용한 어조로 얘기했다.

“가령 가문에는 모르게 무언가 이루고 싶은 게 있다거나…… 그런 건 없나?”

“…….”

시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글쎄요. 딱히 없어서 잘 모르겠군요.”

“그런가? 한창 그럴 나이대라 생각했는데 아쉽군.”

클로드가 웃으며 물러났다.

그러나 웃고 있는 그 입가와 다르게,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그 눈이 시안을 남김없이 살폈다.

모든 것을 꿰뚫어 보겠다는 듯이.

그 뱀과 같은 시선 앞에서 시안은 그저 조용히 서 있을 뿐이었다.

잠깐의 침묵이 흐른 후.

“할아버지.”

둘 사이에 가느다란 손이 끼어들었다.

체샤였다.

“오라버니는 제가 먼저 찜해놨으니까 다른 사람이나 찾으세요.”

“으응?”

갑자기 끼어든 체샤를 보며 클로드가 눈을 끔뻑거렸다.

그와 시안 사이의 긴장감이 단숨에 사라졌다.

당돌한 체샤의 모습을 보며 클로드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그렇다면야 어쩔 수 없구만. 꼬맹이는 좋겠어. 이렇게 따라주는 여동생이 있으니.”

“예 뭐…….”

“알겠다, 오늘은 이만 가지. 감세.”

클로드가 마법사들을 거느리고 떠나갔다.

유독 ‘오늘은’이란 말에 방점이 찍힌 것 같은 건 착각일까?

“오라버니. 혹시 절 차 놓고 저런 할아버지한테 흔들린 건 아니죠?”

“안 흔들렸어.”

쫑알대는 체샤를 데리고 시안이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래도 덕분에 클로드를 쫓아내기는 했다.

천둥마탑이라는 카드는 확실히 매력적이긴 하나, 그곳에 들어간다거나 할 수는 없는 입장이니.

그래도 안면을 튼 것은 확실한 수확이다.

클로드의 인상과 성향을 머릿속에 새겨 넣으며 시안이 대회의실로 향했다.

그리고 문을 열고 들어가자, 그가 보였다.

아그리드의 가주.

검에 있어서 이미 일가를 이룰 경지라는 평이 따르는, 제국제일검의 칭호를 받은 남자.

검왕 베르페드 아그리드.

그가 시안을 보더니, 이윽고 그를 뒤따라오는 체샤도 보았다.

“체샤. 넌 나가 있거라.”

“아직 오라버니랑 신뢰도 덜 쌓았는데.”

“…….”

가주가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한 번 참아주는 것에서 벌써 두 사람이 가족이란 것이 느껴졌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한 번 말한 걸로 이미 끝이었을 테니까.

“넵.”

그걸 알기에 체샤 역시 빠르게 사라졌다.

한 번 안 된다고 하면 절대 안 되는 아버지란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체샤가 나가고 회의실에는 가주와 시안만이 남았다.

“저 아이가 무척 따르는 모양이군.”

“예.”

시안이 잠시 그를 보았다.

가주의 눈빛.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미 가주는 체샤가 자신에 대해 모든 것을 눈치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실은 아가씨께서 제 정체를 알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래?”

“예. 어제 수련장에서…….”

그래서 얘기했다.

겉으로 자신은 어디까지나 충성스러운 부하이다. 부하의 덕목은 어떤 사사로운 일에도 보고를 놓치지 않는 것이 아니던가.

시안이 어제 체샤와의 일을 모두 얘기했다.

심지어 그녀가 자신을 스카우트하려고 했단 것까지.

후계인 딸이 대놓고 반기를 들었다는 얘기를 듣는데도 가주는 담담하기만 했다.

그가 얘기했다.

“그 아이는 예전부터 물건을 버릴 줄 모르는 아이였지.”

“그랬었군요.”

시안이 말을 이었다.

“필요 없어진 물건은 제때 버려야 집안이 깔끔해질 텐데요.”

함축적인 의미가 담긴 말.

가주가 시안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러곤 대뜸 얘기했다.

“너는 아직 필요한 물건이더냐?”

예상 이상으로 직설적인 발언이었다. 숨길 생각도 없어 보이는.

하긴, 이 오만한 남자가 자신 같은 말단의 눈치를 볼 리가 있겠는가.

시안이 가주와 눈을 마주쳤다.

필요라…….

그러고 보니 어제 들었던 의문점이 있었지.

―예전부터 아버지가 이런저런 말을 많이 해주셨는데…….

체샤가 했던 얘기.

그 자체론 별다를 것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가주의 성정을 아주 잘 알고 있는 시안은, 그 말을 듣자마자 위화감 하나가 스쳤다.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말해보거라.”

이 남자가, 과연 후계도 아니었을 옛적의 딸에게 덕담이나 교육 같은 것을 베풀던 남자였을까?

그럴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예전부터 들었다던 체샤의 말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그리고 또 하나. 그동안 정말 오래도록 품고 있었던 의문.

도대체 가주는, 어째서 후계자인 장남이 방종을 일삼으며 엇나가는 것을 방치한 것일까.

어젯밤, 전혀 관련이 없는 이 두 가지의 의문이 뒤섞이더니 시안에게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오르게 했다.

혹시 처음부터.

“처음부터 후계자는 아가씨였던 겁니까?”

자신은 물론, 사고로 죽은 망나니 시안조차도.

애초부터 체샤를 가리기 위한 장치가 아니었을까?

가주의 피를 누구보다 짙게 이었다던 그 아이를 가리기 위한.

“…….”

그 말을 들은 베르페드가 침묵했다.

그러곤,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 지었다.

“쓸 만하군.”

이 집에 주워지고 12년.

12년 동안 길러지며 처음으로 보는 그의 웃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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