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40화 (40/188)

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40화

교외수업의 일정이 종료되고 학생들이 돌아왔다.

몇몇 부상을 입은 이들은 있지만 다행히 죽거나 크게 다친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시안의 교외수업 성적은 B가 찍혔다.

아무래도 범인을 잡은 것은 포함되지 않은 것 같았다. 진짜 범인이라는 증거도 없고, 애초에 배점 기준이 미리 정해져 있기 때문이겠지.

시안의 실력을 생각하면 아쉬움이 남는 점수였지만 그는 별생각이 없었다.

애초에 성적 때문에 아카데미를 다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뭐야? 너 B야? 우린 다 A+인데. 흐흐흐.”

“주, 중간부터라도 왔으면 좋았을 텐데.”

아카데미로 돌아온 이안, 레이나, 드론드와 간단한 회식이 있었다.

굳이 이런 식으로 모일 필요가 있을까 싶긴 했지만, 그래도 그들의 상태를 확인하고픈 마음도 있었다.

자신 때문에 사건에 휘말렸던 아이들이니까.

“오랜만에 아버지를 만나고 오느라.”

“아버님이 과보호가 심하신가 봐?”

레이나의 말에 시안이 적당히 웃어넘겼다.

과보호란 말이랑 가장 안 어울리는 사람이 그 작잔데…… 라고 생각하던 중, 문득 다른 생각이 들었다.

따지고 보면 체샤를 위해 이중 삼중으로 울타리를 두는 것도 과보호 축에 속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다만 그 과보호가 딸이란 존재를 향한 것이 아닌 후계자를 향한 것이란 점이 문제였다.

자식을 위한 과보호와 후계자를 위한 과보호는 염연히 다르다.

전자였다면 아들인 진짜 시안에게도 좀 더 신경을 썼을 것이 아닌가.

“야, 먹어먹어. B 하나가 뭐 대수냐. 다른 수업에서 보충하면 되지.”

교외수업에서 나름의 성과가 있었는지 기분이 좋아 보이는 이안이 음식을 재촉했다.

테이블에는 이미 파티 요리가 한가득 놓여 있었다. 음료는 오렌지 주스와 샴페인, 그리고 가벼운 와인.

“야, 들어봐. 너 가고 나서 어떤 용병들이 같이 탐색해 보지 않겠냐고 찾아와서 말야…….”

음식을 집어 먹으며 그들이 끊임없이 대화를 이어갔다.

휘말렸던 사건에 대해, 그리고 시안이 간 뒤로 유적에서 어떤어떤 일이 있었느냐에 대해.

확실히 처음 만났을 때에 비해 훨씬 스스럼이 없었다.

같은 위기를 겪었던 전우라는 느낌도 있었고, 염노의 인상도 컸다.

인상 좋은 할아버지에게 친하게 지내 달란 얘기를 들으니 조금 더 벽이 낮아진 느낌.

“시안.”

그러던 와중, 이안이 따로 조용히 시안을 불렀다.

“고맙다. 너 없으면 우리 모두 큰일 났을 거야.”

그 말에 시안이 쓰게 웃었다.

그건 틀린 말이다. 애초에 자신이 없었다면 이들이 휘말릴 일도 없었을 테니.

그래도 그걸 말할 수는 없었다.

모든 일을 설명하기 위해선 본래의 시안이 암살을 당했다는 일까지 얘기해야 하니까.

자신이 얘기하고 싶다고 얘기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이안이 묘한 표정을 짓는 시안을 쳐다보았다.

처음 만났을 때는 그냥 별것 아닌 양아치라 생각했다. 소문만 듣고 편견을 가진 것이었지만.

하지만 한 번의 대련을 하고 나자, 그는 높이 솟아오른 벽을 느꼈다.

그 벽은 줄어들기는커녕 유적 안에서 더더욱 커져갔다.

지금까지 본 적이 없던 높은 벽을 마주했을 때, 이안은 스스로에게 조금 놀랐었다.

생각보다 좌절감 같은 것은 전혀 생기지 않았다.

“나, 9위에서 멈출 생각 없다. 네 반지도 언젠간 뺏으러 갈 테니까 잘 간수하고 있어.”

“…….”

생겨난 것이라곤 뜨거운 열기뿐.

강렬한 빛이 스쳐 가는 이안의 눈을 시안이 바라보았다.

언제 어디서나 정상에 앉는 사람은 정해져 있다.

산이 그저 그곳에 있기에 오르는 사람.

벽이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넘고 싶다는 욕망을 불태우는 사람.

―단언컨대 너희들 중에도 나올 거다. 그 어떤 이익도 보상도 없는데도, 자신의 숫자를 못 견뎌 하는 녀석들이.

첫날에 담임인 테일 교관이 얘기한 것이 다른 게 아니다.

