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52화
새벽 달빛이 내려앉은 공터에서 유설이 나뭇등걸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시안이 서 있었다.
“…….”
“…….”
둘 사이엔 말이 없었다. 둘 모두 이 어처구니없는 사태에 머리를 정리하고 있었으니.
[겨울의 뱀이 발을 동동 구릅니다.]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항변합니다!]
덧붙여 프시케는 진작 강림을 풀고 유설의 몸속으로 쏙 숨은 지 오래였다.
당연한 일이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몰라도 그녀는 라비에게 족쇄가 채워졌다.
라비의 앞에 당당히 나설 수 있을 리 없었다.
“웅-!”
정작 그 라비는 시안의 손안에서 자랑스레 으쓱이고 있었다.
시안이 녀석을 살살 쓰다듬자 라비가 시안의 손에 몸을 비벼왔다.
“라비 너, 생각보다 대단한 녀석이었구나?”
“웅!”
시안이 라비를 보면서 웃었다.
유설이 힐끔 그런 시안과 라비를 쳐다보았다.
그러곤 살짝 오물거리다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라비…… 라는 이름인가 봐?”
“그래. 애칭이지만.”
“본명은 뭐야?”
“비밀.”
유설의 입술이 살짝 튀어나왔다. 이렇게 된 마당에도 비밀이라니.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 새벽에 불러내는가 싶더니 갑자기 공격해 목줄을 채우려 했던 것은 자신들 쪽이다.
프시케의 독단이었다곤 하나 그녀는 프시케의 결단과 스스로의 책임을 분리할 생각은 없었다.
“프시케란 녀석, 자신만만하게 구는가 싶더니 생각보다 낮은 녀석이었나 보지?”
“그건…….”
[겨울의 뱀이 몸을 비틉니다.]
[아니야―! 내 위엔 없어―! 아무도 없다고!]
평소보다도 훨씬 직접적인 사념, 그리고 그 내용에 유설이 살짝 눈이 커졌다.
프시케 본인에 대한 얘기를 들은 것은 그녀 역시 처음이었다.
“으음…… 본인 말론 자기 위론 아무도 없다는데…….”
“없다고? 그 녀석이 지옥에서 가장 강한 녀석이란 말이야?”
[그건 아니고…… 동격(格)의 악마들은 몇몇 있긴 한데…….]
지옥의 대군주 중 하나.
겨울의 뱀, 프시케.
그녀는 이렇게 보여도 상당한 격을 가진 악마 중 하나였다.
다만 최고는 아니다. 그녀와 동등한 악마들이 몇이나 있었으니까.
그 모든 설명을 듣고 유설이 고개를 갸웃거리다 말을 전달했다.
“어…… 공동 1등이라는 거 같아.”
간단하기 짝이 없는 요약이었다.
“흠.”
유설이 전한 프시케의 대답에 시안이 턱을 쓰다듬었다.
자신은 분명 프시케가 생각보다 낮은 존재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한다.
그러면, 그런 녀석의 목줄을 채운 라비는 대체 어떤 존재라는 말인가?
[그 녀석, 정체가 뭐야!]
“라비 정체가 뭐냐는데.”
“나도 몰라.”
[발뺌이나 하고―!]
발뺌이 아니라 정말로 몰랐다.
오히려 그가 더욱 묻고 싶다. 라비가 어떤 존재인 것인지.
흑마법사나 악마들을 만나가다 보면 그 정체가 보일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프시케와의 만남으로 더욱 알 수 없어져 버렸다.
“우웅?”
정작 그 장본인은 아무 생각도 없이 방긋 웃기나 하고 있으니.
유설이 작게 한숨을 쉬며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어떻게?”
“난 이제, 아니, 나는 아닌가. 프시케는 이제 너나 라비한테 해코지를 하지 못하게 됐어. 그리고 나는…… 아직은 강림 없이 너를 이길 수 없어.”
라비가 프시케를 묶었다. 하지만 그건 라비와 프시케의 사이에서만 통하는 관계다.
시안이 프시케에게 명령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같은 이유로 라비가 유설을 복종시킬 수도 없다.
다만 이미 저울추는 기울어졌다.
프시케가 무력화된 이상 유설이 시안을 어찌해 볼 수는 없게 되었다.
비밀을 지키는 것도 까발려지는 것도 모두 시안에게 달렸다는 뜻이었다.
조용히 처분을 기다리고 있는 듯 시무룩한 그녀에게 시안이 물었다.
“너는 칠흑마탑의 관계자인가?”
“?”
[?]
시안의 질문에 유설도 프시케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들은 완전히 처음 들어본 단어였다.
유설과 프시케가 만난 것은 칠흑마탑의 마법진이 아니라 가문의 창고에서였으니까.
‘모르는 건가.’
다만 말과 표정뿐으론 확신할 수 없다.
