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47화
[ 검령(劍靈) – 검륜(劍輪) ]
텅 비어 있는 수련장에서 혼자, 시안이 검을 들고 있었다.
검륜. 회색의 도신에 둥그런 가드, 가죽끈으로 동여매어 있는 손잡이를 가진 평범하게 생긴 검.
휙― 휙휙―
시안이 검을 몇 번 허공에 휘둘러보았다.
자신에게 딱 맞게 커스텀한 흑검과는 다르게 살짝살짝 거슬리는 부분도 있었지만, 크게 모난 검은 아니었다.
길이는 흑검보다 살짝 길고 대신 검신이 더 얇다. 무게 중심은 딱 좋은 수준보다는 좀 더 아래쪽에 쏠려 있다.
때문에 쓰기에는 흑검의 하위호환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 검의 진가는 다른 것에 있었다.
‘복사.’
왼손에 들고 있는 검륜에 오른손을 대고, 두 번째 검륜을 뽑아낸다.
데릭 교수에게 깃들었던 악마를 처치하고 얻은 능력.
녀석이 스스로의 몸에서 끝없는 마물을 뽑아냈듯이 이 검은 검에서 검이 뽑혀 나왔다.
‘몇 자루까지 되려나.’
검의 스펙을 확인할 생각에 시안이 복사한 검을 수련장 바닥에 떨어뜨렸다.
챙-
그리고 새로운 검을 뽑았다. 세 자루째.
그렇게 뽑고 떨구고 뽑고 떨구고.
결과는 상상 이상이었다.
어느새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검은 157자루나 되었다. 왼손에 들고 있는 것과 합치면 158자루나 되는 셈.
‘이 이상은 마나가 모자라는군.’
뽑으면서 알게 된 사실은, 검을 복사하는 것에 마나가 소모된단 것이었다.
지금의 자신의 한계는 158자루. 마나가 올라가면 이 이상 올라가겠지만 일단은 이 정도였다.
‘뭐, 이렇게 뽑아봤자 쓸 데는 없지만.’
물론 이만큼의 검이 필요할 일은 없다.
자신에게 군대나 사병이라도 있다면 긴급 시의 무장으로 활용할 수 있겠지만 그런 것이 있을 리 없다.
당장 그가 쓸 수 있는 건 잘해봐야 2자루다.
간혹 이도류의 검술이 필요해질 때는 쓸 만하겠지.
‘그리고 또…….’
또 한 가지 알아낸 사실은 복사된 검을 그 상태로 각인에 수납이 가능했다.
한 번 복사해 놓으면 다음부턴 굳이 다시 검에서 검을 뽑을 필요는 없다는 뜻.
다음부턴 그냥 각인에서 꺼내 쓰면 된다.
어느 자세에서든 바로 꺼내 쓸 수 있어서 편하긴 하다.
단지 158자루나 쓸 일이 없어서 문제지…….
‘일단은 이 정돈가.’
검륜의 스펙은 얼추 확인을 마쳤다.
활용도는 아직 팟 떠오르진 않지만, 뭐 어디에든 쓸 데가 있겠지.
조금 아쉬운 감은 있었다.
창해를 처음 사용해 봤을 때는 새로운 가능성에 무척 흥분되었었는데, 검륜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베리엄의 악마랑 데릭 교수의 악마랑 그만큼 차이가 난단 얘기겠지.’
라비가 흡수한 기운의 양부터도 크게 차이가 났었지.
베리엄의 기운을 일부 흡수한 것이 데릭 교수의 기운을 전부 빨아들인 것보다 많았으니.
툭툭.
“이봐, 시안 아그리드.”
그때 누군가가 수련장에 방문했다.
돌아보니 나름 반가운 얼굴이 있었다.
“줄리오.”
“잠깐! 대련하러 온 거 아니니까!”
시안이 검을 들고 다가가자 줄리오가 사색이 된 얼굴로 반사적으로 물러났다.
시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왜 왔지?”
“쳇, 대련이 아니면 후배 좀 찾아오면 안 되냐?”
“그거 말곤 너한테 볼 일 없는데.”
“아오- 저 싸가지없는 것 봐. 나 네 선배야!”
“나한테 이기면 형이든 선배든 좋을 대로 불러주지.”
“쓰읍…….”
시안의 얘기에 줄리오의 입이 대번에 다물어졌다.