어떠한 의무감, 혹은 사명 같은 것으로 벽을 오르는 사람은 결국 어디선가 좌절하고 주저앉게 마련이었다.

단순하고 알기 쉬운 욕망.

사람을 진화시키는 원동력엔 그 이상의 것이 없었으니.

‘1위.’

<1>이 적힌 자신의 반지. 자신도 이걸로 안주할 때가 아니다.

뭐 애초에 안주하겠다는 생각 같은 건 17년 동안 가져본 적이 없었지만.

“나보다 2위나 292위부터 이기고 와야 할 거 같은데?”

“쳇, 말은. 근데 292위는 뭐야? 누군데?”

툴툴대며 대꾸하는 이안을 보며 시안이 피식 웃었다.

그렇게 시끌벅적한 저녁 시간을 보내고.

주말이 되었다.

* * *

푹.

어두운 하수도 안. 마물의 몸에서 붉은 핏물이 분수처럼 솟아올랐다.

마음만 먹으면 피 따윈 보지 않고도 마물을 죽일 수 있는 그였으나, 그는 그러지 않았다.

마물의 뜨거운 피가 닿을 때마다 그의 정신이 더욱 날카롭게 벼려지고 있었기에.

시체를 밟으며 그, 알렌이 앞으로 전진했다. 그러곤 또다시 덮쳐온 마물을 시체로 만들었다.

그다음 놈도, 그다음 놈도, 그리고 다음 놈도.

어느새 그가 걸어온 길은 마물들의 시체로 빼곡히 메워져 있었다.

“후우―”

모든 마물을 처치하고 그가 짙게 한숨을 내쉬었다.

숨에 담긴 뜨거운 열기가 차디찬 하수도 안에서 옅게 퍼져 나갔다.

그가 문득 옆쪽에 졸졸 흐르고 있는 물줄기를 바라보았다.

그곳에 비친 자신의 얼굴.

“…….”

평상시의 그의 모습에선 결코 찾아볼 수 없는, 붉게 충혈된 섬뜩한 눈빛.

그가 흠칫 몸을 떨었다.

비록 ‘혈석’의 힘을 받은 마물의 눈과는 달리 생리현상으로 붉어진 것일 뿐이었지만.

그럼에도 그가 혐오하는 붉은 눈의 마물들을 연상시키기엔 충분한 모습이었다.

―화륵. 화르륵.

“그래. 미안……. 정신 차릴게.”

알티마의 질책을 들으며 그가 눈을 감고 호흡을 골랐다.

후우.

크루거 가의 호흡법으로 숨을 들이마시며 그가 심신을 진정시켰다.

―꼬마야, 이걸 익혀보거라. 너의 세상을 조금은 넓혀 줄 거란다.

아직 어린 시절, 갈 곳 없는 격정과 증오만이 몸을 감싸던 그때.

크루거 백작을 만났던 것은 그때였다.

이미 그는 알티마의 마나를 받았기에 크루거 가의 마나를 새기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 호흡법은 그때나 지금이나 충분한 효능을 보여주었다.

분노에 잠식되던 그의 마음이 조금씩 진정되고 있었으니까.

“더 들어가 보자.”

―화륵?

“괜찮아. 이제 진정했으니까. 조사만 조금 하다 갈게.”

그가 점점 더 깊숙이 발걸음을 옮겼다.

도시 전역을 두르고 있는 하수도는 그 혼자 조사하기엔 지나치게 넓고, 또 복잡했다.

심지어 에버웨일은 과거 고대의 유적이었던 곳에 세워진 도시다.

이 아래 하수도에는 그 유적의 잔해까지 얽히고설켜 이 이상 복잡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근래 조사로 그것을 뼈저리게 느낀 그는 단 하나의 기준만 세워 행동하고 있었다.

일단 깊게, 지하 가장 깊숙한 곳으로 향해보자.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냥 수상한 무언가가 존재한다면 제일 아래층에 있을 거라 생각했을 뿐.

막힌 곳에 다다르면 돌아가고 갈림길에 다다르면 표시를 해가며, 그가 계속해서 아래로 내려갔다.

얼마간 내려가니 하수도로서의 기능은 없어지고 그냥 지하 미로만이 남았다.

무슨 벽화나 문자 따위가 잔뜩 훼손된 채로 남아 있는.

“여기는…….”

그가 생경한 눈으로 횃불을 들어 주변의 벽들을 살폈다.

아무래도 본격적으로 묻혀 있던 고대 유적의 안으로 들어온 것 같았다.

그렇게 주변을 조사하는 데 여념이 없던 중.

―크르르…….

―크륵…….

―컹! 컹컹!

횃불의 빛이 닿지 않는 저 너머의 어둠 속.

그 어둠 속에 수십이나 되는 붉은 눈동자가 떠올라 있었다.

