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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62화 (62/188)

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62화

시안이 에르제를 데리고 돌아왔을 때, 주둔지로 쳐들어왔던 하이오크들은 이미 정리된 후였다.

쳐들어온 50마리 중에 도망칠 수 있었던 건 고작 십수 마리 남짓.

이 정도면 대승이었다.

시안을 비롯해 부상을 입은 학생들은 부상자가 들어가는 커다란 천막에 눕혀졌다.

그나마 멀쩡한 학생들에게 간단한 처치를 받은 후, 시안은 그대로 쓰러지듯 잠들었다.

그렇게 꼬박 하루를 내리 잤다.

“하암.”

시안이 하품을 하며 일어났다.

특유의 알싸한 약초 향이 가득한 천막. 압박붕대로 어깨부터 한쪽 팔까지 단단히 고정된 채, 그가 몸을 일으켰다.

새벽이라 그런지 그 외에 다른 부상자들은 모두 자고 있는 채였다.

꿀꺽꿀꺽.

머리맡의 물병으로 목을 축인 후 그가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가장 먼저, 라비의 상태를 확인했다.

지금까지 얻은 라비의 능력은 꽤 많았다.

가장 처음부터 가지고 있던 체력 회복 능력. 그리고 흑검과 창해, 검륜.

이렇게만 해도 벌써 4개나 되는데, 이번에 아기 오크의 힘을 흡수하여 얻은 검이 하나 더 있었다.

‘녀석의 특징을 생각해 보면…… 쓰레기산의 죄수인가?’

프시케에게 들은 여러 악마들의 특징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직접 싸운 것이 아니기에 정확하진 않았지만, 지금으로선 쓰레기산의 죄수라는 추측이 가장 가능성 있었다.

그리고 녀석을 처치하고 얻은 검은.

[ 검령(劍靈) – 비검(飛劍) ]

비검이란 이름의 검.

그가 비검을 꺼내보았다.

흑검이 츠츠츠 길어졌다. 정확히는 손잡이까지는 그대로인데 검신만 1.5배 가까이 늘어났다.

연한 연둣빛이 도는 기다란 검신에 손잡이 끝에는 하얀 천이 흩날리는 모습.

검의 능력은, 그 이름 그대로 날 수 있는 검이었다.

‘라비.’

그가 라비를 불렀다.

‘라비, 날아봐.’

‘우웅?’

시안이 그리 얘기했지만 라비는 갸우뚱거릴 뿐이었다.

날아보라니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면서.

시안이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아마 나는 법은 알고 있을 것이다. 이미 능력으로 습득한 것이니까.

단지 단 한 번도 날아보지 않아서 무의식적으로 몸이 거부하고 있는 것이겠지.

그래선 곤란하다.

시안이 이부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비검을 손바닥에 얹고는 높이 들어 올렸다.

‘웅!’

무슨 놀이라고 생각하는 건지 라비가 웃으면서 기뻐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때, 휙 하고 시안이 손을 치웠다.

‘우―!’

바닥을 잃은 라비가 기겁하며 떨어져 내렸다.

시안 나름의 강경책.

날지 못하고 떨어져도 문제는 없다. 이 정도 높이에서 떨어진다고 부러질 검도 아니었거니와 애초에 이불도 있었으니까.

물론 이걸로 안 된다면 높이를 더 높이겠지만.

‘우우…… 웅?’

그러나 라비에겐 다행스럽게도, 한 번에 떠오르는 것에 성공했다.

이불에 닿기 직전 미약하게 공중에서 멈춘 것이다.

한 번 떠올랐다면 그 정도 높이로도 충분했다.

스스로가 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라비가 더 높게 날아올랐다.

‘웅!’

이내 신나게 천막 안을 날아다니는 녀석이 보였다.

붕붕붕.

날아다니는 모양새가 새의 비행이라기보다는 꿀벌의 것과 비슷한 모양새였다.

좋은 일이다.

좀 더 자유로운 비행이 가능하단 뜻이었으니까.

‘이건 꽤 유용하겠어.’

주력으로 쓸 만해 보이진 않지만 갖가지 상황에서 대응하기 좋아 보인다.

애초에 주력으로 쓰는 검은 흑검 하나로 충분하기도 하고.

시안이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그때까지도 라비는 아직도 천막 여기저기를 날아다니고 있었다.

천장에 붙어서 꼬물거리거나 높다란 선반 위로 다이빙하거나.

나중에 바깥에서 산책이라도 시켜줘야 하나.

그렇게 흐뭇하게 라비를 보던 중.

‘…….’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시안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심각한 표정으로 그가 라비를 불렀다.

‘라비.’

라비가 비행을 멈추곤 시안의 손에 사뿐히 안착했다.

비검을 그대로 손에 든 채로 시안이 천막 밖으로 나왔다.

새벽녘의 한적한 공기가 그를 맞았다.

시안이 진지한 표정으로 비검을 바라보았다.

그러곤.

휙!

공중에 검을 던졌다.

“웅웅!”

밖이라 더 좋은지 라비가 이리저리 날아다녔다.