그가 불만스럽다는 듯 한동안 꿍얼꿍얼거리더니, 이내 용건을 얘기했다.
용건이라 함은 뭐 당연했다.
“데미안 공자님이 부르신다. 잠깐 시간 좀 내라.”
줄리오가 대련 말고 시안을 찾아올 이유는 그것 외엔 없었다.
애초에 대련으로도 줄리오 쪽에서 먼저 찾아올 일은 없긴 했지만.
“그 노…… 형님이?”
반사적으로 그놈이라 튀어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그래. 뭐 별일은 아니고, 비스트 길드랑 숲지기 놈들이랑 시비가 좀 붙었거든.”
“…….”
“그래서 잠깐 와줬으면 좋겠는데.”
데미안이 비스트 길드랑 숲지기 놈들이랑 시비가 붙었다고?
줄리오의 말에 시안이 눈을 찌푸리며 얘기했다.
“……그게 뭔데?”
* * *
옛날에 어떤 철학자가 그런 얘기를 했다.
사람은 언제 어디서든 본능적으로 뭉치고자 한다.
때론 학연으로 때론 지연으로 때론 혈연으로.
그건 아카데미 역시 마찬가지였다.
소메르 제국과 자카르타 왕국, 요정궁 빙하백령 세 곳을 포함해 대륙 곳곳에서 모인 학생들.
그들이 저 셋을 중심으로 뭉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본능이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제국역사연구부, 비스트 길드, 그리고 웨일숲의 숲지기.
아카데미 내 학생들의 내부조직으로, 일단 형식은 동아리의 일종으로 되어 있다.
다만 일반적인 취미 동아리보다 그 규모도 역사도 차원이 다르다.
“그런 게 있었군.”
“그렇다니까. 동아리 찾을 때 당연히 한 번은 들어봤을 텐데 왜 모르냐.”
“동아리엔 관심이 없어서.”
줄리오의 뒤를 따라가며 시안이 대답했다.
그가 알고 있는 동아리라고 해봐야 사냥 동아리, 등산 동아리, 낚시 동아리 이런 것들뿐이다.
취미나 소일거리로 즐길 법한 것들.
조금이라도 시간이 남으면 단련에 투자하기 바쁜 시안에겐 모두 관심 밖의 것이었기에 동아리에 대해선 알아보지조차 않았다.
“몰랐으면 지금부터라도 잘 알아둬. 그 셋이 이 학교에서 가장 큰 조직들이고, 참고로 제국연의 부장은 공자님이다.”
“그랬군.”
제국역사연구부, 줄여서 제국연의 리더는 데미안인 듯하다.
2학년이지만 소메르의 학생 중 그 이상의 강함과 카리스마를 가진 이가 없어서 자연스럽게 추대되었다고.
실제로 데미안은 2학년 중 1위이기도 했다.
참고로 비스트 길드의 리더와 숲지기의 리더는 모두 3학년이라고 한다.
보통 이렇게 3학년이 맡는 것이 관례였다. 데미안이 이례적인 경우고.
“어때. 그분의 대단함이 좀 느껴지냐? 너 같은 게 범접할 분이 아니라고.”
“보나 마나 더러운 뒷공작이라도 했겠지.”
“……쯧. 그러고 보니 넌 공자님 진짜 모습을 알고 있는 녀석이었나.”
어떻게든 자랑을 해보려던 줄리오가 시안의 말에 바로 혀를 찼다.
다른 학생은 몰라도 시안에겐 쥐뿔도 먹히지 않을 말이었다.
“다 왔다.”
줄리오의 말에 시안이 눈앞의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아카데미 부지에 있는 건물 중 하나. 각종 동아리들의 부실과 사무실, 회의실 따위가 위치한 별관이었다.
‘생각보다 크네.’
건물 크기가 기숙사만큼이나 컸다.
아카데미 내의 동아리 활동이 이렇게나 활성화되어 있었던가.
강의동과 수련동, 기숙사만을 전전하는 시안에겐 꽤나 의외인 광경이었다.
“들어와. 최상층 대회의실이다.”
목적지는 꼭대기인 모양. 시안이 줄리오를 따라 승강기에 올랐다.
벽면에 마력이 흐르기 시작하며 두 사람을 태운 승강기가 꼭대기까지 올랐다.