그 광경에 알렌의 눈이 크게 뜨이며 동시에 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의 눈이 다시 빨갛게 충혈되기 시작했다.

그건 차갑게 가라앉는 분노가 아니라 활활 타오르는 증오였다.

* * *

주말. 밤공기를 맞으며 시안이 도시의 거리를 산책하고 있었다.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뒤쪽의 길목에서 그가 오러를 피어 올렸다.

그 손에 밤하늘의 기운이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좋아. 안정적이군.’

오러. 이른바 검기(劍氣)라고도 불리는, 검사의 상징과도 같은 기술.

오러는 마력으로 인한 신체 강화의 술(術) 중엔 최상으로 취급받는 기술이다.

오러를, 손발을 넘어 또 하나의 의지처럼 자유자재로 운용할 수 있는가 없는가가 진짜 초인과 그렇지 않은 자를 가르는 벽.

‘원래는 잠깐 발현하는 정도가 고작이었는데.’

본래 시안은 일순간 발현하는 것이 전부였다.

심지어 그마저도 약간의 정신집중이 필요했기에 실전에선 도저히 사용하지 못했던 기술.

그러나 염노가 준 영약을 계기로 오러의 발현이 훨씬 안정적이게 되었다.

의지를 일으킴과 동시에 발현할 수 있게 되었고, 장시간 유지해도 전혀 힘이 들지 않는다.

수련장에서 잠시 시험해 본 바로는 위력도 더할 나위 없었다.

이로써 그도 오른 것이다.

진정한 검의 길을 걷기 위한 시작점에.

물론 세상에는 오러를 피우지 못하는 이들이 훨씬 많다. 누군가에겐 하나의 정착점이기도 했다.

그러나 시안에겐 아니다.

위만 보고 있는 그에게 오러라는 것은 스타트라인이지 결코 골이 아니었다.

그의 위에는 아직도 무수히 많은 강자들이 존재하였으니.

―뭐야? 웬 불빛이야?

―불이라도 났나 봐!

‘응?’

그때, 멀찍이 있는 번화가 쪽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그쪽을 바라보니 어두운 도심지 한가운데에 번쩍이는 빛이 보였다.

화재였다.

―야! 물 가져와!

―빨리빨리!

점차 사위가 시끄러워진다.

시안이 그쪽으로 발을 돌렸다. 손 하나라도 도울 게 없을까 하여.

그런데 그때, 그의 발을 멈추게 만드는 것이 있었다.

“찍.”

그가 뒤를 돌았다. 뒤쪽에 보이는 깊게 팬 강줄기. 하수도와 연결되어 있는 그곳에서.

눈이 붉은 시궁창 쥐를 발견했다.

‘알렌이 말한 게 이거였나?’

요새 시궁창 쥐가 들끓는다 하더니 이쪽에서도 한 마리가 튀어나온 모양이다.

시안이 아래쪽으로 뛰어내렸다.

불은 다른 사람이 꺼도 된다. 하지만 마물을 잡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찌익!”

서걱!

놈이 시안을 보고 발광을 하려 했으나 미수에서 그쳤다.

입구 쪽에 아직 더 남아 있을까 시안이 확인 차 다가갔다.

그런데.

[친숙한 기운에 라비가 기뻐합니다.]

막 입구를 들여다보려던 그가 멈칫했다.

익숙한 사념이었다.

‘흑마법사의 기운!’

베리엄을 벨 때 받았던 것과 비슷한 사념.

시안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에버웨일의 한가운데, 이렇게 가까이 흑마법사가 있었다고?

―그러면 다른 점은? 갑자기 놈의 힘이 강해지거나 정신이 이상해 보이거나 그러지는?

알렌의 말이 스쳐 지나갔다.

역시.

그때 알렌의 말과 가주의 말이 겹쳤던 것은 우연 같은 게 아니었다.

그건 흑마법사에 대한 일이었다.

‘알렌은 흑마법사에 대해 알고 있다.’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금 도시에 있는 흑마법사의 뒤를 쫓고 있다.

그렇게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그가 하수도 안으로 들어갔다.

‘발자국.’

그리고 바로 보이는 사람 하나 분의 발자국.

확신할 수는 없지만, 아마 알렌의 발자국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한 시안이, 주저 없이 하수도 안으로 몸을 던졌다.

‘사건이 터진 게 밤이란 게 그나마 다행이군.’

밤시간에 라비의 기운은 3할 이상 증폭된다.

알렌이 쫓는 흑마법사가 얼마나 강한 놈인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알렌을 데리고 몸을 빼는 정도는 할 수 있겠지.

흑마법사를 잡을 수 있느냐 없느냐는 그다음 문제.

지하로 내려가는 그의 몸을, 어둡고 청명한 기운이 감싸오기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