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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43화 (43/188)

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43화

어느 산맥의 동쪽 깊은 곳.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그곳에.

한 일족이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은 선대로부터 내려오는 푸른 구슬을 지키며 세속과 일절 연을 갖지 않은 채 그들끼리 살아가고 있었다.

그 생활에 진저리를 내며 뛰쳐나갔던 일족의 한 여인.

그 여인이 푸른 머리칼의 아이를 안고 돌아온 것은 어느 비 오는 날의 일이었다.

―제발…… 아이만은…….

병이었을까, 아니면 고된 여정으로 생명의 불꽃이 다한 것일까.

여인은 며칠 가지 않아 죽어버렸고, 오직 아이만이 남게 되었다.

이제 1~2살은 됐을까 싶은 작은 아이.

―배신자의 아이다.

―족장님. 그것이 아이의 죄는 아니지 않습니까?

멋대로 마을을 뛰쳐나간 배신자의 아이다.

그러나 그건 어린아이와는 관계가 없는 일이었다.

―아비가 누군지도 모르지 않느냐?

―어미는 누군지 잘 압니다. 그녀는 어린 시절 제 앞집에 살았었습니다.

아이의 아버지가 누군지 단서조차 없었다.

하지만 죽어가는 순간까지 아이의 이름만을 되뇐 그 여인은 과거 그들의 이웃이며 가족이었다.

―……그 녀석은 네 약혼자였다. 널 배신하고 뛰쳐나가 아이를 만들어 온 것이다. 그 아이를 받아들이겠단 말이냐?

―족장님만 허락하신다면, 제가 책임지고 길러내겠습니다.

―허락하지 않으면?

―아이와 함께 마을을 나가겠습니다.

―…….

고집하면 둘째가라면 서럽다는 늙은 족장도, 이날만큼은 남자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족장의 암묵적인 공인 하에 아이는 마을에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남자의 손에서 무럭무럭 커갔다.

홀로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무척이나 버거운 일이었으나 다행히 이웃들이 많은 도움을 주었다.

마을을 뛰쳐나간 여인이 괘씸하기는 해도 아이에겐 죄가 없다는 것이 마을 사람들의 공통된 인식이었다.

단 한 명, 족장만 제외하고.

―아빠. 족장님은 날 싫어하시나 봐요…….

―그렇지 않단다. 그냥 조금…… 그 뭐냐, 무뚝뚝할 뿐이야.

―나만 볼 때마다 찡그리시는데도요?

―네가 너무 귀엽고 이쁘게 생겨서 그런 거겠지, 하하.

―정말요?

친절한 마을 사람들과 아비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아이는 자라났다. 밝고 활기차게.

늙은 족장이 무섭고 불편하다는 것 외에 아이에겐 아무 고민도 근심 걱정도 없었다.

그리고, 그날이 찾아왔다.

―아아아악!

―도, 도망쳐! 빨리!

―괴물이야!

마을이 불타고 있다.

지옥의 화마와 같은 불의 파도가, 나약한 인간 따위는 모두 쓸어버리겠다는 듯 자비 없이 그들을 덮쳤다.

그리고 그 화마를 일으킨 이는 단 한 사람이었다.

핏빛처럼 붉게 물든 흰자와 심연과도 같은 검은 동공을 가진 끔찍한 남자.

―이쪽으로! 이쪽으로 오거라!

―아, 아빠!

아비는 아이를 데리고 급하게 어딘가로 향했다.

어른이 되기 전까지는 결코 들어가지 말라고 했던 마을의 금지(禁地).

죽어가는 이웃을 보며 눈물범벅이 된 아이가 아비의 손에 이끌려 금지에 발을 디뎠다.

그곳에는 또 한 명. 족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족장님! 마, 마을이! 흑, 흐아아아앙!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는 아이의 앞에서, 족장은 등을 보인 채로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족장이 나직하게 물었다.

―알렌.

―예, 예?

―어미에 대해 기억나는 것이 있느냐?

―아, 아니요. 모르겠어요.

어째서 이런 상황에 어머니에 대한 것을 묻는 것일까. 그런 간단한 의문조차 품지 못할 만큼 어렸을 때였다.

그냥 무서운 어른이 물어보니 그대로 답하는 것일 뿐.

족장이 한 번 눈을 감았다 뜨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오랜 회한이 느껴지는 한숨을.

―네 어미는 정말 어리석은 이였다. 속세에 나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단 말이더냐.

―예, 예?

아직 아이는 이런 말을 알아들을 나이가 아니었다.

―어리석구나, 어리석어. 삶이란, 행복이란 바깥에서 찾는 것이 아니거늘. 그 어디에 있다 하더라도 자신에게서 찾는 것이 행복이라 불리는 것이거늘. 가족, 이웃, 약혼자와의 연까지 모두 끊으면서 바깥세상에서 무엇을 보고자 했단 말이더냐.

―……저는 이해합니다. 그녀는 자유로운 영혼이었습니다.

―네가 이해해서 무엇하느냐. 결국 그렇게 죽어버린 것을.