그렇게 들어간 대회의실.
그곳엔 꽤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벽면에 따라 몇 명의 학생들이 셋으로 갈라져 서 있는 것이 보였고, 그리고 가운데 테이블.
그곳에 다섯 사람이 앉아 있었다.
정확히는 세 사람하고 둘.
‘쟤네들도?’
시안의 눈에 이채가 흘렀다.
그 두 사람은 란 아슬라와 유설이었다.
“오오, 시안! 잘 왔다 잘 왔어. 자, 여기 앉거라.”
데미안이 그를 반기며 자신의 옆자리를 탕탕 쳐댔다.
대번에 쏠리는 시선에 눈을 찌푸리면서도, 시안이 그곳으로 가 앉았다.
여기서 거절할 거면 애초에 이런 장소는 오지도 않았다.
“호오! 그 녀석이 그 유명한 시안 아그리드군! 생각보다 사내다운데!”
“사내답기는. 그냥 딱딱해 보이기만 하는데.”
“남자라면 응당 묵직한 맛이 있어야지!”
“하여간 이래서 머리 굳은 고릴라들은.”
“뭐라고!?”
시안이 자리에 앉으며, 시끄러운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한쪽은 란 아슬라의 옆에 앉아 있는 수인족.
비스트 길드의 리더 쿠르간 델피아.
그 목소리만큼이나 덩치도 큰 사내였다. 앉아 있는 의자가 어린애용 의자로 보일 정도로.
그런 주제에 머리에는 무슨 앙증맞은 토끼 귀가 달려 있는 것이 보였다.
토야족의 토끼 수인.
저 구릿빛 덩치에 토끼 귀라니. 그나마 흰색이 아니라 갈색인 게 다행인가.
토야족이라 그런지 특히 하체가 더 두꺼운 모습.
근육이 발달한 모양새만 봐도 각법(脚法)에 상당한 조예가 있는 것이 보였다.
끼고 있는 반지는 백색의 4위.
3학년 중 4위란 뜻이었다.
“흥.”
덧붙여 옆에 앉아 있는 란은 평소와 같이 잔뜩 인상을 쓰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홱 하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여전히 까칠한 녀석이다.
‘다른 한쪽은.’
유설의 옆에 앉아 있는 여자.
웨일숲의 숲지기의 리더 유연.
그녀는, 마치 유설과 쌍둥이처럼 꼭 닮은 생김새였다. 머리 색이나 풍기는 분위기나 차림새나.
다른 점이 있다면 유설의 눈동자는 머리 색과 닮은 백색인 것에 비해 유연의 눈동자는 하늘을 담은 것과 같이 푸르렀다.
그 외로는 표정 하나 없는 유설에 비해 유연은 시종일관 생글거리고 있다는 점 정도일까.
오히려 이쪽이 더욱 반요정다운 모습이다. 그들은 웃음이 많은 종족이니.
유설의 경우가 특이한 것이다.
‘키도 살짝 더 큰 거 같고.’
줄리오의 말에 따르면 둘은 자매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무척 가까워 보였다.
정확히는 유설은 가만히 있는데 유연 쪽에서 들러붙고 있는 느낌.
참고로 그녀의 반지는 백색의 2위였다.
3학년 중에 2위라는 뜻.
“…….”
한편 유설과는 눈이 마주치지 않았다. 그녀는 아까부터 고개를 숙인 채 꼿꼿이 굳어 있었다.
평소답지 않게 긴장이라도 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뭐 평소의 모습을 내가 알고 있는 건 아니지만.’
잠깐 훑어본 것으로 인원의 확인은 끝났다.
시안이 찻잔을 들어 입술을 축였다.
그나저나 이 모임은 대체 무슨 모임인 건지.
뒤에 서 있는 학생들은 그냥 들러리라고 쳐도 테이블에 앉아 있는 6명은 묘했다.
아카데미에서 가장 영향력이 강한 세 명과 그 1학년 후배들.
이 멤버로 무슨 행사라도 할 생각인가?
라고 생각하던 시안이었으나.
“흥, 직접 봐도 역시나군. 우리 란이 최고다.”
“어휴. 뇌로 갈 영양이 다 근육으로 간 걸까, 저 고릴라는? 우리 설아가 여기 있는데 누가 뭐 어째?”