“프시케. 네가 나와서 대답해.”
[뭐? 내가 왜!]
“그러면 믿어줄 거야?”
“그래.”
“프시케.”
[알았어…….]
결국 그녀는 다시 한번 표면에 나와 시안의 질문에 대답했다.
칠흑마탑에 대해서도 흑마법사에 대해서도 전혀 모른다고.
“웅! 우웅!”
“진짜 거짓말 아냐! 이제 됐지!? 나 간다!”
라비가 딴에는 무서운 얼굴로 다시 다그쳤으나 거짓이 아니라고 한다.
그 대답만 마치고는 그녀는 다급히 다시 유설의 안에 들어가 숨었다.
유설도 프시케도 칠흑마탑과 관련이 없다는 것이 확실해졌다.
‘데릭 교수와 같은 케이스였나.’
칠흑마탑에 적을 두고 있지 않으면서 악마와 관계한 자.
자신을 공격한 것도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고 한다.
원래 지옥에선 동포들을 만나면 딱 세 가지 반응밖에 없다고 한다.
약한 쪽이 죽어라 도망가거나, 노예가 되거나, 아니면 잡아먹히거나.
지옥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꽤나 살벌한 장소인가 보다.
“지금은 두 번째 경우겠군.”
[끄으…….]
침음을 토해내는 프시케였으나 그것은 시안에겐 전달되지 않았다.
그는 지금의 이 상황에 대해 고민했다.
프시케에게 목줄을 채웠다는 이 상황을 어떻게 이용할 수 있을까.
그가 턱을 쓰다듬으며 얘기했다.
“그럼…… 이참에 몇 가지 물어봐야겠군.”
일단 당장 해야 할 것은, 지옥이란 곳에 대해 알아보는 것이 먼저였다.
* * *
지옥계란 곳에 대해선 그는 아무것도 모른다. 무언가를 알 만한 라비는 말을 하지 못하고, 가주에게 물어볼 수도 없었다.
그런데 마침 딱 좋은 심문 상대가 나타났다.
본인 말론 지옥에서 최고 서열을 가졌다고 하는 자칭 대군주가.
[흥. 내가 순순히 얘기해 줄 줄 알고?]
프시케가 일단 한 번 튕겨보았다.
그러나 정작 그 사념을 전달하는 유설은 생각이 달랐다.
“뭐든지 물어보래.”
[설아야!]
‘어쩔 수 없어, 프시케. 우리가 약점을 잡혔으니까.’
유설의 말에 프시케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이렇게 된 것도 모두 자신이 라비에게 묶였기 때문이니까.
그것 때문에 결국 유설까지 시안에게 고개를 들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그 사실에 프시케가 참담한 심정으로 고개를 떨궜다.
“시원스레 허락하는군.”
한편 두 사람의 내부사정을 모르는 시안은 만족스럽게 웃을 뿐이었다.
“일단 그것부터 들어볼까. 내가 지금까지 두 놈이랑 싸워봤는데…….”
시안이 처음 질문한 것은 베리엄과 데릭 교수의 악마였다.
놈들의 이름과 능력. 성향이나 그런 간단한 신상 정보들.
[아, 걔들?]
프시케는 별다른 고민도 없이 두 악마에 대해 생각해 냈다.
애초에 지상에 강림을 노릴 정도의 악마는 지옥계에서도 상당히 높은 놈들이라고 한다.
이른바 네임드들.
[일단 그 마물 녀석은 다크 이터네. 잡아먹은 마물을 본인의 몸속에서 기르면서 그때그때 꺼내 쓰는 녀석. 뭐, 허접한 놈이야.]
다크 이터.
데릭 교수의 몸을 잠식했던 악마는 그 녀석이라 한다.
[그리고 물을 조종하던 녀석은…… 으음, 흔한 능력이라 특정하긴 힘든데. 다크 이터보다 강했어 약했어?]
“다크 이터보다 강했냐는데?”
“강했어. 훨씬.”
시안의 대답에 프시케가 잠시 침묵했다.
갑자기 조용해지니 유설이 의아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이내 프시케가 조금 낮아진 목소리로 얘기했다.
[해령궁주. 나랑 똑같이 대군주에 속하는 놈이야. 나보단 훨씬 오래된 놈이긴 하지만.]
해령궁주.
지옥의 대영지 중 하나인 해령궁의 주인.
프시케의 얘기론, 비록 동격이긴 하지만 힘이나 세력이나 그녀보다도 훨씬 강력한 놈이라고 한다.
다만 그녀와는 사는 곳이 떨어져 있어서 만날 일은 없다는 듯.
“해령궁주…….”
시안이 그 이름을 머릿속 깊숙이 박아 넣었다.
다크 이터는 이미 라비가 영혼을 집어삼켰다. 하지만 해령궁주는 그 힘의 편린을 살짝 잘라 먹었을 뿐.