그런 녀석을 내버려 두곤 시안이 천막 뒤쪽에 있던 큼직한 나무 한 그루를 바라보았다.

표적으로 쓰기에 딱 좋아 보이는 나무.

그것을 바라보며, 시안이 날고 있는 라비에게 의념을 보냈다.

[ 상천검(霜天劍) - 섬(閃) ]

직후, 허공에서 번뜩이는 검광이 내리꽂혔다.

* * *

새벽 아침이 지나고 해가 떠올랐다.

낮이 되니 성채 공략을 떠났던 용병들이 돌아왔다.

그들은 엉망이 된 주둔지를 보곤 크게 놀랐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뭔 일 있었어!? 학생들은? 무사하나!?”

기겁하며 놀라는 그들에게 테일 교관과 학생들이 그간 있던 일을 설명했다.

그런 한편, 시안은 새벽부터 지금까지 천막 바깥의 숲에 들어간 채 나오지 않았다.

그곳에서 수련에 매진하고 있었다.

어깨의 부상이 있기에 몸을 움직이는 것은 아니고, 오러의 단련에만 집중하여.

‘확실히 이전보다 훨씬 강해졌어.’

그의 손에서 피어오르는 검은 오러.

보기만 해도 느낄 수 있었다.

하크쉬와 싸우기 전보다도 훨씬 강한 기운이 피어올랐다.

그렇기에 시안은 더더욱 오러의 운용에 집중했다.

한 번 깨달음을 얻었다면 거기에서 만족하고 있으면 안 된다.

그 깨달음을 놓지 않고 끊임없이 관조하며 스스로의 것으로 소화하는 과정이 중요했다.

그리고 전투 중에 느꼈던 또 한 가지 깨달음.

‘내 기운은 압축보다는 오히려 더 넓고 커다랗게 펼치는 게 좋아 보여.’

해가 지면 밤의 장막이 하늘을 뒤덮는 것처럼.

그쪽으로 수련하는 것이 옳은 방향이란 느낌이 들었다.

오러는 압축해야 강해진다는 일반적인 상식을 벗어나는 일이었지만 미혹은 없었다.

그는 세간의 상식보다는 직접 보고 느낀 감각을 더 신뢰하는 남자였다.

더불어 더 강해진 기운으로 몸 안쪽에 남아 있는 영약의 기운을 녹이려 시도해 보았다.

이전보다도 작아진, 엄지손가락 정도 크기의 단단한 기운.

그러나 실패했다.

더 강해진 기운으로도 그것은 마저 녹지 않았다.

뭐 상관없다.

이걸로 안 된다면 다시금 새로운 방법을 찾으면 되는 일.

―실패를 쌓아가는 것만이 성공을 위한 가장 빠른 길입니다.

그가 염노에게 배웠던 수많은 것들 중 하나.

그는 실패를 쌓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것이 스스로를 더욱 강하게 해줄 것임을 알기에.

“시안 아그리드.”

그때, 그가 있는 숲에 누군가가 찾아왔다.

이자크였다.

“돌아오셨군요.”

“지금 막.”

이자크가 이채를 띤 눈으로 시안을 바라보았다.

그는 방금 테일 교관에게 모든 일을 듣고 온 참이었다.

그중에는 당연히 시안의 활약도 있었다.

쳐들어온 오크 무리 중 대장으로 보이는 놈을 홀로 처치한 학생. 그 학생은 심지어 오러를 사용했다고.

믿기 힘든 이야기였지만 믿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왜냐하면.

화르륵!

지금도 시안의 손에선 검은 오러가 피어오르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건 시안이 이자크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기도 했다.

‘소문 그대로의 녀석이었다면, 저 나이에 오러를 발현하는 건 불가능해.’

제아무리 천재라고 하더라도 소문처럼 망나니짓만 하고 다녔다고 한다면, 오러의 발현은 불가능하다.

검에 미쳤다는 이들만이 도달할 수 있는 경지. 그게 오러였다.

심지어 시안은 17이라는 어린 나이가 아닌가?

이자크가 잠시 눈을 감았다 뜨고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다.”

시안이 눈을 찌푸렸다.

“미안하다니 뭐가 말이죠?”

“너희들을 위험에 빠뜨린 것. 네가 아니었다면 돌이킬 수 없는 피해가 나올 수도 있었어.”

자신의 부주의로 인해 주둔지가 습격받게 되었던 일.

이자크가 사과하는 것은 그것이었다.

여기 오기 전 테일 교관과 다른 학생들에게도 똑같은 사과를 하고 온 참이다.

“대장이 사과할 이유는 없습니다.”

시안이 고개를 저었다.

그는 이자크에게 사과를 받을 생각이 없었다.

이곳 유적에 그 귀한 워프 마법이 새겨져 있을 줄 누가 예측하겠는가.

거기에 자신은 이번 일로 많은 것을 얻었다.

이자크의 오러를 볼 수 있었고, 자신보다 격이 높은 오러를 사용하는 하크쉬와 목숨 걸고 대적했다.

그 과정에서 깨달음을 얻었으며 에르제가 잘해준 덕택에 비검이라는 새로운 무기까지 얻었다.