“천박한 짐승 새끼들이 다 그렇지. 눈이 있어도 보질 못하는데 왜 달고 다니는 거지?”
셋 사이에서 흐르는 건드리면 터져 버릴 것과 같은 신경전.
그 가운데서, 시안이 눈을 찌푸리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가 설마 하는 생각에 물었다.
“데미안 형님. 설마 일부러 부른 이유가…….”
데미안이 쿠르간과 유연 쪽으로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저들이 요상 망측한 얘기를 꺼내서 말이다. 감히 널 두고 다른 이가 신입생 중 최고라고 주장하지 않더냐.”
그 대답에 기뻐하기는커녕 시안의 얼굴은 더더욱 구겨졌다.
일부러 이렇게 불러 모은 이유가 그러니까.
‘자랑하려고 불렀다고?’
란과 유설 역시 처음 듣는 얘기였던 듯하다.
각자 열변을 토하는 선배진들과 다르게, 시안을 포함한 후배진들의 얼굴은 한껏 싸늘해졌다.
* * *
“그러지 마 설아야~!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난 그냥 저 원숭이 자식들이 우리 설아를 나쁘게 말하길래 본때를 보여주고 싶어서…… 내 맘 알지? 응?”
“누가 원숭이야!”
“……흥.”
데미안이 가당찮다는 듯 코웃음 치며 시안의 반지를 가리켰다.
잿빛의 1위의 반지.
“이 이상의 증명이 필요한가?”
반박은 쿠르간에게서 들어왔다.
“하! 잘 차려진 무대에서 변수 하나 없이 겨뤄서 얻는 그따위 순위에 무슨 의미가 있지? 전장은 무대 위에 있지 않다.”
“아- 그래서 네 순위가 고작 4위인 건가?”
“뭐 인마!”
“어휴~ 어차피 설아한테 다 처발릴 애들이.”
한창 그렇게 노려보던 세 사람이 이윽고 쾅! 책상을 내려치며 외쳤다.
“란! 다 밟아버려라!”
“부탁해, 설아야!”
“미안하다 아우야. 내가 미처 저들을 계몽하지 못해 너를 귀찮게 만들었구나.”
그러나 그 직후 흐르는 것은 싸늘한 침묵뿐.
그걸 깨고 가장 먼저 박차고 일어선 것은 란이었다.
“어처구니가 없군.”
그녀가 홱 몸을 돌려 회의장 바깥을 향했다.
“라, 란? 어디 가는 거냐?”
“난 당신들의 투견 같은 게 아냐.”
란이 거칠게 쏘아붙이고는 그대로 회의실을 나갔다. 쾅!
“쿡! 우리 쿠르간은 후배한테 인망도 없네. 설아야~ 넌 언니 말 들어줄 거지? 응?”
“그것이…….”
유설은 조금 머뭇거리는 듯이 보였다만, 어차피 의미 없는 일이다.
시안도 이따위 일에는 흥미가 없었으니까.
“저도 가보겠습니다, 형님.”
“시안?”
“대련은 언제나 환영입니다만, 이런 식의 구경거리가 되고 싶진 않군요.”
딱히 싸우는 것을 남들에게 보이기 싫다거나 그런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싸움이 타인의 사리사욕을 위한 것일 때는 예외다.
안 그래도 후작 밑에 있는 것에 진저리를 내는 시안이 데미안의 자존심 같은 것을 위해서 싸워줄 리가 없었다.
“상대가 없으니 저도 이만…….”
시안이 일어서자 유설이 이때라는 듯이 따라 나왔다.
시안이 슬쩍 그녀를 돌아보았다.
가슴에 손을 올리고 휴우, 한숨을 내쉬는 그녀가 보였다.
그녀와 나란히 회의실을 나가기 직전.
시안이 뒤를 돌아보았다.
후배들에게 모두 차이고 벙쪄 있는 선배 세 사람과 주변의 학생들.
시안이 얘기했다.
“내 실력을 보고 싶으면 당신들이 직접 덤비시죠. 기꺼이 받아들일 테니.”
그 순간 회의실의 공기가 굳었다.
데미안은 둘째 치고, 쿠르간과 유연의 눈빛이 장난이 아니었다.
저 건방진 놈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냐는 듯한 표정.
그 험악한 시선을 뒤로하곤, 시안이 작게 웃으며 떠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