어른들의 어려운 얘기는 잘 몰랐지만 하나는 알 것 같았다.

자신의 어머니를 나쁘게 말하고 있다는 것.

얼굴도 모르고 기억조차 없는 어머니였지만, 그래도 참을 수 없었다.

아이가 매일 밤 잠자리에서 상상하는 어머니는 무척이나 상냥하고 자신을 사랑해 주는 존재였다.

―엄마는 착한 사람이에요!

―아니. 어리석은 여자다, 어리석은 여자야. 어리석은…….

……어리석은 딸내미 같으니라고.

아이가, 족장의 중얼거림을 이해하게 된 것은 훨씬 나중의 일이었다.

한동안 눈가를 짚은 족장이 몸을 일으켜 제단 위의 푸른 구슬을 꺼내왔다.

그걸 아이의 손에 쥐여주었다.

―이걸 너에게 맡기마.

―조, 족장님?

―받으렴, 알렌. 마을 사람들 모두가 동의한 일이란다. 가장 어린 네가 사는 것이 옳다며.

―아빠?

영문을 모르는 아이에게 족장과 아비가 강제로 푸른 구슬을 안겨주었다.

족장이 수인(手印)을 짚으며 뭐라 중얼거리자 구슬에서 푸른 불꽃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푸른 수호자시여. 부디 이 아이를…….

―알렌. 너의 행복을 찾거라. 네가 사랑하고 너를 사랑해주는 이를 만나 다시 가족을 만들거라. 행여나 복수 같은 것은 생각도 하지 말고. 알겠니?

그게, 그들과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 * *

검은 나뭇가지 같은 것이 수백 갈래로 뻗어 나간다. 그것들이 날카로운 가시를 세워 사방에서 알렌을 덮쳐들었다.

알렌이 힐끔 그것을 보더니 손가락을 튕겼다.

[ 대염위(大炎威) - 폭쇄(爆碎) ]

콰과과과과광!

온 사방은 물론 바닥과 천장까지 육면을 모두 감싸고 있는 불의 감옥에서 검은 나뭇가지가 터져 나갔다.

폭발과 함께 그 불꽃이 나뭇가지를 타곤 다크 이터에게 다다랐다.

놈이 다급히 스스로 나뭇가지를 끊어보지만, 이미 늦었다.

“끄아아아아아악―!”

철퍼덕.

벌레처럼 나가떨어지는 녀석의 모습을 알렌이 내려다보았다.

어둡고 칙칙한 열기가 뚝뚝 떨어져 나오는 표정으로.

놈이 바닥에서 꿈틀거리는가 싶더니, 기습적으로 알렌을 향해 무언가를 쏘아냈다.

맹독이 뚝뚝 떨어지는 가시.

그러나 그 가시는 알렌에게 닿기도 전에 허공에서 불타 사라졌다.

“젠장……!”

다크 이터가 땅을 차 거리를 벌렸다.

하지만 아무리 거리를 벌려봐야 결국 알렌의 손아귀란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이 공간 전체가 그의 불꽃으로 막혀 있었으니까.

다크 이터의 입이 일자로 다물어졌다.

‘이 이상 낭비하면 손핸데.’

이미 3백 이상의 마물이 당했다.

1천의 마물 중에 벌써 1/3이 당한 것이다.

마물을 보충하는 것은 일도 아니긴 하다만, 그렇다 해도 고작 한 녀석에게 300이나 당한 것은 확실한 손해였다.

그렇다고 당장 꺼낼 수 있는 하급 마수들만으로 이 상황을 역전시킬 것 같지도 않았다.

‘너무 조급했나? 이딴 반푼이의 몸에 강림해 버리다니.’

조금 더 공을 들였어야 했다.

천천히 시간을 들여서, 이 몸뚱이를 개조하고 상황도 완벽히 가다듬은 다음에 강림을 했어야 했다.

그래야 더 고위급의 마물을 꺼낼 수 있는데.

급한 마음에 몸뚱이가 정신줄을 놓은 틈에 파고드느라 이리도 불완전하게 강림할 수밖에 없었다.

“조용하군. 아까까지 시끄러웠던 건 다 어디 갔지?”

“……뭐?”

“결국 잘난 건 말뿐인가?”

까득.

데릭 교수의 목에 난 입이 까드득 이를 갈았다.

자신의 본신 앞에선 벌벌 떨며 똥오줌이나 지릴 하찮은 녀석에게 이딴 모욕을 듣다니!

“이 새……!”

쾅!

“끄아아악!”

놈이 발끈하며 일어나려던 순간, 그 목덜미가 터져 나갔다.

쾅, 쾅, 쾅!

한 번이 아니었다. 몇 번이나, 몇 번이나. 녀석이 강림한 데릭 교수의 반쪽 몸뚱이를 중점적으로 폭음이 터지고 있었다.

[ 대염위(大炎威) - 천(千)의 불꽃 ]

콰콰콰콰콰콰쾅!