거기에 다크 이터와 달리 칠흑마탑에 관계된 놈이기도 했다.
놈은 지금 이 순간에도 경계 대상이다.
그러던 중, 시안이 무언가를 깨달았다.
‘그렇군. 그때 해령궁주가 강림하지 않았던 건.’
죽어가는 베리엄에게 해령궁주가 강림하지 않았던 이유.
그동안은 추측뿐이었다. 강림에도 리스크가 있다든지 베리엄의 상태가 녀석의 강림을 받을 만큼 만전의 상태가 아니었다든지.
그 이유들이 딱히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좀 더 근본적인 이유를 알아냈다.
‘잘못하면 라비에게 묶일 것 같아서 그랬었군.’
가진 권능은 더욱 강력하다고 하지만 놈의 격 자체는 프시케와 동급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프시케가 라비에게 꼼짝 못 하고 목줄이 채워졌다.
그 말은 해령궁주 역시 섣불리 강림을 했다간 라비에게 당해버린단 얘기.
그걸 경계하여 녀석은 깔끔히 물러났던 것이다.
‘프시케랑 달리 라비를 알아보고 도망갔다는 건.’
아무것도 모른 채 접근했다가 역으로 당해버린 프시케와 달리 해령궁주는 미리 눈치채고 도망갔다는 사실.
그 말은 즉, 녀석이 라비의 정체를 알고 있단 얘기다.
‘라비에 대해 알아내려면 녀석을 붙잡아야 한다는 건가.’
라비에 대한 단서를 발견했다.
다만, 사실 라비의 정체는 그의 목적과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후작의 손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이름을 되찾길 원한다.
그건 라비의 정체와는 직접적인 연관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자신의 이름을 되찾길 원하는 것처럼 라비도 스스로의 정체를 알고 싶어 하지 않을까.
라비에게 직접 부탁을 들은 것은 아니다.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웅?”
뭐 정작 본인은 매일이 행복하고 즐거워 보이긴 했지만.
‘어차피 칠흑마탑을 쫓다 보면 해령궁주에게도 도달할 테니까.’
굳이 둘을 분리할 필요는 없겠지.
어느 정도 정리가 된 시안이 쓰게 웃으며 얘기했다.
“그나저나 이 목줄이란 게 대체 뭐지? 그렇게 무서운 건가?”
[당연하지!]
지옥의 대군주들조차 겁내는 지옥의 강제력.
지상이 핏줄과 종족, 신분 등으로 계급이 나뉘는 것처럼 지옥은 격(格)에 의해 계급이 나눠진다.
그리고 그것은 지상의 계급보다도 훨씬 더 직접적이고 강력한 규칙이었다.
스스로의 존재 자체가 얽혀 있는.
또한 이 목줄은 악마들이 이 지상의 인간을 노리는 이유이기도 했다.
굳이 지상의 인간과 계약을 하여 리스크까지 짊어지며 인간의 몸을 탐내는 이유.
뭐 물론 개중에는 그냥 지상이 마음에 든다든지 그런 속 편한 이들도 있겠지만 보다 진실된 이유는.
[자기보다 윗대가리를 처치하려고 그러는 거야.]
하극상을 위해서.
목줄의 탓에 지옥계에선 좀처럼 하극상이 일어나기 어렵다.
아주 가끔 특수한 경우로 발생하긴 하지만 웬만해선 없다고 봐도 좋았다.
그 특수한 경우 중 하나가 바로 지상의 인간을 이용하는 것이다.
[내가 지금 설아의 몸에 숨어서 네 명령을 피하는 것처럼 인간을 이용하면 직접적인 강제력을 피할 수 있거든.]
“……라고 하네.”
“그거참 까다롭기도 하네.”
시안이 헛웃음을 지었다.
요는 스스로의 손으론 윗놈들을 쳐내기가 힘드니 인간의 손을 이용한다는 말이었다.
지옥의 규칙을 피하기 위해 지상을 우회하는 것.
“별 희한한 시스템이 다 있어. 누가 만든 건데?”
[지옥계가 탄생할 때부터 있었다는데 그런 고릿적 일은 몰라. 난 악마들 중에는 비교적 젊은 축에 속하거든.]
이 격과 서열이란 것은 지옥의 탄생과 동시에 생겨났던 것으로, 지옥에 속한 존재라면 예외 없이 이 강제력에 구속된다.
물이 아래로 흐르고 태양이 동쪽에서 떠오르는 것과 같이, 그 세계를 구성하는 불변의 섭리 중 하나.
그녀의 얘기를 전해 듣곤, 시안이 툭 질문했다.
“넌 몇 살인데?”
단순한 호기심.
그의 질문에 프시케가 훗, 웃으며 대답했다.
[비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