어깨가 좀 갈라졌다곤 하지만 충분히 남는 장사가 아닌가.

이자크가 천천히 고개를 들고는 시안을 바라보았다.

“정말로 많이 달라졌구나.”

“그만한 사고를 겪었습니다.”

시안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자신에게 이전과 달라졌다고 지적하는 사람들에게 항상 하는 얘기다.

마차 사고를 겪고 기억 일부를 잃었다.

그 때문에 예전과 많이 달라 보일 수도 있다.

간단하지만 효과적인 변명거리였다.

“그래……. 그럼 이만 가보지. 방해해서 미안했군.”

이자크가 발을 돌렸다.

엉망이 된 주둔지를 정리해야 했기에 아직 할 일이 많았다.

“내가 참견할 문제는 아니지만, 난 지금까지 네가 검왕의 후계자에 적합하지 못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숲을 나가기 전, 그가 마지막으로 얘기했다.

“지금 보니 다르더군. 검왕이 체샤가 아닌 너를 후계로 삼은 이유가 있었구나.”

그 말만을 남기고 이자크가 숲을 뒤로했다.

홀로 남은 시안은 쓴웃음만 지을 뿐이었다.

후계는커녕 가문을 벗어나기만을 바라는 자신인데.

* * *

“와우! 이 녀석이 그 영웅인가!”

“그렇다니까요! 와 설마 반 친구가 오러를 쓸 줄 누가 알았겠어!”

“그래? 진짜 저 나이에 오러를 쓴다고? 못 믿겠는데.”

“진짜 봤다니까요. 그 하이오크도 오러를 쓰는 녀석이었는데 시안이 슥삭 하니까 그냥…….”

그날은 하루 종일 용병들과 학생들이 시끌시끌했다.

시안은 그중에서도 특히 화제가 되었다.

주둔지로 쳐들어온 하이오크들의 대장의 목을 친 장본인이었으니까.

다행히도 부상자는 있어도 사망자는 없었고, 장애를 입을 정도의 큰 부상을 입은 이도 없었다.

그랬기에 주둔지는, 비록 엉망이 되긴 하였으나, 축제와 같은 분위기였다.

가운데 커다랗게 불을 피워놓고 남은 식량과 술로 파티를 벌인다.

오가는 대화는 주로 자신들의 무용담뿐이었다.

용병들의 무용담, 학생들의 무용담.

시안이 조용히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그러곤 뒤쪽에 있는 나무 그늘에 찾아왔다.

“넌 항상 나를 찾아주는구나.”

그곳엔 에르제가 쪼그려 앉아 축제를 벌이는 용병과 학생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안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본래 검은색이었던 그녀의 눈동자는 어째선지 붉어져 있었다.

쓰레기산의 죄수와 싸우면서 무언가를 당했는지 물어보았으나, 그녀는 고개를 저었을 뿐.

결국 왜 저렇게 된 건지는 알지 못한 채였다.

“너도 가서 끼지 그래.”

“괜찮아. 나는 뭐 한 일도 없는데.”

“한 일이 없다니. 네가 그 아기 오크를 잡아주지 않았다면 큰 피해가 났을 수도 있어.”

“아니라니까. 그렇게 센 녀석도 아니었고.”

그렇지 않다.

라비에게 들어온 기운의 양을 생각해보면, 쓰레기산의 죄수는 다크 이터 정도의 기운은 가지고 있었다.

만약 한창 하이오크들이 주둔지를 헤집어놓던 그때 다크 이터와 비슷한 수준의 적이 하나 더 있었다면.

확실히 얘기해서 사망자 없이 사태를 수습하진 못했을 것이다.

“너도 가서 애들이랑 같이 자랑이라도 해보면? 네 활약이 안 알려져도 상관없어?”

그가 아는 에르제는, 소극적인 성격이긴 했지만 그래도 남들에게 관심받기를 원했다.

존재감이 옅은 그녀의 특성. 그 탓에 잊히기 쉬운 자신을 싫어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런 기회를 적극 활용해야 하지 않겠는가.

자신의 활약상을 알리고, 더 나아가 널리 회자될 정도의 업적을 쌓아간다면.

언젠가 그녀도 잊히지 않는 존재가 될 수 있을 텐데.

“응…….”

시안의 말에 그녀가 말끝을 흐렸다.

그녀가 아기 오크와 싸웠을 때의 일을 떠올렸다.

깨달음 때문에 잠시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을 때.

몸이 얼어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던 그때.

그녀의 눈에 스쳐 지나간 풍경이 있었다.

온통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새하얀 세계.

그곳에서 하얀 망토를 두른 채 소복소복 걸어가던 한 사람의 모습.

[ 이 차디찬 세상에서 내가 칼을 드는 이유는. ]

[ 한줄기 온기만으로 충분했다. ]

팔에 얼굴을 묻고 있던 그녀가 살짝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나무에 기댄 채 축제를 보고 있는 시안이 있었다.

그녀의 붉은 눈동자에 시안의 상이 맺혔다.

“필요 없어, 이제.”

나를 찾아주는 한 사람만 있다면.

뒷말은 삼킨 채, 그녀가 작게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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