새하얗게 보일 정도의 밝은 빛이 계속해서 터져 나가며 다크 이터가 몸을 비틀었다.

신기하게도 데릭 교수의 몸에는 상처 하나 없었으나, 거기 나 있는 입과 살덩이는 흉측하게 지져지고 있었다.

그것을 알렌이 무심한 듯 내려다보았다.

‘악마 녀석들.’

핏빛과 같은 흰자와 검은 동공을 가진 악마의 자식들.

과거 마을이 불탈 때, 그는 이런 분노를 몰랐다.

그의 인생에서 분노란 감정은 존재하지 않았고, 그걸 떠나서 모든 걸 이해하기엔 너무 어렸을 때였다.

분노는 그가 자라면서 한 획씩 새겨져 갔다.

아빠. 할아버님. 레미. 아네샤 아주머니. 폴만 아저씨. 사미 누나. 그 밖에 일족의 모든 가족들.

매일매일 불현듯 떠오르는 그들과의 추억은 그리움과 동시에 그의 마음에 하나씩 상처를 새겼다.

어둡고 찐득한 그 감정은, 순간의 격정으로 그치지 않고 나날이 들러붙어 갔고.

이제 와서 그것은 그와 떼어낼 수 없는 몸이 되었으니.

「알렌…….」

걱정하는 알티마의 목소리도 지금은 멀게만 느껴진다.

눈앞의 벌레를 처치하기 전까진 그치지 않을 감정이었다.

콰콰콰콰쾅!

“끄아아아아악―!”

다크 이터는 더 이상 참기 힘들었다.

이 기이한 불꽃은 표면만을 태울 뿐만 아니라 그의 근원을 파고 들어왔다.

아무리 통각을 차단하고 수를 써봐도 그 무엇도 소용없었다.

정신이 나가버릴 것만 같은 극심한 통증이 끝도 없이 올라왔다.

“젠장! 젠장할!”

그가 증오 섞인 욕지기를 내뱉더니, 이윽고 최후의 한마디를 던졌다.

그의 비장의 수.

어떤 때라도 제 몫을 하는 그 마물의 이름을.

“도플갱어!”

콰아아앙―!

외침과 동시에, 알렌이 기존보다도 더욱 커다란 폭발을 일으켰다.

털썩. 힘없이 바닥에 쓰러진 다크 이터.

그러나.

터벅.

이내 그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렌은 놈에게 시간을 주지 않았다.

콰아아앙!

다시금 놈의 몸이 날아갔으나, 이번에도 놈은 일어섰다. 끝도 없는 정신력이라도 가지고 있는 듯.

그러나 비밀은 다른 곳에 있었으니.

‘죽여 버리겠어!’

데릭 교수의 몸에서 한참은 떨어진 뒤쪽.

검고 작은 새가 뽈뽈거리며 날아가고 있었다.

건물의 잔해의 어둑한 그림자를 방패 삼아 녀석이 알렌의 마법을 빠져나갔다.

제아무리 불완전한 상태로 강림했다곤 하나 이 정도 돌파할 능력은 남아 있었다.

‘안 잊는다. 절대 안 잊어, 파란 머리 애송이!’

자신의 행세를 하며 알렌과 전투를 벌이는 도플갱어를 두고, 그가 작은 새로 변해 도주했다.

당장은 힘을 더 되찾아야 한다. 지금 상태론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는 걸 뼈저리게 깨달았다.

‘일단 나가서 다른 녀석의 몸을 빼앗는다. 저딴 비실한 몸이 아니라 튼튼하고 마력도 빵빵한 놈으로. 그 몸속에서 당분간 힘을 기르고…….’

이곳이 어디더라? 에버웨일?

좋아, 가장 먼저 이곳을 처참한 잿더미로 만들어내 마물들의 화장실로 써주마.

그 화장실의 첫 장식품은 꽃병에 담긴 파란 꼬맹이의 대가리다.

그리고, 그리고…….

“급해 보이는군.”

갑자기 앞쪽에서 들리는 소리에 그가 고개를 들었다.

어두운 통로 안쪽에서 저벅거리며 사내 하나가 나타났다.

“이쪽에서 기다리고 있던 게 정답이었어.”

“넌 뭐야!”

갑자기 나타나 앞을 막는 검은 머리 사내. 그를 보며 다크 이터가 악을 질렀다.

“멜베인!”

그러곤 그에 그치지 않고 마물을 쏘아냈다.

다크 이터의 작은 몸뚱어리에서 거대한 늑대 아가리가 쏘아졌다.

당장에라도 눈앞의 녀석을 씹어 삼키려는 그 마물을.

서걱―

사내, 시안은 너무나도 쉽게 베어냈다.

[친숙한 기운에 흑정령이 흥분합니다!]

그리고 늑대를 구성하고 있던 기운을 흑검이 고스란히 빨아들였다.

다크 이터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경악성을 내질렀다.

“동포였나! 젠장할!”

“…….”

그렇게 녀석이 놀라는 사이 시안은, 침착하게 녀석에게 검을 내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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